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37

신당서 북적 해전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1 ◉亦種, 爲所破, 保. 斬其帥, 蓋其後也. 時自號/$「眞」,《魏書》卷一⃝⃝及《周書》卷四九《庫莫奚傳》․《隋書》卷八四《奚傳》․《通典》卷二 ⃝⃝均作「莫」.$/, 居故地, 直京師東北四千里. 其地東北接, 西, 南, 北. 與同俗, 逐水草畜牧, 居 廬, 環車爲營. 其君長常以五百人持兵衛牙中, 餘部散山谷間, 無賦入, 以射獵爲貲, 稼多穄, 已穫, 窖山下. 斷木爲臼, 瓦鼎爲飦, 雜寒水而食. 喜戰鬪, 兵有五部, 部一俟斤主之. 其國西抵, 距牙三千里, 多依. 其馬善登, 其羊黑. 盛夏必徙保, 山直西北. 至始去「庫眞」, 但曰 해 역시 동호(東胡)종족으로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오환산에 의지하여 머물렀다. 하의 조조가 그의 장수 답돈을 참수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후손일 것이다. 원위(元.. 2009. 11. 17.
신당서 북적 실위전 #新唐書卷219-列傳第144-室韋-03/01 ◉, 別種, 之北邊, 蓋苗裔也. 地據北, 傍, 直京師東北七千里, 東, 西, 南, 北瀕海. 其國無君長, 惟大酋, 皆號「莫賀咄」, 攝筦其部而附于. 小或千戶, 大數千戶, 濱散川谷, 逐水草而處, 不稅斂. 每弋獵卽相嘯聚, 事畢去, 不相臣制, 故雖猛悍喜戰, 而卒不能爲彊國. 剡木爲 , 人挽以耕, 田穫甚褊. 其氣候多寒, 夏霧雨, 冬霜霰. 其俗, 富人以五色珠垂領, 婚嫁則男先傭女家三歲, 而後分以産, 與婦共載, 鼓舞而還. 夫死, 不再嫁. 每部共構大棚, 死者置尸其上, 喪期三年. 土少金鐵, 率資於. 器有角弓․楛矢, 人尤善射. 每溽夏, 西保․二山. 山多草木鳥獸, 然苦飛蚊, 則巢居以避. 酋帥死, 以子弟繼, 無則推豪桀立之. 率乘牛車, 蘧蒢爲室, 度水則束薪爲桴, 或以皮爲舟. 馬皆草.. 2009. 11. 17.
신당서 거란전 전문번역 거란은 본래 동호 종족으로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선비산에 의지하여 자리잡았었다. 위나라 청룡(233~237) 연간에 부락의 추장 가비능이 점차 사납고 교만해지더니 유주자사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그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달아났다. 원위(元魏-북위) 때 이르러 스스로 거란이라 불렀다. 그 땅은 경사에서 곧장 동북방 5천 리 남짓에 있으며, 동쪽은 고려에 이르고 서쪽은 해(奚)이며 남쪽은 영주(營州)이고 북쪽은 말갈 및 실위로서, 냉형산(冷 山)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스스로 견고하게 여긴다. 활로서 수렵하며 거처는 고정된 곳이 없다. 그들의 군장은 대하(大賀)씨이며 날랜 군사가 4만 명이 있고 여덟 부락로 나뉘어져 돌궐에 신하로 복속되어 사근(俟.. 2009. 11. 17.
통전 백제전 번역 通典 卷第一百八十五 邊防一 東夷上 百濟 百濟,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高麗先出夫餘。」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檟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自晉代受蕃爵,自置百濟郡。義熙中,以百濟王夫餘腆佗典反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宋、齊並遣使朝貢,授官,封其人。 백제는 후한국後漢 말기에 부여왕인 위구태의 후손이다. 후위後魏 때에는 백제의 왕이 표를 올려서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와 함께 일찍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초기에 100여 가구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 진국晉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