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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26

奈勿大聖神帝紀(내물대성신제기) (A.D.377 - A.D.382(名號變更)) - 한문본 仇道帝(述禮) - 味鄒帝(達禮) - 休禮 仇道帝(錄帽) - 末昕帝(述禮) - 末仇帝(休禮) - 奈勿聖帝 仇道帝(錄帽) - 末昕帝(乳帽) - 大西帝(禮生) - 實聖帝 元年 丁丑 五月 受禪于桃(山) 卽位于明宮 大赦天下 尊父末仇角干爲帝 母休禮宮主爲太聖 繼父大西知爲太公 원년(A.D.377) 七月 華宗稟主(伊伐)飡 明白稟主 明白者季父長昕公女也 與其夫華宗受長昕公命 行禪讓大事 故首登寵相也 大西長昕自味鄒時 繼末仇帝 久執兵權 威振一國 至是天下 竟歸金氏 神后夢見海宮神 命復築海宮 九月 品馬于桃山 長白主之 帝與后 行大場 于南郊 聞太聖生太公女成勿 命世己代行之 還入太公宅 視兒賜米衣 十一月 加耶君守克殂 慕訶立 以宣失爲太后 時加耶與倭相通 不遵朝廷之令 至是以倭王女爲妻 而不聽宣失之言 遣使責之 夫餘與麗爭地 戰于靑木〈十月 謹須以兵三萬 襲平.. 2018. 1. 16.
나물대성신제기(奈勿大聖神帝紀) 번역 2 7년[계미383] 정월, 수양제(水羊祭)를 행했다. 七年正月行水羊祭 광신(光臣)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백화(白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光臣伊伐湌白花稟主 3월, 부여(夫余)의 유민(流民) 30호(戶)가 다시 투항해 왔다. 부여(夫余)가 왜(倭)와 서로 상통(相通)하여 해마다 그 백성을 받아들여 도성과 시골에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왜신(倭臣) 웅언(熊彦)은 아름답고 말솜씨가 좋아 아이(阿尒)와 서로 정을 통하고 그 말을 들어주는 일이 많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이반(離反)하여 혹은 우리에게 오고 혹은 고구려로 가기도 했다. 三月夫余流民三十戶又來降夫余與倭相通年年受其民散置都鄙倭臣熊彦美而善辯與阿尒相通多聽其言故國人異反或歸于我亦歸于麗 휴례태후(休禮太后)가 장흔(長昕)의 아들 물흔(勿昕)을 낳았다. 休禮太后.. 2018. 1. 16.
위화진경(魏華眞經) 번역 2 다음해에 호물공(好勿公)이 눌지성제(訥祗聖帝)를 받들어 입경(入京)하였는데 마도(馬徒)에서 관직[士]을 얻었던 자들은 허다하게 주륙(誅戮)을 당했다. 그러나 양도(羊徒)는 안연(晏然)하였는데 모두가 그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성제(聖帝)는 랑(郞)이 사직(社稷)에 음공(陰功)이 있었던까닭에 봉하여 가선(歌仙)으로 삼고 명을 내려 남도(南桃)를 행하도록 하였고, 전대사(典大舍)를 양도(羊徒)에 분속(分屬)시켰다. (이에) 내외가 일시에 그를 영예롭게 여겼으니, 타도(他徒)들이 감히 그에 대항하지 못했다. 命行南桃典大舍分屬羊徒於內外一時榮之他徒不敢抗之 ?? 이에 앞서 포아(布兒)의 우도(牛徒)는 양도(羊徒)와 합치고자 했는데 이에 이르러 포아(布兒)가 득죄(得罪)하여 외방으로 유배되니 그 낭도(徒)들이 모.. 2018. 1. 16.
남당 박창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베끼다 남당의 고구려사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稱摩帝以酒多干[舒弗邯牛角干]마제를 酒多干(주다간)이라 칭하였다. [酒多干(주다간)이란 舒弗邯(서불한) 혹은 牛角干(우각간)이라 한다.] * 角干이것은 "각간"이라 읽은 것이 아니라 "뿔간"이라 읽는 것이죠. 중세국어를 따르자면 "ㅃ"이 아니라 "ㅅㅂ"입니다.즉, "간"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채호선생께서는 角干(각간)의 다른 명칭이 舒弗邯(서불한)이므로 舒를 "소" 혹은 "쇠"의 음사로 보고 角을 현대 글자인 "뿔"로 해석하여 角干의 角은 꼭 "쇠뿔"로 읽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角干의 뿔은 오직 소牛의 뿔에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신채호선생의 설명을 틀렸는데 왜냐하면 角은 "뿔"로 읽는 것이 아니라 중세국어의 ㅽ을 이용하여 ""로 읽.. 2009.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