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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15

신당서 지리지 발해 관련 당나라는 여러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국경 근처에 있었으므로 오랑캐 부락에 이름을 붙였다. 사방의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수들이 토벌하거나 칙사들이 방문할 때 나아간 길을 기록해 두었다. 천보(天寶) 연간에 현종(玄宗)이 여러 주변 나라들의 거리를 물으니 홍려경(鴻臚卿) 왕충사(王忠嗣)가 서역(西域)의 지도로 대답하니 겨우 십여국에 불과하였다. 그후 정원(貞元) 연간에 재상을 지냈던 가탐(賈耽)1)이 사방 영역의 거리를 고찰한 것이 가장 상세하였으니, 변방에서 사방 오랑캐로 들어갈 때 홍려시(鴻臚侍)에서 통역하는 자치고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사방 오랑캐로 들어가는 길과 관문과 요새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일곱 개가 있다. 첫째는 영주(營州)에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2013. 6. 12.
발해(渤海)란 고조선 람국(藍國)이 끼고 있던 바다라는 뜻이다 고조선은 여러 개의 봉국을 가지고 있었던 거대한 나라였습니다. 그중 고조선의 서남쪽에 람국(藍國)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이름으로부터 현재의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 같군요. 람국의 위치 《규원사화》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서남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한 들녘은 매우 광활하고 바다와 하늘은 밝고 푸르기에 람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지를 대릉하와 서납목륜하 주변으로 본다면 그곳은 서남쪽은 북경과 천진 부근이고 이 부근에 람국(藍國)이 자리잡았다는 것이죠. 고대로부터 나라의 중심 도읍은 큰 강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람국(藍國)에도 강이 있었을텐데 나라 이름을 따서.. 2012. 9. 5.
잘못알고있던 발해(渤海)의 영토 발해, 즉 진단(震旦)의 강역은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下 聖厯中自立為振國王…중략…睿宗先天二年遣郎將崔訢往冊拜祚榮為左驍衛貟外大將軍渤海郡王 성력 년간에 (대조영은) 자립하여 진국(振國)의 왕이 되었다. 예종 선천 2년에 낭장 최흔을 보내어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 위 기록의 해석에 논란이 많지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것은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 이름을 진단(震旦,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름)이라 하였는데, 이 것을 당국(唐國)에서 대조영의 진단(震旦)을 더 이상 공격할 힘이 없자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지나인의 특유의 병적심리인 자존감으로 인하여진단(震旦)을 자신들의 봉국(封國)인냥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 2010. 8. 19.
浡上과 渤海 令感怒上心。流之窮北慶源。慶源古沃沮之地。在肅愼東浡上上其外幅餘之界。 임금의 마음을 노하게 하여 북쪽 끝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니 경원은 옛 옥저(沃沮)의 땅으로, 숙신(肅愼)의 동쪽 발해 위에 있으며 그 밖은 국경이니 풍토가 다른 이역의 땅이다. (고전번역원에서 가져옴) 귀향간 곳이 경원慶源이며 옛 옥저의 땅이고 숙신의 동쪽에 있는 浡上에 있는데 국경 끝의 경계 밖이라고 합니다. 말하는 곳은 분명 함경도나 그 북쪽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을 가리키면서 浡上이라고 했고, 강희자전에서는 浡이란 與勃渤竝通이라고 했지만, 浡이 항상 渤海를 가리키지는 않나보군요. 2010.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