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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81

나물대성신제기(奈勿大聖神帝紀) 번역 2 7년[계미383] 정월, 수양제(水羊祭)를 행했다. 七年正月行水羊祭 광신(光臣)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백화(白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光臣伊伐湌白花稟主 3월, 부여(夫余)의 유민(流民) 30호(戶)가 다시 투항해 왔다. 부여(夫余)가 왜(倭)와 서로 상통(相通)하여 해마다 그 백성을 받아들여 도성과 시골에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왜신(倭臣) 웅언(熊彦)은 아름답고 말솜씨가 좋아 아이(阿尒)와 서로 정을 통하고 그 말을 들어주는 일이 많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이반(離反)하여 혹은 우리에게 오고 혹은 고구려로 가기도 했다. 三月夫余流民三十戶又來降夫余與倭相通年年受其民散置都鄙倭臣熊彦美而善辯與阿尒相通多聽其言故國人異反或歸于我亦歸于麗 휴례태후(休禮太后)가 장흔(長昕)의 아들 물흔(勿昕)을 낳았다. 休禮太后.. 2018. 1. 16.
위화진경(魏華眞經) 번역 2 다음해에 호물공(好勿公)이 눌지성제(訥祗聖帝)를 받들어 입경(入京)하였는데 마도(馬徒)에서 관직[士]을 얻었던 자들은 허다하게 주륙(誅戮)을 당했다. 그러나 양도(羊徒)는 안연(晏然)하였는데 모두가 그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성제(聖帝)는 랑(郞)이 사직(社稷)에 음공(陰功)이 있었던까닭에 봉하여 가선(歌仙)으로 삼고 명을 내려 남도(南桃)를 행하도록 하였고, 전대사(典大舍)를 양도(羊徒)에 분속(分屬)시켰다. (이에) 내외가 일시에 그를 영예롭게 여겼으니, 타도(他徒)들이 감히 그에 대항하지 못했다. 命行南桃典大舍分屬羊徒於內外一時榮之他徒不敢抗之 ?? 이에 앞서 포아(布兒)의 우도(牛徒)는 양도(羊徒)와 합치고자 했는데 이에 이르러 포아(布兒)가 득죄(得罪)하여 외방으로 유배되니 그 낭도(徒)들이 모.. 2018. 1. 16.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9]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율곡 이이를 모신 서원으로 제자 김장생도 배향되어 있다. 김장생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창작해 사실인 것처럼 전파했다(왼쪽). 유수원이 쓴 사회 개혁서인 . 유수원은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임에도 국사 교과서는 노론이란 식으로 서술해왔다(오른쪽).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 2018. 1. 16.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8]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 과학조사 불구 “AD 3세기 축조” 억지 주장 삼국 건국시기 수십~수백년 후퇴시켜 초기기록 허위 확인된 ‘일본서기’ 인용 등 서천왕·근초고왕·눌지왕부터만 실존 인정 » 백제의 왕성이었던 서울 풍납토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 쪽 학자들은 서기 3세기 후반에야 축조되었다고 주장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란 조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일 정상의 합의로 2002년 발족하여 2005년까지 활동했던 조직이다. 물론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었다. 위원회는 2005년 (이하 보고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이 를 ‘장래 양국 역사교과서 편수에 참고할 수 있.. 2018.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