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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나물대성신제기(奈勿大聖神帝紀) 번역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 16.
7년[계미383] 정월, 수양제(水羊祭)를 행했다.
七年正月行水羊祭

광신(光臣)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백화(白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光臣伊伐湌白花稟主

3월, 부여(夫余)의 유민(流民) 30호(戶)가 다시 투항해 왔다. 부여(夫余)가 왜(倭)와 서로 상통(相通)하여 해마다 그 백성을 받아들여 도성과 시골에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왜신(倭臣) 웅언(熊彦)은 아름답고 말솜씨가 좋아 아이(阿尒)와 서로 정을 통하고 그 말을 들어주는 일이 많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이반(離反)하여 혹은 우리에게 오고 혹은 고구려로 가기도 했다.
三月夫余流民三十戶又來降夫余與倭相通年年受其民散置都鄙倭臣熊彦美而善辯與阿尒相通多聽其言故國人異反或歸于我亦歸于麗

휴례태후(休禮太后)가 장흔(長昕)의 아들 물흔(勿昕)을 낳았다.
休禮太后生長昕子勿昕

처음으로 호구전(戶口典)을 세워서 백성들의 자모상혼(子母相婚)을 금했다.
始立戶口典禁民子母相婚

4월, 각간 등비(登非)가 졸(卒)했다.
四月角干登非卒

7월, 건효(乾孝)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야물(冶勿)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乾孝伊伐湌冶勿稟主

부사군(夫沙郡)사람 휴치(休齒)는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워 사냥을 해서 고기를 이바지하였다. 하루는 (잡을) 짐승이 없어 나무에 기대어 울자 외뿔사슴(一角鹿)이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이에 제(帝)에게 헌상하자 (제는) 해궁(海宮)에서 기르도록 명하고 휴치(休齒)에게는 연곡(年穀)을 하사하였다.
夫沙郡人休齒孝于母獵而供肉一日無獸依樹而泣有一角鹿來跪乃獻于帝命畜於海宮賜休齒年穀

동탄(東炭)이 나기(奈己)의 아들 탄기(炭己)를 낳았다.
束炭生奈己子炭己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八月行嘉俳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九月行大場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十月行月歌
※<추모경>에 의하면 월가(月歌)는 ‘연소왕(燕昭王)의 궁중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여 황룡국(黃龍國)에서 행해지고 (추모왕 때에) 이르러 우리(고구려)의 풍속이 되었다’라고 했고, <중천대제기>에는 ‘(월가는) 본시 옛 풍속으로 지금은 신라의 풍속이 되었다.是本古俗今爲羅俗’라고 하는 상이한 기록이 보인다.

한 해 농사가 대풍이라 환호성(歡聲)이 들판에 이어지니 제(帝)는 영(令)을 내려 풍년일 때 검약을 지킴으로써 흉년일 때를 대비하라하고, 보리를 내버려서 공황(匈)에 봉착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백성들이 감복해 마지않았다.
年大豊歡聲連野帝令豊時儉守以備歉歲無使棄麥而逢匈百姓莫不感服

12월, 세신묘(世神廟)에 제사하였다. 十二月祀世神廟



8년[갑신384] 정월, 목신제(木神祭)를 행하였다. 八年正月行木神祭

내개(乃芥)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양신(良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乃芥伊伐湌良臣稟主

4월, 양산(楊山)의 백성 효창(孝倉)이 참새(雀)를 갖고 있어 매우 자그마했는데 황새(大鳥)와 교합하여 황새(大鳥)를 낳으니 구경하는 자들이 저자를 이루고 봉물(奉物) 또한 많았다. 효창(孝倉)이 이를 부당하게 여기고 스스로 가진 것을 제(帝)에게 헌상했다. 제(帝)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대조사(大鳥祠)를 세우도록 명하고 효창(孝倉)을 작관(雀官)으로 삼았다. 옛 풍속에 신작(神雀)을 중시하는 까닭이었다.
四月楊山民孝倉有雀甚小與大鳥合而生大鳥觀者成市奉物亦多孝倉以爲不當自有獻之于帝帝嘉其志命立大鳥祠以孝倉爲雀官古俗重神雀故也

부여의 근수(謹須)가 죽고(殂) 침류(枕流)가 섰다. 그 어머니 아이(阿尒)가 집정(執政)했다.
천세(千世)를 보내서 그를 조문하였다.
夫余謹須殂枕流立其母阿尒執政 遣千世吊之

옹판(雍判)이 제(帝)의 아들 장기(長己)를 낳았다. 雍判生帝子長己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자 안팎(中外)으로 (모두가) 기도를 행하였다. 旱不雨中外行禱

위두(衛頭)등 7인에게 명하여 부량(符良)등 7인을 진(秦)나라에 전송하도록 하였다. 진주(秦主)가 계림(鷄林)이 어찌 신라(新羅)가 되었는가를 묻자 대답하였다.
“시대(時代)의 변혁과 명호(名號)의 개량이니 어찌 지금이 옛날과 같겠습니까?.”
진주(秦主)가 “나라의 임금(國君)이 변경된 것인가?”하고 묻자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어진이(賢)를 택해서 세워 예로부터 상전(相傳)해 왔습니다. 어찌 변경됨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라(新羅)의 좋음을 취한 것일 따름입니다.”
진주(秦主)가 계림(鷄林)과 신라(新羅)의 뜻(義)을 묻자 답하기를 “신관(神官)이 이름한 바이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은 풀 수 없으나 천신(天神)이 내려온 땅이라서 계림(鷄林)이라 하고 또한 신라(新羅)라 합니다.”라고 했다.
命衛頭等七人送苻良等七人于秦秦主問鷄林何爲新羅答曰時代變革名號改良今何與古同乎秦主曰國君變乎答曰我國擇賢而立自古相傳也豈有變乎但取新羅之好而已秦主問鷄林新羅之義答以神官之所名故不解其深旨而天神所降之地爲鷄林而亦爲新羅
※원문의 해당 기사에는 흐릿하게 X자가 그려져 있는데, <아달라기>에 수록된 <나물대성신제기>를 보면 이 기사가 나물 5년 7월조에 나옵니다. 『위두(衛頭)등이 진(秦)으로부터 돌아와 금인(金人) 옥마(玉馬)등의 보기(寶器)를 바쳤다. 애초에 제(帝)가 위두(衛頭)등 7인(七人)에게 명하여 부량(符良)등 칠인(七人)을 진(秦)에 전송토록 하였다. 진주(秦主) 부견(符堅)이 계림(鷄林)이 어찌 신라(新羅)가 되었는가를 묻자 대답하였다. “닭(鷄)의 상서로움이 있었던 까닭에 계림(鷄林)이라하며, (사방)망라(羅)의 새로움(新)이 있었던 까닭에 신라(新羅)라 합니다.” 부견이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희 나라임금(國君)이 변(變)했다는데 어떠한가?”하자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어진이(賢)를 택해 서로 전해왔으며 예로부터 그러하여 변(變)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계림(鷄林) 신라(新羅)가 글자는 비록 다르나 말(語)은 실상 서로 같습니다.” 부견이 말하기를 “어떻게 서로 같은가?”하자 대답하기를 “월주(月主)가 사는 성(城)인 까닭입니다.”하였다. 부견이 묻기를 “너희 나라 여주(女主)는 젊은 남편(少夫)을 좋아하여 자주 바꾸고 여러 남편이라 가히 짝(配)할만한 영웅(雄)이 없다. 짐이 그를 취해 장가들고자 하니 어떠한가?”하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오히려 신(神)을 숭상하고 현(賢)을 선택하니 젊은 남편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하였다. 부견이 그 대답을 선(善)하게 여겨 두터이 예우(優禮)하고 그를 보내며 신후(神后)와 제(帝)에게 보물을 헌상하였다. (광명)후(后)가 부견(符堅)의 상(象)을 조각하도록 명했다. 衛頭等自秦回獻金人玉馬等宝器初帝命衛頭七人送符良等七人于秦秦主符堅問鷄林何爲新羅答曰有鷄之瑞故曰鷄林有羅之新故曰新羅符堅曰聞爾國君變何如答曰我國 擇賢相傳自古然也非變也故鷄林新羅字雖不同而語實相同堅曰何以相同答曰月主所居之城故也堅曰汝國女主好少夫數易數夫無可配之雄也朕欲娶之何如答曰我國尙神 而擇賢非好少夫也堅善其對優禮而送之獻宝于神后及帝后命刻符堅象』

고추태자(古鄒太子)가 훙하니 나이 71세였다. 선도(仙徒)들이 문천(蚊川)에 그 묘(廟)를 세우고 태자사(太子祠)라 했다. 古鄒太子薨年七十一仙徒立其廟于蚊川曰太子祠

7월, 칠황(漆黃)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세붕(世朋)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漆黃伊伐湌世朋稟主

10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눌리(訥里)를 낳았다. 농작이 흉년이어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十月保反生帝女訥里年荒開倉賑民

11월 고구려의 이련(伊連)이 이어서 섰다. 十一月麗伊連繼立



목계(木鷄:을유385) 정월, 사씨(思氏)가 제(帝)의 아들 진사(進思)를 낳았다. 가야(加耶)에 길보를 알렸다(報吉) 木鷄正月 思氏生帝子進思 報吉加耶

졸생(卒生)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효백(孝白)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卒生伊伐湌孝白稟主

2월, 부여(扶余)가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창건했다. 二月扶余創佛寺于漢山

4월, 보길사(報吉使) 구미(久味)등이 가야(加耶)로부터 돌아와 고하였다.
“모가(慕訶)가 지난 겨울에 스스로 야왕(野王)의 딸을 몰래 맞아들였는데 매우 아름다워서 선실태후(宣失太后)가 그를 질투하자 모가(慕訶)가 마침내 선실태후(宣失太后)를 산궁(山宮)에 유폐(幽)시키고는 병이 있다하면서 배알하지 못하게 한 까닭에 상견치 못하고 왔습니다.”
제(帝)는 사씨(思氏)가 근심할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말하지 말도록 명했다.
四月報吉使久味等自加耶還告曰慕訶自昨冬密納野王女甚美宣失太后妬之慕訶乃幽宣失太后于山宮以爲有疾而不使謁之故不得相見而來 帝恐思氏憂之命勿直言之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발유(發有)를 낳았다. 內留生帝女發有

홀명(忽明)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忽明大日大師

7월, 담해(談解)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초황(綃况)을 품주(稟主)로 하였다.七月談解伊伐湌綃况稟主

8월, 혈성(穴城)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八月大閱穴城

10월, 침류(枕流)가 졸(卒)하고 아우 진사(辰斯)가 섰다. 十月枕流卒弟辰斯立



화구(火狗:병술386) 정월, 골성태후(骨聖太后)를 받들어 잔치를 열었다. 성달(聖達)]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홍(三弘)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火狗正月 奉宴骨聖太后 聖達伊伐湌三弘稟主

3월, 도령(道寧)등이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가서 선실태후(宣失太后)를 알현하고 왔다. 三月道寧等使加耶謁宣失太后來

부여(扶余)가 관방(關防)을 크게 설치하고 고구려(句麗)에 대비하였다. 扶余大設關防以備句麗

등억(登檍)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登檍六軍頭上

궁인(宮人) 난황(暖凰)이 제(帝)의 딸 음황(陰凰)을 낳았다. 宮人暖凰生帝女陰凰

7월, 도장(道長)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천빈(茜彬)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道長伊伐湌茜彬稟主

제(帝)의 딸 상기(桑期)를 구미(久味)의 처로 하였다. 以帝女桑期妻久味



화시(火豕:정해387) 정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아들 눌기(訥祇)를 낳았다. 火豕正月 保反生帝子訥祇
※눌기(訥祇) : 흔히 ‘눌지(訥祗)’로 통용되는데 본서에는 ‘눌기(訥祇)’로 나온다. ‘눌기왕(訥祇王)’을 일명 ‘老王’으로도 표기한 것으로 보아 “訥祇”와 “老”는 ‘눌기 = 늙이/늘기’의 음훈대응으로 보임. 즉 訥祇王왕은 '늘기왕'으로 읽는 것이 당시의 원음에 가까운 것이며, 고대인의 형제간 돌림음을 감안하여 美海(未斯欣/未叱希/微叱許)및 寶海(卜好)와 연동시켜 해석하면 그 고대음은 'nlxi(늘키/늘크)' 또는 'nlxeo(늘커)'쯤으로 재구해볼 수 있다.'x(ㅋ)'의 실제음은 '흑석동'을 발음할때의 첫소리로 독일어등에 흔히 보이는 연구개 마찰음

옥겸(玉謙)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천발(茜發)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玉謙伊伐湌茜發稟主

부여(扶余)가 진가막(眞嘉莫)을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아 병관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扶余以眞嘉莫爲達率豆知爲恩率使屬兵官
※진가막(眞嘉莫) : <고국양왕대제기(故國襄大帝紀)>에는 진가모(眞嘉謨)

3월, 아라(阿羅) 칠붕(七朋)등이 조견(朝見)하고 그 토산물을 바쳤다. 三月阿羅七朋等朝見獻其土物

5월, 옹판(雍判)이 제(帝)의 딸 색지(色支)를 낳았다. 五月雍判生帝女色支

7월, 소줄(昭茁)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등원(登元)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昭茁伊伐湌登元稟主

9월, 부여(扶余)가 말갈(末曷)과 관미령(關彌岺)에서 크게 싸웠다. 九月扶余與末曷大戰闕彌岺

부여(扶余) 여자를 사서 처로 삼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에 앞서 소민(小民)중에 처가 없는 자들이 많이 부여(扶余) 여자를 샀기에 부여가 이를 원망했는데 이에 이르러 그것을 금지시키고 가야민(加耶民)과 서로 혼인하는 것은 그대로 허락했다. 禁買扶余女爲妻先是小民無妻者多買扶余女子扶余怨之至是命禁之仍許加耶民相婚

10월, 대장(大場)을 행하고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行大場宴父老

두두선모(豆豆仙母) 줄례궁주(茁禮宮主)가 훙(薨)하였다. 제(帝)의 이모(姨)이다. 豆豆仙母茁禮宮主薨帝姨也



토서(土鼠:무자388) 4월, 경사(京師)에 지진이 있었다. 土鼠四月 京師地震

한현(汗玄)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포기(布杞)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汗玄伊伐湌布杞稟主

사씨(思氏)가 아들 인사(仁思)를 낳았다. 思氏生子仁思

마아(馬兒)를 아찬(阿湌)으로 삼고 미사품(未斯品)을 사벌성주(沙伐城主)로 삼았다. 以馬兒爲阿湌未斯品爲沙伐城主

6월, 경사(京師)에 다시 지진이 있어 선무대장(仙巫大場)을 열었다. 六月京師又震設仙巫大場

7월 당윤(棠尹)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장화(長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棠尹伊伐湌長花稟主

11월, 얼음이 얼지 않고 눈꽃(雪花)을 볼 수 없었다. 두 해가 대풍이 들자 백성들이 즐겁고 태평(泰平)하여 들판에서 노래하며 춤추었다.
이찬(伊湌) 세기(世己)등이 상주하였다.
“부여(扶余)와 야인(野人)등이 스스로 편안하질 못한데 우리나라만 홀로 태평을 누리는 것은 제(帝)의 힘입니다. 원컨대 수주(壽酒)를 헌상코자 합니다.”
제(帝)가 말했다.
“신후(神后)의 성력(聖力)이다.”
이에 신후(神后)를 받들어 광명신궁(光明神宮)에 천수(天壽)를 올리니 안팎(中外)에서 회집(會集)한 자가 만의 무리(萬衆)였다. 十一月無氷不見雪花兩年大豊民樂泰平歌踊于野伊湌世己等奏曰扶余野人等皆不自安我國獨享泰平者帝力也願獻壽酒帝曰神后聖力也乃奉神后上天壽于光明神宮中外 會集者萬衆


토우(土牛:기축389) 정월, 경도(京都)에 크게 역병이 돌고 가야(加耶) 또한 크게 역병이 돌아 선실태후(宣失太后)가 역질로 붕(崩)했다. 제(帝)가 그를 위해 궁중에서 발상(發喪)하며 말했다.
“선실(宣失)은 곧 우리 사씨(思氏)의 어머니이니 또한 나의 어머니 아닌가.”
명을 내려 그에게 후한 부의를 보내도록 했다. 궁중에서 많이 그를 위하는 효(孝)로써 제(帝)에게 아첨하였다. 土牛正月京都大疫加耶亦大疫宣失太后以疫崩帝爲之發喪于宮中曰宣失乃吾思氏之母亦非吾母乎命以厚賻送之宮中多爲之孝以媚于帝

장백(長白)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당진(棠眞)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長白伊伐湌棠眞稟主

2월, 부여(扶余)및 우리(나라) 서변(西邊)에 흙비가 내렸다. 二月扶余及我西邊雨土

모가(慕訶)가 야왕(野王)의 딸을 후(后)로 삼았다. 慕訶以野王女爲后

7월, 누리(蝗)로 곡식이 잘 익지 않자 제(帝)가 그를 근심하여 감식(減食)하니 황제(皇弟:임금의 아우) 소물(小勿)이 간하였다.
“올해 비록 흉작이나 두 해 곡식이 오히려 많습니다. 제(帝)는 만민의 아버지이고 또한 신후(神后)의 총부(寵夫)가 되어서 어찌 스스로를 훼손할 수 있습니까?”  
제(帝)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후(后)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명을 내려 주군(州郡)에 비축창고를 설립하게 하였다.
七月蝗穀不登帝憂之減食皇弟小勿諫曰今年雖凶兩年穀尙多帝以萬民之父且爲神后寵夫何可自毁帝以爲然乃與后入海宮命設州郡備倉

건웅(乾雄)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구심(久心)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乾雄伊伐湌久心稟主

9월, 부여(扶余)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쳐서 그를 이겼다. 九月扶余伐麗南鄙克之

10월, 성동(城東)에 사는 무품녀(無品女)가 명활지(明活池)에서 목욕하자 금액(金液)을 이루므로 그 무리들이 받들어 백양신(白羊神)을 삼았다. 十月城東無品女浴明活池成金液其徒奉爲白羊神
※무품녀(無品女) : <위화진경>에 보이는 무품녀(無品女) 백양선자(白羊奾子).



금호(金虎:경인390) 정월, 신후(神后)가 병질이 있으므로 삼산(三山)에 기도하였다. 金虎正月神后有疾禱于三山

등로(橙盧)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건발(乾發)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橙盧伊伐湌乾發稟主

부여(扶余)가 못을 파서 산을 만들고 궁실을 크게 중수하며 중외(中外)의 진금이초(珍禽異草)를 모아들였는데 대개 아이후(阿爾后)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扶余穿池造山大修宮室集中外珍禽異草盖出阿爾后之意也

제(帝)의 형 동구랑(冬九郞)이 관성(管城)에서 졸하자 잡판(匝判)의 예(禮)로 장사지내도록 명하고 그 서자 10인에게 작위를 내렸다.
帝兄冬九郞卒于管城命以匝判禮葬之爵其庶子十人

2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아들 보해(宝海)를 낳았다. 二月保反生帝子宝海

4월, 구려(句麗)가 사신을 보내와 미녀(美女) 3인과 양마(良馬) 7쌍을 헌상했다. 말은 병관(兵官)에 소속시켜 기르게 하고, 여자는 황제(皇弟) 소물(小勿) 호물(好勿) 대물(大勿)의 비(婢)로 삼았다.
四月句麗遣使獻美女三人良馬七雙馬屬兵官畜之女爲皇弟小勿好勿大勿之婢

정월, 상기(桑期)가 구미(久味))의 딸 사사(沙沙)를 낳았다. 五月桑期生久味女沙沙

말갈(末曷)이 부여(扶余)를 침공하여 적현성(赤峴城)을 함락시켰다. 末曷侵扶余陷赤峴城

7월, 연당(連棠)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양불(良弗)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連棠伊伐湌良弗稟主

9월, 곡식이 크게 풍작이라 대장연(大場宴) 베풀었다. 九月穀大登設大場宴



백토(白兎:신묘391) 2월, 사씨(思氏)가 제(帝)의 아들 대사(大思)를 낳았다. 나명(奈明)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황인(况仁)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白兎二月 思氏生帝子大思 奈明伊伐湌况仁稟主

4월,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딸 아로(阿老)를 낳았다. 이에 마아(馬兒)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아 -제명(帝)을 출명(出命)하는 것을 품주(稟主)라 불렀다(?)-出命帝命呼曰稟主(해석난해) 마아(馬兒)는 얼굴이 아름답고 아첨을 잘하여 어려서부터 제(帝)의 용양군(龍陽君)이 되었으며 그 어머니 예생궁(禮生宮) 역시 제(帝)와 사통(私通)하여 자녀를 낳았으므로 마아(馬兒)에게 점차 총애가 더하였다. 이에 이르러 신후(神后)가 병으로 혼미하여 정령(政)이 제(帝)및 보반(保反)과 내류(內留)에게서 나오자 마아(馬兒)가 이로써 부군(副君)의 일을 행하니 일국(一國)이 그를 영예(榮)롭게 여겼다.
四月內留生馬兒女阿老乃以馬兒爲大阿湌出命帝命呼曰稟主馬兒皃美而善媚自幼爲帝龍陽君其母禮生宮亦與帝私通生子女寵漸加馬兒至是神后病昏政出於帝及保反內留馬兒以是行副君事一國榮之

7월, 고구려왕(麗王) 담덕(談德)이 부여(扶余)를 대파(大破)하니 석현(石峴)등의 10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七月麗王談德大破扶余石峴等十城皆降之
※6월, 왕은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기(祖奇) 우옥(于屋) 해방(解放)등에게 명하여 백제(百濟)를 정벌하여 석현(石峴) 인물(仁物)등의 10성을 취하고 평양(平壤)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채워(實)넣었다. 六月王自將四萬軍命祖奇于屋解放等伐白濟取石峴仁物等十城移平壤民戶實之 <소수림왕기>의 국강호태왕 원년 기사.

9월, 술호(述戶)가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를 낳았다. 九月述戶生道寧女福壽

담덕(談德)이 루부(婁夫)등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부여(扶余)를 치지 않는다고 제(帝)를 책망했다. 이에 미사품(未斯品)등에게 명하여 소리 높여 호응하는 척하며 고구려비(麗婢) 3인을 모두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談德遣婁夫等責帝起兵伐扶余乃命味斯品等佯作聲應以麗婢三人皆爲宮人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빼앗았다. 10월에 우옥(于屋)등이 관미성(關彌城)을 함락했다. 진사(辰斯)가 아이(阿爾)와 더불어 구원행궁(狗原行宮)으로 나가서 사냥으로 일삼으니 국인들이 많이 그를 비난하였다.
十月麗拔闕彌城 辰斯與阿爾出狗原行宮以田獵爲事 國人多非之

제(帝)가 계물궁(癸勿宮)에 행차(幸)하여 그 아들 계억(癸檍)에게 옷과 쌀을 내렸다. 帝幸癸勿宮賜其子癸檍衣米

11월, 진사(辰斯)가 구원(狗原)에서 졸(卒)하니 아이(阿爾)가 이에 아신(阿莘)을 임금(君)으로 삼았다. 十一月辰斯卒于狗原阿爾乃立阿莘爲君
※아이(阿爾) : <소수림대제기>에는 ‘가리(佳利)’
『10월, 다시 수륙군(水陸軍)을 이끌고 7도(七道)로 나누어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했는데 주야불휴(晝夜不休)로 20일간 공격하여 그를 함락했다. 그 성(城)은 사면이 초절(峭絶)하고 해수(海水)가 둘러싼(圍繞) 까닭에 진사(辰斯)는 (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그 처 가리(佳利)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10흘이 지나도록 사냥하며 우리가 퇴각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에 이르러 함락 소식을 듣고는 놀라 쓰러지더니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가리(佳利)가 이에 침류(枕流)의 아들 아신(阿莘)으로 그를 대신하였다.十月又引水陸軍分七道攻關彌城晝夜不休二十日而拔之其城四面峭絶海水圍繞故辰斯以爲不落而與其妻佳利獵?于狗原經旬而待我退至是聞陷而驚倒仍 不起而死佳利乃以枕流子莘代之』<소수림대제기> 영락대제 2년 임진(392) 10월 기사.


제(帝)가 담덕(談德)에게 도령(道寧)등을 보내서 토산물로 답(答)하였다. 담덕(談德)이 말하기를 “네 임금의 애신(愛臣) 마아(馬兒)를 보기 원하노라.”하였다.
帝遣道寧等于談德以土物答之談德曰汝君愛臣馬兒願欲見之

이찬(伊湌) 세기(世己)가 훙(薨)하니 나이 57세였다. 공(公)은 고전(古典)에 박식하고 외사(外史)에 두루 통달해서 신법(新法)을 세움으로써 국치(國恥)를 바로 잡은 것이 많았으므로 국인들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伊湌世己薨年五十七公博識古典旁通外史多立新法以正國恥故國人惜之



흑룡(黑龍:임진392) 정월, 마아(馬兒)를 담덕(談德)에게 보냈다. 黑龍正月送馬兒于談德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어 나밀(奈密)의 딸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맞아들여 좌우(左右) 소비(小妃)로 삼고 보금(寶金)을 비궁대부(妃宮大夫)로 삼았다. 보금(寶金)은 나밀(奈密)의 조카(猶子)이다. 몸이 크고(身長) 식견이 있어 과공주(寡公主) 천성(天星)을 그 처로 하였다. 正月遣胥狗迎奈密女雲帽霞帽爲左右小妃以宝金爲妃宮大夫宝金奈密之猶子也身長而有識以寡公主天星妻之 <소수림대제기>의 영락대제 2년 임진(392) 기사. 마아(馬兒) = 보금(寶金) 또는 실주(實主) <삼국유사>

반권(般權)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고류(古留)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船權伊伐湌古留稟主
  
2월, 신후(神后)가 침궁(寢宮)에서 붕(朋)하였다. 제(帝)가 그를 위하여 음식을 먹지 않으니 보반(保反)이 말했다.
“모후(母后)가 비록 그대에게 공(功)이 많으나 그대가 만약 먹지를 않으면 나는 누구를 남편으로 삼습니까?”
제(帝)가 이에 보반(保反)과 더불어 상례를 행(行祥)하여 신후(神后)를 장릉(長陵)에 장사하고 유골을 각 남편의 융릉(隆陵)에 나누었다 (유골을 나누어 각 남편의 능(陵)을 북돋았다.?) 신후(神后)는 곧 아이혜성후(阿爾兮聖后)의 제 7녀이다. 신장(身長)이 7척이요 몸무게가 2백 근이었으며 한 번의 식사에 돼지 한 마리를 다 들었다. 향가(鄕歌)와 신사(神事)에 능숙하고 잘 하였으며 아이혜(阿爾兮)를 이어서 자황(雌皇)이 된지 40여년에 부제(夫帝)를 바꾼 것이 5위(位)였으며 모두 자녀를 가졌다.
미추제(味鄒帝)의 딸은 막희(莫姬), 인송(仁竦), 족송(足竦), 솔류(率留), 고류(古留), 도류(道留), 단판(丹判), 잡판(匝判), 옹판(雍判), 보반(保反), 내류(內留)이며, 유례제(儒禮帝)의 딸은 기탄(其炭)이며, 기림제(基臨帝)의 딸은 동탄(東炭), 근단(斤丹), 석단(昔丹)이고, 흘해제(訖解帝)의 딸은 방단(方丹)이며 금제(今帝)의 아들은 호동(好童), 숙단(叔丹)이고 딸은 성단(成丹)이었다. 춘추는 69세였으며 왕손(王孫)은 수백 명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어질고 백성을 아꼈으며 난음(亂淫)을 좋아하지 않아 오직 부제(夫帝)와 부군(副君)외에는 사신(私臣)을 기용하지 않았다. 국중대사(國中大事)는 골로(骨老)와 상선(上仙)들로 하여금 결정케 하고 사사로이 행하지 않음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렸으니 상복을 입은 자(掛孝者)들이 길을 가득 메워 나라 안이 남김없이 흰색이었다.
二月神后崩于寢宮帝爲之不食保反曰母后雖多功汝若不食吾誰爲夫帝乃與保反行祥葬神后于長陵分骨于各夫隆陵神后乃阿爾兮聖后之第七女也身長七尺重二百斤一食 盡一豚能善鄕歌神事繼阿爾兮爲雌皇四十余年易夫帝五位皆有子女味鄒帝女莫姬仁竦足竦卒留古留道留丹判匝判雍判保反內留儒禮帝女曰其炭基臨帝女曰東炭斤丹昔 丹訖解帝女曰方丹今帝子曰好童叔丹女曰成丹春秋六十九王孫數百人性至仁愛民不喜亂淫唯夫帝副君外不用私臣國中大事令決于骨老上仙不以私行以此國治掛孝者塡 道國中盡白

3월, 담덕(談德)이 마아(馬兒)를 볼모로 삼고 부여상(夫余象)을 우리에게 보냈다. 三月談德以馬兒爲質送夫余象于我

4월, 난황(暖凰)이 마아(馬兒)의 딸 마씨(馬氏)를 낳았다. 四月暖凰生馬兒女馬氏

5월, 담덕(談德)이 그 아버지 이련(伊連)을 계승하여 섰다. 五月談德繼其父伊連而立

5월 정묘 삭(朔)에 일식이 있었다.
제(帝)가 보반(保反)과 더불어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하였다. 기탄(其炭)이 호물(好勿)의 아들 진물(珍勿)을 낳으니 쌀과 옷을 하사했다. 帝與保反后行吉鮑祠其炭生好勿子珍勿賜米衣

■■■后■仙帝■■帝□□□■后□■■■凡四十六■
[글자 판독이 안되는 원문의 세주(細註)부분]

8월, 아신(阿莘)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석현(石峴)등 5성(五城)을 수복하게 하였다. 八月阿莘使眞武收復石峴等五城

10월, 담덕(談德)이 평양(平壤)에 9사(寺)를 창건했다. 談德創九寺於平壤

태공(太公) 장흔(長昕)이 훙했다. 太公長昕薨



수사(水蛇:계사393) 정월, 큰 눈이 내렸다. 인공(忍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현기(玄杞)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水蛇正月大雪 忍公伊伐湌玄杞稟主

3월, 보반후(保反后)가 제(帝)의 아들 미해(美海)를 낳자 제(帝)가 친히 그를 씻겼다. 三月保反后生帝子美海帝親洗之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五月野人入寇待其無功而退追擊獨山大破之

7월, 부여(扶余)가 수곡(水谷)에서 대패하였다.七月扶余大敗于水谷

10월, 곡식이 대풍이므로 대장연(大場宴)을 베풀었다. 十月穀大登設大場宴

제(帝)가 태후(太后) 보반(保反) 내류(內留)와 더불어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帝與太后保反內留入海宮



목마(木馬:갑오394) 2월,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수로(首老)를 낳았다. 木馬二月內留生帝女首老
유훤(乳萱)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현승(玄勝)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乳萱伊伐湌玄勝稟主

3월, 제(帝)의 사씨(思氏)가 제(帝)의 아들 왕사(王思)를 낳았다. 三月思氏生帝子王思

5월, 운화공주(雲花公主)가 제(帝)의 딸 총씨(寵氏)를 낳았다. 五月雲花公主生帝女寵氏

8월, 부여(扶余)가 구려(句麗)와 누수(泪水?)에서 크게 싸우고 패배하여 돌아갔다.八月扶余與句麗大戰泪水敗歸
※누수(泪水) : 패수(浿水)의 오기(誤記)인 듯. <소수림대제기>와 <소수림왕기>의 영락 5년 을미(394) 8월의 기사에는 모두 패수(浿水)로 나옴.

궁인(宮人) 월씨(月氏)가 소물(小勿)의 아들 관월(關月)을 낳았다. 월씨(月氏)는 곧 고구려 미녀이다. 宮人月氏生小勿子關月氏乃麗美女也

10월, 감문군(甘文君) 숙록(叔鹿)이 입조(入朝)하였다. 十月甘文君叔鹿入朝

12월, 천동(茜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화명(華明)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十二月茜冬伊伐湌華明稟主



목양(木羊:을미395) 5월, 보반(保反)이 아들 실상(實相)을 낳았는데 혹은 황제(皇弟) 호물(好勿)이 사통하여 낳은 것이라고도 한다. 木羊五月保反生子實相或曰皇弟好勿通而生也

9월, 말갈(末曷)이 쳐들어오자 삼생(三生)등이 실직(悉直)의 들판에서 영격(迎擊)하여 대파하였다. 획득한 마필(馬匹)이 심히 많았으므로 그를 크게 포상하였다.
九月末曷入寇三生等迎擊大破于悉直之原所獲馬匹甚多大賞之

황제(皇弟) 호물(好勿)이 아찬(阿湌) 삼여(三輿)의 처 개신(芥臣)을 빼앗아 처로 삼았다. 제(帝)가 그를 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皇弟好勿奪阿湌三輿妻芥臣妻之帝禁之不得

영술(英述)이 숙단(叔丹)의 아들 명숙(明叔)을 낳았다. 英述生叔丹子明叔



화원(火猿:병신396) 정월, 휴례태후(休禮太后)가 병질이 있자 죄수들을 방면하였다. 火猿正月休禮太后有疾放囚

등로(登老)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유선(乳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登老伊伐湌乳宣稟主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을 구려(句麗)에 보내어 미녀를 바치고 마아(馬兒)를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담덕(談德)이 그 누이 두씨(杜氏)를 마아(馬兒)의 처로 하고서 보내지 않았다. 遣水酒干宝末于句麗獻美女請還馬兒談德以其妹杜氏妻馬兒而不送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 : <소수림왕기> 영락 6년 병신(936) 조에는 ‘태수(太守) 보마(寶馬)’로 나옴. <삼국사기> 눌지왕조에는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문자와 음의 유사성으로 보아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과 동일인이 아닌가 의심된다.  
‘水酒干(스불캄/스불칸)’은 ‘=酒多(수블한) = 徐弗邯 = 徐發翰 = 角干(ㅅ뿔칸)’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이표기로 추정됨.


4월, 우화(宇花)가 호동(好童)의 아들 호원(好原)을 낳았다. 四月宇花生好童子好原

5월, 아신(阿莘)이 그 태자 전지(腆支)를 야인(野人)에게 볼모로 보냈다. 五月阿莘以其太子腆支質于野人

7월, 구■(久■)의 아들 심(沁)을 사인(舍人)으로 삼고 사찬(沙湌) 하기(河期)를 내위두상(內衛頭上)으로 삼았다. 구미(久味)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다. 七月以久■子沁爲舍人沙湌河期爲內衛頭上 久味伊伐湌

10월, 초리(初利)를 하기(河期)의 처로 삼았다. 보반후(保反后)가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十月初利妻河期保反行吉鮑祠



화계(火鷄:정유397) 정월, 내류(內留)가 딸 성명(聖明)을 낳았는데 혹은 호동(好童)이 사통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권공(權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다.火鷄正月內留生女聖明或曰好童私而生也 權公伊伐湌

3월, 두씨(杜氏)가 마아(馬兒)의 아들 격중(鬲中)을 낳았다. 三月杜氏生馬兒子鬲中
※두씨(杜氏) : 두양(杜陽), 천성(天星)으로도 표기됨

부여(扶余)가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扶余築雙峴城

5월, 사씨(思氏)가 딸 방사(方思)를 낳았다. 五月思氏生女方思

7월, 북로(北路)가 가물고 누리(蝗)가 있자 명하여 1년 조세를 제하였다. 七月北路旱蝗命除一年租

강명(康明)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원의(元義)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康明伊伐湌元義稟主

9월, 보반(保反)이 아들 호연(好淵)을 낳았는데 사신(私臣) 심(沁)이 증(烝)하여 낳았다. 九月保反生子好淵私臣沁之所烝而生也

흘해닛금(訖解尼昑)의 서자(庶子) 무알(武謁)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訖解尼昑庶子武謁爲級湌

제(帝)는 호동(好童)이 색사로 황란(荒色)하자 그를 걱정하여 방기(房期)에게 명하여 그를 가르치게 했다. 帝以好童荒色憂之命房期敎之




토구(土狗:무술398) 정월, 제(帝)의 딸 초리(初利)가 하기(河期)의 딸 아호리(阿胡利)를 낳았다. 하기(河期)의 작위를 일길찬(一吉湌)으로 진급시키고 그 어머니 예생(禮生)에게 대품자의(大品紫衣)를 더하였다. 土狗正月帝女初利生河期女阿胡利進河期爵一吉湌加其母禮生大品紫衣

골선(骨宣)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등인(登仁)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骨宣伊伐湌登仁稟主

2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보반(保反)은 스스로 길모(吉母)가 되어 누차 하기(河期)를 끌어 들였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사신(私臣)중에 총애가 융성하였으나 제(帝)가 능히 금할 수 없었다. 二月保反與河期入海宮先是保反自爲吉母累引河期至是益甚寵隆於私臣帝不能禁

3월, 영술(英述)이 숙단(叔丹)의 아들 향숙(享叔)을 낳았다. 三月英述生叔丹子享叔

4월, 해궁(海宮)에 큰 불이 났는데 보반(保反)과 하기(河期)가 함께 탕(湯)으로부터 업혀서 달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난해 말하기를 ‘골신의 불이다(骨神火也).’라고 했다. 혹은 말하기를 ‘초리(初利)가 질투해서 도적을 시켜 방화한 것’이라고도 했다. 四月海宮大火保反與河期自湯負走人皆非之曰骨神火也或曰初利妬而使賊放火也

제(帝)는 재앙이 많으므로 선무(仙巫)들을 모아 그를 굿풀이(禳) 하게했다. 帝以多災會仙巫禳之

7월, 해궁(海宮)의 사상자 7인과 유공자 20인에게 포상하였다. 七月賞海宮傷死子七人有功者二十人

태홍(泰虹)을 이벌찬(伊伐湌)으로 하고 소을(小乙)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秦虹伊伐湌小乙稟主


황시(黃豕:기해399) 정월, 부여(扶余)의 투항해온 백성들을 남로(南路)에 분산 배치하고 (전문)기술을 가진 자(有技者)를 뽑아 각 전(典)에 소속시킴으로서 그 재주를 소통케 했다. 黃豕正月以扶余降民分置南路擇其有技者屬于各典以通其才

생오(生烏)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공아(公兒)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生鳥伊伐湌公兒稟主

3월, 제(帝)의 아들 호동(好童)이 초리(初利), 준물(俊勿), 사류(舍留), 도리(都利)등과 함께 형산(兄山)으로 돌아갔다. 三月帝子好童與初利俊勿舍留都利等畋于兄山

4월, 두씨(杜氏)가 마아(馬兒)의 아들 연중(兗中)을 낳았다. 담덕(談德)이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길보를 알렸다(報吉). 혹은 말하기를 연중(兗中)은 담덕(談德)이 사통하여 낳았다고 하는데 모습이 담덕(談德)과 닮았다. 四月杜氏生馬兒子兗中談德爲之設宴報吉或曰兗中者談德所私而生也皃似談德

7월, 메뚜기떼(飛蝗)가 들판을 해치자 제(帝)가 그를 위해 음식을 줄이고 자신을 책망했다. 七月飛蝗敝野帝爲之減饍責己

8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의 딸 상연(上淵)을 낳았다. 八月保反生河期女上淵

10월, 휴례태후(休禮太后)가 붕하였다. 말구릉(末仇陵)에 장사하고 대서릉(大西陵)에 유골을 나누어 백릉(白陵)이라 이름 하였다.  十月休禮太后崩葬于末仇陵分骨大西陵名曰白陵



금서(金鼠:경자400) 2월, 사씨(思氏)가 딸 식사(息思)를 낳았다. 심궁(心宮)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우비(羽比)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金鼠二月思氏生女息思心宮伊伐湌羽比稟主

5월,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호명(皓明)을 낳았다. 五月內留生帝女皓明

명을 내려 해궁(海宮)의 공사(役)를 파하였다. 제(帝)의 몸이 편치 않은데다 해궁(海宮)이 이롭지 않다는 말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命罷海宮役以帝不寧有言海宮不利故也

9월, 금관(金官)의 사신 도무(徒武)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九月金官使徒武等來獻土物

10월, 친히 휴례태후릉(休禮太后陵)에 제사하니 어마(御馬) 3마리가 모두 무릎을 꿇고 소리내어 슬피 울며 마치 사람처럼 눈물을 흘려 뚝뚝 떨구었다. 제(帝)는 마음에 감동해서 병이 되었다. 十月親祀休禮太后陵御馬三頭皆跪膝哀鳴如人啼淚下滂滂帝感而成疾

도리(都利)가 옹기(雍己)의 딸 도매(都妹)를 낳았다.都利生雍己女都妹

12월, 큰 눈이 내렸다, 제(帝)의 질환 때문에 삼산(三山)에 기도하였다. 十二月大雪以帝疾禱三山


백우(白牛:신축401)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帝)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은 모두 황음(荒淫)으로 일을 삼았다. 제(帝)가 이에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등을 선사하고 마아(馬兒)의 귀환을 청하였다. 두씨(杜氏) 또한 마아(馬兒)를 위하여 담덕(談德)을 설득했다.
“마아(馬兒)는 우리나라에게는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돌아가 그 나라에 왕 노릇함만 못합니다. 연중(兗中)으로써 전한다면 대왕(大王)의 골육이 남방에서 왕 노릇함이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담덕(談德)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화를 7수레에 싣고 마아(馬兒)와 두씨(杜氏)를 정기(精騎) 3백으로 호송하여 보냈다.
白牛四月自春大旱帝且不寧諸王子皆以荒淫爲事帝乃遣一同仇里迺等于麗贈錦帛眞珠而請還馬兒杜氏亦爲馬兒說談德曰馬兒之於吾國九牛一毛也不如歸王其國以傳兗仲則大王之骨其王南方不亦好乎談德然之乃以宝貨七車載馬兒杜氏以精騎三百護送之

호물(好勿)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介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好勿伊伐湌芥臣稟主

5월, 초리(初利)가 호동(好童)의 딸 식호리(息胡利)를 낳았다. 五月初利生好童女息胡利

6월, 두씨(杜氏)가 혼문령(渾門岺)에 이르러 태가 동하여 수레 안에서 딸을 낳으니 그대로 이름을 혼씨(渾氏)라 했다. 마아(馬兒)가 (그를) 위해 혼문(渾門)에 머물렀다. 六月杜氏至渾門岺胎動生女于車中仍名渾氏馬兒爲留渾門

7월, 마아(馬兒)가 입경(入京)하여 제(帝)를 뵈옵자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제(帝)가 말하기를 “너를 보니 병이 없겠노라.”하였다.
마침내 보반(保反)에게 명하여 두을(豆乙)에서 길례를 행함으로써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종자를 심을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이 이를 부군우(副君雨)라 하였다. 제(帝)가 부군(副君)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대정(大政)을 시행하도록 했다. 七月馬兒入京見帝相扶而泣帝曰汝可無病矣乃命保反行吉于豆乙以爲副君天大雨得以種植人以爲副君雨帝命副君行大政于大宮

도령(道寧)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술호(述戶)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道寧伊伐湌述戶稟主

8월, 제(帝)는 질환이 점점 깊어지자 성산(聖山)에 나가 기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八月帝疾漸好出居聖山

영술(英述)이 호동(好童)의 아들 정숙(丁叔)을 낳았다. 英述生好童子丁叔

9월, 두씨(杜氏)가 그 세 아들과 더불어 성산(聖山)에서 제(帝)를 알현하였다. 제(帝)가 두씨(杜氏)에게 골품(骨品)과 자의(紫衣)를 내렸다. 九月杜氏與其三子謁帝于聖山賜斗氏骨品紫衣

10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의 딸 하연(河淵)을 낳았다. 제(帝)가 성산(聖山)으로부터 대궁(大宮)으로 돌아왔다. 十月保反生河期女下淵帝自聖山還大宮

12월 성모사(聖母祠)에 큰 눈이 내려 이틀간 불통되었다. 방기(房期)를 아찬(阿湌)으로 삼고 제(帝)의 딸 발유(發有)로 처를 삼았다. 十二月大雪聖母祠不通二日以房期爲阿湌妻以帝女發有



수호(水虎:임인402) 정월, 보반후(保反后)가 부군(副君)과 더불어 조례를 받았다. 세윤(世閏)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양태(良兌)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水虎正月保反后與副君受朝
世閏伊伐湌良兌稟主

우화(宇花)가 호동(好童)의 딸 염(廉)을 낳았다. 宇花生好童女廉

2월, 제(帝)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藥)을 구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제(帝)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 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賢)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상례(祥)를 행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后)를 삼았으나 음(陰)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부제(父帝)를 추존하여 나물대성신제(奈勿大聖神帝)라 하였다. 그 보록(譜)에서 말한다.
“아효성모(阿孝聖母)가 아호성모(阿好聖母)를 낳고 아호(阿好)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을 낳았고, 구도갈문왕이 골정태자(骨正太子)의 딸 녹모골모(綠帽骨母)를 취하여 말흔세신(末昕世神)을 낳았고, 말흔세신이 미추대성태제(味鄒大聖太帝)의 어머니 술례성모(述禮聖母)를 취하여 말구세신(末仇世神)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제(帝)의 아버지가 된다. (미추)태제(太帝)에게서 제(帝)인 까닭에 내외(內外)가 중시하고 총애가 지극히 깊어 진골(眞骨) 중흥(中興)의 조상이 되었다. 그 천명(天命)이었음 이련가.”  二月帝復病劇求藥于神山帝曰天命自在藥能何爲晏然而崩帝性寬仁好德能於武事能禦其侮晩年好神仙委政於內初年唯以奉順神后爲旨無所創新然臣民 莫不感其德而痛如考妣亦賢哉卽日副君行祥于保反宮卽宝位是爲實聖帝實聖在麗思歸累請代質不得內懷不平及卽位雖以保反爲后而陰有報復之意分質宝海美海逐出訥 祇好勿等乃擁訥祇靖之尊父帝爲奈勿大聖神帝其譜曰阿孝聖母生阿好聖母阿好生勢漢勢漢生首留首留生郁甫郁甫生仇道葛文王娶骨正太子女綠帽骨母生末昕世神取味 鄒大聖太帝之母述禮聖母生末仇世神是爲帝父故帝於太帝內外重親寵愛極深遂爲眞骨中興之祖其天命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