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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11

[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0)우리 역사 빼닮은 선우·중산국 ㆍ중산왕릉 위 우뚝 선 ‘향당’은 동이족의 표식 1974년부터 발굴한 중산왕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2300년 전 왕릉 설계도(조역도)에 따라 중국 학계가 복원한 착왕(錯王)의 왕릉과 향당 모습. 왕과 왕후, 애후, 부인묘 등이 나란히 조성됐다. 작은 그림은 이형구 교수가 복원한 고구려 장군총의 향당. 먼저 무덤이 석곽으로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 돌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듯 발해문명권, 즉 동이문화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또한 묘실을 중심으로 아(亞)자형 혹은 중(中)자형으로 묘도를 조영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은(상)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예이다. 또한 리쉐친(李學勤) 등 중국 학자들이 검토해왔듯 중산국 영역에서 쏟아지는 은(상)의 유적들과, 우칭셴(武淸縣)에서 확인된.. 2015. 2. 24.
[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9)중원에 꽃 핀 동이족의 나라 ㆍ朝鮮의 이름을 딴 기자의 후예 선우·중산국 선우·중산국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는 백적(白狄)의 별종”이라 했고,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주석한 색은(索隱)에는 “중산은 옛 선우국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했다. 여기서 백적은 북방의 오랑캐이고, 희성은 주나라 왕의 성(姓)이다. 결국 이 사료에 따르면 선우나 선우의 뒤를 이은 중산은 (은)상, 즉 동이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톈진 우청셴에서 확인된 선우황비문. 선우·중산국=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금석문이다. 하 지만 다른 사서인 ‘속한지(續漢志)’는 “선우는 자성(子姓)”이라 했고, ‘성씨변증(姓氏辯證)’도 “선우는.. 2015. 2. 23.
단군나라의 이름은 조선(朝鮮)이 아니라 신단(辰檀)이다. 단군이 세운 나라를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지은 때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은 후이고 이때는 이미 모화사상이 팽배하여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될대로 왜곡된 시기일 것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어디서 처음에 기록되었을까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과연 "조선"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기자와 위만의 나라 이름의 유래 조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곳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 중 조선열전입니다. 史記卷一百十五, 朝鮮列傳苐五十五 (集解張晏曰朝鮮有濕水洌水汕水三水合為洌水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중략....)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為置吏築鄣塞...중략....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집 해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 등 3개의 강이.. 2012. 9. 5.
[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1)뉴허량의 옥기묘 “옥기 쥔 巫人은 神과 소통한 왕” 1989년 가을.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제2지점 1호 적석총을 발굴 중이던 조사단은 기이한 모습에 꿈을 꾸는 듯했다. 21호묘에서 무려 20점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은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한 곳에서 나온 가장 많은 옥기였다. 무덤에는 옥기로 도배하다시피한 성인 남성이 누워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린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은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잔뜩 치장했다. -옥으로 도배한 인골- 뉴허량 제1지점 중심대묘에서 확인된 인골. 양손에 옥거북이를 쥐고 있는 것을 비롯, 7점의 옥기만 부장돼 있다. 일인독존의 무인(巫人)으로 추정된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희한했다. 다른 부장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2011.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