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지리지40

진서(晉書) 지리지 번역: 평주(平州)와 유주(幽州) 1. 평주(平州)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국(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국(漢)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국(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1] .. 2018. 1. 4.
한서지리지의 유주(幽州) 등 우리역사 관련지명 번역 1. 유주(幽州) ① 탁군(涿郡) 涿郡, 高帝置. 莽曰垣翰. 屬幽州. 戸十九萬五千六百七, 口七十八萬二千七百六十四. 有鐡官. 縣二十九. 涿, 桃水首受淶水, 分東至安次入河.[1] 逎, 莽曰逎屛.[2] 榖丘, 故安, 閻鄉, 易水所出, 東至范陽入濡也. 并州䆮. 水亦至范陽入淶.[3] 南深澤, 范陽, 莽曰順陰.[4] 蠡吾,[5] 容城, 莽曰深澤. 易, 廣望, 侯國. 鄭, 莽曰言符.[6] 高陽, 莽曰高亭.[7] 州鄉, 侯國. 安平, 都尉治. 莽曰廣望亭. 樊輿, 侯國. 莽曰握符. 成, 侯國. 莽曰宜家. 良鄉, 侯國. 垣水南東至陽鄉入桃. 莽曰廣陽. 利鄉, 侯國. 莽曰章符. 臨鄉, 侯國. 益昌, 侯國. 莽曰有祑[8]. 陽鄉, 侯國. 莽曰章武. 西鄉, 侯國. 莽曰移風. 饒陽,[9] 中水,[10] 武垣, 莽曰垣翰亭.[11] .. 2018. 1. 4.
[요사遼史]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전문번역 신교본요사新校本遼史 / 지志 / 권卷 三十九 지志 제第九 / 지리지地理志三 / 중경도中京道 /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중경도中京道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는 헤아리건대 영주營州에 속한다. 하夏나라때는 기주冀州에 속하였으며 주周나라때에는 유주幽州의 한 부분이었다. 진군秦郡의 천하天下일때는 이곳은 요서遼西이었음이 옳고 한漢나라때에는 요서군遼西郡 신안평현新安平縣이었다. 한말漢末에 해족奚族이 뒤이어 들어와서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는데,폭원幅員이 천리千里이고 커다란 산들과 깊은 계곡이 많아서 조험阻險하므로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충분하였다. 위무魏武가 북정北征을 하여 병사들을 풀어 크게 싸웠는데 항복한 자가 20여만명이었고 피신한 자들은 송막松漠으로 갔다. 그후에 북위北魏의 타브가치Tabgatsch拓拔氏가 .. 2013. 6. 12.
신당서 지리지 발해 관련 당나라는 여러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국경 근처에 있었으므로 오랑캐 부락에 이름을 붙였다. 사방의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수들이 토벌하거나 칙사들이 방문할 때 나아간 길을 기록해 두었다. 천보(天寶) 연간에 현종(玄宗)이 여러 주변 나라들의 거리를 물으니 홍려경(鴻臚卿) 왕충사(王忠嗣)가 서역(西域)의 지도로 대답하니 겨우 십여국에 불과하였다. 그후 정원(貞元) 연간에 재상을 지냈던 가탐(賈耽)1)이 사방 영역의 거리를 고찰한 것이 가장 상세하였으니, 변방에서 사방 오랑캐로 들어갈 때 홍려시(鴻臚侍)에서 통역하는 자치고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사방 오랑캐로 들어가는 길과 관문과 요새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일곱 개가 있다. 첫째는 영주(營州)에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2013.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