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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위화진경(魏華眞經) 번역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 16.
다음해에 호물공(好勿公)이 눌지성제(訥祗聖帝)를 받들어 입경(入京)하였는데 마도(馬徒)에서 관직[士]을 얻었던 자들은 허다하게 주륙(誅戮)을 당했다. 그러나 양도(羊徒)는 안연(晏然)하였는데 모두가 그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성제(聖帝)는 랑(郞)이 사직(社稷)에 음공(陰功)이 있었던까닭에 봉하여 가선(歌仙)으로 삼고 명을 내려 남도(南桃)를 행하도록 하였고, 전대사(典大舍)를 양도(羊徒)에 분속(分屬)시켰다. (이에) 내외가 일시에 그를 영예롭게 여겼으니, 타도(他徒)들이 감히 그에 대항하지 못했다. 命行南桃典大舍分屬羊徒於內外一時榮之他徒不敢抗之 ??
이에 앞서 포아(布兒)의 우도(牛徒)는 양도(羊徒)와 합치고자 했는데 이에 이르러 포아(布兒)가 득죄(得罪)하여 외방으로 유배되니 그 낭도(徒)들이 모두 랑(郞)에게 들어왔다. 새금(塞金) 역시 기세가 미칠 수 없음(勢不可及)을 알고 마도(馬徒)로써 그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랑(郞)이 모든 낭도(徒)를 통합코자 하여 그를 허락하고 연장자(年長)인 까닭으로 (그를) 형(兄)으로 삼고 일선(日仙)으로 추대하니 모든 무리(諸徒)가 다 그 높은 의리(高義)에 함복(咸服)하였다.
※낭도(徒) : ‘선도(仙徒)’로 번역할 수도 있으나 본서는 위화랑 이후에 편찬된 저작이므로 원작의 용례와 저자의 언어를 존중하여 ‘낭도’로 번역함.  
이 해에 청아낭주(靑我娘主)가 랑(郞)의 딸 조리궁주(助里宮主)를 낳았다. 꿈에 백학(白鶴)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낳았는데) 명미(明美)하고 연묘(娟妙)하였다.    
이에 앞서 청아(靑我)는 미해전군(美海殿君)에게 천침(薦枕)하여 백흔공(白欣公)을 낳았었다. 조리(助里)보다 세 살이 많았는데 우애(友愛)가 지극히 도타워 서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제(帝)가 부부가 될 것을 명하여 섬신공(剡臣公)을 낳았다.
이듬해 순실공(順實公)이 일선(日仙)으로써 상화(上化)하니 낭도(郎徒)들은 부모(考妣)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여) 성동(城東)에 사당(祠)을 세웠다. 법흥제(法興帝)가 추숭(追崇)하여 갈문왕(葛文王)으로 삼고 궁(宮)을 설치했는데 청아후(靑我后)의 배향(配)을 그곳에 속하게 한 까닭에 이름을 청연궁(靑淵宮)이라했다.
섬신공(剡臣公)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이(穎異)했는데 신선(神仙)을 좋아하고 골격이 청수(骨秀)하며 살결이 맑아(肉淸) 점 하나도 없었으니 연하(煙霞)의 기질(氣)이었다.

청아궁주(靑我宮主)가 말하기를 “내 손자는 길공(吉公)의 후신(後身)이다. 길공(吉公)은 살결이 맑아(肉淸) 물건을 비출 수 있었는데 이 아이가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제(帝)가 조리(助里)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름답기(美)는 순실(順實) 같고, 웅장(雄)하기는 제상(堤上) 같다”고 하자 백흔공(白欣公)이 “이는 신(臣)의 좋은 흰 망아지(白駒)입니다.”라고 하였다.

자비제(慈悲帝) 4년, 상궁(上宮) 파호후(巴胡后)의 아들 비처(毗處)를 태자로 삼고 섬신(剡臣)에게 명을 내려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도록 하니 나이 15세였다. 태자가 그를 아껴 궁중에 머물도록 명하니 백흔공(白欣公)은 그 불학무례(不學無禮)함을 근심하여 그를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조리궁주(助里宮主)로 하여금 태자궁(太子宮)에 들어가 그를 가르치게 했다.
궁주가 마침내 궁중에서 태자의 딸 수아(繡兒?)를 낳으니 제(帝)가 그를 가상히 여겨 백흔공(白欣公)의 질품(秩品)을 더하고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태자가 다시 백흔공(公)의 딸 백씨(白氏)를 맞아들여 시첩(侍妾)을 삼으니 곧 섬신(剡臣)의 포매(胞妹)였다.
태자가 마침내 섬신(剡臣)에게 명하여 호연공(好淵公)및 숙부 등흔공(登欣公)에게 취학(就學)하여 순실(順實)의 업(業)을 계승(紹)하도록 했다.
섬신(剡臣)이 미도(媚道)에는 기꺼워(善)하나 문장(文章)은 좋아하지 않자 백흔공(白欣公)이 노하여 말했다.  
※미도(媚道) : 아첨과 교태로 남에 영합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무축(巫祝)의 술법으로써 남에게 즐거움을 갖게 한다(以巫祝之術取悅於人)'라는 뜻도 있음. 여기서 말하는 미도(媚道)는 후자에 가까운 의미로, 고대 신라의 선도(仙道) 무격(巫覡)과 관련된 특수한 문화적 함의가 내포된 용어로 추정됨.
“네가 내 아들로써 문장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미해(美海)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겠는가?”
호연공(好淵公)이 말했다.
“이 아이는 순실(順實)의 맑음(淸)과 청아(靑我)의 슬기(智)를 얻어 비록 문장은 없어도 선도(仙道)에 가합(可合)하니 그 좋아하는 바대로 풀어줌이 가하리라.”  
섬신공(剡臣公)이 이에 오로지 가무(歌舞)를 일삼아 신풍(神風?)에 더한층 정교(尤精)로워졌다.
골녀(骨女)들이 많이 태자궁중(太子宮中)에 나아와 배웠는데 마치 나비(蝴蝶)들의 난무와도 같아서 그 당(堂)을 이름하여 호접당(蝴蝶堂)이라 했다.
골녀(骨女)들이 섬신(剡臣)을 지칭(目)하여 무성(舞聖)으로 삼았다.
태자가 즉위하자 호접루(蝴蝶樓)를 설치하고 널리 무도(無道)를 공개하였는데 나라 안이 일시에 그에 휩쓸렸다.
비제(毗帝)가 (그) 공(功)으로써 (차례를) 뛰어넘는 비품(非品)의 직(職)을 제수하여 국정(國政)을 오로지 할 수 있게 되자 백흔공이 그를 경계하여 말했다.
“네가 폐행(嬖倖)으로써 나이도 어린데 지위는 높고 권력을 농락할 수도 있고 휘어잡을 수도 있으니 크게 상서롭지 않다(大不祥). 일찌감치 걸휴(乞休)하고 나무아래서 부자(父子)의 공락(共樂)을 기르느니만 못하다.”
※걸휴(乞休) : 자진사퇴의 뜻. ‘걸면(乞免)’ 또는 ‘걸해골(乞骸骨)’이라고도 표현.
섬신공(剡臣公)이 이에 백흔공(白欣公)의 뜻으로써 그를 여쭈자 제(帝)는 허락하지 않고 성안(城中)에 백흔공의 동산과 못(白欣公園池)을 조성하고 부자당(父子堂)을 세워 때로 귀성(歸省)하게끔 하였다. 帝不許築白欣公園池于城中建父子堂使以時歸省(??)
이에 앞서 제(帝)는 종제(從弟)인 지도로공(智度路公)을 아끼어 그 비(妃)를 구(求)하였는데 섬신공(剡臣公)이 종매(從妹)인 영제(迎帝)로써 그를 천거했었다.
※영제(迎帝): <炤知明王紀>에는 연제(蓮帝)로 나옴. <삼국사기>에는 연제(延帝).
이에 이르러 영제(迎帝)가 상(上)의 총애를 얻자 등흔공(登欣公)이 재상(相)으로 들어와 정권을 잡고, 지도로공(智度路公)과 섬신공(剡臣公)을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로 삼았다. 제(帝)는 지도로공의 누이동생 원혜궁주(元兮宮主)를 섬신공의 처(妻)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길례(吉)를 올리도록 명했다.
등흔공(登欣公)이 백흔공(白欣公)에게 말했다.
“섬아(剡兒)는 어리지만 명민(敏)하니 나는 걱정이 없노라.”
백흔공과 등흔공은 본디 우애가 두터웠는데 늙어가며 더욱 은근(勤)해져 매양 아침저녁으로 단합(團合)하는 것으로써 지극한 도락을 삼았다.
백흔공은 형을 아버지처럼 섬겨 그 말을 신뢰하는 까닭에 마침내 섬신공을 허락하고 근심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이 아들을 가졌으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했다.
제(帝)가 술과 음식으로 양 흔공(欣公)을 대접하는데 숙부(叔父)라 부르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풍차(豊車)와 비마(肥馬)를 하사하고 승부(乘府)로 하여금 그를 이바지하게 하니 은사(恩渥) 가장 무거웠다.
비제(毗帝) 2년 금원(金猿:경신480)의 중춘(仲春:음력 2월) 10일에 영제(迎帝)가 모량궁(牟粱宮)에서 지도로공(智度路公)의 아들 모진궁(慕珍宮)을 낳았다. 제(帝)가 친히 행차하여 쌀(米)을 하사했다.
※모진궁(慕珍宮) ; <炤知明王紀>에는 모진(慕珍)으로 나옴.
등흔공이 백흔공에게 말했다.
“백양신모(白羊神母)가 말한 ‘조짐이 80년 밖에 있다’한 것은 바로 이 아이를 이른 것이다. 나와 너는 늙어서 비록 볼 수 없으나 섬아(剡兒)라면 그를 보리라.”
백흔공이 이에 섬신공을 불러 그를 경계시켰다. 섬신공이 이로써 천명(天命)이 돌아갈 바를 알고 시종(終始) 지제(智帝)를 보호하여 끝내는 부군(副君)으로써 선양을 받고 보조(寶祚)가 모진궁(慕珍宮)에게 돌아갔으니 거의 하늘이 내려주심이요 인력(人力)이 아니었다.
후 3년 수구(水狗:임술482) 7월, 백흔공(白欣公)이 대등이찬(大等伊湌)으로써 선원(仙院)에서 졸(卒)하였다.
※백흔공(白欣公) : 『7월 대등이찬(大等伊湌) 백흔(白欣)이 졸(卒)하였다. 공(公)은 미해왕(美海王)의 적통아들(嗣子)이고,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의 딸 청아부인(靑我夫人)이다. 공(公)은 문장을 좋아하고 풍채가 있었다. 일찌기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으로 가서 그 군신(君臣)들을 굴복?(服)시켰는데, 고구려인이 늘 공(公)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백공(白公)이 있으니 경시할 수 없다.”라고 했다. 공(公)의 덕(德)을 가히 이에서 알 수 있다. 공(公)의 아들 섬신(剡臣)은 왕(王)의 총신(寵臣)이 되어 사치를 좋아하고 여색을 탐하므로 공이 그를 꾸짖어 “내 아들이 아니다. 가까이 할 수 없다.”하니 섬신이 이로써 방자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급기야 공이 졸(卒)함에 미쳐서는 술에 취해 춤추는 행색(行色?)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애석히 여겨 말하기를 “호랑이 아버지인데 개아들이다.”라고 했다.<炤知明王紀>』
이듬해에는 등흔공(登欣公)과 조리궁주(助里宮主)가 훙(薨)하였는데 제(帝)는 모두 후하게 그를 장사지냈다.
※등흔공(登欣公) : 『2월, 병관이찬(兵官伊湌) 등흔(登欣)이 졸(卒)하자 조서(詔)를 내려 말했다. “병관(兵官)은 난궁(暖宮)의 아버지이고 노왕(老王:눌지왕)의 총신(寵臣)이다. 특별히 태공(太公)의 예(禮)로써 장사한다.” 공(公)은 청아부인(靑我夫人)의 장자인데 아버지는 순실랑(順實郞)이라고 한다. 체격이 홍대하고 뜻이 컸으며 명리에 담백하였다. 참소를 만나 야인으로 있었으나 일찍이 원망하고 허물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자손들이 많았는데 연제(蓮帝)와 해량(海粱)의 총애로써 모두가 귀해지고 현달하니 당시 사람들이 제상공(堤上公)이 먹지 않은 (福의) 음덕(蔭)이라 하였다.<炤知明王紀>』
섬신공(剡臣公)에게 (차례를 뛰어넘어) 파진찬(波珍湌)을 제수(超授)하고 품주(稟主)의 일(事)을 행하도록 명했다.
이듬해 보미궁주(宝美宮主)가 훙(薨)하였다.  
※보미궁주(宝美宮主) :『대원부인(大元夫人) 보미(宝美)가 훙(薨)하니 수(壽) 82세였다. 미해왕릉(美海王陵)에 장사하였다. 보미(宝美)는 다파나왕(多婆那王)의 딸이다. 미해왕(美海王)을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노왕(老王)에게 총애를 얻고 자녀 12인을 낳았다. 뒤이어 연제(蓮帝)와 해량(海粱)이 총애를 얻은 이래로는 그 형제들이 날로 더욱 귀해지고 현달하므로 세상에서 대원족(大元族)이라 하였다. 노왕(老王:눌지왕) (재위) 초(初)에 상로(上老)인 국기(國奇)가 일찍이 왕(王)에게 말하기를 “왕기(王氣)가 해도(海島)중에 있으니 백년이 안가 뼈를 도울(援骨) 조짐이 있습니다.”라고 했으니 그 말이 징험(驗)한 것이로다.<炤知明王紀>』

섬신(剡臣)이 모량궁(牟粱宮)을 위하여 대원사(大元祠)를 세우고자 했으나 비기(毗己)와 불합하여서 면출(免出)?되고 경외옥사(京外獄事)를 안핵(按)하였다.
※按京外獄事 : 경도 밖의 주군(州郡)을 돌며 옥사(獄事)를 검토하고 처리하는 일인 듯.
이듬해에 날이(捺已)에 당도했다.
날이(捺已)는 옛날에 월벽태후사(月碧太后祠)가 있었는데 곧 소문(召文)의 성후(聖后)이다. 그 왕손(王孫)이 세세로 수묘하다가 가난하여 스스로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 부호(富戶)인 손동(孫同)이 왕손(王孫)의 딸 벽아(碧我)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천마리 소(千牛)와 바꾸기를 원하자 왕손(王孫)이 그를 허락하였는데 딸을 낳아 벽화(碧花)라고 하였다. 혹은 손동이 왕손과 도박을 함으로써 그를 빼앗은 것이고 벽화(碧花)를 낳음에 이르자 소 천마리로써 납폐(納幣)한 것이라고도 한다.  
벽화(碧花)가 태어나고 겨우 5달만에 손동(孫同)이 폭사(暴死:급사)하였다.
손동의 이부제(異父弟)인 파로(波路)는 평소 손동의 적처(嫡妻)와 상통(相通)하고 있었다. 적처(嫡妻)가 마침내 파로(波路)를 맞이해 계부(繼夫)로 삼아 그 재산을 차지하고서 벽아(碧我) 모녀를 쫓아내고자 하였다. 파로가 벽아를 사모하여 그대로 그녀를 부처(副妻)로 삼고 쫓아내지 않았다. 적처(嫡妻)가 노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관청(官)에 고발하여 말하기를 “파로가 그 형을 독살(鴆)하고 그 처(妻)의 재산을 취했다.”고 했다.
관리는 그 무고(誣)임을 알자 그 재산과 벽아를 빼앗을 욕심으로 강제로 그 옥사(獄)를 성립시키고 장차 죽이려 했다. 관리가 벽아에게 이르기를 “네가 내 첩이 되면 마땅히 네 죄는 사면하리라.”
벽아(碧我)가 어쩔 수 없어 그를 허락하고 돌아와서 자결(自盡)하려하자 시녀가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지금 안사(按使)가 군(郡)에 당도했다하니 그를 찾아 호소할 수 있습니다.”
벽아(碧我)가 마침내 시녀와 더불어 도중(途中)에서 (공을 만나) 호소하니 공(公)이 그 관리를 내쫓았다.
파로(波路)가 은혜에 감동하여 벽아를 비녀(婢)로 삼아줄 것을 원하자 공(公)이 사양하려하니 벽아가 말했다.
“살아서 봉공할 수 없다면 죽어서 호귀(護鬼)가 되어 보은하느니만 못합니다.”
공(公)이 그 뜻을 가련히 여기고 뒷수레(後車)에 태우도록 명하고 돌아왔다.
당시 공(公)은 정처 원혜궁주(元兮宮主)와 부처 취황궁주(翠凰宮主)가 각각 저택과 침비(枕婢)를 갖고 있어 용납이 불가하였다. 이에 사사로이 작은 원(小院)을 세워 그곳에 거처하도록 명했다.
벽아(碧我)가 곧 수왕(樹王)에게 자식(子)을 기원하여 가로되 “자식(子)을 낳은즉 만세에 보은함이니 이 몸의 봉공은 다만 한번 낳음(一生)에 한할 뿐이옵니다.”하였다.    
공(公)이 그 기쁨(歡)을 위해 합방을 하였는데 과연 꿈에 적토선관(赤兎仙官)이 채색구름(彩雲)을 타고 하강하여 옥검(玉劍)을 주고 가거늘, 자금서(紫金書)가 있어 이르되 “위화옥야(魏華玉耶)가 그것을 뽑는다.”라 하고, 광명이 크게 쏘아지며 이상한 향내가 가득 스미는 것이었다. 공(公)이 그를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는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하며 즉시 그 품계(秩)를 높여 난방(煖房)을 삼고 노비(奴婢)를 두어 그를 이바지하게 했다.
과연 이듬해 적토(赤免;정묘 487)의 5월(午月) 묘일(卯日)에 옥남(玉男)을 낳았는데 얼굴은 하얀 백옥(白玉)과도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기름을 칠한 듯하였다. 이에 이름을 위화랑(魏華郞)이라 하였다.
때에 일선(日仙) 말후(末厚)는 꿈에 순실랑(順實郞)이 섬신(剡臣)의 집안에 다시 태어남(復生)을 보고 상주하여 말했다.
“금년에는 대선(大仙)이 하강하고, 명년에는 비록 작은 요사(邪)가 있을 것이나 월성(月城)을 수리하면 그를 제거(除)할 것입니다.”
제(帝)가 이에 그 대선(大仙)이 누구인가 묻자 말후(末厚)가 곧 하얀 합(白盒)에 물을 가득 채워서 그를 비추니 백설이 어지럽게 내리는 가운데 한 조촐한 원(院)이 있고 자의(紫衣)를 입은 한 선녀(仙娥)가 옥아(玉兒)를 안고 나와서 제(帝)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제(帝)가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후(末厚)가 상화(上化)하자 묘심(妙心)이 그를 대신하였다.
그 겨울에 제(帝)가 눈 내리는 밤(雪夜)에 섬신(剡臣)의 집을 방문했는데 벽아(碧我)가 위화(魏華)를 안고 나와 절을 하니 완연히 합(盒)안에서 본바와 같았다.  
제(帝)가 이에 그 대선(大仙)이 됨을 알고 마침내 벽아(碧我)에게 품작(爵品)을 내리고 그녀에게 행차(幸)하였다. 누차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가 있자 원혜(元兮)와 취황(翠凰)이 모두 몸을 굽히고 언사를 겸손(卑辭)하게 하며 감히 난방(煖房)이라 하여 그녀를 깔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