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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잘못알고있던 발해(渤海)의 영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8. 19.



발해, 즉 진단(震旦)의 강역은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下
聖厯中自立為振國王…중략…睿宗先天二年遣郎將崔訢往冊拜祚榮為左驍衛貟外大將軍渤海郡王
성력 년간에 (대조영은) 자립하여 진국(振國)의 왕이 되었다. 예종 선천 2년에 낭장 최흔을 보내어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

위 기록의 해석에 논란이 많지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것은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 이름을 진단(震旦,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름)이라 하였는데, 이 것을 당국(唐國)에서 대조영의 진단(震旦)을 더 이상 공격할 힘이 없자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지나인의 특유의 병적심리인 자존감으로 인하여진단(震旦)을 자신들의 봉국(封國)인냥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국의 이름을 자기들 마음대로 발해(渤海)라 한 것이죠.

그런데 왜 당국(唐國)은 진단(震旦)을 발해국(渤海國)이라 기록하였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우리나라와 지나 사이에 있는 바다인 발해(渤海) 유역에 그 중심부 혹은 도읍이 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단(震旦)이 강역이 원래 난하를 중심으로 한 국가였는데 어떻게하여 송화강 혹은 목단강 유역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하나씩 살펴봅시다.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 신당서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필요한 몇 개만 골라 아래에 인용하여 봅니다.

唐書卷二百十九
肅慎故地為上京曰龍泉府 숙신의 옛 땅을 상경 용천부라 했다.
其南為中京曰顯徳府 상경의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 했다.
獩貊故地為東京曰龍原府 예맥의 옛 땅을 동경 용원부라 했다.
沃沮故地為南京曰南海府 옥저의 옛 땅을 남경 남해부라 했다.
髙麗故地為西京曰鴨淥府 고구려의 옛 땅을 서경 압록부라 했다.
挹婁故地為定理府 읍루의 옛 땅을 정리부라 했다.

제가 첫 번째로 첨부한 지도를 보시면 강단에서 주장하는 진단(震旦)의 강역이 나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 보통 사서에서 숙신과 읍루를 같은 위치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당서에서는 숙신의 옛 땅을 상경으로 삼아 용천부라 했고 읍루의 옛 땅을 정리부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숙신을 보통 읍루와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단에서는 억지로 만들기를 읍루는 바닷가에 두고 숙신은 읍루의 서쪽에 두었죠. 중경 현덕부가 상경 용천부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숙신과 읍루를 억지로 비정한 결과로 중경이 송화강 상류에 오게 됩니다. 진단(震旦)의 중경이 송화강 상류인데 왜 구태여 당국(唐國)에서는 진단의 임금을 발해왕(渤海王)이라 하였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2) 고조선 붕괴후 열국시대의 국가로 동예와 옥저가 있습니다. 동예는 보통 예맥이라고 하죠. 그런데 위 첫 번째 지도를 보시면 열국시대(첫 번째 지도 오른쪽 것입니다)의 동예도 북부이고 옥저는 함경도 남부입니다. 신당서 기록에서는 예맥의 땅을 동경이라 했고 옥저의 땅을 남경이라 했으므로 열국시대 강역론에 따라 동경은 강원도 그리고 남경은 함경도가 됩니다. 좀 이상하죠? 동경이 남경보다 더 남쪽에 오게됩니다. 즉, 열국시대 강역론은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이죠. 그래서 강단에서는 급기에야 열국시대 완전히 강역론을 무시하고 예맥의 땅이라고 강단이 주장한 강원도를 저쪽 함경북도에다가 옮겨 동경이라고 했습니다. 도깨비도 못할 짓을 한겁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상황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상경인 숙신의 위치를 잘못 비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숙신의 위치

숙신의 강역을 비정하려면 저 멀리 환웅이 세운 신불(神市)로 가야 합니다. 사서는 아니지만 숙신의 위치를 설명하는 좋은 기록이 있어 소개합니다.

진주소씨 족보책중 하나입니다.
扶蘇譜序
太夏公初居灤河當肅愼 洪帝時入於弗咸山北仍封其地國名有蘇以上詳載於桓國史
태하공 초기에 난하(灤河) 숙신국에서 살았다. 홍제(洪帝)때에 불함산 북쪽으로 투항하여 그 땅을 봉국으로 받았는데 봉국의 이름은 유소국(有蘇國)이다. 이상 상세한 내용은 환국사(桓國史)에 보인다.

여기서 보면 우리나라 진주소씨의 조상은 원래 난하 유역의 숙신에서 살았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신불(神市)의 홍제(洪帝, 혁다세 임금으로 추정)때에 투항하여 불함산 북쪽에 봉국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아마도 숙신은 신불(神市) 때에는 지나측에 속하였었나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숙신이 원래 난하(灤河)에 살았다가 불함산의 북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입니다. 불함산은 아마도 대흥안령산맥 중에 있는 산이었을 것입니다.

숙신이 또한 고조선과 지나의 경계 정도에 있었다고 기록한 지나측 기록도 보입니다.

史記卷一百十七
齊東有巨海南有琅邪觀乎成山射乎之罘浮渤澥游孟諸邪與肅慎為鄰湯谷為界
제齊의 동쪽은 큰 바다가 있고, 남쪽에는 낭야(琅邪)가 있고, 성산을 보며, 그물의 토끼를 쏘고 놀다가, 발해에 배를 띄워 맹제(孟諸)에서 논다. 낭야(琅邪)의 곁에는 숙신이 이웃하여 있는데 탕곡과 경계를 이룬다.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낭사는 산동반도 남쪽에 진나라가 설치한 군현입니다. 발해는 산동반도 북쪽 바다를 말하는 것이죠. 맹제(孟諸)는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바로 숙신이 있다고 하는군요. 이는 우리나라와 지나의 경계에 숙신이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이 전쟁 때 위나라 장군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기록을 보고 위나라 장군이 동해바다까지 왔다고 보죠. 그러나 어림없는 말입니다. 위에 제가 인용한 기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숙신은 난하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위나라가 침략한 곳은 불내성과 환도성이므로 숙신의 남쪽 경계는 절대로 지금의 요하 동쪽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숙신의 남계에 도달하였다 했으므로 숙신은 요하의 서북쪽 부근 혹은 난하의 상류 부근에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진단(震旦) 5경의 새로운 비정

이렇게 숙신의 땅을 난하 상류로 비정하면 진단(震旦) 5경의 위치가 논리상 모순이 없이 바로잡히게 됩니다.

* 상경 용천부
신당서에 숙신의 옛 땅을 상경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므로 난하의 상류로 비정합니다.

* 중경 현덕부
신당서에 상경의 남쪽을 중경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므로 난하의 중류로 비정합니다.

규원사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曰壬儉城今滿洲吉林之地有蘇密城在於涑沫江之南此卽其地也.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발원지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淸平云粟末水之陽有渤海中京顯德府地此乃檀君始都處故壬儉城卽平壤也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又曰高王夢有神人授以金符曰天命在爾統我震域故國號曰震
청 평(진역유기의 저자)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였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우리나라 사서인 규원사화의 기록과 좀 안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규원사화의 저자가 속말수를 송화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참고하였다는 진역유기의 저자의 말에서는 만주 송화강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저 속말수 북쪽 발해의 중경 현덕부의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속말수를 찾는 것이 바로 관건이 되겠습니다. 속말수(涑沫水) 즉 우수하(牛首河)의 발원지 혹은 상류에 중경 현덕부가 있었는데 속말수는 우수하라고도 하였으므로 풀어쓰면 “소머리강”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송화강이라 불리는 강은 “소머리강”이 아닙니다. 송화강은 또 다른 이름이 송아리강입니다. 그러면 송아리강의 의미를 찾아보면 됩니다.

欽定金史語解卷三
松阿哩天河也卷二十四作宋瓦江名
송아리는 하늘강(天河)이란 뜻이다. 요사 권24에서는 송와강(宋瓦江)이라고 하였다.

많 이들 말하기를 속말수 즉 소머리강이 송화강이라고 하지만 그 말의 뜻이 전혀 다릅니다. 속말수는 우수하로 “소머리강”이고 현재 만주에 있는 송화강 즉 송아리강은 “하늘강(天河)”라는 뜻이죠. 발음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강입니다. 따라서 규원사화 저자인 북애자가 말하는 우수하 속말수가 현재의 만주 송화강이라는 주장은 틀렸으며 진역유기의 저자의 말만 근거로 하여 속말수 즉 소머리강을 찾아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소머리강”으로 보이는 강이 난하로 생각되는 옛 유수(濡水)의 지류에 나타납니다.

水經注卷十四
濡水又東南索頭水注之水北出索頭川南流逕廣陽僑郡西
유수는 또 동남으로 흘르다가 索頭水가 유수로 흘러 들어간다. 索頭水는 索頭川의 남쪽 지류인데 광양교군(廣陽僑郡)의 서쪽을 지난다.

欽定熱河志卷五十八
索頭水即今伊遜河流經承徳府北境過豐寧縣至灤平縣之東北境會入灤河
索頭水 즉 현재의 이손하(伊遜河)인데 승덕부의 북쪽을 경과하여 풍녕현(豐寧縣)을 지나 란평현(灤平縣)의 동북 지경에 이르러 난하(灤河)로 들어간다.

索頭水... 이게 과연 색두수(索頭水)일까요? 제 생각에는 이 것은 소머리강(素頭水, 소두수)이 와전된 것입니다.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이죠. 索頭水라고 하면 동아줄머리강이라는 뜻이되는데 전혀 의미가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素頭水라고 하면 첫글자는 음으로읽어 소(牛)이고 뒷글자는 뜻으로 읽어 머리(頭)입니다. 즉 소머리강이란 뜻이며 규원사화에 나오는 우수하(牛首河)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소머리강(素頭水)이 지나가는 풍녕현(豐寧縣)은 진단(震旦)의 서경 압록부 풍주(豊州)일 가능성이 크죠.

* 남경 남해부
신 당서에 옥저의 옛 땅을 남경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옥저(沃沮)란 삼림(森林)의 뜻이므로 남경 남해부의 옥저가 어떤 옥저를 가리키는지, 즉 동옥저 북옥저 남옥저 중 어떤 옥저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일통지에 남경 남해부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欽定滿洲源流考卷十
元一統志澄州本海州南海府沃沮地髙麗時卑沙城唐李世勣攻卑沙城即此渤海為南海府遼仍之金改曰海州天徳三年以山東有海州改為澄州治臨溟縣
《원 일통지(元一統志)》 징주(澄州)는 원래 해주(海州) 남해부(南海府)의 옥저(沃沮)의 땅으로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비사성(卑沙城)이었다. 당(唐)의 이적(李勣)이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였다는 곳이 바로 여기다. 발해에서는 남해부(南海府)를 두었고, 요(遼)에서 그대로 하였고, 금(金)에서는 해주(海州)로 개칭했다. 천덕(天德) 3년에 산의 동쪽에 해주(海州)가 있으므로 징주(澄州)로 고쳤고, 임명현(臨溟縣)에 치소가 있다.

위 기록에서 진단(震旦)의 남경 남해부는 고구려 비사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요하 근처 혹은 요동반도입니다. 강단에서 진단(震旦)의 남경을 함경도로 비정하니 이곳이 바로 비사성이군요. 당국(唐國) 장군 이적이 한반도 한바퀴 돌아 동해안에 있는 비사성을 공격하였군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 서경 압록부
신당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서경 압록부라 두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중심부가 어딘지 참으로 헷갈리는 구절입니다. 강단에서는 현재 압록강 주변을 비정하지만 숙신은 난하 부근이므로 절대 서경은 현재의 압록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도 하지만 역시 서경이므로 요하근처로 올 수도 없습니다. 요사(遼史)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遼史卷三十八
渌州鴨渌軍
桓州髙麗中都城故縣三桓都神鄉浿水
록주 압록군 중에 속한 주로 환주(桓州)는 고구려 영토 가운데 있는 도성인데 옛 현이 3개다. 각각 환도현, 신향형, 패수현(浿水縣)이다.

서경 압록부에 있었던 패수(浿水)를 대략적으로나마 찾으면 난하의 서쪽인지 동쪽인지 나오게 됩니다.

説文解字卷十一上
貝水出樂浪鏤方東入海
패수는 한나라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으므로 절대로 요하나 압록강이 될 수 없습니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말은 지리적 조건상 난하 서쪽에 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한 중경 현덕부 설명할 때 나온 索頭水는 소머리강(素頭水)이며 풍녕현(豐寧縣)을 지나서 난평현에 이르러 난하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풍녕현의 동쪽에 난하가 있다는 말이 되며 이곳은 바로 중경 현덕부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사서에서는 풍녕현이 요나라 중경에 속한다고 하였지만 이 풍녕현은 아마도 진단(震旦) 서경 압록부 풍주의 땅일 것입니다.

패수가 정확히 어떤 강이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뒤로 미루고 당장은 서경은 난하의 서쪽이라고만 해두겠습니다.

* 동경 용원부
신당서에 예맥의 옛 땅이라고 하였으므로 길림성의 동쪽으로 비정합니다.

이 렇게 비정하면 동서남북이 제대로 맞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당국(唐國)에서 왜 진단(震旦)을 발해(渤海)라고 하였는지 이해가 되실겁니다. 제가 첨부한 두 번째 지도를 보시면 진단(震旦)의 5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발해를 주변으로 상경 중경 서경 남경이 모두 모여 있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당국에서는 진단의 임금인 대조영을 발해국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진단의 강역이 위와 같기에 구당서에서는 이렇게 말한것입니다.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下
祚榮遂率其衆東保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
대조영은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위의 계루는 고구려 중부인 계루부인 것입니다. 신당서에서는 고구려 계루부가 진단의 중심 강역인것을 변조하여 읍루의 동모산으로 바꾼 것입니다. 지나인의 잘못된 인식인 숙신=말갈=읍루라는 것때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