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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37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 발해관련 기록 발췌 번역 개원(開元) 7년(719) 3월 정유일 발해말갈군왕(渤海靺鞨郡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그 아들 (대)무예(武藝)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개원 14년(726) 12월 신축일 발해말갈(의 왕)이 그 아들 의신(義信)을 보내어 내조(來朝)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바쳤다. 개원 16년(728) 봄 1월 갑자일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개원 20년(732) 9월 을사일 발해말갈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토록 하였다. 개원 26년(738) … 이해에 발해말갈의 왕 대무예가 죽고 그 아들 (대)흠무(欽茂)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대흠무를 책봉하였다. 개원 29년(741) 가을 7..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傳 전문번역 말갈(靺鞨)은 곧 숙신(肅愼)의 땅이니, 후위(後魏) 때에는 이를 물길(勿吉)이라 하였다. 경사(京師)에서 동북 방향으로 6천 여리 밖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突厥)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高句麗)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室韋)와 인접해 있다. 그 나라는 모두 수십 부나 되는데, 각각 우두머리(酋帥)가 있어 더러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더러는 돌궐의 신하로 예속되어 있다. 유 주도독(幽州都督)을 추증하고 건릉(乾陵)에 배장하였다. 그 뒤로부터 때로는 추장이 직접 오고 때로는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백산부(白山部)는 본래 고구려에 부용(附庸)되었는데,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 많은 무리들이 중국으로 들어 왔다. 골돌(汨咄), 안..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거란契丹 전문 번역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 지역인 선비족(鮮卑族)의 옛 영토에 살고 있다.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동북쪽으로 5,300 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해국(奚國), 남쪽으로는 영주(營州)와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에 다다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냉형산(冷陘山)이 위치하고 해국의 서산(西山)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영역은 사방 2,000리이다. 사냥을 일삼아 왕래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군장(君長)의 성씨는 대하씨(大賀氏)이다. 정예병사 43,000명인데 8부족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만약 군사의 징발이 있으면 각각의 부족에서는 모두 반드시 합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거병을 할 수 없었다. 수렵은 각 부족별로..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해奚傳 전문 번역 해족(奚)은 대개 흉노(匈奴)의 별종이다. 거주지는 선비(鮮卑)의 옛 땅이니 바로 동호(東胡)의 경계로서 당나라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4,000여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 돌궐(突厥)에 이르며 남쪽으로 백랑하(白狼河 ; 대릉하)까지 이르며, 북쪽으로 습(霫)에 이른다. 영주(營州)에서 서북쪽의 요락수(饒樂水)부터 그 나라에 이른다. 뛰어난 병사는 3만여명이며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족마다 사근(俟斤) 한 사람이 있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해서 항상 물과 풀을 쫓아다니며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 옮겨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다. 머무는 곳은 융단 장막이며 수레를 사용하여 군영을 만드는데 항상 500명을 두어 지키도록 한다. 이 밖의 부락은 모두 산간 계곡에 흩어져 있으므로 ..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