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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37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黑水靺鞨 전문번역 연간(A.D. 742~755;신라 경덕왕1~14)에 여덟 번 와서 고래 눈알(鯨睛), 담비(貂鼠), 흰토끼가죽(白兎皮)를 바쳤다. 철리(鐵利)는 개원(開元) 연간(A.D. 713~741;신라 聖德王 12~孝成王 5)에 여섯 번 왔다. 월희는 (개원 연간에) 일곱 번 오고, 정원(貞元) 연간 (A.D. 785~804;신라 원성왕 1~애장왕 5)에 한번 왔다. 우루(虞婁)는 정관(貞觀) 연간(A.D. 672~649;고구려 營留王 10~寶藏王 8)에 두 번오고, 정원(貞元) 연간 (A.D. 785~804;신라 元聖王 1~哀莊王 5)에 한번 왔다.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복속되어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肅愼) 땅에 있는데,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후위.. 2009. 11. 17.
신당서新唐書 거란契丹 전문 번역 거란은 원래 동호(東胡)의 종족으로 조상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을 지키고 살았다. 위(魏)나라 청룡(靑龍) 연간에 부족의 추장 비능(比能)이 점점 흉폭하고 오만해져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피살되었다.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潢水) 남쪽과 황룡(黃龍)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위(北魏) 때에 스스로 거란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은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동북쪽으로 오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과 실위(室韋)에 이른다. 냉형산(冷陘山)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하며 산다. 사냥을 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 임금의 성씨는 대하(大賀)이다. 정예병사는 4만이나 되는데.. 2009. 11. 17.
신당서新唐書 해전奚傳 전문 번역 해족은 돌궐과 풍속이 비슷하고 물과 풀을 쫓아 목축하며 융단으로 만든 장막에 거주하며 수레를 빙 둘러서 진영을 만들었다. 군장(君長)은 항상 무기를 지닌 오백명으로 막사를 지키게 한다. 나머지 부족은 산간 계곡에 흩어져 살며 세금이 없다. 짐승을 사냥하여 물자로 삼는다. 농사는 기장을 많이 심는데, 수확하고 나면 산아래 구덩이를 파고 저장해 둔다. 나무를 잘라서 절구를 만드며, 솥을 이용해 말린 밥을 만들어 찬물에 말아서 먹는다.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군대는 5부로 나뉘며 부마다 사근(俟斤)이 이를 주관한다. 그 나라의 서쪽으로는 대락박(大洛泊)에 이르는데, 회흘(回紇)의 아장에서 3천리 떨어져 있다. 대부분 토호진수(土護眞水 ; 老哈河)에 의거한다. 그 나라의 말은 산에 잘 오르고 양은 검다. 한여름에.. 2009. 11. 17.
신당서 오승체 전 발해의 대무예가 동생 대문예와 나라에서 싸워 대문예가 당으로 도망쳐 왔다. 조서를 내려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과 함께 범양(范陽)과 신라의 군사 10만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케 하였으나, 아무런 공이 없었다. 대무예가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자객을 보내 문예를 찌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공격하였다. 오승체(烏承玼)가 요충로를 막고 큰 돌로 400리에 걸쳐 메우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에 흩어진 유민들이 돌아올 수 있었고, 병사들이 조금 쉬면서 갑옷을 벗고 농사를 지었다. 이 해에 세금을 감면하였다.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