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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37

삼국지三國志 읍루전挹婁傳 전문 번역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붉은 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가 그것이다.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에 신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黃初) 연간(A.D. 220~226; 고구려 山上王 24~30)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차례 정발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하므로 이웃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동이(東夷)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대부분 그릇(俎豆)를 사용했으나,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 2009. 11. 17.
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 번역 석계룡이 사신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나 소와 말이 항상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간 보고서, 대국(大國)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떄문에 왔습니다.”하였다 한다.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지금의 백두산을 지칭함)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60일 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 지금의 송화강을 지칭함)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리에 뻗쳐 있다. 사람들은 깊은 산과 골짜기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 여름철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철에는 땅굴에서 산다. 북쪽은 약수(弱水, 지금의 송화강을 지칭함)에.. 2009. 11. 17.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 전문번역 본래 가지고 온 배를 타고 그 나라에 이르렀다. 9년(A.D.485 ; 고구려 장수왕 73)에 다시 사신 사니지(俟尼支)를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그 다음해에 다시 입공(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능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노루국(魯婁國), 우진사국(羽眞俟國)이 있는데, 잇달아 각기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태화(太和) 12년(A.D. 488 ; 고구려 장수왕 76)에 물길에서 다시 사신을 경사에 파견하여 활(楛矢)와 방물을 바쳤다. 17년(A.D. 493 ; 고구려 문자왕 2)에 또 사신 파비(婆非) .. 2009. 11. 17.
수서隋書 말갈전靺鞨傳 전문번역 그러나 그 나라는 수(隋)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고, 속말부와 백산부만이 가까웠다. 수 양제 초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자주 그들을 물리치니, 그의 우두머리인 도지계(度地稽)가 그 부락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양제는 그에게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제수하고, 유성(柳城, 지금의 요령성 조양일대를 지칭함)에 거주시켜 변방 사람과 내왕을 하게 하였다. 중국의 풍속을 좋아하여 관대(冠帶)를 청하니, 양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비단(錦綺)를 내려주고 총애하였다. 요동정벌(遼東征伐)때에도 도지계가 그 무리들을 이끌고 종군하였는데, 전공을 세울 때마다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대업(大業)13년(A.D. 617 ; 고구려 영양왕28)에 양제를 따라 강도(江都)에 갔다. 얼마후 유성으로 돌아갔는데, 중도에서 이밀..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