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37

흉노 간략사 - 중국사서 사기에는 흉노가 堯와 관계있음으로 인식하고 흉노가 중국왕조에서 분리된 민족의 인식이 있으나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의 일족으로 흉노가 분리된것으로 기록됨. - 동호가 흉노의 수장 묵특의 上國이었다고 기술됨으로 고조선의 일파로 보아야 함. - 호한야선우의 入朝 이후 漢에게 약점을 잡히기 시작하여 한의 분열전략에 의해 흉노의 분열이 시작됩니다. - 서흉노 이후의 기록은 한나라의 기록에 없으나 독일학자에 의해 서흉노의 후신이 훈으로(유사발음과는 상관없음) 아틸라와 관계가 있음을 밝혀냄. 심제 정리. 2009. 11. 17.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나타난 우리나라 역사 발췌 번역 1. 史記, 卷三, 殷本紀, 第三 箕子懼, 乃詳狂為奴, 紂又囚之. ……周武王遂斬紂頭, ……釋箕子之囚. 箕子(기자)는 두려워하여 이에 거짓으로 미친척하여 노비가 되니 紂王(주왕)은 또한 그를 가두었다. …… 周(주) 武王(무왕)은 드디어 紂(주)의 머리를 베고, …… 箕子(기자)를 가둔 것으로부터 풀어주었다. 2. 史記, 卷四, 周本紀, 第四 武王已克殷, 後二年, 問箕子殷所以亡. 箕子不忍言殷惡, 以存亡國宜告. 武王亦醜, 故問以天道. 武王(무왕)이 이미 殷(은)을 이기고 난 뒤 2년에 箕子(기자)에게 殷이 망한 바에 대하여 물으니 箕子는 참지 못하고 殷이 악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武王은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였고, 그래서 天道(천도)에 대하여 물었다. 3.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第.. 2009. 11. 17.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전문 번역 【集解: 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為洌水. 疑樂浪, 朝鮮取名於此也. 索隱: 案,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집해에서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와 열수와 산수가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하여져서 열수가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낙랑이이 조선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여기에서인 것 같다. 색은에서 안을 내었는데 朝의 음은 조(潮)인데 죠[直驕反]로 발음된다고 하였고, 鮮의 음은 선(仙)이다.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汕의 음은 산(訕)이다. 朝鮮[一]王滿者, 故燕人也[二].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三]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爲其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四],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五], 聚黨千餘人, 魋..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渤海靺鞨 전문번역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족과 무리를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696)에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좌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참하고, 다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 군대를 압박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규합하여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이해고만 몸을 빼..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