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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신당서 북적 해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1

◉< 奚>亦<東胡>種, 爲<匈奴>所破, 保<烏丸山>. <漢><曹操>斬其帥<蹋頓>, 蓋其後也. <元魏>時自號<庫眞奚>/$「眞」,《魏書》卷一⃝⃝及《周書》卷四九《庫莫奚傳》․《隋書》卷八四《奚傳》․《通典》卷二 ⃝⃝均作「莫」.$/, 居<鮮卑>故地, 直京師東北四千里. 其地東北接<契丹>, 西<突厥>, 南<白狼河>, 北<霫>. 與<突厥>同俗, 逐水草畜牧, 居 廬, 環車爲營. 其君長常以五百人持兵衛牙中, 餘部散山谷間, 無賦入, 以射獵爲貲, 稼多穄, 已穫, 窖山下. 斷木爲臼, 瓦鼎爲飦, 雜寒水而食. 喜戰鬪, 兵有五部, 部一俟斤主之. 其國西抵<大洛泊>, 距<回紇>牙三千里, 多依<土護眞水>. 其馬善登, 其羊黑. 盛夏必徙保<冷陘山>, 山直<嬀州>西北. 至<隋>始去「庫眞」, 但曰<奚>


해 역시 동호(東胡)종족으로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오환산에 의지하여 머물렀다. 하의 조조가 그의 장수 답돈을 참수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후손일 것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고 부르며 선비의 옛 땅에 머무르니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4천 리이다. 그 땅은 동북쪽에 거란과 접해있고 서쪽은 돌궐이며, 남쪽은 백랑하(白狼河)이고, 북쪽은 습( )이다.


돌 궐과 더불어 같은 풍속이니, 물과 풀을 쫓아 목축하고 모전으로 지은 오두막에 기거하며 수레를 둥글게 둘러 놓고 진영으로 삼는다. 그 군장은 항상 5백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지니고 본영(牙中)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부락은 산과 계곡에 흩어져 있으며, 조세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활로 수렵하여 재물을 장만하며, 검은 기장을 많이 심고 수확해서는 산 아래에 땅을 파서 만든 광에 저장한다. 나무를 잘라 절구를 만들며 질그릇 솥에 죽을 끓이고 찬물을 섞어 먹는다. 전투를 좋아하며 군사로는 다섯 부가 있는데 부마다 한 명의 사근이 다스린다.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맞닿아있으며 회흘(回紇)의 본영과는 3천 리의 거리에 있고 토호진수(土護眞水)에 많이 의존하여 있다. 그곳의 말은 산을 잘 오르며 양은 검다. 한 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 山) 으로 옮겨 의지하여 머무르는데 그 산은 규주에서 곧장 서북쪽에 잇다. 수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고진을 떼어버리고 단지 해라고 일컬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2

◉< 武德>中, <高開道>借其兵再寇<幽州>, 長史<王詵>擊破之. <太宗><貞觀>三年始來朝, 閱十七歲, 凡四朝貢. 帝伐<高麗>, 大酋<蘇支>從戰有功. 不數年, 其長<可度者>內附, 帝爲置<饒樂都督府>, 拜<可度者>使持節六州諸軍事․<饒樂>都督, 封<樓煩縣公>, 賜<李氏>. 以<阿會>部爲<弱水州>, <處和>部爲<祁黎州>, <奧失>部爲<洛瓌州>, <度稽>部爲<太魯州>, <元俟折>部爲<渴野州>, 各以酋領辱紇主爲刺史, 隸<饒樂府>. 復置<東夷都護府>於<營州>, 兼統<松漠>․<饒樂>地, 置東夷校尉.


무 덕(618~626) 연간에 고개도가 그들의 군사를 빌려 다시 유주(幽州)를 노략질하자 장사 왕선이 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태종 정관(627~649) 3년에 비로소 와서 예방하였으며 17년동안 무릇 네 차례 조공했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하자 그들의 큰 추장인 소지가 전장을 좇으며 공로가 있었다. 몇 년 되지 않아 그들의 우두머리 가도자가 내지로 붙좇으니 제께서는 요락도독부를 설치하고 가도자를 임명하여 사지절 6주제군사·요락도독으로 삼아 누번현공에 봉하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아 회부를 약수주로 삼고, 처화부를 기려주로 삼고, 오실부를 낙괴주로 삼고, 도계부를 태로주로 삼고, 원사절부를 갈야주로 삼고는 각각의 추장인 욕흘주를 자사로 삼아 요락부에 예속시켰다. 다시 동이도호부를 영주(營州)에 설치하고 송막과 요락의 땅을 겸하여 통솔하게 하고 동이교위를 두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3

◉< 顯慶>間<可度者>死, <奚>遂叛. 五年, 以<定襄>都督<阿史德樞賓>․左武候將軍<延陀梯眞>․<居延州>都督<李含珠> 爲<冷陘道>行軍總管. 明年, 詔尙書右丞<崔餘慶>持節總護<定襄>等三都督討之, <奚>懼乞降, 斬其王<匹帝>. <萬歲通天>中, <契丹>反, <奚>亦叛, 與<突厥>相表裏, 號「兩蕃」. <延和>元年, 以左羽林衛大將軍<幽州>都督<孫佺>․左驍衛將軍<李楷洛>․左威衛將軍<周以悌>帥兵十二萬, 爲三軍, 襲擊其部; 次<冷陘>, 前軍<楷洛>與<奚>酋<李大酺>戰不利. <佺>懼, 斂軍, 詐<大酺>曰: 「我奉詔來慰撫若等, 而<楷洛>違節度輒戰, 非天子意, 方戮以徇.」 <大酺>曰: 「誠慰撫我, 有所賜乎?」 <佺>出軍中繒帛․袍帶與之, <大酺>謝, 請<佺>還師, 擧軍得脫, 爭先無部伍, <大酺>兵躡之, 遂大敗, 殺傷數萬, <佺>․<以悌>皆爲虜禽, 送<黙啜>害之. 朝廷方多故, 不睱討.


현 경(656~661) 연간에 가도자가 죽자 해가 마침내 반란하였다. 5년(660)에 정양도독 아사덕추빈과 좌무위장군 연타제진 및 거연주도독 이함주  냉형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다음해에 조서를 내려 상서우승 최여경에게 부절을 지니고 정양 등의 세 도독을 통솔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니, 해가 두려워 항복을 구걸하기에 그 왕 필제의 머리를 베었다.


만 세통천(696~697) 중에 거란이 배반하자 해 역시 반란을 일으키고 돌궐과 더불어 서로간에 안팎이 되었기에 양번(兩蕃)이라 불렀다. 연화(712) 원년에 좌우림위대장군 유주도독 손전과 좌효위 장군 이해락 및 좌무위장군 주이제로 군사 12만을 거느리고 삼군으로 나뉘어 그들의 부락을 습격하였는데 냉형에 진영을 설치하였던 전위군 이해락이 해의 추장 이대포와 싸워 불리하였다. 손전이 두려워 군대를 거두고 이대포에게 거짓으로 이르기를 [나는 조칙을 받들과 와서 너희를 위무하려 하였는데 해락이 통제를 위반하여 번번히 싸움하니, 이것은 천자의 뜻이 아니기에 이제 그를 참수하여 두루 돌릴 것이다.] 하니 이대포가 이르기를 [진실로 우리를 위무하려 하였다면 하사한 물품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손전이 군중의 비단 및 도포와 띠 등을 내어 그에게 주자 이대포가 사례하고 손전에게 청하여 군사를 돌리게 하엿더니 군대가 일제히 벗어나며 앞을 다투어 대오가 없으므로 이대포의 군사가 이를 뒤쫓다가 마침내 크게 패퇴시키니 수만 명이 죽고 다쳤으며, 손전과 주이제는 포로로 사로잡혀 묵철에게 송치되어 그곳에서 해를 입었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변고가 많았기에 그를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4

◉< 玄宗><開元>二年, 使<奧蘇悔落>丐降, 封<饒樂郡王>, 左金吾衛大將軍․<饒樂>都督. 詔宗室出女<辛>爲<固安公主>, 妻<大酺>. 明年, 身入朝成昏. 始復<營州都督府>, 遣右領將軍<李濟>持節護送. <大酺>後與<契丹><可突于>鬪, 死. 弟<魯蘇>領其部, 襲王. 詔兼<保塞軍>經略大使. 牙官<塞黙羯>謀叛, 公主置酒誘殺之, 帝嘉其功, 賜主累萬. 會與其母相告訐得罪, 更以<盛安公主>女<韋>爲<東光公主>妻之/$「<盛安公主>女<韋>」,《舊書》卷一九九下《奚傳》及《冊府》卷九七九作「<成安公主>之女<韋氏>」. 按<成安公主>爲<中宗>女, 嫁<韋捷>, 見本書卷八三《諸公主傳》及《唐會要》卷六. 此當從《舊書》.$/. 後三年, 封<魯蘇><奉誠郡王>, 右羽林衛將軍, 擢其首領無慮二百人, 皆位郞將.


현 종 개원(713~741) 2년에 오소회락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비니, 요락군왕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요락도독의 관작을 수여하였다. 조서를 내려 종실 출신의 여인 신을 고안공주로 삼아 이대포에게 시집보냈다. 다음 해(715)에 직접 조정에 들어와 결혼하였다. 비로소 영주(營州)도독부를 부활시키고 우령장군 이제를 파견하여 부절을 지니고 호송하게 하였다. 이대포는 후에 거란의 가돌우와 싸우다 죽었다. 아우 노소가 그 부락을 이끌며 왕의 자리를 답습하였다. 조서를 내려 보색군경략대사를 겸하게 하였다.


아 관 색묵갈이 반란을 꾀하자 공주가 술자리를 베풀고 그를 유인하여 살해하니 제께서 그 고을 어여삐 여겨 공주에게 물품 수만을 하사하였다. 마침 그의 어미와 더불어 서로 간에 고자질 하는 등 허물이 있자 성안공주의 여식 위를 동광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3년 후(718)에 노소를 봉성군왕에 봉하고 우우림위장군의 관작을 수여하였으며, 그들의 수령을 무려 2백 명 발탁하여 모두에게 낭장의 직위를 주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5

◉ 久之, <契丹><可突于>反, 脅<奚>衆幷附<突厥>, <魯蘇>不能制, 奔<楡關>, 公主奔<平盧>. <幽州>長史<趙含章>發<淸夷軍>討破之, 衆稍自歸. 明年, <信安王><禕>降其酋<李詩鎖高>等部落五千帳, 以其地爲<歸義州>, 因以王<詩>, 拜左羽林軍大將軍․本州都督, 賜帛十萬, 置其部<幽州>之偏.


얼 마 있다 거란의 가돌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해의 무리를 위협하여 함께 돌궐을 붙좇자 노소가 능히 제아하지 못하고 유관(楡關)으로 달아나니 공주는 평로(平盧)로 달아나왔다. 유주장사 조함장이 청이군을 일으켜 그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그 무리들이 점차 스스로 귀순하여 왔다. 다음해 신안왕 의가 그들의 추장 이시쇄고 등 부락의 유목민 5천 가구를 항복시키니, 그 땅읠 귀의주로 삼고 그대로 이시쇄고를 왕으로 다스리게 하여 우우림군대장군·본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비단 10만을 하사하고 그의 부락을 유주의 곁에 두도록 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6

◉< 李詩>死, 子<延寵>嗣, 與<契丹>又叛, 爲<幽州><張守珪>所困. <延寵>降, 復拜<饒樂>都督․<懷信王>, 以宗室出女<楊>爲<宜芳公主>妻之. <延寵>殺公主復叛, 詔立它酋<婆固>爲<昭信王>․<饒樂>都督, 以定其部. <安祿山>節度<范陽>, 詭邊功, 數與鏖鬪, 盛飾俘以獻, 誅其君<李日越>, 料所俘驍壯戍<雲南>. 終帝世, 凡八朝獻, <至德>․<大曆>間十二.


이 시쇄고가 죽자 아들 연총이 자리를 잇고는 거란과 더불어 또 반란을 하였으나 유주의 장수규에 의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연총이 항복하자 다시 요락도독·회신왕에 임명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양으로 의방공주를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연총이 공주를 살해하고 다시 반란하자 조서를 내려 다른 추장인 파고를 세워 소신왕·요락도독으로 삼아 그 부락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안 록산이 범양에 절도사로 있으면서 변방의 공로를 속여 수 차례 적과 더불어 전멸할 때까지 싸움을 벌였다 하고 포로를 한껏 구밈질 하여 바쳤다. 그들의 군주인 이일월을 주살하고 포로한 자 가운데 날래고 건장한 자를 끌어들여 운남에서 수자리를 서게 하였다. 제의 시대가 다할 때까지 무릇 여덟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지덕(756~758)과 대력(766~779) 사이에는 열 두차례 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7

◉< 貞元>四年, 與<室韋>攻<振武>. 後七年, <幽州>殘其衆六萬. <德宗>時, 兩朝獻. <元和>元年, 君<梅落>身入朝, 拜檢校司空․<歸誠郡王>. 以部酋<索氐>爲左威衛將軍․<檀><薊州>游弈兵馬使, <沒辱孤><平州>流弈兵馬使, 皆賜<李氏>. 然陰結<回鶻>․<室韋>兵犯<西城>․<振武>. 大抵<憲宗>世四朝獻.


정 원(785~805) 4년에 실위와 더불어 진무를 공격했다. 7년 후에 유주(幽州)에서 그들의 무리 6만을 살해하였다. 덕종 때 두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다. 원화(806~820) 원년에 군주 매락이 직접 들어와 예방하니 검교사공·귀성군왕에 임명하였다. 부락의 추장 색저를 좌위위장군·단계주유변병마사로 삼고 몰욕고를 평주유변병마사로 삼으며 모두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은밀히 회골 및 실위의 군사와 결탁하여 서성과 진무를 침범했다. 대략 헌종 시기에 네 차례 예방하고 조공을 바쳤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8

◉< 大和>四年, 復盜邊, <盧龍><李載義>破之, 執大將二百餘人, 縛其帥<茹羯>來獻, <文宗>賜冠帶, 授右驍衛將軍. 後五年, 大首領<匿舍郞>來朝. <大中>元年, 北部諸山<奚>悉叛, <盧龍><張仲武>禽酋渠, 燒帳落二十萬, 取其刺史以下面耳三百, 羊牛七萬, 輜貯五百乘, 獻京師. <咸通>九年, 其王<突董蘇>使大都督<薩葛>入朝.


대 화(827~835) 4년에 다시 변방을 도적질하자 노룡 이재의가 그를 격파하여 대장 2백여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장수 여갈을 포박하여 와서 바치니, 문조이 관과 때를 하사하고 우효위장군에 제수하였다. 5년 뒤에 대수령 익사랑이 와서 에방하였다. 대중(847~860) 원년에 북부의 여러 산에 있던 해들이 모두 반란하자 노룡 장중무가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고 유목민의 부락 20만여 호를 불살랐으며, 그들의 자사 이하 면이 3백 명 및 양과 소 7만 두를 포획하고 수레 5백 승을 끌고 와서 경사에 바쳤다. 함통(860~874) 9년에 그들의 왕 돌동소가 대도독 살갈을 사신으로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奚-09/09

◉是後<契丹>方彊, <奚>不敢亢, 而擧部役屬. 虜政苛, <奚>怨之, 其酋<去諸>引別部內附, 保<嬀州>北山, 遂爲<東>․<西奚>.


그 후로 거란이 바야흐로 강성해지니 해가 감히 필적하지 못하고 모든 무락을 데리고 복속하였다. 오랑캐의 정치가 가혹하여 해가 이를 원망하더니 그들의 추장 거제가 별도의 부락을 이끌고 내지로 붙좇으며 규주( 州)의 북쪽 산에 의지하여 거처 , 마침내 동쪽의 해와 서쪽의 해로 나뉘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