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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신당서 북적 실위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新唐書卷219-列傳第144-室韋-03/01

◉< 室韋>, <契丹>別種, <東胡>之北邊, 蓋<丁零>苗裔也. 地據<黃龍>北, 傍<峱越河>, 直京師東北七千里, 東<黑水靺鞨>, 西<突厥>, 南<契丹>, 北瀕海. 其國無君長, 惟大酋, 皆號「莫賀咄」, 攝筦其部而附于<突厥>. 小或千戶, 大數千戶, 濱散川谷, 逐水草而處, 不稅斂. 每弋獵卽相嘯聚, 事畢去, 不相臣制, 故雖猛悍喜戰, 而卒不能爲彊國. 剡木爲 , 人挽以耕, 田穫甚褊. 其氣候多寒, 夏霧雨, 冬霜霰. 其俗, 富人以五色珠垂領, 婚嫁則男先傭女家三歲, 而後分以産, 與婦共載, 鼓舞而還. 夫死, 不再嫁. 每部共構大棚, 死者置尸其上, 喪期三年. 土少金鐵, 率資於<高麗>. 器有角弓․楛矢, 人尤善射. 每溽夏, 西保<貣勃>․<次對>二山. 山多草木鳥獸, 然苦飛蚊, 則巢居以避. 酋帥死, 以子弟繼, 無則推豪桀立之. 率乘牛車, 蘧蒢爲室, 度水則束薪爲桴, 或以皮爲舟. 馬皆草繩羈靮. 所居或皮蒙室, 或屈木以蘧蒢覆, 徙則載而行. 其畜無羊少馬, 有牛不用, 有巨豕食之, 韋其皮爲服若席. 其語言, <靺鞨>也.


실 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동호의 북쪽 변방에 있으니 아마도 정령의 후예일 것이다. 땅은 황룡의 북쪽에 자리하고 노월하의 곁에 있으니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7천 리이며, 동쪽은 흑수말갈이고 서쪽은 돌궐이며, 남쪽은 거란이고 북쪽은 바다에 접해있다.


그 나라는 군자잉 없이 단지 큰 추장이 있어 모두 막하돌이라 부르는데 그 부락을 관할하여 돌궐에 붙좇는다. 작은 곳은 1천 호이고 큰 곳은 수천 호이며, 하천과 게곡에 연하여 흩어져 물과 풀을 좇아 거처하며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매번 수렵하게 되면 곧 서로 불러 모이게 하고 일을 마치면 돌아가는데 서로 복속이나 제재하지 않는 까닭에 비록 용맹하여 굳세어 전투를 즐긴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능히 강국이 되지 못하였다.


나 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어 사람이 끌어 경작을 하니 밭의 수확이 매우 적다. 그곳의 기후는 추운 날이 많으며 여름이면 안개와 비가 많고 겨울에는 서리와 싸라기눈이 많다. 그들의 풍속에 부유한 사람은 오색 구슬을 목에 늘어뜨리며, 시집가고 장가들게 되면 곧 남자가 먼저 여자의 집에서 3년 동안 고용을 산 뒤에 재산을 나누어 부인과 함께 싣고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돌아온다.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지 않는다.


매 부락 공동으로 큰 시렁을 얽어서 만들어 놓고 사람이 죽으면 주검을 그위에 놓아두는데 상복의 기간은 3년이다. 그 땅에는 금과 쇠가 적어 고려에서 가져다 쓴다. 병기로 뿔활과 호시가 있으며 사 람들은 활쏘기에 매우 뛰어나다.


매 번 무더운 여름이면 서쪽으로 특발과 차대 등 두 산에 의지하여 거처한다. 산에는 초목과 조수가 많고 날아다니는 모기에 괴롭힘을 당하기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거처하여 그 해를 피한다. 우두머리가 죽으면 자제가 대를 이으며 자제가 없으면 뛰어난 인물을 추대하여 자리를 잇게 한다. 소수레를 끌며 타고다니고 거친 대자리로 집을 만들며, 물을 건너고자 하면 땔나무를 묶어 뗏목을 만들거나 혹은 가죽으로 배를 만든다. 말은 모두 풀로 된 언치를 얹고 밧줄로 굴레와 고삐를 한다. 거처하는 곳으로는 혹은 가죽으로 집을 덮어 가린 것이거나 혹은 굽은 나무에 거친 대자리를 덧씌운 것이며, 옮길 때는 수레에 실어서 이동한다. 그곳의 가축은 양은 없고 말은 적으며 소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며, 큰 돼지가 있어 그것을 먹고 그 가죽을 무두질하여 옷을 만드는데 마치 깔개와 같다. 그들의 언어는 말갈의 언어이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室韋-03/02

◉ 分部凡二十餘. 曰<嶺西>部․<山北>部․<黃頭>部, 彊部也; <大如者>部․<小如者>部․<婆萵>部․<訥北>部․<駱丹>部: 悉處<柳城>東北, 近者三千, 遠六千里而贏. 最西有<烏素固>部, 與<回紇>接, 當<俱倫泊>之西南. 自泊而東有<移塞沒>部; 稍東有<塞曷支>部, 最彊部也, 居<啜河>之陰, 亦曰<燕支河>; 益東有<和解>部․<烏羅護>部․<那禮>部․<嶺西>部, 直北曰<訥比支>部. 北有大山, 山外曰<大室韋>, 瀕於<室建河>/$「室」,《舊書》卷一九九下《室韋傳》作「望」,《唐會要》卷九六「室」「望」並見.$/. 河出<俱倫>, 迆而東, 河南有<蒙瓦>部, 其北<落坦>部; 水東合<那河>․<忽汗河>, 又東貫<黑水靺鞨>, 故<靺鞨>跨水有南北部, 而東注於海. <峱越河>東南亦與<那河>合, 其北有<東室韋>, 蓋<烏丸>東南鄙餘人也.


부락은 무릇 20개 남짓으로 나뉘어져 있다. 영서부·산북부·황두부 등이 강한 부락이며, 대여자부·소여자부·파와부·눌북부·낙단부 등은 모두 유성의 동북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까운 것은 3천 리이고 먼 것은 6천 리 남짓이다.


가 장 서쪽에는 오소고부가 있는데 회흘과 접하며 구륜박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구륜박에서 동쪽으로 이색몰부가 잇으며 조금 동족으로는 색갈지부가 있으니 가장 강한 부락으로서 연지하(燕支河)라고도 불리는 철하( 河)의 남쪽에 거처하고 있으며, 더욱 동쪽에는 화해부와 오라호부 그리고 나례부와 영서부 등이 있고 곧장 북쪽은 눌비지부라고 한다. 북쪽에는 큰 산이 있으며 산의 바깥을 대실위라 일컫는데 실건하(室建河)에 연해있다. 하천은 구륜박으로부터 나와서 비스듬히 동쪽으로 흐르는데 하천의 남쪽에느 몽와부가 있고 그 북쪽은 낙탄부이며, 물줄기는 동쪽의 나하(那河)와 합쳐지고 그 북쪽에는 동실위가 있으니 아마도 오환 가운데 동남쪽으로 처져 있다가 낙후된 나머지 무리일 것이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室韋-03/03

◉< 貞觀>五年, 始來貢豐貂, 後再入朝. <長壽>二年叛, 將軍<李多祚>擊定之. <景龍>初, 復朝獻, 請助討<突厥>. <開元>․<天寶>間, 凡十朝獻, <大曆>中十一. <貞元>四年, 與<奚>共寇<振武>, 節度使<唐朝臣>方郊勞天子使者, 驚而走軍, <室韋>執詔使, 大殺掠而去. 明年, 使者來謝. <大和>中三朝獻, <大中>中一來, <咸通>時, 大酋<怛烈>與<奚>皆遣使至京師, 然非顯夷後, 史官失傳.


정 관(627~649) 5년에 처음으로 들어와 많은 담비를 바치고 후에 다시 들어와 예방하였다. 장수(692~694) 2년에 반란하자 장군 이다조가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경룡(707~710) 초에 다시 예방하여 공무을 바치며 청하여 돌궐을 토벌하는데 돕고자 하였다. 개원(713~741)과 천보(742~756) 사이에 무릇 열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력(766~779) 연간에는 열한 차례였다.


정 원(785~805) 4년에 해와 더불어 함께 진무를 노략질하였는데, 절도사 당조신이 막 교외에서 천자의 사자를 마중하다가 놀라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자. 실위가 조서를 지닌 사자를 사로잡고는 크게 살육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다음 해(789)에 사자가 와서 사죄하였다. 대화(827~835) 연간에 세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중 (847~860) 연간에 한 차례 오고, 함통(860~874) 연간에는 큰 추장 달열이 해와 더불어 모두 사신을 보내 겨앗에 이르렀으나 뒷일들은 명백한 것이 아니고 없어지기도 하여 역사를 적는 관리가 전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