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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통전 백제전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通典 卷第一百八十五 邊防一 東夷上 百濟

百濟,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高麗先出夫餘。」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檟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自晉代受蕃爵,自置百濟郡。義熙中,以百濟王夫餘腆佗典反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宋、齊並遣使朝貢,授官,封其人。

백제는 후한국後漢 말기에 부여왕인 위구태의 후손이다. 후위後魏 때에는 백제의 왕이 표를 올려서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와 함께 일찍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초기에 100여 가구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 진국晉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였으므로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하였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의 사이다. 진나라때 이후로 여러 제국들을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남쪽에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에는 고구려 천리와 대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경계지어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나라의 서남 바다에는 3개의 섬이 있어서 황칠수가 나오는 흡사 작은 개오동나무와 같으나 크기가 크다. 유월에 그 즙을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는데, 마치 황금을 칠한 것과 같이 그 빛이 사람의 눈을 빼앗는다. 진대이후로 번작을 받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의희(405-418)년중에 백제왕 부여(전타전반-전지왕?)을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로 삼았다. 송,제 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직을 받았으며, 그 사람을 봉했다.


土著地多下濕,率皆山居。其都理建居拔城。王號「於羅瑕」,百姓呼爲「■■吉支」,■■音乾。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官有十六品:左平一品,達率二品,恩率三品,德率四品,扞率五品,柰率六品,以上冠飾銀花;將德七品,紫帶;施德八品,皁帶;固德九品,赤帶;季德十品,靑帶;對德十一品,文督十二品,皆黃帶;武督十三品,佐軍十四品,振武十五品,克虞十六品,皆白帶。統兵以達率、德率、扞率爲之,人庶及餘小城咸分隷焉。其衣服,男子略同於高麗,拜謁之禮以兩手據地爲敬。婦人衣似袍而袖微大,在室者編髮盤於首,後垂一道爲飾,出嫁者乃分爲兩道焉。兵有弓、箭、刀、槊。俗重騎射,兼愛墳史。其秀異者頗解屬文,又解陰陽五行。用宋元嘉曆,以建寅月爲歲首。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有投壺、樗蒲等雜戱,然尤尙弈碁。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賦稅以布、絹、麻、米等。婚娶之禮略同華俗。父母及夫死者三年持服,餘親則葬訖除之。氣候溫暖,五穀、雜果、菜蔬及酒醴、餚饌、樂器之屬多同於內地,唯無駝、騾、驢、羊、鵝、鴨等云。其王以四仲之月祭天,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大姓有八族:沙氏、燕氏、劦氏、劦音俠。解氏、眞氏、國氏、木氏、■■音白氏。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사 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는데, 땅이 낮고 습하여, 모두들 산에서 산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하며, 왕은 어하라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건질지라고 부른다.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이라 하는데, 중국 말로 왕비라 말이다. 벼슬은 16품게가 있다. 좌평은 1품, 달솔 2품, 은솔 3품, 덕솔 4품, 한솔 5품, 내솔 6품인데, 이상은 관에 은화로 장식한다. 장덕은 7품인데 자색 허리띠를, 시덕은 8품은 검은 허리띠를 한다. 고덕은 9품으로 적색 허리띠를 계덕은 10품으로 청색 허리때를 하며, 대덕 11품과 문독 12품은 모두 황색 허리띠를 무덕 13품과 좌군 14품, 진무 15품과 극려 16품은 모두 백색 허리띠를 한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달솔, 덕솔, 한솔 들이 하며, 도성 내에 사람들과 여러 작은 성이 함께 모두 여기에 예속되었다.

그 들의 의복은 남자는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며, 높은 분을 뵙는 의례에서는 양손을 땅을 집어서 공경을 나타냈다. 부인의 의복은 도포와 흡사하지만, 소매가 약간 크다. 시집가자 않은 여자는 편발로 머리ㅟ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드려 꾸미기도 한다. 출가한 여자는 두 갈래로 늘어뜨렸다.

무 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고, 그들의 습속은 말타고 활 쏘는 것을 중하게 여겼고, 아울러 경전과 사서릉 래옥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이해하기도 했다. 또 음양, 오행도 이해했다. 송나라 원가력을 사용하여 인월(3월)로 한 해의 머리를 삼았다. 또한 의약, 점치기, 관상학 등도 알고 있었다. 투호와 저포 등의 여러 놀이들이 있으나, 특히 바둑, 장기를 좋아한다. 중과 승려 탑은 심히 많지만, 도사는 없다.

세 금은 베, 비단, 삼베, 살 등으로 하며, 혼인의 예는 중화의 풍속과 대개 같다.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고, 그 나머지 친족은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벋는다. 기후는 온화하고 따스하며, 오곡과 여러 과일과 채소 및 술, 음식, 악기 등의 풍속은 거의 내지(중화)와 같다. 오직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이 없다. 기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중월(2,5, 8,11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 매년 4번 그의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서 제사드린다. 나라에는 8 씨족의 대성이 있는데, 사씨, 연시, 협시, 해씨, 진시, 국시, 목씨, 백(묘)씨가 있다. 나라의 서남쪽에는 사람이 거처하는 15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後魏孝文遣衆征破之。後其王牟大爲高句麗所破,衰弱累年,遷居南韓地。隋文開皇初,其王夫餘昌遣使貢方物,拜爲帶方郡公、百濟王。大唐武德、貞觀中,頻遣使朝貢。顯慶五年,遣蘇定方討平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至是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仍以其酋渠爲都督府刺史。其舊地沒於新羅,城傍餘衆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土地盡沒於新羅、靺鞨,夫餘氏君長遂絶。

후 위 효문제(471-499)가 무리를 보내 정복하여 깨뜨렸다. 후에 그 왕 모대가 고구려에게 여러번 패한 바가 되어 차차 쇠약한지 오래되어 남한의 땅으로 옮겨갔다. 수문제 개황(581-600)초에 그 왕 부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기에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대당 무덕(618-6260, 정관(626-649) 시기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해왔다. 현경 5년(660)에 소정방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예전에는 5부와 37개군, 200성을 나누어 76만호로 통치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땅에 웅진, 마한, 동명 등 5도독부를 나누어 두게 된 것이다. 이에 그 추장 거수를 도독부자사로 삼았다. 그 옛 땅은 신라에게 편입되었으며, 성과 주변의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적어지고 약해졌으며, 흩어져서 돌궐 및 말갈에 투항을 했다. 백제의 주인인 부여숭은 마침내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토지는 신라, 말갈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으므로, 부여씨 왕가는 마침내 끝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