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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신당서 거란전 전문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거란은 본래 동호 종족으로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선비산에 의지하여 자리잡았었다. 위나라 청룡(233~237) 연간에 부락의 추장 가비능이 점차 사납고 교만해지더니 유주자사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그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달아났다. 원위(元魏-북위) 때 이르러 스스로 거란이라 불렀다.
그 땅은 경사에서 곧장 동북방 5천 리 남짓에 있으며, 동쪽은 고려에 이르고 서쪽은 해(奚)이며 남쪽은 영주(營州)이고 북쪽은 말갈 및 실위로서, 냉형산(冷 山)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스스로 견고하게 여긴다. 활로서 수렵하며 거처는 고정된 곳이 없다. 그들의 군장은 대하(大賀)씨이며 날랜 군사가 4만 명이 있고 여덟 부락로 나뉘어져 돌궐에 신하로 복속되어 사근(俟斤)이 되어 있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치를 때는 곧 모든 부락이 빠짐 없이 모이고, 수렵을 할 때는 부락마다 스스로 행한다. 해와 더불어 평화롭지 않으며 싸움에서 불리하면 번번히 선비산에 숨어들어 수비한다. 풍속은 돌궐과 대략 같다.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 수레에 주검을 실어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의 꼭대기에 놓아둔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지만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며, 또한 상복의 기간이 없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1
< 契丹>, 本<東胡>種, 其先爲<匈奴>所破, 保<鮮卑山>. <魏><靑龍>中, 部酋<比能>稍桀驁, 爲<幽州>刺史<王雄>所殺, 衆遂微, 逃<潢水>之南, <黃龍>之北. 至<元魏>, 自號曰<契丹>. 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 東距<高麗>, 西<奚>, 南<營州>, 北<靺鞨>․<室韋>, 阻<冷陘山>以自固. 射獵居處無常. 其君<大賀氏>, 有勝兵四萬, 析八部, 臣于<突厥>, 以爲俟斤. 凡調發攻戰, 則諸部畢會; 獵則部得自行. 與<奚>不平, 每鬪不利, 輒遁保<鮮卑山>. 風俗與<突厥>大抵略侔. 死不墓, 以馬車載尸入山, 置於樹顚. 子孫死, 父母旦夕哭; 父母死則否, 亦無喪期.


무덕(618~626) 연간에 그들의 큰 추장인 손오조가 말갈의 우두머리 돌지계와 더불어 함께 사람을 보내와서 예방하였으며, 간혹 군장으로서 작은 자들은 들어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2년 뒤에 군장이 사자를 보내어 이름 있는 말과 많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627~649) 2년에 마회가 와서 항복하였다.
돌 궐의 힐리가한은 바깥 오랑캐들이 당나라와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고자 양사도를 거란과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거란은 돌궐과 같은 무리가 아니며 지금 나에게 항복하였는데 어찌된 연고로 그들을 찾는가? 양사도는 당의 호적에 편성되어 있다가 우리의 주와 부락을 도적질함에 돌궐이 번번이 도움이 되어주었으니 우리의 장수가 그를 사로잡을 것이지 항복한 자와 바꿀 수는 없다.] 하였다.
다 음해에 마회가 다시 들어와 예방하니 북과 깃발을 하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항상 조공하였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할 때 추장들을 모두 징발하여 해의 수령과 함께 군대를 따르게 하였다. 제께서 돌아오는 길에 영주를 지나며 그들의 우두머리 굴가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차등 있게 화려한 비단을 하사하고 굴가로 좌무위장군을 삼았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2
< 武德>中, 其大酋<孫敖曹>與<靺鞨>長<突地稽>俱遣人來朝, 而君長或小入寇邊. 後二年, 君長乃遣使者上名馬․豐貂. <貞觀>二年, <摩會>來降. <突厥><頡利可汗>不欲外夷與<唐>合, 乃請以<梁師都>易<契丹>. <太宗>曰: 「<契丹>․<突厥>不同類, 今已降我, 尙可索邪? <師都>, <唐>編戶, 盜我州部, <突厥>輒爲助, 我將禽之, 誼不可易降者.」 明年, <摩會>復入朝, 賜鼓纛, 由是有常貢. 帝伐<高麗>, 悉發酋長與<奚>首領從軍. 帝還, 過<營州>, 盡召其長<窟哥>及老人, 差賜繒采, 以<窟哥>爲左武衛將軍.

큰 추장인 욕흘주 곡거가 또 무리를 거느리고 귀순하니 곧 그의 부락으로 현주를 삼고 곡거를 임명하여 자사로 삼아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굴가가 부락을 모두 가지고 내지로 붙좇으니 이에 송막 도독부를 설치한 뒤에 굴가를 사시절 10주제군사·송막도독으로 삼고 무극남에 봉하여 이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달계부를 초락주로 삼고 홀편부를 탄한주로 삼고, 독활부를 무봉주로 삼고, 분문주를 우릉주로 삼고 도편부를 일련주로 삼고 예해부를 도하주로 삼고, 추근부를 만단주로 삼고, 복부를 필려와 적산의 두 주로 삼고는 모두 송막부에 예속시키고 곧 욕흘주들을 그곳의 자사로 삼았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3
大酋辱紇主<曲據>又率衆歸, 卽其部爲<玄州>, 拜<曲據>刺史, 隸<營州都督府>. 未幾, <窟哥>擧部內屬, 乃置<松漠都督府>, 以<窟哥>爲使持節十州諸軍事․<松漠>都督, 封<無極男>, 賜氏<李>; 以<達稽>部爲<峭落州>, <紇便>部爲<彈汗州>, <獨活>部爲<無逢州>, <芬問>部爲<羽陵州>, <突便>部爲<日連州>, <芮奚>部爲<徒河州>, <墜斤>部爲<萬丹州>, <伏>部爲<匹黎>․<赤山>二州, 俱隸<松漠府>, 卽以辱紇主爲之刺史.

굴가가 죽자 해와 더불어 연이어 반역을 하니 행군총관 아사덕추빈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를 잡아 동도(東都:낙양)에 바쳤다. 굴가에게 두 후손이 있었는데 고막리는 좌위장군·탄한주 자사가 되어 귀순군왕에 봉하여졌으며, 진충은 무위장군·송막도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조에게 만영이라는 후손이 있었는데 귀성주자사가 되었다.
영주도독 조문홰는 교만하고 허욕이 많아 수 차례 그의 휘하를 업신여기니 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만영은 본디 시자로서 입조하였던 적이 있었기에 중국의 어려움과 쉬움을 알고 있어서 난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 함께 군사를 일으켜 문홰를 살해하고 영주를 도적질하여 반란하였다. 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이라 부르고 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군사를 놓아 공략하여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굴복시키고는 거듭 간섭하지 않았으며, 수만의 무리로서 망령되게 10만이라 말하며 숭주를 공격하여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았다.
무 후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 조인사, 금오대장군 장현우, 우무위장군 이다조, 사농소경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에게 그를 치게 하였으며,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로 삼고 납언 요숙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만영의 칭호를 고쳐 만참이라 하고 진충을 진멸이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 황장곡에서 싸움을 치렀는데, 왕의 군대가 거듭 패하고 현우와 인절 등이 모두 포로가 되어 사로잡혔다. 진격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글이 전달되어 알려지자 무후가 이에 우무위대장군 건안왕 무유의로 청변도대총관을 삼아 거란을 치게 하였으며, 천하의 노복 가운데 용기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관가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치르게 하고 모두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다. 만영이 말의 입에 재갈을 하고 야음을 틈타 단주(檀州)를 습격하니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이 결사대 수백 명을 모집하여 들이쳐 싸우자 만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지 않아 진충이 죽자 돌궐의 묵철이 그 부락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만영이 흩어졌던 군사를 거두어 다시 떨치고 일어나서 별장 낙무정과 하아소 등으로 하여금 기주(冀州)로 들어가게 하여 자사 육보적을 살해하고 수천 명을 약탈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4
< 窟哥>死, 與<奚>連叛, 行軍總管<阿史德樞賓>等執<松漠>都督<阿卜固>獻<東都>. <窟哥>有二孫: 曰<枯莫離>, 爲左衛將軍․<彈汗州>刺史, 封<歸順郡王>; 曰<盡忠>, 爲武衛大將軍․<松漠>都督. 而<敖曹>有孫曰<萬榮>, 爲<歸誠州>刺史. 於是<營州>都督<趙文翽>驕沓, 數侵侮其下, <盡忠>等皆怨望. <萬榮>本以侍子入朝, 知中國險易, 挾亂不疑, 卽共擧兵, 殺<文翽>, 盜<營州>反. <盡忠>自號<無上可汗>, 以<萬榮>爲將, 縱兵四略, 所向輒下, 不重浹, 衆數萬, 妄言十萬, 攻<崇州>, 執討擊副使<許欽寂>. <武后>怒, 詔鷹揚將軍<曹仁師>․金五大將軍<張玄遇>․右武威大將軍<李多祚>․司農少卿<麻仁節>等二十八將擊之; 以<梁王><武三思>爲<楡關道>安撫大使, 納言<姚璹>爲之副. 更號<萬榮>曰<萬斬>, <盡忠>曰<盡滅>. 諸將戰<西硤石><黃麞谷>, 王師敗績, <玄遇>․<仁節>皆爲虜禽. 進攻<平州>, 不克. 敗書聞, 后乃以右武衛大將軍<建安王><武攸宜>爲<淸邊道>大總管, 擊<契丹>; 募天下人奴有勇者, 官畀主直, 悉發以擊虜. <萬榮>銜枚夜襲<檀州>, <淸邊道>副總管<張九節>募死士數百薄戰, <萬榮>敗而走山. 俄而<盡忠>死, <突厥><黙啜>襲破其部. <萬榮>收散兵復振, 使別將<駱務整>․<何阿小>入<冀州>, 殺刺史<陸寶積>, 掠數千人.

무후가 진충이 죽었음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 왕효걸과 우림위장군 소굉휘로 하여금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하게 하니, 동협석에서 싸워 군대가 패하고 효걸은 그곳에서 죽었다. 만영이 이미 승세를 굳히고 마침내 유주를 도륙하였다. 유의가 장수를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이겨내지 못하였다.
이에 우금오위대장군 하내군왕 무의종을 명하여 신병도대총관으로 삼고, 우숙정대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위대장군 사타충의를 청변중도전군총관으로 삼아 군사 20만으로 적을 치게 하였다. 만영은 날래기가 월등하여 북을 울리며 남으로 내려가 영주(瀛州)에 예속된 현들을 해치고 제멋대로 하는 등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그러자 신병도총관 양현기가 해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의 후미를 엄습하니 거란이 크게 패하였으며, 하아소를 노획하고 별장 이해고와 낙무정을 항복시키고 거두어 들인 병장기가 산더미 같았다.
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다 흩어졌던 대오를 다시 합쳐 해와 공박하였는데 해가 사면에서 공격하니 이에 크게 무너지고 만영은 떨어져 나와 달아났다. 장구절이 세 곳에 매복을 하고 그의 동정을 엿보았는데 만영이 곤궁하여지자 집안에서 부리던 노복과 더불어 말을 가벼이 하고 노하( +路河)의 동쪽으로 달아나더니 몹시 피곤하여 수풀 아래 누워 있으니 노복이 그의 머리를 베었으며, 장구절이 그것을 동도에 전하자 나머지 무리들이 허물어졌다.유의가 개선하여 돌아오자 무후가 기뻐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고쳐 신공(神功)이라고 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5
< 武后>聞<盡忠>死, 更詔夏官尙書<王孝傑>․羽林衛將軍<蘇宏暉>率兵十七萬討<契丹>, 戰<東硤石>, 師敗, <孝傑>死之. <萬榮>席已勝, 遂屠<幽州>. <攸宜>遣將討捕, 不能克. 乃命右金吾衛大將軍<河內郡王><武懿宗>爲<神兵道>大總管, 右肅政臺御史大夫<婁師德>爲<淸邊道>大總管, 右武威衛大將軍<沙吒忠義>爲<淸邊中道>前軍總管, 兵凡二十萬擊賊. <萬榮>銳甚, 鼓而南, 殘<瀛州>屬縣, 恣肆無所憚. 於是<神兵道>總管<楊玄基>率<奚>軍掩其尾, <契丹>大敗, 獲<何阿小>, 降別將<李楷固>․<駱務整>, 收仗械如積. <萬榮>委軍走, 殘隊復合, 與<奚>搏, <奚>四面攻, 乃大潰, <萬榮>左馳. <張九節>爲三伏伺之, <萬榮>窮, 與家奴輕騎走<潞河>東, 憊甚, 臥林下, 奴斬其首, <九節>傳之<東都>, 餘衆潰. <攸宜>凱而還, 后喜, 爲赦天下, 改元爲<神功>.


거란이 능히 자립하지 못하고 마침내 돌궐에 붙좇았다. 구시 원년(700)에 조서를 내려 좌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우무위장군 낙무정으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게 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오랑캐의 뛰어난 장수로서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고 수 차례 관군을 곤공하게 하였던 자들인데 이때에 이르러 공적이 있게 되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6
<契丹>不能立, 遂附<突厥>. <久視>元年, 詔左玉鈐衛大將軍<李楷固>․右武衛將軍<駱務整>討<契丹>, 破之. 此兩人皆虜善將, 嘗犯邊, 數窘官軍者也, 及是有功.

개원(713~741) 2년에 진충의 사촌동생 도독 실활이 돌궐 묵철의 정치가 쇠퇴하자 부락을 거느리고 힐리발이건철과 더불어 와서 귀순하니 현종이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2년 뒤(716)에 해의 우두머리 이대포와 더불어 모두 들어오니 조서를 내려 다시 송막부를 설치하고 실활을 도독으로 삼아 송막군왕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을 제수하였으며, 그대로 그 부에 정석군을 설치하여 실활로 경략대사로 사은 뒤 거느리고 있던 여덟 부락에서 우두머리를 모두 발탁하여 자사로 삼았다. 조서를 재려 장군 설태로 압번낙사로 삼아 군대를 감독하고 진압하여 위무하게 하였다. 제께서 도평왕의 이손 양원사의 여식을 영락공주로 삼아 실활에게 시집보냈다. 다음 해에 실활이 죽자 특진에 추증하였으며, 제께서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그의 아우 중랑장 사고로 하여금 피봉된 관작과 다스리던 곳을 답습하여 있게 하였다. 다음 해(717)에 사고가 공주와 더불어와서 예방하니 연회를 베풀고 물품을 하사하기를 후하게 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7
< 開元>二年, <盡忠>從父弟都督<失活>以<黙啜>政衰, 率部落與<頡利發伊健啜>來歸, <玄宗>賜丹書鐵券. 後二年, 與<奚>長<李大酺>皆來, 詔復置<松漠府>, 以<失活>爲都督, 封<松漠郡王>, 授左金吾衛大將軍; 仍其府置<靜析軍>, 以<失活>爲經略大使, 所統八部皆擢其酋爲刺史. 詔將軍<薛泰>爲押蕃落使, 督軍鎭撫. 帝以<東平王>外孫<楊元嗣>女爲<永樂公主>, 妻<失活>. 明年, <失活>死, 贈特進, 帝遣使弔祠, 以其弟中郞將<娑固>襲封及所領. 明年, <娑固>與公主來朝, 宴賚有加.

가돌우라는 자가 있어 정석군의 부사가 되었는데, 굳세고 용감하여 군중의 신임을 얻으니 사고가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가 영주(營州)로 달아났다. 도독 허흠담이 주의 장졸 5백 명으로 해의 군장인 이대포의 군사를 합쳐 함께 가돌우를 공격하엿으나 승리하지 못하였으며, 사고와 이대포가 모두 죽자 흠담이 두려워하여 군대를 옮겨 유관(楡關)으로 들어갔다.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동생 울우를 받을어 군주로 삼고 사자를 보내 사죄하니 조서를 내려 울우를 임명하여 송막군왕으로 삼고 가돌우는 사면하여 주었다. 울우가 들어와 예방하자 솔갱령에 제수하고 종실출신의 여인 모용을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 역시 들어와 예방하자 좌우림위장군으로 발탁하엿다. 울우가 죽고 아우 토우가 자리를 이었는데, 가돌우와 틈이 생겨 능히 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더니 공주를 데리고 달아나오자 요양군왕에 봉하고 숙위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가돌우가 진충의 아우 소고를 받들어 무리를 통솔하니 조서를 내려 왕위의 답습을 허락하였다. 천자께서 봉선을 행하자 소고가 여러 오랑태의 우두머리와 더불어 모두 천자가 머무른 곳을 좇았다. 다음 해(718)에 좌우림위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광화군으로 옮겨 왕으로서 다스리게 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진을 동화공주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냈으며 조서를 내려 그 부락의 추장 1백여 명에게 관직을 주니 소고가 아들을 들여보내 시위하게 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8
有<可突于>者, 爲<靜析軍>副使, 悍勇得衆, <娑固>欲去之, 未決. <可突于>反攻<娑固>, <娑固>奔<營州>. 都督<許欽澹>以州甲五百, 合<奚>君長<李大酺>兵共攻<可突于>, 不勝, <娑固>․<大酺>皆死, <欽澹>懼, 徙軍入<楡關>. <可突于>奉<娑固>從父弟<鬱于>爲君, 遣使者謝罪, 有詔卽拜<鬱于><松漠郡王>, 而赦<可突于>. <鬱于>來朝, 授率更令, 以宗室所出女<慕容>爲<燕郡公主>妻之/$《舊書》卷一九九下《契丹傳》云: 「<鬱于>入朝請婚, 上又封從妹夫率更令<慕容嘉賓>女爲<燕郡公主>以妻之.」《冊府》卷九七九略同. 此刪「嘉賓」名而以「率更令」移上, 誤.$/. <可突于>亦來朝, 擢左羽林衛將軍. <鬱于>死, 弟<吐于>嗣, 與<可突于>有隙, 不能定其下, 攜公主來奔, 封<遼陽郡王>, 留宿衛. <可突于>奉<盡忠>弟<邵固>統衆, 詔許襲王. 天子封禪, <邵固>與諸蕃長皆從行在. 明年, 拜左羽林衛大將軍, 徙王<廣化郡>, 以宗室出女<陳>爲<東華公主>, 妻<邵固>, 詔官其部酋長百餘人, <邵固>以子入侍.

가돌우가 다시 들어오니 재상 이원굉이 예의로서 대하지 않자 불만에 찬 모습으로 돌아갔다. 장열이 이르기를 [저놈은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단지 이익이 되는 것만 향한다. 더욱이 지금은 나라를 지탱하고 있으며 아랫백성들이 붙좇고 잇는 것이며, 예의를 가장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다.] 했다. 3년 후(721)에 가돌우가 소고를 살해하고 굴열을 세워 왕으로 삼으며 해를 위협하여 함께 돌궐에 투항하니 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달아났다.
조서를 내려 유주장사·지범양절도사 조함장으로 하여금 그를 치게 하고 중서사인 배관과 급사중 설품을 파견하여 건장한 병사들을 크게 모집하게 하였으며, 충왕 준을 임명하여 하북도행군원수로 삼고 어사대부 이조은과 경조윤 배주선으로 그를 보좌하게 한 뒤 장수 정백헌·장문엄·송지제·이동몽·조만공·곽영걸 등 여덟 총관의 군사로 거란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를 겸하게 하였으나 왕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부상서신안군왕 의로 지절하북도행군부원수를 삼아 함장과 더불어 변방을 나서서 오랑캐를 체포하게 하니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가돌우는 달아나고 해의 무리들은 항복하니 왕이 두 오랑캐의 포로의 수급으로 모든 사당에 고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09
< 可突于>復來, 不爲宰相<李元紘>所禮, 鞅鞅去. <張說>曰: 「彼獸心者, 唯利是向. 且方持國, 下所附也, 不假以禮, 不來矣.」 後三年, <可突于>殺<邵固>, 立<屈烈>爲王, 脅<奚>衆共降<突厥>, 公主走<平盧軍>. 詔<幽州>長史․知<范陽>節度事<趙含章>擊之, 遣中書舍人<裴寬>․給事中<薛 >大募壯士, 拜<忠王.浚><河北道>行軍元帥, 以御史大夫<李朝隱>․<京兆>尹<裴伷先>副之, 帥<程伯獻>․<張文儼>․<宋之悌>․<李東蒙>․<趙萬功>․<郭英傑> 等八總管兵擊<契丹>. 旣又以<忠王>兼<河東道>諸軍元帥, 王不行. 以禮部尙書<信安郡王><禕>持節<河北道>行軍副元帥, 與<含章>出塞捕虜, 大破之. <可突于>走, <奚>衆降, 王以二蕃俘級告諸廟.

다음해(722)에 가돌우가 변경을 도적질하자, 유주장사 설초옥과 부총관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 등이 1만 명의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여 도산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사로 쳐들어오니 해가 두려움에 두 마음을 품고 그 물리들이 험한 곳으로 달아났으며, 지의와 수충이 패하고 영걸과 극근은 그곳에서 죽었고 살해된 당의 군사가 1만여 명이 되었다.
제께서는 장수규를 발탁하여 유주장사로 삼고 그를 다스려 공략하게 하였다. 장수규는 원래 뛰어난 장수이기에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신하로 복속할 것이라 청하고는 점차 서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돌궐에 의지하였따. 그들의 벼슬아치인 이과절이 가돌우와 더불어 안으로 평화롭지 못하자 장수규가 빈객인 왕히를 보내어 은밀히 그를 맞이할 것이라 하고는, 군사로 가돌우를 에워싸니 이과절이 곧 밤을 틈타 가돌우와 굴열 및 그의 도당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스스로 귀순하여 왔다. 수규가 이과절로 하여금 그 부락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수급을 함에 담아 동도에 전했다. 이과절을 임명하여 북평군왕으로 삼고 송막도독에 제수하였다. 가돌우의 잔당들이 과절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그의 집안을 도륙하였는데, 그 중 한 아들인 나건이 안동으로 달아나오자 좌효위장군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25년(737)에 장수규가 거란을 토벌하여 다시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전공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10
明年, <可突于>盜邊, <幽州>長史<薛楚玉>․副總管<郭英傑>․<吳克勤>․<烏知義>․<羅守忠>率萬騎及<奚>擊之, 戰<都山>下. <可突于>以<突厥>兵來, <奚>懼, 持兩端, 衆走險; <知義>․<守忠>敗, <英傑>․<克勤>死之, 殺<唐>兵萬人. 帝擢<張守珪>爲<幽州>長史經略之. <守珪>旣善將, <可突于>恐, 陽請臣而稍趨西北倚<突厥>. 其衙官<李過折>與<可突于>內不平, <守珪>使客<王悔>陰邀之, 以兵圍<可突于>, <過折>卽夜斬<可突于>․<屈烈>及支黨數十人, 自歸. <守珪>使<過折>統其部, 函<可突于>等首傳<東都>. 拜<過折><北平郡王>, 爲<松漠>都督. <可突于>殘黨擊殺<過折>, 屠其家, 一子<剌乾>走<安東>, 拜左驍衛將軍. 二十五年, <守珪>討<契丹>, 再破之, 有詔自今戰有功必告廟.

천보(742~756) 4년에 거란의 큰 추장인 이회수가 항복하자 송막도독에 임명하여 숭순왕에 봉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독고를 정락 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이해에 공주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범양절도사 안녹산이 그를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다시 그 추장 해락을 봉하여 공인왕으로 삼고 송막도독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안녹산이 바야흐로 총애를 받자 표를 올려 거란을 토벌하는 것으로 황제의 뜻에 붙좇으려 한다고 하였다. 유주(幽州)와 운중(雲中) 및 평로(平盧)와 하동(河東)의 군사 10여 만을 일으키고 해를 길잡이로 삼아 황수(潢水)의 남쪽에서 크게 싸웠으나 안녹산이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이로부터 안녹산은 서로 더불어 침략하는 등 해결을 보지 못하다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11
< 天寶>四載, <契丹>大酋<李懷秀>降, 拜<松漠>都督, 封<崇順王>, 以宗室出女<獨孤>爲<靜樂公主>妻之. 是歲, 殺公主叛去, <范陽>節度使<安祿山>討破之. 更封其酋<楷落>爲<恭仁王>, 代<松漠>都督. <祿山>方幸, 表討<契丹>以向帝意. 發<幽州>․<雲中>․<平盧>․<河東>兵十餘萬, 以<奚>爲鄕導, 大戰<潢水>南, <祿山>敗, 死者數千, 自是<祿山>與相侵掠未嘗解, 至其反乃已.

거란이 개원과 천보(742~756) 연간에 사신으로 에방하고 공물을 바친 것이 무려 스무차례였다. 에전의 일로서 범양 절도로 해와 거란의 사절을 단속하였었는데, 지덕(756~758)으로부터 그 후로는 번국들이 제멋대로 날뛰던 것이 진정되고 스스로 안정되더니 막아지키고 동정을 살피며 더욱 삼갔기에 변방에는 변고가 생기지 않았으며, 해와 거란 역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이 드물게 되었고 해마다 추장과 호족 수십 명을 가려 장안으로 들어와 조회하면 매번 불러들여 접견하고 질서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휘하에 거느리고 왔던 수백 명은 모두 유주에 머무르게 하였다.
지덕과 보응(762~763) 때 다시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력(766~779) 연간에 열 세차례 정언(785~805) 연간에 세 차례, 원화(806~820)연간에 일곱차례, 긜고 대화(827~835)와 개성(836~840) 사이에 무릇 네 차례엿었으나, 천자께서 그들이 밖으로 회골(回 )에 붙좇은 것을 미워하여 다시는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관작을 수여하지 않았다.
회창(841~846) 2년에 회골이 격파되자 거란의 추장 굴수가 비로소 다시 내지로 붙좇기에 우누히장군·수우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회골에게 주었던 예전의 인장을 바꾸어 당의 새로운 인장을 하사하였는데 [봉국거란지인]으로 되어 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12
< 契丹>在<開元>․<天寶>間, 使朝獻者無慮二十. 故事, 以<范陽>節度爲押<奚>․<契丹>使, 自<至德>後, 藩鎭擅地務自安, 鄣戍斥候益謹, 不生事于邊, <奚>․<契丹>亦鮮入寇, 歲選酋豪數十入<長安>朝會, 每引見, 賜與有秩, 其下率數百皆駐館<幽州>. <至德>․<寶應>時再朝獻, <大曆>中十三, <貞元>間三, <元和>中七, <大和>․<開成>間凡四, 然天子惡其外附<回鶻>, 不復官爵渠長. <會昌>二年, <回鶻>破, <契丹>酋<屈戍>始復內附, 拜雲麾將軍․守右武衛將軍. 於是<幽州>節度使<張仲武>爲易<回鶻>所與舊印, 賜<唐>新印, 曰「奉國<契丹>之印」.


함 통(860~874)연간에 그 왕 습이지가 다시 사자를 보내 들어와 예방하더니 그 부락이 점차 강해졌다. 습이지가 죽자 친족인 흠덕이 자리를 이었다. 광계(885~888) 대 바야흐로 천하의 도적이 들고 일어나서 북쪽의 강역에도 변고가 많아지니 이에 해와 실위(室偉)를 노략질하였으며, 소소한 부락의 종족들이 모두 그에게 복속되자 유주(幽州)와 계주( 州)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유인공이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적성산을 넘어 그를 토벌하며 해마다 변방 아래의 초원에 불을 놓아 그들로 하여금 머무러 목축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말이 많이 죽게 되자 거란이 이에 회맹을 구걸하여 좋은 말을 바치고 방목지를 구하기에 유인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다시 약속을 깨뜨리고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는데, 유수광이 평주(平州)를 지키고 있자니 거란이 1만의 기병으로 쳐들어옴에, 유수광이 거짓으로 그들과 화친하여 들녘에 장막을 설치하고 음식을 갖추어 놓았다가 복병을 일으켜 그 대장을 사로잡았다. 오랑캐의 무리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말 5천 필을 바치고 속죄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흠덕이 많은 뇌물을 보내며 빌기에 이에 더불어 강화를 맺으니 10년 동안 감히 변경에 근접하지 않았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13
< 咸通>中, 其王<習爾之>再遣使者入朝, 部落寖彊. <習爾之>死, 族人<欽德>嗣. <光啓>時, 方天下盜興, 北疆多故, 乃鈔<奚>․<室韋>, 小小部種皆役服之, 因入寇<幽>․<薊>. <劉仁恭>窮師踰<摘星山>討之, 歲燎塞下草, 使不得留牧, 馬多死, <契丹>乃乞盟, 獻良馬求牧地, <仁恭>許之. 復敗約入寇, <劉守光>戍<平州>, <契丹>以萬騎入, <守光>僞與和, 帳飮具于野, 伏發, 禽其大將. 羣胡慟, 願納馬五千以贖, 不許, <欽德>輸重賂求之, 乃與盟, 十年不敢近邊.

흠덕이 만년에 정치가 번성하지 않자 그들 여덟 부락의 대인들이 법으로 항상 3년마다 자리를 대신하였는데, 이때에 야율아보기가 북과 깃발을 세워 하나의 부락을 이루고는 자리를 번갈아들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일러 왕이 되니 나라를 이루게 되었으며 대하씨는 마침내 망하였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契丹-14/14
<欽德>晩節政不競, 其八部大人法常三歲代, 時<耶律阿保機>建鼓旗爲一部, 不肯代, 自號爲王而有國, <大賀氏>遂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