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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요나라 태조가 낚시를 한 압록강은 어디인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5.
요 태조가 901년 본부의 이리근이 된 이후 사방을 정벌하기 시작하여 907년 칭제를 하였는데, 요사를 보면, 칭제한지 9년(915년)되는 겨울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압록강이 현재의 한중 경계의 것이라면, 발해의 최고 동쪽에 있게 됩니다.
태조가 발해를 공격기 위해 거병한 것은 925년(천찬 4년 겨울 12월 을해일)이며, 926년(천현 원년) 봄 정월에 부여성과 홀한성을 깨뜨리고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7월에 다시 부여부로 갔다가 그 곳 행궁에서 55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915년에는 주위 제부를 정복하기에 바쁜 때 입니다.
다음은 요사 본기 태조 상의 기록입니다.

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新羅遣使貢方物,高麗遣使進寶劍,吳越王錢鏐遣滕彥休來貢。是歲,君基太一神數見,詔圖其像。
神冊元年春二月丙戌朔,上在龍化州,迭烈部夷離堇耶律曷魯等率百僚請上尊號,三表乃允。丙申,群臣及諸屬國築壇州東,上尊號曰大聖大明天皇帝,後曰應天大 明地皇后。大赦,建元神冊。初,闕地為壇,得金鈴,因名其地曰金鈴岡。壇側滿林曰冊聖林。三月丙辰,以迭烈部夷離堇曷魯為阿廬朵裡於越,百僚進秩、頒賚有 差,賜酺三日,立子倍為皇太子。

(915)겨울 시월 무신일, 압록강에서 고기를 낚았다. 신라가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고려가 사신과 보검을 보냈다. 오월왕 전류가 승언휴를 보내 조공하였다. 이 해에 군기태일신이 여러 번 보여서, 그 모양을 그리도록 조칙을 내렸다.
신책 원년(916) 봄 2월 병술일 초하루, 주상이 용화주에 있었는데, 질열부 이리근 야율갈로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주상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세 번이나 고하자 이에 허락을 하였다. 병신일, 군신과 여러 속국의 제후들이 주의 동쪽에 단을 쌓고 <대성대명청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황후는 <응천대명지황후>라고 하였다. 대사면을 하고 연호는 신책(神冊)이라 하였다. 초에, 땅을 파서 단을 쌓을 때에 금방울이 나왔기에 그 땅을 금령강이라 불렀다. 단의 옆에 나무가 빽빽한 곳을 성림이라 불렀다. 3월 병진일, 질열부 이리근 갈로를 아려타리어월로 삼고, 백관을 차례대로 승진시키고, 직급에 따라 차이가 있게 물건을 내렸다.  술을 내려 3일간 연회를 하고, 아들 배(倍)를 황태자로 삼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요사 본기에서 태조가 낚시를 한 곳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적국을 통과하여 그 동쪽에 가서 한가하게 낚시를 할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당시 발해와 요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결국 발해 멸망당시와 고려의 어느 때까지는 압록강이 현재의 한중 경계선을 말한 것이 아니고, 최소한 요나라와 발해의 서쪽 경계, 또는 요나라에서도 변경에서는 다소 떨어져서 황제가 낚시를 하기에 안전한 위치에 있던 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압록강은 대략 현재의 요하 상류가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학자들이, 신당서 가탐도리기 등에 기록된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대하여 재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신완순 (2009-10-12 18:22:31)  
백송 선생님 좋은 글 소개해 주셔서 고맙고
번역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요나라 태조 안파견이 '겨울 10월에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였다(釣魚)'는 기록은
매우 흥미를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 구(鉤) : 조어(釣魚), 낚시질하다

요나라 시절에
현 압록강이 얼음이 언제 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음 낚시를 했다고 볼 수도 있고(10월이면 보통은 얼음이 얼지 않지만)
그냥 낚시를 했다면 얼음이 얼지 않는 다른 지역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대목이라서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습니다.

요사 권15에는 성종(聖宗) 때(1014년)에
"동경유수 야율탁실(耶律托實) 등이 고려를 토벌하고 압록강에
부량(浮梁, 뜬 다리)을 만들었다(東京留守耶律托實等討髙麗造浮梁于鴨渌江)"고 되어 있는데
이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쯤일까 생각하면 재미있습니다.

후에 다리가 전쟁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수리를 하게 되었는데
흥종(興宗) 때(1041년) 여름 4월에 다리 수리하는 것을 중지시켰다는 대목을
보면서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를 짐작케 합니다.

또한 고려의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에서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는 대목과
요 도종(道宗) 때(1078년) 고려에서 압록강 이동의 땅을 돌려달라고 하여 불허하였다는 대목에서
압록강은 주요 물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거란고전>에서 압록이라 하는 것은 고유명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계불의식을 거행하는 신성스러운 강을 일컫는 것을 이해하면
요나라의 압록강은 요나라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10~11세기 압록강은 현 압록강과 별로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위 번역문에서 <단의 옆에 나무가 빽빽한 곳을 성림이라 불렀다>는 대목은
▶ < 제단의 곁에 나무가 빽빽한 곳을 책성림(冊聖林)이라 불렀다>라고 '책'자가 탈자된 듯 합니다.
<책성림>은 안파견의 연호를 신책(神冊)으로 하게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완순 (2009-10-12 18:39:22)  
단순참고바랍니다.

책성림(冊聖林)과 신책(神冊)을 살펴보면

<규원사화> '단군기' 부루임검'편에
“이 때 신령스러운 짐승이 청구(靑丘)에 나타났는데,
털은 밝고 희고 꼬리가 아홉 개가 달린 짐승이
서책(書冊)을 입에 물고 상서(祥瑞)함을 드러내는지라,

이에 고시씨에게 상을 내리고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매우 즐기며,
또한 ‘조천무(朝天舞)’를 지었다.
(時有, 神獸出於靑丘, 白毛九尾, 銜書作瑞,
乃賞高矢氏, 令國中奏樂而致歡, 又作朝天之舞.)”라고 되어 있어
그 상서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단 옆에 나무를 가득 심었거나
아니면 나무가 가득찬 곳 옆에 제단을 마련하였거나 간에
그 나무의 모습이 상서로운 책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면
요태조 안파견이 매우 신령스러운 모습에 고무되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그 모습이 하늘을 향하여 경배하는 모습이었다면 더욱 그랬을 겁니다.
고대의 구미호가 책을 물고 상서로움을 나타낸 것처럼 말이죠.
그러한 태평성대를 바라고 상서로움을 따서 연호를 신책(神冊)이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백송 (2009-10-12 21:00:04)  
신선생님/
선생님의 지적에 따라 다시금 보니 책성림이 맞군요. 또한 신책이란 연호가
如神册元年(916)他所上尊号为“大圣大明天皇帝”,而其受册之地称作“册圣林”이라는 글이 "契丹建国与回鹘文化的关系"라는 글에 보이는데, 신책이라는 연호가 책성림과 연관이 있군요..고맙습니다. 규권사화의 글도 소개해 주셔서 고맙구요.. 요사의 뒷 부분은 아직 보지 못하였는데..요나라가 압록강에 부교를 놓았군요..정말 여러가지로 연관이 있어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