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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712

책부원귀 발해 玄宗先天二年(713) 二月 拜高麗大首領高定傅爲特進 是月 封靺鞨大祚榮爲渤海郡王(大祚榮, 聖曆千自立爲振國王在營州東二千里. 兵數萬人, 至是, 遣郞將崔訢往冊命祚榮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爲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현종 선천(先天) 2년(713) 2월에 말갈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대조영은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으로 등극하였다.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000리나 되고 군사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에 이르러 낭장(郎將) 최흔(崔訢)을 보내 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의연히 그를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이때로부터 해마다 사절을 보내 조근하고 공물을 바쳤다. (開元)七年 三月 忽汗州都督渤海郡王大祚榮卒 遣使撫立其嫡子.. 2015. 2. 24.
송막기문 발해국 발해국은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이나 여진(女眞)의 도읍에서 1,500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옛날부터 대씨(大氏)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로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들은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른다.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 2015. 2. 24.
[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0)우리 역사 빼닮은 선우·중산국 ㆍ중산왕릉 위 우뚝 선 ‘향당’은 동이족의 표식 1974년부터 발굴한 중산왕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2300년 전 왕릉 설계도(조역도)에 따라 중국 학계가 복원한 착왕(錯王)의 왕릉과 향당 모습. 왕과 왕후, 애후, 부인묘 등이 나란히 조성됐다. 작은 그림은 이형구 교수가 복원한 고구려 장군총의 향당. 먼저 무덤이 석곽으로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 돌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듯 발해문명권, 즉 동이문화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또한 묘실을 중심으로 아(亞)자형 혹은 중(中)자형으로 묘도를 조영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은(상)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예이다. 또한 리쉐친(李學勤) 등 중국 학자들이 검토해왔듯 중산국 영역에서 쏟아지는 은(상)의 유적들과, 우칭셴(武淸縣)에서 확인된.. 2015. 2. 24.
[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9)중원에 꽃 핀 동이족의 나라 ㆍ朝鮮의 이름을 딴 기자의 후예 선우·중산국 선우·중산국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는 백적(白狄)의 별종”이라 했고,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주석한 색은(索隱)에는 “중산은 옛 선우국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했다. 여기서 백적은 북방의 오랑캐이고, 희성은 주나라 왕의 성(姓)이다. 결국 이 사료에 따르면 선우나 선우의 뒤를 이은 중산은 (은)상, 즉 동이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톈진 우청셴에서 확인된 선우황비문. 선우·중산국=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금석문이다. 하 지만 다른 사서인 ‘속한지(續漢志)’는 “선우는 자성(子姓)”이라 했고, ‘성씨변증(姓氏辯證)’도 “선우는.. 2015.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