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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송막기문 발해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24.
발해국은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이나 여진(女眞)의 도읍에서 1,500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옛날부터 대씨(大氏)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로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들은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른다.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남자들은 지모가 많으며 날래고 용감함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심지어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가 그 나라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멸망시키고 그의 명장(名帳)에 있는 발해인 천여 호를 연(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는 토지를 지급하고 부세를 바치게 하고 국경의 시장에서 왕래하며 무역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으며, 싸움이 있을 때에는 선봉으로 이용하였다. 천조(天祚)의 난이 일어나자 그들은 무리지어 고국에서 대씨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금(金)나라가 토벌할 때,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귀족인 고씨가 집을 버리고 와서 항복하고 허실을 말해주어, 성이 나중에 함락되었다. 거란이 강제 이주시킨 백성은 늘어나 5천여 호에 달하였고 훌륭한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금나라는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산동(山東) 지방의 국경을 지키도록 보냈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불과 몇백 집만 보내다가 신유년(辛酉年)에 모두 몰아보내자, 이 사람들은 크게 원한을 품었다. 부유한 집은 2백년 넘게 편안히 살면서 왕왕 정원이나 연못에 모란꽃을 심었는데 많은 집은 2백, 3백 포기에 달하며 어떤 것은 수십 줄기가 무더기로 자랐는데 모두 연 지역에는 없는 것이라 하여 십수천 혹은 5천 전으로 사갔다. 그들이 살던 옛 땅은 모두 거란에게 귀속되었다. 옛날 동경(東京)에 유수(留守)를 설치하고 소주(蘇州)와 부(扶州) 등이 있었다.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와 청주(靑州)와 서로 마주하고 있어서, 큰 바람에 따라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도 한다. 아보기의 큰아들인 동단왕(東丹王) 찬화(贊華)가 이곳에 책봉받았는데 그를 인황왕(人皇王)이라 부른다. 그는 황제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을 품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짖누르나 큰 산은 아무런 힘도 없어라.

고향 사람 보기가 부끄러워 이로부터 외국에 투신하리라” 드디어 소주(蘇州)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당나라 명종(明宗)에게 귀속하였다. 말을 잘 그렸고 경서도 좋아하여 배에 싣고서 그 나라를 떠났다. 처음 당을 모방하여 관청을 두었지만, 나라에는 절이 적었다. 조숭덕(趙崇德)이라는 사람이 연도(燕都)에서 미곡 장사를 하다가 예순이 넘어서야 그만두고 스님이 되었다. 스스로 큰 사원을 만들고 연(燕)의 죽림사(竹林寺)의 혜일(慧日) 스님에게 주지를 요청하며 스님들의 3년 비용을 공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죽림은 곧 사명인(四明人)인데 조숭덕과 나는 서로 안지가 퍽 오래 되었다. 옛 숙신성은 사방이 약 5리쯤된다. 낮은 담의 유적은 아직 있고 발해의 수도에서 30리쯤 떨어졌는데 역시 성밑을 돌로써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