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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송사전 금열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청장관전서> 제 23권 송사전 금열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개명은 민(旻), 한성(漢姓)은 왕(王)인데, 핵리발(劾里鉢)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나라씨(拏懶氏)이다. 선계(先系)는 말갈(靺鞨)인데, 말갈의 본호는 물길(勿吉)로서, 즉 고대 숙신국(肅愼國)이다. 당(唐) 초기에는 흑수(黑水)ㆍ속말(粟末) 두 말갈로서 함께 고구려에 부속되었다. 속말 말갈은 성이 대씨(大氏)인데 나중에 발해국(渤海國)을 세웠고, 흑수 말갈은 당 나라의 작위를 받아 발해에 속해 있다가 뒤에 거란(契丹)에 부속되었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이 되어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리우고, 북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되지 않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리웠다. 그 뒤 요주(遼主) 진종(眞宗)의 이름을 피해 여직(女直)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생여진이 나중에 금(金) 나라가 되었다.
시조(始祖)는 보함(普函)인데, 나이 60여 세에 고려를 떠나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 유역에 정착해 살며 어떤 노부인에게 장가를 드니, 그도 60여 세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경원 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했다.
아들 오로(烏魯)의 시호는 덕황제(德皇帝)이고, 오로의 아들 발해(跋海)의 시호는 안황제(安皇帝)이며, 발해의 아들 수가(綬可)는 안출호수(安出虎水) 부근에 정착해 살았는데, 묘호(廟號)는 헌조(憲祖)이다.
아들 석로(石魯)가 뒤를 이어, 요 나라로부터 척은(惕隱 즉 종정(宗正)직이다)이란 관직을 받아 차츰차츰 조교(條敎)를 펴나갔는데 백성들이 잘 따랐다. 묘호는 소조(昭祖)이다.
아들 오고내(烏古迺)가 뒤를 이으니 모든 부족이 복종하여, 요에서 여진 부족 절도사(女眞部族節度使)를 삼았다. 묘호는 경조(景祖)이다. 둘째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뒤를 이으니, 그는 성격이 준엄하고 기량이 켰다. 시호는 성숙황제(聖肅皇帝),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그래서 아우 파뢰숙(頗賴淑)이 뒤를 이으니, 묘호는 숙종(肅宗)이요, 다시 아우 영가(盈哥)가 뒤를 이으니, 자는 오로완(吾魯完),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오아속(烏雅束)이 뒤를 이으니, 자는 모로(毛路)이며, 핵리발의 맏아들이다. 묘호는 강종(康宗)이다. 오고내에서 오아속까지 모두 절도사를 이어받아 겉으로는 요에 붙는 척하면서 속으로 모반을 꾀하다가, 아골타(阿骨打)에 이르러 마침내 요를 멸망시켰다. 요주 홍기(洪基 도종(道宗)의 이름) 때에 오색(五色) 구름이 누차 동녘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천 섬[斛]들이 창고와 같아 사천(司天) 공치화(孔致和)가 "저 구름 밑에 반드시 이인(異人)이 태어나리라." 하였다 한다.
과거에 흘석렬부(紇石烈部) 아소(阿疏)가 군사의 힘을 믿고 난을 일으킨 것을 영가(盈哥)가 토벌하였는데, 아소가 요에 가서 호소를 하자 그 길로 억류해 두었고, 한편 요의 사신이 해마다 사신을 보내 해상(海上)에서 해동청(海東靑 우리나라 산매의 이름)을 무역하는데, 길이 〈여진족〉 경내로 나 있었으므로 수많은 세금을 요구하여 이 두 가지의 일로 늘 알력이 되어 왔다. 아골타가 오아속의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되면서 누차 아소의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요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정화(政和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4년(1114), 아골타가 요의 죄상을 들어 진격하는데 싸움마다 연이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5년(금 태조(金太祖) 수국(收國) 1, 1115), 제(帝)라 일컫고 나서 "요는 빈철(賓鐵)의 견고함을 취하여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그러나 쇠도 녹이 슬어 부러지는 것이고 오직 금만이 불변한다. 더군다나 완안(完顔)이 흰빛을 숭상하였고, 또 살던 곳이 안출호수(安出虎水)가 아니었던가?" 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금의 방언에 '금'을 일러 '안출호'라 한다.
요주 연희(延禧 천조제(天祚帝)의 휘)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아골타(阿骨打)는 듣지 않고 황룡부(黃龍府)를 공격하여 아루강(阿屢崗)까지 진격하였다. 그 결과 요의 군사 7만 명이 섬멸되었다. 연희가 도리어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니, 아골타도 그러한 내용으로 답을 보냈다. 연희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장춘로(長春路)로 출전하자 아골타는 호보답강(護步答崗)으로 추격하여 요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6년, 요의 동경(東京)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장군 고영창(高永昌)을 사로잡아 죽였다.

7년(금 태조 천보(天輔) 1, 1117), 동성 혼인을 금지하고 이를 범하는 자는 곤장을 쳐서 떼어 놓았다. 요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冊封)을 청하였다.

중화(重和 송 휘종(宋徽宗)의 개원) 1년(천보 2, 1118) 제(帝)가 무의대부(武義大夫) 마정(馬政)을 보내어 양국이 힘을 합쳐 요를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는데, 요를 이긴 뒤에 오대(五代) 때 거란에 점령된 땅을 모두 반환할 것을 전제하였더니, 아골타(阿骨打)는 보사(報使)를 보내어 "원하는 바의 땅은 함께 공격하여 점령하는 대로 차지합시다." 하였다.

선화(宣和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1년(천보 3, 1119), 아골타가 이선경(李善慶)ㆍ산도(散覩)를 마정과 함께 보내와서 우호를 맺자고 하였다. 이에 그들이 돌아갈 때 제가 군교(軍校) 호연경(呼延慶)을 시켜 선경 일행을 환송하였는데, 아골타가 호경을 돌려보내며 그에게 "네 임금이 과연 우호를 맺고 싶거든 다시는 이런 조서를 쓰지 말라고 하라. 결코 따르지 않으리라." 하였다. 사신 산도(散覩)가 제에게 단련사(團練使)라는 직책을 받았다 하여, 아골타가 화를 내어 곤장을 쳤다.
과거에 고려가 의원을 요구해와서 두 명의 의원을 데리고 갔었는데, 이때에 이 두 명의 의원이 귀국해서 "고려가 천자께서 여진(女眞)과 함께 거란을 도모한다는 소문을 듣고, 거란을 그대로 둔다면 우리에세 호위가 될 수 있지만 여진은 호랑이와 같아서 사귈 수가 없다하여 무슨 대비를 하는 듯하더이다." 하였다.
연희(延禧)가 사신을 보내어 아골타를 '동회국 황제(東懷國皇帝)'라고 책봉하니, 아골타는 책문이 예제(禮制)에 어긋난다 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어 꾸짖었다. 처음으로 여진 문자를 썼는데 이것은 곡신(谷神 완안회윤(完顔希尹)의 본명)이 지은 문자이다.

2년(천보 4, 1120), 제가 조양사(趙良嗣)를 보내어 〈요의〉 연경(燕京) 운중(雲中) 땅을 빼앗자고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아골타도 요가 거짓 화친을 내세워 지연 작전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를 말한다)을 진격하였다. 상경을 치고 나서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요의 정벌 및 세폐(歲幣) 문제를 제의하므로 제가 마정(馬政)을 시켜 회보케 하였다.

3년(천보 5, 1121), 요의 도통(都統) 야율여도(耶律余覩)가 항복하였다.

4년(천보 6, 1122), 야율여도로 향도(嚮導)를 삼아서 요를 침공하여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를 말한다)을 점령하니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달아났는데, 완안희윤과 종한(宗翰)이 다시 서경(西京 운중을 말한다)을 탈취하였다. 종한이란 자의 본명은 점몰갈(粘沒喝)이다. 누실(婁室)이 천덕(天德) 등 여러 주를 항복받고 반란자 아소(阿疏)를 사로잡았다. 요의 종실 순(淳)이 자칭 제(帝)라 일컫고 사신을 보내와서 붙기를 청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아골타(阿骨打)가 사신을 보내와서, 양국이 힘을 합쳐 요를 공격하자고 약속하므로 제는 선무사(宣撫使) 동관(童貫)에게 명하여 응해주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관이 충사도(种師道)를 시켜 군사를 백구(白溝)에 집결하였다가 패전하자 철수하고 말았다. 완안 희윤과 종망(宗望)이 오리질역(烏里質驛)으로 연희(延禧)를 추격하니, 연희가 달아났다. 종망이란 자는 알리불(斡离不)이다. 아골타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요를 공격하는데, 연경(燕京)에 진격하자 지추밀(知樞密) 좌기궁(左企弓) 등이 항복하였다.
과거 제가 사신 조양사(趙良嗣)를 보내어 땅을 나눌 적에 적석산(積石山) 남북의 주를 모두 요구하였으나 아골타가 적석산 남쪽의 6주만 허락하였으므로, 이때에 다시 조양사를 보내어 영주(營州)ㆍ난주(灤州)ㆍ평주(平州) 3주를 요구하였다.

5년(금 태종(金太宗) 천회(天會) 1, 1123), 과거 조양사가 가서 땅을 나눌 적에 아골타는 "연경(燕京) 땅의 조세(租稅)가 6백만 석이나 된다. 송 나라는 1백만 석만 차지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려거든 우리의 탁주(涿州)ㆍ역주(易州)와 상승군(常勝軍)을 반환하라." 하므로, 조양사가 "어필(御筆)로 20만 석을 허락하였으니, 내 임의로 더할 수는 없소." 하였었다. 양사가 떠나올 적에 아골타가 "반 달이 지나도록 조세가 도착하지 않으면 내가 군사를 이끌고 가리라." 하므로 제가 다시 조양사를 보내어 요의 세폐(歲幣) 40만 관에다 연경의 대세(代稅)를 더하여 매년 돈 1백만 민(緡)을 내고, 국경을 새로 정하고 하정사(賀正使) 및 생신사(生辰使)를 보내며, 아울러 무역도 열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아골타가 다시 군량을 요구하므로 양사를 시켜 20만 석을 허락하고 동관(童貫)과 채유(蔡攸)를 시켜 연경에 들어가 6주만 받아오게 하였다.
종망(宗望)이 백수란(白水灤)에서 연희의 부대를 대파하니, 연희가 운내(雲內)로 쫓겨가서, 아우나 아들 노릇을 할 것이니 땅을 조금 떼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연희의 아들 아리(雅里)가 서북부(西北部)에서 제라 칭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아골타가 부도난(部堵灤)에서 죽었다. 아골타가 사람을 잘 알아보아 일을 제대로 맡겼고, 조세를 많이 경감하였으며, 모든 계획에 실책이 없고, 군령을 지체하지 않았다. 나이 56에 9년을 참위(僭位)하였고, '수국(收國)' '천보(天輔)' 등의 개원(改元)을 하였으며, 시호는 대성무원황제(大聖武元皇帝), 묘호는 태조(太祖), 능호는 예릉(睿陵)이다.
아우 오걸매(吳乞買)가 즉위하였다. 오걸매의 개명은 성(晟)인데, 핵리발(劾里鉢 세조의 이름)의 넷째 아들이다. 도모(闍母)를 보내어 장각(張殼)을 치니, 장각이 패전하였는데 이는 각이 송 나라에 귀부했기 때문이다. 제가 장각의 머리를 베어서 함에 담아 보내자, 오걸매가 적석산(積石山) 북쪽의 땅을 돌려주려고 하였는데, 종한(宗翰)이 만류하여 무(武)ㆍ삭(朔) 2주만 돌려 보내고 말았다. 경원사(慶元寺)의 중이 불골(佛骨)을 바쳤으나 물리쳤다.

6년(천회 2, 1124) 하주(夏主)가 사신을 보내와서 번신(藩臣)이라 일컫고 나누어 준 땅을 받아갔다. 오걸매가 사신을 보내와서 전번에 조양사와 약속한 20만 석을 청구하므로 선무사(宣撫使) 담진(譚稹)이 주지 않으니 그길로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 연희(延禧)가 하국(夏國)으로 망명하였다가 이때에 오적렬부(烏敵烈部)로 돌아오 살며 군사를 모아 수복을 꾀하다가 패전하여 음산(陰山)으로 달아났다.

7년(천회 3, 1125), 누숙(屢宿) 등이 응주(應主)에서 연희를 사로잡아 해빈왕(海濱王)을 봉했다.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기아만(起兒漫)에서 제라 칭하였다. 종망이 동관(童貫)ㆍ곽약사(郭藥師)가 연산(燕山)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오걸매(吳乞買)에게 남침(南侵)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종한(宗翰) 등을 시켜 대거 침입케 하였는데, 동관이 태원(太原)에서 도망치자, 종한은 삭주(朔州)ㆍ대주(代州) 2주를 함락하였으며, 종망은 계주(薊州)에 침입하였다. 곽약사가 연산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는데 그로 향도를 삼았다.
제가 외구(外寇)의 잇따른 침략으로 해서 태자 환(桓)에게 선위(禪位)하고 스스로 도군황제(道君皇帝)라 일컬었다.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1년(천회 4, 1126), 종망(宗望)이 요하(遼河)를 건너 활주(滑州)를 함락하고 도성(都城)에 육박하자, 제(흠종을 말한다)가 이체(李梲)를 보내어 화친을 제의했는데, 종망이 삼진(三鎭)의 땅을 떼어 줄 것과 세폐(歲幣)를 증가할 것과 백질(伯姪)이라고 일컬을 것을 요구하므로 강왕(康王) 구(構)와 소재(小宰) 장방창(張邦昌)을 볼모로 보내었다, 그 뒤 다시 우문허중(宇文虛中)을 보내어 숙왕(肅王) 추(樞)로 볼모를 바꾸므로 강왕과 장방창은 돌아왔다. 종망이 군사를 후퇴시켜 태원(太原)을 포위하고 머물다가 얼마 후 철수하였다.
고려왕(高麗王) 왕해(王楷 해는 인종(仁宗)의 이름)가 표(表)를 올려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오걸매(吳乞買)의 사자 소중공(蕭仲恭)을 볼모로 억류해 두었는데, 그의 부사 조윤(趙倫)이 거짓으로 "금 나라의 야율여도(耶律余覩)가 거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국에 귀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제가 이 말을 곧이듣고 납서(蠟書 밀서(密書))를 써서 조윤에게 주며 여도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더니, 조윤이 귀환하자 오걸매는 종한(宗翰) 등을 시켜 하동(河東)에 침입하였다.
찰방사(察訪使) 장호(張灝) 등이 모두 패전하므로 제가 왕운(王雲)을 보내어 삼진(三鎭) 땅과 세폐를 허락하고 군사를 후퇴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종한은 태원(太原)을 함락하고 경략사(經略使) 장효순(張孝純)을 잡아갔으며 드디어 승승장구하여 황하(黃河)를 건넜다. 그리고는 삼진 땅과 부세는 언급도 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양하(兩河 하남(河南)ㆍ하북(河北)을 말한다)를 다 차지하겠다 하며, 도성(都城) 밑까지 진둔(進屯)하여 화친을 맺고서야 물러가겠다고 선언을 하므로 제가 종한의 군문까지 거둥하여 표(表)를 올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2년(천회 5, 1127), 오걸매가 제의 항표(降表)를 받고 드디어 제와 태상황제(太上皇帝 휘종(徽宗)을 말한다)를 서인으로 폐하고 장방창(張邦昌)으로 초제(楚帝)를 세웠다. 종한(宗翰) 등이 두 제 및 후비(后妃)ㆍ태자(太子)ㆍ종척(宗戚) 등 3천 명을 북으로 데리고 갔다. 강왕(康王)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건염(建炎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1년(천회 5, 1127) 제가 부방(傅雱)을 보내어 두 제의 안부를 탐문하였다. 종망(宗望)이 제(고종을 말한다)가 즉위한 소문을 듣고 상황을 돌려보내어 강화하려 하였는데, 종한(宗翰)이 허락하지 않더니 마침 종한이 죽으므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이때에 종한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서 오걸매도 영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양주(揚州)로 가자, 오걸매가 이 소문을 듣고 종한 등을 시켜 대거 침입하여 연거푸 주(州)ㆍ군(郡)을 함락하였다. 한편 과거 중경(中京)에 억류되어 있던 두 제를 다시 상경(上京)으로 옮겨 소복(素服) 차림으로 아골타(阿骨打)의 사당에 배알시키고 상황은 혼덕공(昏德公)에, 연성황제(淵聖皇帝 흠종의 시호)는 중혼후(重昏侯)에 봉하였다. 이윽고 한주(韓州)로 옮기는데, 종실(宗室)ㆍ종신(從臣) 모두를 함께 딸려보내었으나 진회(秦檜)만은 함께 보내지 않아서 나중에 도망쳐 와서 화친을 주장하였다. 한방(韓昉) 등이 비로소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3년(천회 7, 1129), 종한(宗翰)이 초주(楚州)에 침입하였다가, 초제(楚帝)가 강을 건너자 운중(雲中)으로 돌아갔다. 제가 홍호(洪皓)를 시켜 종한에게 글을 보내는데, 존호를 삭제하고 번신(藩臣)으로 일컬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완안종필(完顔宗弼)이 침입하여 백성들에게 한복(漢服)을 금지하고, 또 삭발령을 내리는데 따르지 않는 자는 죽였다. 종필이란 자는 본명이 올출(兀朮)이다. 종필 등이 군대를 나누어 남쪽으로 침입하니, 제가 월주(越州)로 가자 종필이 강을 건넜다.

4년(천회 8, 1130), 한기선(翰企先)을 시켜 비로소 국례(國禮)를 제정하였다. 종필이 악 비(岳飛)ㆍ한세충(韓世忠)에게 연패를 당하게 되자, 진강(鎭江)으로 돌아갔다. 오걸매(吳乞買)가 두 제를 오국성(五國城)으로 옮겼다. 유예(劉豫)를 제제(齊帝)에 책립(冊立)하였다.

소흥(紹興 고종의 개원) 1년(천회 9, 1131), 오걸매(烏乞買)가 야율여도(耶律余覩)를 보내어 한북(漢北)에서 야율대석(耶律大石)을 쳤다. 종필이 화상원(和尙原)으로 침입하다가 오개(吳玠)ㆍ오인(吳璘)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2년(천회 10, 1132), 반란을 모의한 야율여도를 죽였다. 드디어 요의 종실(宗室)들을 무참히 죽였다.

3년(천회 11, 1133), 살리갈(撒离喝)이 흥원(興元)으로 침입하다가 오개ㆍ유자우(劉子羽)에게 패전하였다. 종한(宗翰)이 사람을 보내어 강으로 국경을 그어 유예에게 보태어 줄 것을 제의하였다.

4년(천회 12, 1134), 오개ㆍ오인이 선인관(仙人關)에서 종망(宗望)을 크게 무찔렀다. 달불야(撻不野) 등이 대의(大義)로 침입하다가 한세충(韓世忠)에게 사로잡혔다.

5년(천회 13, 1135), 오걸매(吳乞買)가 죽었다. 오걸매가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을 매우 즐겼으며, 국가를 경제하는 규모가 상당히 볼 만하였다. 나이 61에 13년을 참위하였고, 천회로 개원하였으며, 시호는 문열황제(文烈皇帝), 묘호는 태종(太宗), 능호는 공릉(恭陵)이다.
아골타(阿骨打)의 손자 합라(合剌)가 즉위하였다. 합라의 개명은 단(亶)인데, 풍왕(豐王) 승과(繩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포채씨(蒲蔡氏)이다.
과거 오걸매(吳乞買)의 아우 고(杲)가 죽었을 적에 종한(宗翰) 등이 보반발극렬(譜班勃極烈)의 직위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 하여, 합라로 보반발극렬을 삼자고 청하므로 오걸매가 마지못해 따랐었다. 오걸매가 일찍이 이 직위에 있다가 고에게 물려 준 것으로 보아 이사(貳嗣)의 자리인 듯하다. 유예(劉豫)에게 명하여 이제 부하는 '신'이라 일컫고 '자'라 일컫지 말라 하였다. 상황(上皇)이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으니,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ㆍ치부(致賻)하였다.

6년(천회 14, 1136), 9대 조(祖)까지를 황제(皇帝)ㆍ황후(皇后)에 추존하였다.

7년(천회 15, 1137), 과거에 오걸매가 종한(宗翰)을 불러 정승을 삼고부터 병권(兵權)을 상실하였는데,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 고경예(高慶裔)가 장(贓)으로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적에 종한이 경예를 찾아가서 울며 영결하자, 경예가 종한을 보고 "당신이 일찍이 나의 말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한 것으로 보아 경예가 언젠가 종한에게 반란을 획책시킨 듯하다. 종한이 걱정하다가 밥을 굶고 죽었다. 제왕(齊王) 유예(劉豫)를 폐위하여 촉왕(蜀王)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대명력(大明曆)을 썼으니, 이는 양급(楊級)이 지은 것이다.

8년(금 희종(金熙宗) 천권(天眷) 1, 1138), 경의(經義)ㆍ사부(詞賦) 두 과로 과거를 보였다. 장통고(張通古) 등을 보내와서 화친을 제의하고 하남(河南) 땅을 돌려주는데 장통고를 강남 조유사(江南詔諭使)라고 일컬었다. 이때에 유예가 이미 폐위되었으므로 단(亶)이 연성황제(淵聖皇帝)를 남원(南原)에서 세우려다가, 화친이 이루어지므로 그만두었다.

9년(천권 2, 1139), 처음으로 조참(朝參)에 조복을 입었다. 포로호(蒲盧虎)가 오걸매의 맏아들이라 하여 거칠게 날뛰면서 달라(撻懶)와 반란을 꾀하다가 결국 베임을 당하였다. 제가 왕윤(王倫)을 보내어 〈휘종(徽宗)의〉 재궁(梓宮)을 청하였는데, 단(亶)은 왕윤까지 보내지 않고 억류하였다. 그 뒤에 왕윤에게 벼슬을 주려 하자 윤이 자결하였다.

10년(천권 3, 1140), 종망(宗望)과 살리갈(撒离喝)이 두 길로 나누어 침입하였는데 오인(吳璘)은 부풍(扶風)에서, 유기(劉錡)는 순창(順昌)에서 각각 격퇴하고 악비(岳飛)가 다시 종망을 대파시켜 쫓았다. 상경(上京)에 공자(孔子)의 사당을 세우고, 공자의 49세 손인 공반(孔璠)을 연성공(衍聖公)에 봉하였다.
11년(금 희종(金熙宗) 황통(皇統) 1, 1141), 단(亶)이 처음으로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썼다. 양기중(楊沂中)과 유기가 자고(柘橰)에서 종망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상황(上皇)을 천수군왕(天水郡王)에 추봉(追封)하였고, 연성황제(淵聖皇帝)를 천수군공(天水郡公)에 개봉(改封)하였다. 단이 친히 공자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시신(侍臣)들에게 "짐이 어린 시절에 놀기만 좋아하고 학문에 뜻을 둘 줄 몰랐던 것이 지금에 와서 깊은 후회가 된다." 하였다. 이때부터 《상서(尙書)》ㆍ《논어(論語)》ㆍ《오대사(五代史)》ㆍ《요사(遼史)》를 읽었다. 종망(宗望)이 사신 소의(蕭毅)를 보내와서 회수(淮水)로 국경을 그어 당(唐)ㆍ등(鄧) 2주와 섬서(陝西)의 남은 땅을 떼어 주고, 세폐(歲幣)를 은(銀)ㆍ견(絹) 각각 25만으로 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휘종의〉 재궁(梓宮)과 태후(太后)의 귀환을 승낙하였다. 연성황제가 본품(本品)의 녹봉(祿俸)을 청구하니, 단이 주었다.

12년(황통 2, 1142), 제가 하주(何鑄)를 보내어 서표(誓表)를 올리니, 단(亶)은 유괄(劉筈)을 시켜 휘종(徽宗) 및 현숙(顯肅)ㆍ의절(懿節) 두 후비의 재궁(梓宮)과 황태후(皇太后) 위씨(韋氏)를 보내오고, 또 곤룡포ㆍ면류관ㆍ홀[圭]ㆍ책문[冊]을 보내왔는데, 책문에 "아! 송왕(宋王) 구(構)야, 하늘이 네 나라에 불행을 내린지라 너희 스스로가 우호의 맹세를 저버리고 전복(顚覆)을 불러일으킨 까닭에 내가 군사를 동원한 지 18년이로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제 하늘이 과거를 뉘우치게 해서 네 충심을 회유시킨 바 너희가 봉주(封奏)를 올려 번신(藩臣)의 대열에 끼이기를 원하기에 너를 제(帝)로 책봉하노니 길이 나의 울타리가 되라." 하였다. 단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었다. 대신들이 이를 간하면 술을 마시게 하며 "경들의 뜻을 알겠소. 내일부터는 꼭 경계할 것이오." 하고는 그 말이 끝나면 다시 마시었다.

16년(황통 6, 1146), 단이 제의 아들 위왕(魏王) 도제(道濟)를 죽이고, 또 한림 학사(翰林學士) 우문허중(宇文虛中)을 죽였다. 허중은 사신으로 와서 벼슬을 받고 머물렀다가 이때에 화를 당한 것이다.

17년(황통 7, 1147), 단의 후(后)인 배만씨(裵滿氏)가 정치에 가담하자, 단이 그에게 제재를 받게 되어 마냥 술에 빠져 주정을 부리고, 호부 상서(戶部尙書) 종례(宗禮) 등 9명을 칼로 찔러 죽였다. 몽고(蒙古)와 강화를 하였는데, 그의 추장(酋長)이 스스로 조원황제(祖元皇帝)라 일컬었다.

19년(금 제량(金帝亮) 천덕(天德) 1, 1149), 단(亶)이 그의 아우 조왕(胙王) 상승(常勝)을 죽인 것은 병덕(秉德) 등이 그를 추대할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그 길로 화를 못 이겨 후 배만씨를 죽이고 조왕의 비(妃)인 살묘(撒卯)를 후궁으로 들였다. 평장(平章) 양(亮)이 평장 병덕(秉德) 등과 함께 단을 죽이고 뒤를 이었다. 단이 처음에는 대신을 공경하고 정사를 잘 살폈는데, 말년에 와서는 안으로 거센 후(后)에게 제재를 받게 되어 술에 빠져 함부로 사람을 죽이다가 죽음을 초래한 것이다. 나이 31에 15년을 참위하였으며, 천권(天眷)ㆍ황통(皇統) 등으로 개원하였다. 동혼왕(東昏王)으로 추폐(追廢)되었다가 나중에 시호를 효성황제(孝成皇帝), 묘호를 희종(熙宗),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올렸다.
양(亮)의 아들 원공(元功)은 본명 적고내(迪古乃)인데, 아골타(阿骨打)의 서손(庶孫)이요.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대씨(大氏)이다. 사람됨이 경망하고 잔인하였다. 단이 위를 이어받게 되자, 문득 그의 자리를 넘보았고, 평장정사(平章政事)를 거쳐 도원수(都元帥)가 되자 단도 주시하였다. 이에 양이 늘 불안해 하더니 드디어 죽이고 빼앗았다.

20년(천덕 2, 1150), 사신을 보내어 휘종(徽宗)의 옥대(玉帶)를 제에게 바치려 하는데 그의 신하 장중가(張仲軻)가 "이것은 보기 드문 보물입니다." 하자, 양은 "강남의 땅은 언젠가 우리의 차지가 되고 말 것이니, 이는 우선 외부(外府)에 보관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종실(宗室)인 오걸매ㆍ종한(宗翰)의 자손을 씨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 죽였다.
21년(천덕 3, 1151), 처음으로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다. 제가 기청사(祈請使) 무급(巫伋)을 보내어 연성황제(淵聖皇帝)의 귀환을 청하였는데 양(亮)이 "그 뒤 어느 곳에 추방되어 있는지 모른다." 하므로 급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연경(燕京)에 궁전을 크게 건축하는데 한 건물의 비용만도 억만이 되었다. 상서성(尙書省)에 명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시켜 태의(太醫)와 함께 조관(朝官)들 가운데 신병을 청탁하고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찰을 실시해 보아서 실상이 없는 자는 벌을 주라 하고 숙모(叔母) 및 종보(宗婦)ㆍ생질녀(甥姪女)를 후궁으로 들였으며, 다시 여러 종자매(從姊妹)들까지도 들였다.

23년(금 제량(金帝亮) 정원(貞元) 1, 1153), 연경(燕京)에 천도(遷都)하여 중도(中都)라 개칭하였다. 당괄정가(唐括定哥)를 귀비(貴妃)로 특봉하고, 그의 집 종인 손매(孫梅)에게 진사(進士) 급제(及第)를 특사하였다.
25년, 과거 양(亮)이 연경으로 천도를 할 적에 그의 적모(嫡母) 도선후(徒單后)를 회령(會寧)에 홀로 머물러 두므로 도선후가 늘 불안해했는데, 이때에 맞아왔다. 양이 후를 맞아들일 적에 좌우의 신하를 시켜 곤장을 올리게 하고 꿇어 앉아서 "오랫동안 문안을 빼놓았습니다. 바라건대 때려 주십시오." 하니, 후가 곤장을 올리려는 자를 꾸짖어 물리쳤다. 그 길로 공경을 다하여 후를 섬기니, 보는 사람마다 지극한 효자라고 하였다.

26년(금 제량 정륭(正隆) 1, 1156), 연성황제(淵聖皇帝)가 오국성(五國城)에서 붕하였다.

28년(정륭 3, 1158), 양이 행신(幸臣) 장중가(張仲軻)에게 "송 나라를 치려면 무슨 죄명을 씌워야 되겠소?" 하매, 중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송 나라가 말을 사들이고, 군기를 수리하고, 망명자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죄명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양은 기뻐하며 "내가 듣기에 송 나라의 유귀비(劉貴妃)라는 계집이 매우 아름답다 하는데, 이제 단번에 빼앗아 오리라. 그리고 송 나라를 멸한 뒤에 다시 고려(高麗)와 하국(夏國)을 토평하리라." 하였다. 이 일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이통(李通)이 장중가와 함께 양의 비위를 맞추어 주동한 것으로서, 적영고(翟永固)가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드디어 장호(張浩) 등을 보내어 변경(汴京)에 궁실을 건축하였다.

29년(정륭 4, 1159), 태의사(太醫使) 기재(祈宰)가 소(疏)를 올려 송 나라 정벌을 간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31년(금 세종(金世宗) 대정(大定) 1, 1161), 과거에 유기경(柳耆卿)이 망강남사(望江南詞)를 지으며 임안(臨安)의 번화한 풍경을 극구 미화하였는데, 이것이 전파됨에 따라 양이 임안을 선망해 왔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왕전(王全)을 하절사(賀節使)로 보내면서 전에게 "송 나라 임금을 보고 그 앞에서 말을 사들이고 망명자를 불러들인 죄를 문책하고, 또 회(淮)ㆍ한(漢)의 땅을 되찾되 듣지 않거든 사나운 소리로 꾸짖으라."고 일러 주었으니, 이는 분노를 격화시켜 남침의 구실을 만들려는 속셈이였다. 왕전이 하나같이 시킨 대로 하고 다시 "조환(趙桓 흠종의 이름)이 이제 죽었소." 하니 제가 비로소 연성황제(淵聖皇帝)의 죽음을 알았다.
양(亮)이 변경(汴京)으로 천도한 뒤에 적모 도선씨(徒單氏)가 여러 차례에 걸쳐 남침을 하지 말라고 간하자, 시비(侍婢) 고복랑(高福娘)을 시켜 죽였다. 양이 스스로 32총관(摠管)을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해주(海州)로 침임하였다가 주지(州知) 위승(魏勝)에게 패전하여 달아났다.
동경 유수(東京留守) 오록(烏祿)이 요양(遼陽)에서 제(帝)라 일컫고, 양이 시역(弑逆)을 저지른 큰 죄목 열 가지를 들어 포고하였다. 양이 오록의 아내 오림답씨(烏林答氏)가 자태가 매우 정숙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부르니, 오림답씨가 오록에게 "내가 가지 않으면 상(上)이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오. 내가 잘 처리해서 서로의 누가 되지 않게 하리다." 하고 떠나더니, 양향(良鄕)에 이르러서 기회를 보아 자살하였다.
양이 진군하여 강을 건넜다가 위준(魏俊)에게 패하여 다시 양주(揚州)로 달려가려고 과주(瓜州)에 주둔하였는데, 도통제(都統制) 야율원의(耶律元宜)가 양을 죽이고 스스로 부대도독(副大都督)이 되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때 양의 나이 40이었고 13년을 참위하였으며 천덕(天德)ㆍ정원(貞元)ㆍ정륭(正隆) 등으로 개원하였다. 해릉군왕(海陵郡王)에 강봉하여 시호를 양(煬)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서인(庶人)으로 폐하였다.
오록(烏祿)의 개명은 옹(雍)인데, 아골타(阿骨打)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종보(宗輔),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체모가 헌칠하고 긴 수염이 배를 덮었으며, 성품이 인효(仁孝) 명달(明達)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처음에 갈왕(葛王)으로 봉군되었다가 다시 조국공(曹國公)에 승급하였는데 양의 행동이 갈수록 거칠고 음탕해지자, 이석(李石) 등에 의해 옹(雍)이 옹립되었다.

32년(대정 2, 1162), 여러 대신들에게 "내가 이제 깊숙한 궁전 안에 들어앉고 보니 진정코 경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소 각자 좋은 의견을 생각하여 나에게 들려 주오. 내가 어찌 게을리하겠소?" 하는 유지(諭旨)를 내렸다. 제가 하즉위사(賀卽位使)로 홍매(洪邁)를 보냈는데, 적국 간의 예를 썼다 하여 사흘이나 구금하였다가 돌려보냈다. 포찰오근(蒲察五斤)이 대거 침입하여 해주(海州)를 포위하였는데, 위승(魏勝)이 이를 격퇴시켰더니, 다시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침입시켜 "송 나라가 우리의 침입한 땅을 돌려 주고 공례(貢禮)를 과거대로 한다면 군사를 철수할 수도 있다." 하는 유지를 보내왔다.
융흥(隆興 송 효종(宋孝宗)의 개원) 1년(대정 3, 1163) 발살(孛撒)이 이현충(李顯忠)과 부리(符離)에서 싸워 이현충을 크게 무찔렀다. 흘석렬지령(紇石烈志寧)이 삼성(三省)에 글을 보내어 해(海)ㆍ사(泗) 등 4주의 땅 및 세폐(歲幣), 그리고 금을 숙(叔), 송을 질(侄)로 일컬을 것, 중원(中原)에 귀순한 금 사람을 송환할 것 등을 요구하며, 이 요구를 들어 주면 즉각 군사를 철수한다고 하였다. 제가 호방(胡昉)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는데, 4주의 땅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호방을 얼마 동안 억류해 두었다가 돌려보냈다.

2년(대정 4, 1164), 대신들에게 "경들의 상주(上奏)가 모두 평범한 일이요, 치국(治國) 안민(安民)에는 언급한 적이 없으니, 이렇다면 대신의 임무를 누가 못 맡겠는가?" 하는 유지를 내리고 군사를 회수(淮水)로 진군시켜 초주(楚州)를 함락하라 하였다. 예년에 볼 수 없는 풍년이 들어서 죽을 죄를 범한 자가 겨우 17명이었다.

건도(乾道 효종의 개원) 1년(대정 5, 1165) 제가 위기(魏杞)를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는데, 국서(國書)에 "질송 황제 신(姪宋皇帝愼)은 숙대금 성명인효황제(叔大金聖明仁孝皇帝) 궐하에 재배하여 글을 올리옵니다." 하고 썼더니, 복서(復書)는 "숙대금 황제(叔大金皇帝)는 질송 황제(姪宋皇帝)에게 글을 보낸다."로 쓰고 이름과 재배ㆍ궐하 등의 말은 쓰지 않았다. 그제서야 옹(雍)이 군사를 철수하였다.

3년(대정 7, 1167), 모든 깔개[地衣]에 놓인 용무늬를 제거하게 하고, 의복을 지을 때 금실[金線]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각도(各道)에 "과거 내가 거쳐간 군(郡)ㆍ읍(邑)의 당우(堂宇)를 모두 비워 두었다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종전대로 거처하게 하라." 하는 유지를 내렸다.

4년(대정 8, 1168), 대신들에게 "내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경들과 함께 하고 있지 않는가. 되지 않을 일이 있거든 각자 내 앞에서 진술하여 부족한 점을 메워 주되 절대로 아유 구용은 하지 말아야 된다. 이제 경들이 한창 소신을 펴서 이름을 드날릴 때인데 행여 그럭저럭 안일하게 지내려 한다면 오늘의 다행은 될지 몰라도 후세에서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유지를 내리고, 다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경들이 본디부터 아는 바가 있을 터인데 기어이 타인을 시켜 추천케 하니 내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과연 훌륭한 사람이라면 혐의를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유지를 내렸다. 또 이런 말을 하였다. "남의 죄상만 탄핵하고 실행은 선양하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는 어사(御史)를 시켜 선(善)과 악(惡)을 함께 다루도록 하라."

6년(대정 10, 1170), 하국(夏國)에서 신하 임득경(任得敬)이 군주 인효(仁孝)를 위협하여, 표(表)를 올려 하국의 땅 반을 떼어 주게 하였다 하니, 옹(雍)이 "이는 권신의 억압에서이다." 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공물(貢物)도 물리쳤다.

7년(대정 11, 1171), 1품의 예의로 흠종(欽宗)을 공락원(鞏洛原)에 장사하였다.

9년(대정 12, 1172), 예사전(睿思殿)에 거둥하여 여진사(女眞詞)를 노래로 연주케 하고 아들을 돌아보며 "중국의 풍속이 여진의 풍속처럼 순실하지 못하고 문자에 있어서도 더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근본을 잊어버리는 행위이다." 하였다. 여진 사람으로서 한성(漢姓)으로 개성(改姓)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순희(淳熙 송 효종의 개원) 2년(대정 15, 1175), 고려(高麗)의 반신(叛臣) 조위총(趙位寵)이 40여 성(城)을 가지고 붙기를 청하였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3년(대정 16, 1176), 옹(雍)이 뭇 신하들과 조용히 앉아 고금(古今)의 일을 논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경적(經籍)에 보인 교훈은 매우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더라. 그러나 배워서 실천을 못한다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여진의 고풍은 글은 몰라도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친척에게 공경하고, 어른을 존대하고, 손님을 잘 접대하고, 벗끼리 신뢰하고, 예절과 정의에 관곡할 줄은 안다. 이는 모두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옛글에 실린거나 다름이 없다. 너희들은 부디 잘 익혀야 한다."
고교(高橋)에서 매(鷹)를 시험하다가 어떤 술 취한 사람이 나귀에서 떨어져 길섶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좌우 사람을 시켜 일으켜 수레에 태워 집까지 보내 주었다. 태자(太子)ㆍ제왕(諸王)에게 "모든 용도는 절약을 해야 한다. 쓰다 남은 것이 있으면 친척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낭비를 하지 말라." 타일렀다. 그리고 나서 입고 있는 어의(御衣)를 들어 보이며 "이 옷이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완전하다. 너희들은 알아 두어야 한다." 하였다.

4년(대정 17, 1177), 대신들에게 "오늘날 하급 관료들 가운데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위에 있는 자가 더러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시기하여 끌어 주지 않아서이다." 하는 유지를 내렸다.

6년(대정 19, 1179), 이때에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불교와 도교를 신봉하여 복을 받으려 하는 자가 많아서, 옹(雍)도 처음에는 자못 유혹되었으나 곧 돌이켜 재상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하늘이 군주를 세워 주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게 함인데, 만약 흥청거리고 게으름이나 피우며 요행수로 복을 받고자 한다면 이는 어려운 일이다. 과연 아랫백성을 잘 보살펴 천심에 부응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복으로써 보답할 것이다."

10년(대정 23, 1183), 여진 문자로 번역된 《효경(孝經)》1천 부를 출간하여 호위(護衛) 친군(親軍)에게 반사(頒賜)하였다.

12년(대정 25, 1185), 옹(雍)이 상경(上京) 황무전(皇武殿)에서 종실(宗室) 종부(宗婦)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관직과 상품을 차등있게 내리면서 "내가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오늘은 흠뻑 취하고 싶다. 이런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부녀 군신이 차례로 일어서서 춤을 추자 "나도 너희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리라."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의 내용이 왕업(王業)의 어려움과 계술(繼述)의 쉽지 않은 것과 또 조종(祖宗)을 상상하는 것이 마치 완연히 조상이 보이는 듯하였다. 노래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더니,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이 태평한 지가 오래여서 너희들이 사치와 방종을 하다 더러는 빈궁(貧窮)을 초래하는 자가 있으니, 내 이를 매우 불쌍히 여기노라. 부디 검소 절약하여 조선(祖先)의 고생을 잊지 말라." 태자 윤공(允恭)이 죽으니, 태자비 및 황손들에게 중국의 예의로 초상을 치르도록 명하였다.

13년(대정 26, 1186), 대신들에게 "내가 근래에 와서 오직 검소 절약에만 힘쓴 바 상시의 반찬을 네댓 가지로 줄였으나 그래도 배는 부르다. 즉위할 당시의 반찬에서 열에 일곱여덟은 감했다." 하였다. 대신들이 "천자는 평인과 다릅니다." 하자. "천자도 같은 사람인데 낭비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14년(대정 27, 1187), 수라상의 반찬 맛이 고르지 못하여 상식국장(尙食局長)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가 "우연히 노모님의 위독한 환보를 듣고 심란한 나머지 정신을 잃어서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죽여주옵소서." 하자, 옹(雍)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바로 집으로 보내어 시병(侍病)을 시키고, 병이 다 나은 다음에 돌아오게 하였다.

15년(대정 28, 1188), 여진 사람에게 남쪽 사람의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16년(대정 29, 1189), 옹이 죽었다. 옹이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남북간의 강화를 이루어 백성과 함께 휴식을 가졌으며, 뭇 신하가 제 직분을 다하고 모든 백성이 만족을 느끼어 소요순(小堯舜)이라 일컬었다. 나이 67에 29년을 참위하였으며, 대정(大定)이라 개원하였다. 시호는 인효황제(仁孝皇帝),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흥릉(興陵)이다. 손자인 경(璟)이 뒤를 이었다.
경의 소자(小字)는 마달갈(麻達葛)인데, 아버지는 윤공(允恭), 어머니는 도선씨(徒單氏)이다. 처음에 금원군왕(金源郡王)에 봉왕되어 다시 원왕(原王)에게 진봉되었고, 그 후 윤공이 죽자 황태손(皇太孫)에 책봉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위를 이어받았다. 학사원(學士院)에 명하여 한(漢)ㆍ당(唐)의 편민(便民) 제도와 오늘날의 급무(急務)를 조사하여 올리라 하였다.

소희(紹熙 송 광종(宋光宗)의 연호) 1년(금 장종(金章宗) 명창(明昌)1, 1190), 처음으로 응제(應制) 및 굉사과(宏詞科)를 설치하였다.

2년(명창 2, 1191), 근래에 과목(科目)으로써 인재를 많이 얻었다 하여 상서성(尙書省)을 시켜 더 많은 진사(進士)를 뽑아 올리게 하였는데 "이제부터 회시(會試)에 유사(有司)는 정원에 제한없이 정문(程文)에 합격된 자는 다 뽑아 올리라."는 칙령을 내렸다. 역대 제왕의 흉내를 내는 광인들의 놀이를 금지시켰다.

3년(명창 3, 1192), 재신에게 "나는 임관(任官)에 있어 한 사람을 한 관직에 오래 유임시키려 한다. 가령 적성에 맞는 사람이 한 직책에 오래 유임한다면 그 직무에 익숙해져서 마침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반대로 오늘은 예관(禮官)을 시켰다가 내일은 다시 전곡관(錢穀官)을 시킨다면 비록 특출한 인재라 할지라도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너희들은 나의 뜻을 잘 알아서 처리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문선왕묘(文宣王廟)에 봄ㆍ가을 석전(釋奠)을 올리기로 정하였다. 상서성(尙書省)에 명하여 박물 다지(博物多知)한 선비를 찾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신민(臣民)들에게 고대 제왕들의 성명과 동일한 성명을 금지시키고, 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이름은 피휘(避諱)하게 하였다.

4년(명창 4, 1193), 참지정사(參知政事) 서지국(胥持國)은 넉살 좋고 지혜로왔다. 그래서 마침 이때 이비(李妃)가 사랑을 받고 있는 것과 또 경(璟)이 색(色)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어떤 비술(秘術)로 인정을 받아서 이비와 함께 안팎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림 응봉(翰林應奉) 조병문(趙秉文)이 글을 올려 이를 논박하였는데, 병문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다가 이윽고 특명으로 풀어 놓았다.

5년(명창 5, 1194), 《숭문총목(崇文總目)》 내에서 없는 서적을 사들이게 하였다.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2년(승안(承安) 1, 1196), 처음으로 구종법(區種法)을 시행하고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다. 해당 관아에 칙서를 내려 술 만 초롱을 네거리에 내다 놓고 백성들에게 실컷 마시도록 하였다.

6년 (금 장종(金章宗) 승안(承安) 1, 1200), 본국의 혼빙례(婚聘禮)를 정하고, 할아버지 어버이 및 아내의 상(喪)에 거상하는 제도와 유복(有服)끼리 혼취(婚娶)한 자는 이혼하게 만들었으며, 진사(進士) 및 승음인(承蔭人)에게 궁전(弓箭) 시험을 실시하였다.

가태(嘉泰 영종의 개원) 1년(금 장종 태화(泰和) 1, 1201), 방량인(放良人 속량(屬良)된 사람)의 모든 과거 응시를 금하였는데 자손에게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칙령을 내려 관(官)ㆍ사(私)의 문자에 시조(始祖) 이하의 묘휘 및 자(字)를 피휘(避諱)케 하였는데 이를 범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묘휘와 음이 같은 글자도 휘하게 하였다. 또 칙령을 내려 전적(典籍)을 사들이게 하면서, 마땅히 제값을 주어 널리 수집할 것이며, 장서가가 아까와서 잘 내놓지 않는 진본은 관가에서 빌어다 등본을 하고 되돌려 주되 대가로 반값을 주라 하였다.

2년(태화 2, 1202), 완안당(完顔瑭) 등을 생일 축하사로 보내왔는데, 지금 두 나라가 우호를 맺고 있으니 사소한 문제로 큰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국운(國運)을 토덕(土德)으로 삼아 섣달을 진월(辰月 지금의 음력 3월)로 정하였다.

3년(태화 3, 1203), 선비 서민 할 것 없이 좋은 의견이 있으면 진술해 올리게 하여 채택이 된 자는 대궐에 나오게 하였는데, 그 기간에는 밥갑을 주고 관사를 제공해 주었다. 사신 완안아로대(完顔阿魯帶)가 귀국하여, 송 나라의 권신 한탁주(韓侂冑)가 북침을 꾀하고 있다고 여쭈었으나, 경(璟)은 근거없는 거짓말이라 하여 곤장을 쳤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변방의 파수를 증강하고 양양(襄陽)의 전매 시장을 금지하였다. 이것으로 해서 국경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4년(태화 4, 1204), 삼황(三皇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 오제(五帝 소호(少皥)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 사왕(四王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및 하(夏)의 태강(太康), 은(殷)의 태갑(太甲)ㆍ태무(太戊)ㆍ무정(武丁), 주(周)의 성왕(成王)ㆍ강왕(康王)ㆍ선왕(宣王), 한(漢)의 고조(高祖)ㆍ문제(文帝)ㆍ경제(景帝)ㆍ무제(武帝)ㆍ선제(宣帝)ㆍ광무제(光武帝)ㆍ명제(明帝)ㆍ장제(章帝), 당(唐)의 고조(高祖)ㆍ태종(太宗) 등 열 일곱 임금에게 처음으로 제사하였다. 송원길(宋元吉) 등을 시켜 궁정(宮庭) 및 대신(大臣)ㆍ대성(臺省)과 6부에 관한 진언(陳言)ㆍ문자를 부문별로 편집하였는데 무려 2천 권이었다.

개희(開禧 영종의 개호) 1년(태화 5, 1205), 경(璟)이 송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한다는 소문을 듣고 평장(平章) 복산규(僕散揆)에게 명하여 변(汴)에다 군사를 집결시켜 대비케 하였는데, 복산규가 이문(移文)을 띄워 맹약을 저버렸다고 문책하므로, 삼성(三省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尙書省))과 추원(樞院)이 벌써 일을 꾸민 변신(邊臣)을 출척하였고, 변에 배치한 군사도 해산시켰다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경(璟)이 군사를 철수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연이어 군사를 보내어 군ㆍ현을 함락하므로 경이 완안태평(完顔太平)을 보내어 대비하였던 것이다.

2년(태화 6, 1206), 창덕부수(彰德府守)에게 유지를 내려 한탁주(韓侂冑)의 할아버지 한기(韓琦)의 무덤을 잘 보호하여 주위의 벌채를 금지케 하고, 해당관서에 지시하여 모든 송 나라 종족(宗族)이 살고 있는 곳을 제시해 올리라 하였다. 복산규(僕散揆) 등을 시켜 군대를 9도로 나누어 침입케 하였는데 규가 회수(淮水)를 건너자 그 일대가 크게 소란하였다. 사천 선무 부사(四川宣撫副使) 오희(吳曦)가 항복하였는데 경(璟)이 나중에 촉왕(蜀王)으로 봉해 주었다. 추밀원 첨서사(樞密院僉書事) 구숭(丘崇)이 복산규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한바 규가 하채(下蔡)로 퇴군하였다. 몽고의 기악온 철목진(奇渥溫鐵木眞 원 태조(元太祖))이 알난하(斡難河)에서 스스로 제(帝)라 일컬었다.

3년(태화 7, 1207), 한탁주가 왕남(王枏)을 완안광(完顔匡)에게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다.

가정(嘉定 영종의 개원) 1년(태화 8, 1208), 경(璟)이 완안광을 시켜 이문(移文)을 띄워 한탁주의 머리를 보내주면 속(贖)으로 회남(淮南)을 땅을 내주겠다 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탁주가 죽었으므로 제가 명하여 탁주의 머리와 소사단(蘇師旦)의 머리를 보내주고 회(淮)ㆍ협(陜) 땅과 바꾸었는데 사단은 한탁주의 용병(用兵)을 방조하였기 때문이다. 경(璟)이 완안광 등에게 유지를 내려 군대를 철수하였다.
경이 죽었다. 경이 옹(雍)의 태평한 시대를 뒤이어서 예약을 바루고 형법을 닦아 전장(典章) 문물(文物)이 찬란히 법규를 이루었고, 신하들이 수십차례나 글을 올려 호를 높이자고 청하였으나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였으니 정치에만 뜻이 있었다 할 만하다. 그러나 노비와 내시가 내정을 농간하여 부당한 사람에게 뒤를 물려주므로 금원씨(金源氏)가 그 길로 쇠퇴하였다. 나이 41세 19년을 참위하고, 명창(明昌)ㆍ승안(承安)ㆍ태화(泰和) 등으로 개원하였다. 시호는 영효황제(英孝皇帝), 묘호는 장종(章宗)이며, 능호는 도릉(道陵)이다.
숙부 영제(永濟)가 뒤를 이었다. 영제의 본명은 윤제(允濟)이고, 자(字)는 흥승(興勝)이며, 옹의 일곱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키가 크고 수염이 길었으며, 천품이 검소하였다. 처음에 설왕(薛王)에 봉왕되었다가 다시 위왕(衛王)에 역봉(歷封)되었는데, 경(璟)이 아들이 없어서 종실(宗室)을 멀리하였으나 영제는 유약하고 지능이 모자랐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경이 죽자 완안광 등이 영제의 책립을 결정하였다.

2년(금 위소왕(金衛紹王) 대안(大安) 1, 1209), 당초에 경(璟)이 "나인(內人) 가운데 임신한 사람이 두 명이나 된다. 누구든 아들을 낳거든 세자로 세우도록 하라."고 유조(遺詔)를 내렸는데, 평장정사(平章政事) 복산단(僕散端)이 영제(永濟)의 뜻을 받들어 "가씨(賈氏)는 아기를 낳은 지 주년이 넘었고 범씨(范氏)는 의원의 말에 의하면 벌써 태형(胎形)을 잃었다고 합니다."고 상주하였다. 그리하여 영제는 경의 원비(元妃) 이씨(李氏)가 가씨(賈氏)를 시켜 임신하였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하여 범씨와 함께 이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을 편집하게 했다.

3년(대안 2, 1210), 몽고(蒙古)에 사신을 보내어 즉위를 알리니, 철목진(鐵木眞)이 침을 뱉으며 "나는 중국의 황제라면 하늘 나라 사람으로 알았더니, 이따위 못난 인간이 황제 노릇을 한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국교를 끊었다.

4년(대안 3, 1211), 몽고가 대거 침입하니, 서경(西京)의 여러 군(郡)ㆍ현(縣)이 적군이 이르기도 전에 맞아 항복하였다. 그 길로 중도(中都)에까지 육박하였다가 이윽고 철수하였다.

6년(금 위소왕 지령(至寧) 1, 1213), 요인(遼人)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북변 천호(北邊千戶)의 직위를 받고 몽고에 붙었다가 스스로 요왕이 되었다. 우부원수(右副元帥) 흘석렬 호사호(紇石烈胡沙虎)가 반란을 일으켜 감국(監國)을 자칭하며 무력으로 핍박하매, 영제(永濟)는 위저(衛邸)로 쫓겨났다. 호사호가 황문(黃門)을 시켜 병부[符]ㆍ옥새[璽]를 거두어들이게 하였는데, 상궁 좌부인(尙宮左夫人) 정씨(鄭氏)가 옥새를 내주지 않고 부둥켜 잡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궁중 근신으로서, 임금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때에 함께 죽지는 못하더라도 도리어 역적을 위해 옥새를 빼앗아가겠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무니, 호사호는 환자(宦者) 이사중(李思中)을 시켜 영제를 죽이고 승왕(昇王) 순(珣)을 맞아다 세웠다. 그리고 영제를 폐하여 동해군후(東海郡侯)로 삼았다가, 나중에 위왕(衛王)으로 복위시키니, 시호는 소(紹)이며, 5년을 참위하면서 대안(大安)ㆍ숭경(崇慶)ㆍ지령(至寧) 등으로 개원하였다.
순(珣)의 본명은 오도보(吾睹補)이고 후명은 종가(從嘉)인데, 윤공(允恭)의 서장자로서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다. 당초에 온국공(溫國公)에 봉군되었다가, 다시 승왕에 역봉되었고, 호사호에 의해 옹립되었다.
몽고군이 중도(中都)를 포위하자 우감군(右監軍) 출호고기(朮虎高琪)를 시켜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고기가 패전하자 호사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염려되어 드디어 호사호를 죽였다. 그리하여 간의(諫議) 장행신(張行信)이 상소하기를 "호사호가 병권을 장악하고 시해를 자행할 당시에 오직 선양(鄯陽)과 석고내(石古乃)만이 군사를 이끌고 분투하였으니, 그의 충렬에는 녹을 먹고 있는 자로서 다같이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폐하께서는 하루 빨리 이 두 사람을 포상하여 조금이나마 충혼을 위로해 주시고, 이제 호사호는 벌써 죽었으나 죄명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그의 죄상을 폭로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연좌시켜야 합니다." 하였더니, 순(珣)이 호사호의 관작을 삭탈하고, 정씨(鄭氏)를 자명부인(資明夫人)에 봉하고, 석고내에게는 증작(贈爵)하였다. 몽고군이 10여 군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해 갔다.

7년(금 선종(金宣宗) 정우(貞祐) 2, 1214), 위왕(衛王)의 딸로 공주를 삼았다. 철목진(鐵木眞)에게 화친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순(珣)이 변경(汴京)으로 천도(遷都)하자, 화친을 맺고 나서 바로 천도하였다 하여 철목진이 군사를 침투시켜 북경(北京)을 탈취하였다. 유주(濰州) 적 이전(李全)이 군사를 일으켰다.

8년(정우 3, 1215), 중도(中都)가 포위되자, 도원수(都元帥) 완안승휘(完顔承暉)가 유표(遺表)를 남기고 음독 자살하였다. 그로 해서 중도가 함락되었다.

10년(금 선종(金宣宗) 흥정(興定) 1, 1217), 고기(高琪)가 순(珣)에게 남의 나라를 침식해서 땅을 넓히자고 권유하여 양양(襄陽) 및 수주(隨州)로 침입하였다가 맹종정(孟宗政) 등에게 패하였다.

11년(흥정 2, 1218), 완안빈(完顔贇)이 대산관(大散關)을 불살랐는데 통제(統制) 왕일(王逸)이 추격하여 죽였다. 복산안정(僕散安貞)으로 좌부원수(左副元帥)를 삼아 태자 수서(守緖)와 함께 군사를 모아 침입해왔다.

12년(흥정 3, 1219), 몽고군이 남하하매 무려 30여 성이 항복하여 붙었다. 고기(高琪)가 권력을 남용하여 종을 시켜 제 아내를 죽이고 다시 그 종을 죽여 입을 막았는데, 이를 안 순(珣)이 드디어 기를 죽였다.

13년(흥정 4, 1220), 하인(夏人)이 회주(會州)를 탈취해가므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다.

14년(흥정 5, 1221), 몽고의 목화려(木華黎)가 연안(延安)에서 합달(合達)을 대파하였다.

16년(금 선종 원광(元光) 2, 1223), 순(珣)이 죽었다. 순이 정력적으로 정치를 하여 정무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잘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본성이 남을 너무 시기하고 거조에 있어도 실수가 많았다. 나이 61에 11년을 참위하였으며, 정우(禎祐)ㆍ흥정(興定)ㆍ원광(元光) 등으로 개원하였다. 시호는 성효황제(聖孝皇帝), 묘호는 선종(宣宗)이며, 능호는 덕릉(德陵)이다.
아들 수서(守緖)가 뒤를 이었다. 수서의 본명은 영갑속(寧甲速), 또 한 이름은 수례(守禮)인데, 순(珣)의 셋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처음에 수왕(遂王)에 봉군되었다가, 나중에 황태자(皇太子)로 책립되었다.

17년(금 애종(金哀宗) 정대(正大) 1, 1224), 삼베옷을 입은 어떤 남자가 승천문(承天門)을 바라보며 웃다 말고 울더니 "장상(將相)할 사람이 없어서 웃었고, 금 나라가 망할 것 같아서 울었다." 하여 대신들이 중벌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수서(守緖)가 "근간에 조서를 내려 온 백성에게 바른말을 구하고 있는 만큼, 말이 비방에 가까울지라도 벌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궁문은 쳐다보고 웃거나 우는 곳이 아니라 하고 곤장이나 쳐서 보내라." 하였다. 송 나라 국경에 접해 사는 군민(軍民)에게 방유(榜諭)를 내려 남침을 못하도록 타일렀다. 하주(夏主)가 사신을 보내어 수호를 맺었는데, '제'라 일컫고 '신'이라 일컫지 않았다.
보경(寶慶 송 이종(宋理宗)의 연호) 1년(정대 2, 1225), 포충묘(褒忠廟)를 세워 절의로 죽은 선비 열 세 사람을 제사하고, 조병문(趙秉文)ㆍ양운익(楊雲翼)을 시켜 《구경만년록(龜鏡萬年錄)》을 짓게 하였다.

2년(정대 3, 1226), 내정(內庭)에다 익정원(益政院)을 설치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 양운익 등을 설서관(說書官)으로 삼아 날마다 두 사람씩 숙직을 하며 고문에 대비케 하였는데, 운익은 학식이 넓고 바른말을 잘하여 조병문과 함께 당시의 굄을 받았다.

3년(정대 4, 1227), 몽고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이 하(夏)를 멸망시켰다.

소정(紹定 이종의 개원) 1년(정대 5, 1228), 몽고군이 대창원(大昌原)에 침입하였는데, 제공(提控) 진화상(陳和尙)이 크게 무찔렀다.

4년(정대 8, 1231), 몽고군이 변경(汴京)을 침노하였다.

5년(애종 천흥(天興)ㆍ개흥(開興) 1232), 몽고군이 균주(鈞州)에서 완안합달(完顔合達)을
대파하고 이어 그를 죽였다. 진화상(陳和尙)이 몽고군에게"나는 금 나라의 대장 진화상이다. 대창원(大昌原)ㆍ도회곡(倒回谷)의 승리도 내가 거둔 것이다. 내가 난군(亂軍) 중에 죽게 되면 남들은 나를 국가를 저버린 자라고 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히고 죽으니, 이 세상에서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외치니, 몽고군이 항복시키려 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끝내 듣지 않자 발을 자르고 입을 찢었으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굽히지 않았다.
철목진(鐵木眞)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수서(守緖)에게 항복을 권유하니 수서는 조왕(曹王) 와가(訛可)를 볼모로 보냈는데, 다시 속부대(速不臺)가 와서 무려 16일간이나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자 할 수 없이 금과 비단을 뇌물로 주었더니 그제서야 퇴군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수서는 몽고군의 재공격이 두려워서 드디어 변경(汴京)의 곡식을 헤아려 다시 관직을 팔고, 백성들로 하여금 진사(進士)ㆍ급제(及第)를 사가게 하였다. 몽고가 사신을 보내와 연합으로 금을 공격하자고 제의하므로 추신지(鄒伸之)로 하여금 몽고에 가서 회보하게 하였는데, 몽고는 성공을 한 뒤에 하남(河南)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하였다. 변경에 식량이 고갈되어 수서가 하삭(河朔)으로 떠나자, 속부대는 다시 변경을 포위하였다.

6년(천흥 2, 1233), 몽고군이 수서(守緖)를 추격하니, 수서는 귀덕(歸德)으로 달아났다. 안평도위(安平都尉) 최립(崔立)이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위소왕(衛紹王)의 태자 종각(從恪)으로 양왕(梁王)을 삼아 감국(監國)을 시키고 자신은 태사(太師)가 되었다. 원수(元帥) 포찰관노(蒲察官奴)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의 관원들을 무참히 죽였다. 최립이 속부대(速不臺)에게 항복하니, 드디어 후비(后妃)ㆍ종실 남녀 및 연성공(衍聖公) 공원조(孔元措), 명유(名儒) 양섭(梁涉), 의원(醫員)ㆍ공장(工匠)을 청성(靑城)으로 데리고 갔다. 속부대가 다시 종각(從恪)과 형왕(荊王) 수순(守純) 및 딸린 족속들을 죽이고, 후비 등은 화림(和林)으로 데려가는데, 도중의 고초가 지난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보다 휠씬 더 심하였다. 수서(守緖)가 관노(官奴)를 죽이고 왕벽(王璧)을 잔류시켜 귀덕(歸德)을 지키게 한 다음 자신은 채주(蔡州)로 갔다. 완안아호대(完顔阿虎帶)를 걸량사(乞糧使)로 보내오며, 그에게 "송 나라 사람이 나를 저버렸다. 내가 변방 장수들을 계칙하였으므로 남계(南界)의 침범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의 피폐함을 틈탄다면 이는 얕은 꾀이다. 몽고가 40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제 서하(西夏)에까지 뻗었으니, 서하가 멸망하면 우리에게로 침입할 것이요 우리가 멸망하면 반드시 송 나라로 갈 것이다. 경은 잘 이해시키라."고 타일렀는데, 조정(송(宋)을 말한다)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맹공(孟珙)과 답찰아(塔察兒)가 연합으로 서성(西城)을 함락시키니, 수서(守緖)가 시신(侍臣)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내가 큰 과오는 없었는 줄로 안다. 이제 죽어도 한될 바는 없으나, 오직 조정(祖宗)의 전통[傳祚]이 나에 이르러 끊어진데다가 그것도 과거의 황음(荒淫), 폭란(暴亂)하던 군주들이 나라를 망친 것과 같이 되었으니, 이것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망한 나라의 군주들이 남에게 잡혀 죽기도 하고 또는 포로가 되기도 하는데 나는 내 뜻이 벌써 결정되었으니 이와 같이 되지는 않으리라."

단평(端平 송 이종의 개원) 1년(천흥 3, 1234), 수서(守緖)가 원수(元帥) 승린(承麟)에게 위를 물려주었는데, 승린은 핵리발(劾里鉢)의 후손이며 백살(白撒)의 아우이다. 맹공(孟珙)이 서성(西城)을 탈취하자 수서가 유란헌(幽蘭軒)에서 목을 매고 죽으니, 11년을 참위하였고, 정대(正大)ㆍ천흥(天興) 등의 개원을 하였다. 홀사호(忽斜虎)는 여수(汝水)로 달려가 죽고, 발출로(孛朮魯) 등 5백여 명이 모두 따라서 죽었다. 승린이 유란헌에 들어가서 "선제께서 구업의 회복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로다." 하며 슬피 울고 드디어 시호를 애종(哀宗)이라 하였다. 여러 나인과 재신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주검을 거두어다 강산(降山)으로 모시어 유골을 막 묻으려고 하는데 맹공(孟珙)이 답찰아(塔察兒)와 함께 들이닥쳐서 뼈를 나누어 갔다가 그후 대리옥(大理獄)에 감추어 두었다. 승린(承麟)도 난병에게 죽임을 당하니 금은 멸망되었다.
금은 동으로 길리미올적개(吉里迷兀的改)의 모든 야인의 국경을 다 차지하고, 북으로는 포여로(蒲與路) 이북에서 화로화당(火魯火疃)의 전적지까지를 변경으로 삼아서, 바른편으로 진주(秦州)로 돌아들어 다시 임황(臨潢)을 거쳐 북으로 천산(天山) 밖을 나오면 여기서 또 동승(東勝)을 감싸고 서하(西夏)를 스쳐 황하(黃河)를 건너서면 가주(葭州)를 밟고 적석산(積石山) 밖으로 벗어난다. 그리고 적석산 이남에서 왼편으로 꺾어들어 동으로 조주(洮州)를 넘어 위수(渭水)를 따라 대산관(大散關) 북쪽에 이르러 산줄기를 옆세우고 경조(京兆)로 들어가면 당등(唐鄧)에 닿게 되는데, 회수(淮水)의 중류를 경계로 하여 수도를 다섯이나 세우고 총관부(摠管府)를 마흔이나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십구로(十九路)이다. 여기서 산부(散府)가 9, 절진(節鎭)이 36, 방어군(坊禦郡)이 22, 자사군(刺史郡)이 73, 군(軍)이 16, 현(縣)이 6백 32였는데, 나중에 다시 군(軍)은 주(州)로, 보(堡)와 진(鎭)은 현(縣)으로 승격하여, 경(京)ㆍ부(府)의 주(州)가 무려 1백 79이고, 현(縣)은 51이 늘어났으며, 책(寨)ㆍ보(堡)ㆍ관(關)이 1백 22에 진(鎭)이 4백 88이다.
상경(上京)은 곧 안출호수(安出虎水)인데, 이름은 금원(金源)이며, 회령부(會寧府)라고도 일컫는다. 동경(東京)은 곧 요양부(遼陽府)인데, 발해(渤海)의 옛땅이다. 북경(北京)은 대정부(大定府)인데 요(遼)의 중경(中京)이다. 서경(西京)은 곧 대동부(大同府)이다. 중도(中都)는 곧 연경(燕京)인데 양(亮)이 천도를 하였고, 남경(南京)은 곧 변경(汴京)인데 순(珣)이 천도를 하였다.
국민성이 사납고 인물이 대개 억세어서 형제 자질이 모두 훌륭한 장수이고, 부락(部落) 보오(保伍)가 다같이 정예화된 부대로서, 일이 없으면 부지런히 밭을 갈아 의식을 자급하고 일이 있으면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사로 잡아오며, 몸을 부지런히 하고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고 군정의 징발이나 물자의 조달에도 한 집안의 일처럼 협력한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떨치고 일어나서 적은 인원으로써 많은 인원을 제압한 것이다. 그러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종족들이 시기를 하고 장수들이 딴마음을 먹어서 끝내는 멸망하고 말았다.
군제(軍制)는 기병과 보병이 똑같이 군량과 병기를 스스로 마련하고, 부장(部長)은 발근 (孛菫)이라고 부르는데, 싸움터에 나가면 맹안(孟安)ㆍ모극(謀克)이라 한다. 맹안이란 1천 장정의 장이고, 모국이란 1백 장정의 장인데 나중에 3백 호로 모극을 삼고 10모극으로 맹안을 삼았다.
형법(刑法)은, 풍속에 가벼운 죄는 버들 회초리로 매를 치고,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이나 겁탈을 한 자는 뒤통수를 쳐서 죽이는데, 가산도 몰수하여 10에 4는 관가에 들이고 나머지 6은 고한 자에게 보상으로 주며 아울러 죄인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수(隋)ㆍ당(唐)ㆍ요(遼)ㆍ송(宋)의 법을 참고하여 과거 제도도 설치하였으며, 또 요ㆍ송의 제도를 따라 장관은 발극렬(勃極烈)이라 하여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자는 암판발극렬(諳版勃極烈), 그 다음은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極烈)이라 하였는데, 국론은 귀(貴)하다의 뜻이고 홀로는 총수(總帥)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또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을 두어 좌우에 앉혔는데 이른바 국상(國相)이다. 이상의 호칭은 단(亶)에 와서 관제를 개정하면서 모두 폐지하였으며, 오직 진무관(鎭撫官)을 독리(禿里)라 한 것과 오로골(烏魯骨) 밑에 소은탈타(掃隱脫朶)를 두고, 상온(詳穩) 밑에 마홀(麽忽)ㆍ습니곤(習尼昆)을 두었던 것은 폐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요ㆍ송의 옛 제도를 따랐다.
요의 옛 풍속을 따라 중오(重五 음력 5월 5일)ㆍ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ㆍ중구(重九 음력 9월 9일)에 배천제(拜天祭)를 지내며, 군신(君臣)의 조복(朝服), 공복(公服)ㆍ제복(祭服) 및 후비(后妃)ㆍ명부(命婦)의 복장은 모두 송 나라 제도를 썼다. 그리고 일상의 복장은 네 가지인데 띠(帶)ㆍ모자(巾)ㆍ반령의(盤領衣)ㆍ오피화(烏皮靴)와 토골건(吐鶻巾)은 검은 실로 망사처럼 비단을 짜서 만드는데, 위로 향한 모난 꼭대기를 뒤로 접어내린 다음 두 뿔에다 사방 두 치 가량의 모난 비단을 붙이고, 모난 비단 끝에다 다시 예닐곱 치 가량의 댕기를 다는데 이마까지 내려온다. 혹은 주름을 하나 넣기도 하며, 귀하고 현달한 자는 모자 꼭대기에 놓인 열십(十)의 실밥을 따라 구슬을 박는데 한 가운데에는 반드시 큼직한 구슬을 박는다. 또 댕기 가에도 구슬을 달고 수술을 맺는데 수술의 길이는 댕기의 반쯤 되어 아래로 드리워진다.
의복의 빛깔은 대부분이 희고, 3품 이상은 검은데, 좁은 소매아귀에 깃은 둥글고 소매폭은 큼직하며, 허리춤에 주름을 넣어서 치마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가슴과 어깨받이에 더러는 금실로 수를 놓기도 하는데, 길이는 갈비뼈 중간쯤 오게 해서 말타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토골대(吐鶻帶)는 옥으로 된 것이 가장 상품이며, 금이 다음이고 무소 뼈와 코끼리 뿔은 그 다음이다. 과주정(銙周鞓)은 돈잎이 작은 것은 앞뒤에 붙이고 큰 것은 뒤에 붙이며, 양 옆에 쌍수술을 달고 네모난 매듭장식에는 골아(鶻鵝)ㆍ화훼(花卉)ㆍ웅록(熊鹿)ㆍ산림(山林) 등을 새긴다. 그리고 왼쪽에는 패(牌)를 차고 오른쪽에는 칼을 찬다.
부인의 옷은 첨군(襜裙)인데, 대부분이 감자주빛이며, 위에는 꽃가지를 수놓고, 전신에 여섯 겹의 주름을 잡는다. 웃옷은 단삼(團衫)이라 하는데 감자주빛, 또는 아청빛이나 검은 빛의 비단을 쓰며, 곧은 깃에 오지랖은 왼쪽으로 여미고, 겨드랑을 꿰맨 양 옆에 다시 쌍주름을 넣는다. 그리고 앞자락은 땅에 닿고 뒷자락은 땅에 끌리게 한다. 댕기는 적황색의 비단을 쓰는데, 늙은이는 검은 빛의 비단을 상투에 감고 옥전(玉鈿)을 꽂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가 요의 복제이다. 시집간 여자의 옷은 붉은빛 또는 은갈색이나 연한 금빛의 비단을 쓰는데 오지랖은 마주 여미고 깃에다 채색을 넣는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금이 처음 일어날 적에 천하에서 막강하였다. 그러나 아골타(阿骨打)ㆍ오걸매(吳乞買)가 위력으로 중국을 제압한 다음 요의 고사를 본받아 초(楚)와 제(齊)를 세워 그대로 두고 떠나갔는데도, 송 나라가 강하지 못해서 드디어 옛땅(제(齊)ㆍ초(楚))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단(亶)ㆍ양(亮)의 포학으로 해서 거의 무너뜨린 왕업을 옹(雍)이 다시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잘살게 하였으니 금의 운명이 1백 년이나 연장된 것도 그의 덕화가 인심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璟)은 더 잘해 볼 뜻은 있었으나 좋지 못한 일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민력이 고갈되어서 영제(永濟) 시대에 벌써 망할 징조가 보였고, 순(珣)이 남도(南渡)를 하고 나서는 근본을 버렸으므로 스스로 토붕지세(土崩之勢)를 불렀다. 수서(守緖)는 나라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다 끝내는 죽었으니,"한 나라의 군주라면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도리를 다한 사람을 이제 비로소 보았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주D-001]빈철(賓鐵) : 단단하게 제련된 쇠인데, 요의 별호가 빈철이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2]불골(佛骨) : 석가불(釋迦佛)의 뼈로, 즉 사리(舍利)를 말한다. 《法苑珠林》
[주D-003]《숭문총목(崇文總目)》 : 송(宋) 왕요신(王堯臣) 등이 인종(仁宗)의 칙령을 받아 편찬한 서목으로서, 당시 소문(昭文)·사관(史館)·집현(集賢)·비각(祕閣) 4관의 장서 3만 6백 69권의 서명이 수록되어 있다.《四庫全書提要 史部目錄類》
[주D-004]구종법(區種法) : 영농의 한 방법인데, 오늘날의 점파법(點播法)과 비슷하다. 즉 밭 한 이랑을 1자[尺] 5치[寸] 간격으로 1자 깊이의 구덩이를 판 다음 인분 및 퇴비를 넣고 씨를 심는 방법이다.《農政全書 農藥訣 田制》
[주D-005]승음인(承蔭人) : 과거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 및 할아버지의 공훈으로 얻은 벼슬, 즉 음관(蔭官)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