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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40

요사지리지 동경도: 동경요양부, 개주, 정주, 진주, 노주, 흥주, 내원성, 숭주, 해주, 녹주, 현주, 솔빈주 등 전문 번역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국(周國)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었는데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 세를 전하여 연국(燕國)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설치하였다. 진국(秦國) 때에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속하였다. 한국(漢國) 초기에 연국 사람 위만(滿)이 옛 진국(秦國)의 공터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의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후한국(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 2009. 11. 22.
요사지리지 상경도: 상경임황부, 조주, 회주, 경주, 태주,장춘주, 오주, 영주, 의곤주, 용화주, 강성주, 요주, 두하군주 전문 번역 상경임황부 상경림황부(上京臨潢府). 원래 한국(漢)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의 땅이다. 신국(新)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으로 고쳤었다. 태조(太祖)는 천제산(天梯)과 박라산(博囉) 등 3개의 산의 기세를 위전(葦甸)에서 취하여 금착전(金齪箭)을 쏘아 그것을 깨달아 룡미궁(龍眉宫)이라고 하였다. 신책(神冊) 3년에 그곳에 성을 쌓았고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천현(天顯) 13년에 이름을 상경(上京)으로 바꾸었고 부(府)를 림황(臨潢)이라고 하였다.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 太祖取 天梯 博囉 等三山之勢于葦甸, 射金齪箭以識之, 謂之龍眉宫. 神冊三年城之, 名曰皇都. 天顯十三年, 更名上京, 府曰臨潢. 래류하(淶流河)가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상경(上京)의 3면을 에워쌓고.. 2009. 11. 22.
요사 지리지 서문 제(帝) 요(堯)는 천하를 가지런히 하여 9개의 주(州)로 하였다. 순(舜)은 기주(冀)와 청주(青)의 땅이 커서 유주(幽) 병주(并) 영주(營)로 나누어 12 주(州)로 하였다. 유주(幽州)는 발해(渤)와 갈석(碣)의 사이에 있고, 병주(并州)는 북쪽으로 대군(代)와 삭방(朔)이 있으며, 영주(營州)는 동쪽으로 요해(遼海)에 미친다. 그 땅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그 백성은 창과 방패를 잡고 무위(武衛)를 떨치며 풍기(風氣)가 굳세니 예로부터 무(武)를 다스리는 땅이다. 태조(太祖)는 덕렬륵(徳哷勒, 혹은 첩랄(叠剌) 혹은 질랄(迭剌)) 부락 백성을 가지고 약니씨(約尼氏, 또는 요련씨遙輦氏)를 대신하여 림황(臨潢)에서 일어나 황도(皇都)를 건설하였다. 동쪽으로 발해(渤海)를 병탄하여 .. 2009. 11. 22.
신당서 지리지 가탐도리기 一曰, 營州入安東道. 영주에서 출발하여 안동도호부로 가는 길 二曰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 등주에서 바닷길로 고구려와 발해로 가는 길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고 그 서쪽은 해(奚)이며 그 동쪽은 거란(契丹)이 떨어져 있다. 영주(營州)에서 북쪽으로 400리를 가면 황수(湟水)에 이르고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한 (연군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서 요수(遼水)를 건너면 옛날 한국(漢)의 양평성(襄平城)이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까지 500리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까지 800리이고,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서쪽으로 옛 중.. 2009.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