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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21

조선역사지도첩과 고구려영토: 남한의 역사학계는 반성해야만 한다. 고구려 영토는 6세기 말~7세기 초 중국 흑룡강성과 내몽골자치주와 요녕성은 물론이고 연해주까지로 되어있다. 식민사학에 물들어 일본의 역사해석을 그대로 베껴쓰고 있는 게을러빠진 현재 남한의 역사학계는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BC 30세기에 건국된 전조선은 BC 15세기 후조선으로 교체되었고 이 시기에 고대국가인 부여가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북부여는 후부여라고 한 듯 하다. 전조선의 수도가 현재 북한의 평양이라고 한 것으로봐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게 깔려있으니 틀렸다. 단군조선의 수도는 현재 홍산문명지와 하가점하층문화지역으로 요하 상류와 대릉하 상류지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09. 12. 15.
고구려 임금이 기산(箕山)에서 사냥한 까닭은.. 고구려 임금은 기산(箕山)에서 사냥을 하곤 하였습니다. 기산(箕山)의 箕는 기자(箕子)의 箕와 같은데 이상하죠. 왜 그랬을까요? 해답은 고려사에 있습니다. 俠溪縣本高勾麗水谷城縣[一云買且忽.]新羅景德王改名檀溪爲永豐郡領縣. 高麗初更今名. 顯宗九年來屬後置監務. 有北蘇宮闕舊基.[北蘇卽縣之箕達山辛禑時據道詵密記遣權仲和等審得之與左蘇白岳山右蘇白馬山爲三蘇.] 협 계현은 본시 고구려 수곡성현이다(매차홀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개명하기를 단계(檀溪)라 하였고 영풍군에서 다스린 현이다. 고려 초에 다시 이름을 고쳐 지금과 같이 하였다. 현종 9년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북소궁궐(北蘇宮闕) 터가 있다(북소는 기달산(箕達山)을 두고 한 말인데 고려 우왕(禑王) 때에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의거하여 권중화 등을 파견 조사케 .. 2009. 12. 14.
고구려에도 상경 중경 하경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가끔가다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중국은 제가 알기로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있다고 하죠.우리나라도 고려중기와 중세조선을 지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대에 앞쪽을 북쪽으로 보았던 것 같고, 그렇기에 하평양(下平壤)이 남평양(南平壤)이 되는 것입니다. (이하 글에서는 "앞쪽=위쪽"으로 봤다는 전제가 들어갑니다) 고구려 사람이 생각하는 앞쪽은 북쪽고구려는 어떤 책력을 사용하였을까요?해동역사에서 유환기문(游宦記聞)의 기록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해동역사 권17 성력지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가 뜨고 .. 2009. 12. 12.
서옥저(西沃沮)의 위치 태조대왕은 영토를 확장하여 동옥저와 창해와 살수에 까지 이르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태조대왕이 멸망시킨 동옥저라는 나라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었을까? 식민사학자들은 동옥저를 강원도로 보고 있고, 더 나아가 창해를 동해바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모두 틀렸다. 한편, 기원전 128년에 예국(濊)의 군장 남려(南閭)가 한국(漢國)로 투항하여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을 윤내현 교수는 천진시 남쪽에 있는 창주(滄州)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옥저를 멸하고 동쪽으로 창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는 말은 창주(滄州)와 신해(新海)의 동쪽 해안까지 영토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진 남쪽이 바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동옥저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는 생각보다 서쪽에 있었.. 2009.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