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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진서 숙신(肅愼) 열전 전문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6.
석계룡이 사신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나 소와 말이 항상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간 보고서, 대국(大國)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떄문에 왔습니다.”하였다 한다.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지금의 백두산을 지칭함)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60일 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 지금의 송화강을 지칭함)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리에 뻗쳐 있다. 사람들은 깊은 산과 골짜기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 여름철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철에는 땅굴에서 산다.

북쪽은 약수(弱水, 지금의 송화강을 지칭함)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리에 뻗쳐 있다. 사람들은 깊은 산과 골짜기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 여름철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철에는 땅굴에서 산다.

그 나라에서는 부자가 대대로 세습하여 군장(君長)이 된다. 문자가 없기 때문에 언어로 약속을 한다.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단지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을 짜서 베(布)를 만든다. 낙상(雒常,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의 일종)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가 새로 제위(帝位)에 오르면 그 나무에 껍질이 생겨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우물이나 부엌이 없으며, 질그릇으로 만든 솥을 만들어 4~5되의 밥을 담아서 먹는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뻗고 앉으며, 발에 고기를 끼워 놓고 씹어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올라 앉아서 체온으로 녹인다. 그 지방에서는 소금과 철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 즙을 받아서 먹는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묶고(편발編髮), 베로 지름이 한자 쯤 되는 가리개를 만들어 앞과 뒤를 가리운다. & 혼인하러 갈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는데, 여자가 결혼을 승락하면 그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에 예를 갖추어 맞아온다. 부인(婦人)은 정숙한 반면 처녀는 음란하며, 건강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는 천하게 여긴다. 죽은 사람은 죽은 그 날에 곧 바로 들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짜 맞추어 작은 곽(槨)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슬퍼하거니 울지 않는데, 이러한 사람은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인다

그 때문에 비록 들에다 놓아 두어도 훔쳐가지 않는다. 숙신에는 돌로 만든 살촉(石砮)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석자 다섯치의 단궁(檀弓)과, 한 자(尺) 몇 치(咫)쯤 되는 길이의 화살(고시楛矢)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하여야 한다. 주(周) 무왕(武王) 때에 그 화살(楛矢)와 화살촉(石砮)를 바쳤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던 때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다.

그 뒤 천 여년 동안은 비록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강성한 세력으로도 그들을 오게 하지 못하였다. 문제(文帝)가 위(魏)의 정승이 되었을 때인 위나라 경원(景元, A.D.260~263; 고구려 中川王13~16)말경에 고시(楛矢), 석노(石砮), 궁갑(弓甲), 초피(貂皮) 따위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위의 황제는 그 물건들을 승상부(丞相府)에 보내도록 명하고, 숙신의 왕 녹(傉)에게는 닭, 비단, 모직물, 솜을 하사하였다. 무제(武帝)의 원강(元康, A.D.291~299; 고구려 西川王 22~烽上王 8)초에 다시 와서 공물을 바쳤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진나라를 중흥시키자, 또 강좌(江左)에 와서 그 석노(石砮)를 공물로 바쳤다.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서는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통호(通好)하여 조공하였는데, 4년 만에 비로소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