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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위서 물길(勿吉) 열전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6.
본래 가지고 온 배를 타고 그 나라에 이르렀다. 9년(A.D.485 ; 고구려 장수왕 73)에 다시 사신 사니지(俟尼支)를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그 다음해에 다시 입공(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능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노루국(魯婁國), 우진사국(羽眞俟國)이 있는데, 잇달아 각기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태화(太和) 12년(A.D. 488 ; 고구려 장수왕 76)에 물길에서 다시 사신을 경사에 파견하여 활(楛矢)와 방물을 바쳤다. 17년(A.D. 493 ; 고구려 문자왕 2)에 또 사신 파비(婆非) 등 5백 여 명을 파견하여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경명(景明) 4년(A.D. 503 ; 고구려 문자왕 12)에 다시 사신 사력귀(俟力歸) 등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이 때부터 정광(正光) 연간(A.D. 520~524 ; 고구려 안장왕 2~6)이 끝날 때까지 공물과 사신이 서로 왕래하였다. 그 뒤 중국이 어지러워지면서 한참 동안 오지 않다가, 흥화(興化) 2년(A.D. 540 ; 고구려 안원왕 10)6월에 사신 석구운(石久云) 등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으며, 무정(武定) 연간(A.D. 543~549 ; 고구려 안원왕 13~양원왕5)까지 끊이지 아니하였다.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肅愼國)의 지역이다. 읍락(邑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만이 다르다. 두모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낙양(洛陽)에서 오 천리 떨어져 있다. 화룡(和龍, 지금의 朝陽일대)에서 북으로 2백 여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고, 그 산에서 북으로 13일을 가면 기려산(祁黎山)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7일을 가면 여락환수(如洛環水)에 이르니, 강 폭이 1리 남짓이다. 다시 북으로 15일을 가면 태로수(太魯水)에 이르고, 다시 동북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은 3리 남짓이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 지금의 송화강을 지칭함)이다. 땅은 낮고 습하며 성을 쌓아 동굴생활을 하는데, 집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 그 나라에는 소는 없는데, 수레와 말은 있다. 밭갈 때는 사람 둘이서 끌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 곡식은 보리와 기장이 있고 채소는 아욱이 있다. 물의 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소금은 나무에서 생산된다. 또 짠 물이 고여 있는 못도 있다. 돼지는 많으나 양은 없다. 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 마시기만 하면 취한다. 부인은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남자들은 돼지나 개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 결혼 첫날 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잡았다가 그만두면 곧 정혼이 되어 이내 부부가 된다. 오줌으로 세수하고 머리에는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활로 사냥을 잘하니 활의 길이는 3자요, 화살 길이는 1자 2치인데, 돌로 화살촉을 만든다.

부모가 봄이나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묻고는 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비나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한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에 죽으면 그 시체를 이용하여 담비를 포획하는데, 담비가 그 살을 뜯어먹다가 많이 잡힌다. 해마다 7, 8월이면 독약을 제조하여 화살촉에 묻혀 두었다가 새나 짐승을 쏘는데, 맞기만 하면 바로 죽는다. 독약을 다리는데 그 약 기운은 사람도 능히 죽게 한다. 나라 남쪽에는 도태산(徒太山, 지금의 백두산을 지칭함)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대백(大白)]으로,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사람을 해쳐 사람들이 산에서는 오줌이나 대변을 보지 못한다. 산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소변, 대변을 물건에 담아 가지고 간다. 지난 정흥(廷興, A.D. 471~475 ; 고구려 장수왕 59~63)중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태화(太和, A.D. 477~499 ; 고구려 장수왕 65~문자왕 8) 초에 또 말 500필을 바쳤다. 을력지는, “처음 나라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難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오르다가 태진하(太沴河)에 이르러 배를 물속에 감추어 두고, 남으로 육로를 걸어서 낙고수(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화룡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10부락을 함락하고, 은밀히 백제와 함께 물길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고, 을력지를 대국(大國)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를 청한다.”하였다. 이에 조칙으로,“세 나라는 똑같은 주변 나라의 신하로서 마땅히 서로 화순(和順)해야 할 것이니, 서로 침입하지 말라.”하였다. 을력지가 이에 돌아가는데, 그가 온 길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