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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위만조선의 배신자들(한사군은 하북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퍼온곳 http://cafe.naver.com/whqusgh/2204


<한(漢)나라에 투항하여 봉후(封侯)된 자들>
-위만조선의 배신자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한(漢)나라에 투항하여 봉후(封侯)된 자는 모두 다섯명이
다.

상(相) 한음(韓陰) 혹은 한도(韓陶) -> 적저후(荻詳侯)
공로 : 조선의 상(相)으로서 한병(漢兵)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자 항복하였다.
식읍 : 발해(勃海) 540戶
기간 : 元封 三年 四月 丁卯일에 봉후되어 19년을 해먹다가, 延和 二年에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장군 왕협(王 ) -> 평주후(平州侯)
공로 : 조선 장수로서 한병(漢兵)이 이르자 항복하였다.
식읍 : 태산 양부현(泰山 梁父縣) 1,480戶
기간 : 元封 三年 四月 丁卯일에 봉후되어 1년 후에 사망하였고, 후사가 없어 후국(侯國)은
삭제되었다.

이계상(尼谿相) 삼(參) -> 획청후( 淸侯)
공로 : 사람을 시켜 왕 우거(右渠)를 살해하고 투항하였다.
식읍 : 제(齊) 1,000戶
기간 : 元封 三年 六月 丙辰일에 봉후되어 11년을 해먹다가, 天漢 二年 조선의 달아난 포로
를 숨긴 죄로 하옥되어 병사하였다.

상(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 -> 온양후(溫陽侯) 혹은 날양후(涅陽侯)
공로 :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은 한병(漢兵)이 이르자 제일 먼저 항복하였다. 도중에 죽
어 그 아들을 侯로 봉하였다.
식읍 : 제(齊)의 남양군(南陽郡) 날양현(涅陽縣)
기간 : 元封 四年 三月 壬寅일에 봉후되어 5년을 해먹다가, 太初 二年(한서에는 太初 元年
으로 되어 있으나 太初 二年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에 죽었다. 후사가 없어 후국(侯國)은
삭제되었다.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 -> 기후(幾侯)
공로 : 조선의 왕자(王子)로서 한병(漢兵)이 조선을 포위하자 항복하였다.
식읍 : 하동(河東)
기간 : 元封 四年 三月 癸未일에 봉후되어 2년 후인 元封 六年에 조선으로 하여금 모반하도
록 부추겨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후국(侯國)은 삭제되었다.
* 조선 부흥운동을 한 것인지, 모반죄를 덮어 씌워 죽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후국(侯國) 봉지는 사기의 공신표 설명에 나온 내용을 읽어보면 방(方) 삼십리 정도
의 좁은 곳에 지나지 않으며, 봉록은 제사를 겨우 받들 수 있을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다섯명 중 2명은 죄를 받아 죽었고, 나머지 3명의 봉작도 당대에 그쳤다.

조법종은 최(最)와 장항(長降)이 봉후(封侯)된 시기가 원봉 4년임을 들어, 위만조선이 멸망
한 것은 원봉 3년이 아니라 원봉 4년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은 위만조
선이 멸망하기 전에 설치되었으며, 현도군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원봉 4년에 설치되었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사기의 기술대로 위만조선이 멸
망한 후 낙랑군 등이 설치된 것으로 본다.(원봉 3년) 최(最)와 장항(長降)은 위만조선 멸망
후에 봉후된 것으로 본다.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左將軍已幷兩軍,卽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 〔一〕相與謀曰:「
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幷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 ,路
人皆亡降漢.路人道死.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
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二〕相路人之子最〔三〕告諭其民,誅成巳
,以故遂定朝鮮,爲四郡.〔四〕封參爲 淸侯,〔五〕陰爲荻詳侯,〔六〕 爲平州侯,〔七
〕長〔降〕爲幾侯.〔八〕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侯.〔九〕

〔一〕集解漢書音義曰:「凡五人也.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 音頰.」索隱應 云:「凡
五人.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也.路人,漁陽縣人.」如淳云:「相,其國宰相.路人,名也
. 音頰,一音協.」

〔二〕集解徐廣曰:「表云『長路』.漢書表云『長 』,音各.」索隱案:漢書表云「長 」
,音各.

〔三〕索隱路人子也,名最.

〔四〕集解眞番,臨屯,樂浪,玄 也.

〔五〕集解韋昭曰:「屬齊.」索隱參, 淸侯.韋昭云「縣名,屬齊」.顧氏 音獲.

〔六〕集解韋昭曰:「屬勃海.」索隱陰,荻詳侯.晉灼云「屬勃海」.荻音狄,詳音子餘反.

〔七〕集解韋昭曰:「屬梁父.」索隱 ,平州侯.韋昭云「屬梁父」.

〔八〕集解韋昭曰:「屬河東.」索隱長,幾侯.韋昭云「縣名,屬河東」.

〔九〕集解韋昭曰:「屬齊.」索隱最,涅陽侯.韋昭云「屬齊」也.

좌장군은 두 군사를 합쳐 이내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협(王 )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우리는 누선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누선은 체포되었고 좌장군이 누선의 군사들까
지 합쳐서 장차 싸움이 더욱 급해질 것이니, 우리는 능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그러나
왕은 항복을 허락하려 하지 않는다."하였다. 한음(韓陰), 왕협(王 ), 노인(路人)은 모두 도
망하여 한(漢)나라에 항복했는데, 노인(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이계상(尼谿相) 삼(參)은 이에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왕험성(王險城)은 함락되지 않고,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사(成
巳)는 또다시 반하여 거듭 관리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상(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잘 타이르게 하고 성사(成巳)를 죽였
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네 군(四郡)을 만들었다.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 淸侯)를 삼고, 음(陰)을 적저후(荻詳侯)를 삼고, 협( )으로 평
주후(平州侯)를 삼고, 장항(長降)으로 기후(幾侯)를 삼았다. 또 최(最)는 그 아비가 죽었을
뿐 아니라 자못 공이 있다고 해서 온양후(溫陽侯)를 삼았다.

* 우거왕의 아들 이름은 장(長)인지 장항(長降)인지 장각인지(師古曰:「 音格,又音
各.」) 장로(長路)인지 장락(張洛)인지 확실치 않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음으
로는 '장각'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 한음(韓陰)이 봉후된 것이 적저후(荻詳侯)인지 추저후(萩詳侯)인지도 잘 모르겠다.

* 끝까지 저항한 우거왕의 대신(大臣) 이름은 사기에는 성사(成巳)로 나와 있고, 한서에는
성이(成已)로 나와 있으며, 혹은 성기(成己)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
다. <잡담> 성사(成巳)와 성기(成己)의 중간인 성이(成已)로 볼까나? 이런 것을 중용(中
庸)을 지킨다고 하는가? :)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一〕當待左將軍,擅先縱,
失亡多,當誅,贖爲庶人.

〔一〕索隱蘇林曰:「縣名.度海先得之.」

좌장군을 불러들여서, 공을 다투노라 서로 시기하여 계책을 어그러트렸음을 물어 기시(棄
市)의 형에 처했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洌口)에 이른 후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는데, 멋대로 먼저 나가 공격을 개시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음을 물어 마땅히 죽일 것이
나 용서해서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太史公曰:右渠負固,國以絶祀.涉何誣功,爲兵發首.樓船將狹,〔一〕及難離咎.悔失番
,乃反見疑.荀 爭勞,與遂皆誅.兩軍俱辱,將率莫侯矣.

〔一〕集解徐廣曰:「言其所將卒狹少.」

태사공이 말한다. "우거(右渠)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섭하(涉何)는 공을 도둑질 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다. 누선(樓船)의 좁
은 통솔은 재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깝게 번우(番 )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게 되었
다. 순체(荀 )는 전공을 다투다가,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양군
(兩軍)이 모두 욕을 보았으니, 어찌 본받을 제후가 없었는가?"

* 將率莫侯矣의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다. '장차 거느릴 장수가 없었다.'라고 번역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장수로서 봉후(封侯)된 사람이 없었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문을
잘 아시는 분들의 가르침을 바란다.


* 아래는 사기와 한서의 공신표를 읽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때에 따라 표에서는 생략된 '
元封三年' 등의 연대를 적어 넣었다.


史記
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


國名:平州
索隱表在梁父.
侯功:以朝鮮將漢兵至降侯.
元封三年四月丁卯,侯 元年.
集解如淳曰:「 音頰」.
元封四年,侯 薨,無後,國除.

國名:荻詳
索隱音狄 .表在勃海.
侯功:以朝鮮相漢兵至圍之降侯.
元封三年四月,侯朝鮮相韓陰元年.

國名: 淸
索隱表在齊. 音獲,水名,在齊.又音乎卦反.
侯功: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來降侯.
元封三年六月丙辰,侯朝鮮尼谿相參元年.

國名:幾
索隱音機.表在河東.
侯功:以朝鮮王子漢兵圍朝鮮降侯.
元封四年三月癸未,侯張 歸義元年.
索隱韋昭云:「 ,姑洛反.」
元封六年,侯張 使朝鮮,謀反,死,國除.

國名:涅陽
索隱表在齊,志屬南陽.
侯功:以朝鮮相路人,漢兵至,首先降,道死,其子侯.
元封四年三月壬寅,康侯子最元年.
太初二年,侯最死,無後,國除.


漢書卷十七
景武昭宣元成功臣表第五


號諡姓名:將梁侯楊僕
功狀戶數: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 敵侯.
始封:元狩六年三月乙酉封,四年,元封四年,坐爲將軍擊朝鮮畏懦,入竹二萬箇,贖完爲城旦

師古曰:「箇,枚也.音古賀反.」

號諡姓名:平州侯王
如淳曰:「 音頰.」
功狀戶數:以朝鮮將,漢兵至,降,侯,千四百八十戶.
始封:元封三年四月丁卯封,四年薨,亡後.
食邑:梁父

號諡姓名:荻詳侯韓陶
師古曰:「荻音狄.詳音七余反.」
功狀戶數:以朝鮮相將,漢兵圍之,降,侯五百四十戶.
師古曰:「爲相而將朝鮮兵.」
始封:元封三年四月丁卯封,十九年,延和二年薨,封終身,不得嗣.
食邑:勃海

號諡姓名: 淸侯參
師古曰:「 音獲,又音胡卦反.」
功狀戶數: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降,侯,千戶.
始封:元封三年六月丙辰封,十一年,天漢二年,坐匿朝鮮亡虜,下獄病死.
食邑:齊

號諡姓名:幾侯張 
師古曰:「 音格,又音各.」
功狀戶數:以朝鮮王子漢兵圍朝鮮降侯.
始封:元封四年三年癸未封,六年,使朝鮮,謀反,格死.
* 세연의 주 : 한서 공신표에는 '三年癸未封'이라고 되어 있다. 조법종은 이 '三年'을 '四年'
의 오기라고 보았으나, 공신표를 잘 보면 '三月'의 오기임을 알 수 있다. 앞에 '四年'은 생략
되어 있다. 원봉 4년 3월 계미일에 봉후된 것이다. 간지를 살펴 보아도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와 같이 고쳐 읽어야 한다.
始封:元封四年三月癸未封,元封六年,使朝鮮,謀反,格死.
食邑:河東

號諡姓名:涅陽康侯最
功狀戶數:以父朝鮮相路人,漢兵至,首先降,道死,子侯.
始封:元封四年三月壬寅封,五年,太初元年薨,亡後.
食邑:齊


자치통감

封參爲 淸侯,〔功臣表: 淸侯食邑於齊. ,音獲,又戶卦蒜.〕陰爲萩詳侯,〔班書功臣
表作「荻詳侯」,食邑於勃海.此從史記作「萩」,音秋.詳,子餘蒜.〕 爲平州侯,〔功臣
表:平州侯食邑於泰山梁父縣.〕長爲幾侯,〔功臣表作「幾侯張洛」,食邑於河東.〕最以父
死頗有功,爲涅陽侯.〔涅陽縣屬南陽郡.涅,乃結蒜.〕

漢紀 第021卷 漢紀十三 (bc109 bc99)  《世宗孝武皇帝下之上》 三年 p-0689

  左將軍已幷兩軍,卽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考異曰:漢書「陰」作「陶」,今
從史記.〕尼谿相參,將軍王 〔應 曰:凡五人;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師古曰:相路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