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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정인보 선생이 밝힌 평양토성 출토 소위 낙랑 봉니(封泥)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저자: 봉오선생

출처: http://cafe.naver.com/manchuria


1.  글 머리에

   요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자주 들여다 보는 구이넷(coo2.net)이란 사이트가 있다.   필자도 가끔 그곳에 들어가 잡문을 기고한 바 있다.

   거기에는 옛날 평양 일대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입증하는데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낙랑 봉니가 모두 가짜였음을 북한에서 밝힌 것처럼 소개가 되었으나 사실은 그같은 위조 주장은 정인보 선생께서 이미 밝히셨음을 그 분의 저서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확인하였으니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쓴다.  다만 《조선사연구》라는 책이 출간된 것은 1946년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그 책의 초고가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분께서는 연희 전문에서 교수를 하신 바 있으니 혹시 그 제자분들이 북한으로 가서 그 설에 기초하여 하나의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구이넷에 소개된 북한에서 주장하는 낙랑봉니 위조설의 근간은 정인보설에 근거를 두고 있한 인상이 짙은데다가 그 책이 만들어진 해가 1948년 《조선고고학연구》에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정인보 선생의 글은 정말로 익히가 무척 어렵다.  당신께서는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쓰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이는 나중에 우리 나라의 학자들에 의해 정규 대학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자기들식으로 논문다운 논문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비판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양명학자로서 일생 동안 한문 공부만을 하시던 분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하여 제대로 서구식 공부를 하려다가 부친의 사망으로 중도에 그만 두고 귀국 하는 바람에 유학 기간은 겨우 8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그분이 연희 전문에서 교수까지 하신 분인데 대학에서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나 생각된다.

   정인보 선생의 글은 여려운 국한문으로 써 있는데다가 문단을 잘 나눈다거나 소제목을 달지 않아 요즘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불편하다.  또한 서명 · 편명 따위를 표시하는 문장부호인 서명호(書名號)를 사용하지 않아 책 이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고유명사를 말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원문은 가급적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도 붙임과 동시에 어렵게 쓴 곳은 현재 우리말로 풀어서 알기 쉽도록 설명하려고 하였고, 서명 편명에 대해서는 서명호를 붙였다.  이 글을 싣는 도구인 스마트에디터(SmartEditor)는 한자 지원이 제대로 안되어 어려움이 많다.  필자는 이미 중국 번체자 폰트를 다운받아 기존의 상용한자 폰트에 합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한자든지 지원이 가능하다.  또한 벽자나 이체자가 있는 경우에는 가능한 한 원형을 살려서 원문 자료에 충실을 기하도록 하였다.

   정인보 선생이 쓰신 《조선사연구》 상 · 하권은 해방공간에서 편찬된 책이라 종이의 질도 문제지만 당시 무질서한 세태를 반영하듯 본문에 오자 · 탈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은 고문서 취급 사이트인 고고북을 통해 입수한 것인데 발간된지 60년이나 되어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손만 대만 책장의 가장자리가 부스러져 나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2.  봉니에 대한 개념 정리

   봉니(封泥)에 대한 개념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전에 간독(簡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옛날 글자를 적는 데 사용된 재료로는 갑골 · 청동기 · 수골 등이 쓰이다가 나중에는 옥석 · 사백(絲帛: 비단)으로 대체되었으며, 종이가 발명되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간독(簡牘)이 한 때 중요하면서도 또 광범하게 사용된 서사(書寫) 재료였다.  간자는 대죽 변으로 되어 있고, 독자는 조각 변으로 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簡)은 대나무 조각이요, 독(牘)은 나무조각으로 되어 있다.

   봉니란 중국 고대에 간독(簡牘)에 봉함을 하고 인장을 찍은 진흙 덩어리를 말하며, 지니(芝泥) · 이봉(泥封)라고도 한다. 춘추말에 인새(印璽: 옥새)가 출현하였고, 봉니도 이에 뒤따라 생기게 되었다.  진(秦) · 한(漢) · 위(魏) · 진(晉)대에 성행하였고, 당 이후에 이르러 없어졌다.

   옛날 종이가 없었을 때 문서는 모두 죽간이나 목찰에다 글씨를 써야 하는 것이지만, 그 위에 도장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함이나 관령(官令) · 서신을 쓴 죽간이나 목찰을 만약 어디론가 보려내려고 한다면 바로 간찰(簡札) 위에 판대기 하나를 덧붙여서 이를 보호하게 되는데 이를 검(檢)이라고 하였다.  검 위에 네모지게 홈을 하나 파내고 나서 노끈을 사용하여 묶고, 그 위에 매듭을 지어서 묶은 매듭을 홈 속에 집어 넣어 진흙 덩이를 뭉쳐서 그 위에다 도장을 찍게 되면 진흙에 인문이 찍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1건의 문서에 간(簡)이 비교적 많을 때는 간(簡)을 비단 자루에 넣고, 그 자루의 입구를  노끈으로 단단히 묶고 가검(加檢)을 해서 봉함을 한다.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와 부양한묘(阜陽漢墓)의 발굴을 통해서 서한 때에는 물건을 담는 도기 혹은 상자 안에도 똑 같은 방법으로 나무로 검을 하고 봉함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나라 이후에는 종이가 차츰차츰 간독을 대신하게 봉니를 가지고 문서나 잡물을 봉인하는 방법은 점차 없어 지게 되었다.  당대의 봉니는 전국의 진 · 한과는 서로 달라 백토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홍색의 인문일 뿐이다.

   오늘날에 중국에서 발견된 봉니의 사진을 보면 봉니의 뒷면에 검(檢)을 한 판대기의 모습이라든가 묶여진 노끈의 모습이 진흙에 그대로 찍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청 도광 연간에 사천(四川) · 관중(關中)에서 대량의 진 · 한의 봉니가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인범(印範: 도장을 주조하는 틀)으로 오해하였다.  재희(載熙) · 유희해(劉喜海) 등이 처음으로 봉니임을 밝혀냈다.  왕국유(王國維)가 《간독검서고(簡牘檢署考)》를 씀으로써, 비로소 봉니와 검(檢)의 용법을 알게 되었다.  오식분(吳式芬)과 진개기(陳介祺)의 《봉니고략(封泥考略)》이 있는데 가장 최초로 나온 봉니에 관한 전문서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또 주명태(周明泰)의 《속봉니고략(俗封泥考略)》·《재속봉니고략(再續封泥考略)》, 마형(馬衡)의 《봉니존진(封泥存眞)》과 왕헌당(王憲唐)의 《임치봉니문자서목(臨淄封泥文字書目)》 등의 책이 있다.  최근 2천년 30년 이래 하남 낙양(河南洛陽), 내몽고 호화호특(呼和浩特) · 액제납기(額濟納旗) · 영성(寧城), 호남 장사(湖南長沙), 안휘 부양(安徽阜陽) 등지의 유지 및 고분 가운데서도 약간의 한대 봉니가 나왔는데, 봉니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다고 한다.(《중국대백과사전(中國大百科辭典)》 CD, 봉니조 참조),

   위에 소개된 자료 가운데 오식분 · 진개기 공편 《봉니고략(封泥考略)》은 청대 금석학 저작으로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광서 30년(1904년)간행된 바 있다.  이 책에는 중국에서 발견된 봉니 849개를 탁본하여 수록하고 있다.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낙랑토성이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봉니가 한사군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된 바 있으나 북한과 남한의 일부 학자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일제 때 낙랑 유적지라는 곳에서 입증할 물증이 나오지 않자 혈안이 된 일제는 문화재 위조범들로부터 하나에 당시 돈 150원 내지 200원씩 주고 봉니를 사들였다고 한다.  이에 맛들인 골동품 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위조해 만들어 내느라고 약 200여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 내에서도 동일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로는 그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그에 관한 아무 말이 없다.  한사군의 평양일대 존재설을 일제가 해결해 주었으니 그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저 꿀먹은 벙어리요, 그 자료를 철저히 이용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터넷 검색 자료에 의하면 1997년 요녕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여아가(女兒街) 태집둔(邰集屯) 소황지(小荒池)라는 곳에 위치한 옛 성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봉니와 승(丞)자 봉니가 각각 1점씩 수습된 보고서에 근거해서 복기대라는 한국의 학자가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란 논문을 썼다고 하니 일독을 권한다.

   봉니란 이렇게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요, 봉니에 관한 연구라는 게 겨우 1세기 정도 밖에 안되는데 일제는 한사군 유적지에서 무려 200여 점의 봉니를 발견했다니 참 기가 찰 일이다.  이 사람들의 고대유물유적 위조 수법은 이골이 나 있다. 예전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가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노라는 보도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는데 모두 유물을 다른 나라에서 사다가 미리 땅 속에 집어 넣고는 나중에 새로 발굴한 것처럼 가장했다고 하니 이런 것이 다 한사군 유적지 위조 수법을 비전해서 써 먹었던 셈이다.  우리 속담에 "상추밭에 똥싼 개"란 말이 있다.  이 말은 한번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은 나쁜 일이 들어날 적마다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는 뜻이다. (2002. 2월11일자 《동아일보》, 다시 읽는 외신, 유적발굴 사기극 후지무라라는 제목으로, '구석기발굴 날조된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 국사사적지정 해제' 라는 등의 보도가 있었음)

   필자가 현직에 있을 때 취급한 사건 중에 일본 사람 명의로 된 국유지를 가로채기 위해 토지사기단들이 어떤 한국 사람의 할머니가 마치 일본인의 후처가 된 것처럼 관련 호적을 통째로 위조해 삼천포에 있는 시골 어느 면사무소 여직원을 매수, 위조된 호적을 호적부에 슬쩍 끼워넣어 등본을 발급받아 나라 땅을 똥째로 들어 먹으려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었다. 아무리 호적을 교묘하게 위조하기 위해 수십년전 일제 때의 종이를 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닐 뿐더러 일제 때 서식에 맞게 정교하게 위조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행정기관이든지 거래하는 인쇄 업소마다 서식 인쇄에 따른 약간의 형태상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 같은 무렵에 작성된 서식을 비교하면 당장 위조 여부가 밝혀 지게 되어 있다.  게다가 문서 위조에 대한 현대 과학수사 기법의 발달로 위조된 호적의 지질을 분석하면 어느 때 만들어진 어느 회사의 종이며 거기에 쓰인 잉크는 언제 만들어진 어느 회사 제품인지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  후술하는 정인보 선생의 말씀도 계시지만 한나라 때에는 인장의 글씨체를 한 가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어 여러 가지 글씨체로 쓰는 것을 다들 좋아해서 같은 도장이 있을 수가 없었는데 평양토성에서 발견된 봉니는 하나같이 위조 각본을 짜놓고 거기에 맟추어 만들어낸 소위 "기획위조"이기 때문에 글씨가 거의 똑 같다고 하니 그 비열한 수법이 언제가는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봉니를 믿고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그런 주장을 믿고 후학들에게 가르치려는 어리석은 학인들이 있으니 더욱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

   봉니는 중국문화사상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치고 있다.  그 위에는 고대 문자, 역대서체, 인명 · 관명 · 지명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어, 중국 고대의 강역, 역사지리, 고대관제 및 문자학과 풍부한 민족 풍격의 전각예술을 연구하는 데에도 모두 극히 얻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제 상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대의 봉니의 모습을 첨부파일 보시면 많은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봉니의 뒷면에 검을 한 판때기나 노끈 매듭의 흔적이 역력하다.

 

3.  정인보 선생의 봉니 언급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상권에는 한사군역(漢四郡役)이라는 제하의 편명이 있다.

   거기에는 《점제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에 대한 언급이 있고 그 다음에 평양지방에서 출토한 와당 · 봉니 · 봉산 장무이전(張撫夷塼) 등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점제현신사비》의 '蟬'자의 음이 매미 '선'인데 왜 '제'로 읽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여지고(輿地考)》의 '黏蟬'의 주에서 '蟬'의 음은 제(提)라고 했다.  그래서 점제현으로 읽고 "점제현신사비"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점제현신사비》에 관련해서는 일제 때 용강군에서 발견된 《점제현신사비》는 결코 신사비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 비가 있다고 하여 그 지역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25개 현의 하나인 점제현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분의 해박한 금석학 관력 지식을 동원하여 명쾌하게 입증해 내고 있다.  그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키로 하고 이제부터 봉니에 관한 정인보 선생의 논의를 계속 소개하고자 한다.

 

  (1)  봉니의 정의

   정인보 선생은 봉니라는 것은 봉함한 곳에 홍 · 황 · 흑 등 여러 가지 색깔의 칠류(漆類)를 녹이어 붙이고 그 위에 인장을 찍음으로써 절발(竊發: 남모르는 문서를 발송하는 것)이나 투개(偸開: 남모르게 슬쩍 글의 내용을 훔쳐보는 것)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분은 봉니의 재료를 진흙이 아닌 칠류로 보았는데 그에 관한 근거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회남자(淮南子) · 제속훈(齊俗訓)》에는 "마음이 정허하면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나니, 마치 도장을 진흙에 찍은 것과 같아서 반듯하게 찍으면 바르게 찍힐 것이요, 비뚤어지게 찍으면 비뚤어지게 찍히는 것이다(神淸意平, 物乃可正, 若璽之抑埴, 正與之正, 傾與之傾)."라고 한 것을 보면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다만 이(泥)를 인주,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장밥이라고 할 때는 그 재료가 시대나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기록에 의하면 제왕의 도장, 즉 옥새는 무도(武都)라는 곳에서 나는 자색 점토(紫泥)를 써야 하고, 일반 서민들은 청색 점토(靑泥)를 써야 했다.  그러나 실은 일체의 점토는 모두 봉니가 될 수 있었다.

 

(2)  문제 있는 봉니

  《樂浪太守章》,  《樂浪大尹章》, 《樂浪大尹章》, 《樂浪大尹章》, 《樂○大○○》, 《○浪○丞》, 《樂○長○》, 《○浪○史》, 《○浪○○》, 《樂浪大尹五官掾高 ○○》, 《朝鮮令印》, 《朝鮮右尉》, 《朝鮮右尉》, 《邯長印》, 《邯丞印》, 《邯 ○○》, 《○邯○○》, 《浿○長○》, 《○水○印》, 《含資○○》,《○蟬○印》, 《黏○丞印》, 《遂○長印》, 《○成長印》, 《○成○印》, 《○成○尉》, 《增地長印》, 《增地丞印》, 《駟望丞印》, 《海冥丞印》, 《海○○○》, 《長岑長印》, 《長岑丞印》, 《屯有令印》, 《○有令印》, 《昭明丞印》, 《○明○○》, 《提奚長印》, 《提奚丞印》, 《渾彌長印》, 《渾彌長印》, 《渾○○○》, 《○彌○印》, 《東暶長印》, 《東○長○》, 《蠶台長印》, 《邪頭昧宰印》(근자 모씨의 발표를 보니 '宰'를 '室'로 보아 '記室'의 '室'이라 하였으나 도장 밑의 종획이 뽀족하게 나온 것으로 보아 '宰'자임이 분명하니 왕망 때에 '令長'을 고쳐 '宰'라고 한 것에 따라서 새긴 것이다) , 《○頭○長》, 《前莫○○》, 《○○令印》, 《○○長印》, 《○○長Ⅹ》, 《○○長印》, 《○○長印》, 《○○長○》, 《○○長○》, 《○○丞印》, 《○○丞印》, 《○○丞○》, 《○○○丞Ⅹ》, 《○○○尉》, 《○○○尉》, 《○○○印》, 《萬歲》, 《倉印》, 《王顥印信》, 《王超印信》, 《韓賀之印》, 《高調私印》, 《玉○益○》, 《○○私印》, 《○○信印》 등 약 71개로 보고 있으며, 같은 봉니가 중복된 것은 형태가 약간 다른 같은 종류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낙랑 25현 중 누방(鏤方) · 탄(呑) · 대방(帶方) · 열구(列口) · 불내(不耐) · 화려(華麗) · 부조(夫租) 7현을 제외하고 모든 현 이름을 상고할 만한 인장이 있고, 영장(令長)은 말할 것도 없고 현승(縣丞)의 인장까지 거의 다 갖추고 있는데 전부 평양토성(平壤土城) 내에서 발견한 것이니 중국 각성의 고군에 속한 현의 봉니가 이처럼 한 곳에 모여 있은 적이 없었다.  낙랑의 속현 봉니가 이만큼 한 곳에 모인 것을 보면 이곳이 낙랑의 치소임이 틀림 없는 것으로 생각될터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제 이 봉니의 제품이 미덥지 아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3)  평양토성 발견 봉니가 믿기 어려운 까닭

   1) 낙랑의 여러 현의 봉니가 어떻게 해서 이와같이 한 곳에 모여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 그곳이 낙랑의 치소인 까닭이라고 말들을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봉니는 주로 문서를 봉함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므로 각 현에서 보고한 문서가 여기에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의 봉니가 있으니 온 것은 모인 것이라 하려니와 간 것이 여기에 모여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물음에 대해 간혹 봉을 하고 보내지를 않고 그대로 남겨졌던 것이라고 하던가 혹은 그냥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 보관해 두었던 것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또 달리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낙랑은 한나라의 군(郡)인지라 한조(漢朝)의 조령문서, 요동 · 요서 · 현도 등과 서로 오고 간 문서 등 여러 가지 봉니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필이면 낙랑 속현의 영(令) · 장(長) · 승(丞) · 위(尉) 등만의 인봉(印封)이 모아 있단 말인가.  혹시 관하(管下)에 따로 두었다고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으나 조령(朝令)의 봉(封)이나 속현(屬縣)끼리 봉(封)을 다른 성에 넘겨 준다거나 혹은 경계를 넘어서 각각 가져다 두었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위조한 것은 어느 모로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낙랑 25현 중 7현을 제외하고 현 이름이 다 갖추어졌다는 것 자체부터 의문이 생기는 것인데 다른 군이나 또 한조(漢朝; 원문은 '漢胡'로 되어 있는 것은 오식임이 분명하므로 고쳤다)의 봉니는 없고 오직 낙랑 군현에 국한시킨 것은 벌써 조작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니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 · 군국지(郡國志)》를 내놓고 여러 모로 참작을 해서 새겨서 만든 것이 아니고서야 이와같이 짜맞춤식 봉니가 전래하였을 리가 없다.  위조하여 새겨서 찍은 것이라 이외에는 널리 언급하지는 못했을 것이요, 또 낙랑 이외의 봉니까지 위조해서 만들어 냄으로써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킬 것임은 그당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을 줄 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큰 글씨로 깊게 새긴 금석(金石)도 한(漢)나라 시대의 유물로서 남아 있는 것이 몇 개에 지나지 아니하거늘, 봉니란 무엇인가, 뜯으면 대개는 부서지고 말 것이 아닌가.  어쩌다가 간혹 남아 있을지라도 이같이 거의 모조리 온존한다는 것도 기이하고 또 그 현(縣)이 있으면 그 승(丞)이 있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분배한 것이 완연하니 더욱 괴이하지 아니한가.  

   이제 필자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한서 · 지리지》와 《후한서 · 군국지》에 의해 낙랑군 소속 25현의 현황을 기록에 의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서 · 지리지》

   낙랑군, 한무제(漢武帝) 원봉 3년에 열었다.  왕망 때 낙선(樂鮮)이라고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호(戶)는 62,812, 구(口)는 406,748이다.  운장(雲障)이 있다.  현은 25이다: 조선(朝鮮), 남감(邯), 패수(浿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 때 낙선정(樂鮮亭)이라고 했다. 함자(含資),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에 이른다.  점제(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왕망 때 증토(增土)라고 했다.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冥), 왕망 때 해환(海桓)이라고 했다.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남부도위(南府都尉)의 치소이다.  누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열(呑列),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나오는 것으로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820리를 간다.  동이(東暆), 불내(不耐),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치소가 있다.  잠태(蠶台),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등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서 · 지리지》에는 낙랑군 · 현도군과 관련된 기록이 있을 뿐 진번군 · 임둔군에 관한 기록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네 식민사학자들 무슨 근거로 우리 반도내에 한사군의 영역을 아주 상세하게 그려 놓았다.

 

 《후한서 · 군국지》

   낙랑군, 무제(武帝) 때 설치하였다.  낙양(洛陽)에서 동북으로 5천 리 떨어져 있다.  18성(城), 호(戶)는 61,492, 구(口)는 257,050이다.  조선(朝鮮) · 남한(남邯) · 패수(浿水) · 함자(含資) · 점제(占蟬) · 수성(遂城) · 증지(增地) · 대방(帶方) · 해명(海冥) · 열구(列口) · 장잠(長岑) · 둔유(屯有) · 소명(昭明) · 누방(鏤方) · 제해(提奚) · 혼미(渾彌) 등이다.

 

   주지하다시피 한나라는 서한(西漢) · 동한(東漢)으로 부르고 전한(前漢) · 후한(後漢)으로도 부른다.  전한 · 후한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전한의 도읍지인 장안(長安)이 후한의 도읍지인 낙양(洛陽)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들 두 한을 사서에는 양한(兩漢)이라고도 하는데 그 중간에 외척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A.D 8~23)나라가 끼어 있다.

   굥교롭게도 양한에서 낙랑군을 설치한 사람은 무제(武帝)이다.  《전한서》는 지리지라고 했고, 《후한서》에는 같은 것을 군국지로 고쳐 불렀으며, 전한은 속현이 25개 현(縣)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에서는 18개 성(城)으로 되어 있으며 호 · 구에도 증감이 있다.  지명에도 약간의 변동이 보인다.  전한에서는 "점제(黏蟬)"이라고 했는데 후한에서는 "점제(占蟬)"이라고 했으며, 전한에서는 "수성(遂成)"이라고 했는데 후한에서는 "수성(遂城)"이라고 했으며, 왕망 때 일부 지명에 변동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바로 이 꼬투리로 인해 봉니의 위조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다음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명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하기로 한다.

   연 · 장(令長)이란 진 · 한 시기에 만호 이상의 현(縣)을 다스리는 자를 영(令)이라 하고, 만명이 못 되는 곳을 다스리는 자를 장(長)이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영장은 일반적으로 현령(縣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승 · 위(丞尉)란 현승(縣丞)과 현위(縣尉)를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한나라 제도로 현승(縣丞)은 매 현마다 1인씩이었으며, 특별히 규모가 큰 현에서는 3인까지 있었다고 하며, 현승은 중앙에서 임명하고 현위와 더불어 장리(長吏)가 되며, 품질은 2백석 이상으로 문서를 관장하고, 창고와 감옥업무를 담당했다.  현위(懸尉)도 일반적으로 현마다 1인씩을 두었고 구모가 큰 현에서는 2명을 두어 좌 · 우위로 나누었으며, 현위는 중앙에서 임명하고 현승(縣丞)과 더불어 장리로서 품질은 2백석 이상이었고, 그 치소에는 항상 현령 · 현장과는 처소를 달리했으며, 주로 맡은 업무는 도적을 잡는 일이었다. (《한서(漢書) · 백관지(百官志)》, 유록년 편저 《중국관제대사전(中國官制大辭典)》 각 참조) 

 

  2) 출토한 봉니를 자세히 상고하건대 《○浪○丞》이라고 한 것이 하나 있으면 《樂○守○》이라는 또 하나가 있어 서로 읽게 되고, 《樂○長○》이라는 하나가 있으면 《○浪○史》이라는 또 하나가 있어 서로 상고하게 되며, 《浿○長○》《○水○印》과 《점○長○》《○蟬○印》등이 모두 이와 같은 류인즉 어떤 것은 부서지고 어떤 것은 완전하다고 하기로서니 이다지도 공교로울가.  또 《遂○長印》《○成○尉》《昭明丞印》《○明○○》《渾○○○》《○彌○印》등이 비록 부서지고 떨어저 나갔다 할지라도 현 이름을 상고함에는 의연하니 고의로 훼손하지 않고서는 이같이 필요한 부분만 남아 있을 수 없다.

 

  3) 한나라 제도에 규모가 큰 현(縣)은 영(令)이라 하고, 작은 현은 장(長)이라고 하니 작은 현은 승(丞) · 위(尉) 한 사람씩이다. 《한 서(漢書) · 예문지(藝文志)》에 동이령(東暆令》 연년(延年)이라는 사람이 쓴 부(賦) 한 편이 있으니 동이(東暆)가 령(令)이었던 것인데 봉니로서는 장(長)이며, 이는 오히려 전에는 컸으나 나중에는 작아진 것이 아닌지 모른다 하더라도 《遂○長印》《○成○印》《○成○尉》의 봉니로 보면 수성(遂成)의 장(長)이오, 또 좌 · 우의 위(尉)가 있는 것이라 장(長)은 소현이오, 소현(小縣: 원문은 '小驛'으로 되었으나 '驛'은 '縣'의 오식이 분명하므로 고쳤다)은 위(尉) 한 사람씩인 제도와 부합되지를 않으니 어느 것에든지 위조한 것에는 두루 부합되는 법이 없다.

 

  4) 한대의 인문(印文)에 있어서는 기이하게 변화시킨 것(奇變)을 특히 좋아해서 하나의 현의 인장으로도 영(令) · 승(丞)의 인장에 그 인문에 나와 있는 현 이름이 하나같이 똑같지 못하나니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마원(馬援)이라는 사람이 윗 사람에게 올린 글(上書)이 있으되,

  "신에게 내려 주신 복파장군(伏波將軍)이라는 인장의 복(伏)자를 쓰면서 견(犬) 방이 밖으로 향했으며, 성고령(成皐令)의 고(皐)자는 흰 백(白)자 밑에 양 양(羊)자요, 승(丞)의 도장은 넉 사(四)자 밑에 양 양(羊)자요, 위(尉)의 도장은 흰 백(白)자 밑에 사람 인(人)이오, 사람 인자 밑에 양 양(羊)자이니 곧 일개 현의 장(長) · 리(吏)의 인장도 글씨가 같지를 않으니 천하에 부정한 것이 많지 않을까 두렵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한나라 인장의 변화가 많음을 표시한 것이다.  이제 평양 출토의 인니는 실로 하나같이 변화가 없어 한인(漢印)의 중후하고 질박한 가운데서도 무궁무진한 기발함이 보이지를 아니하며 혹시 후한(後漢)에서 군국의 인장을 하나로 통일시킨 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으나 그럴 것 같으면 동이(東暆縣)현부터 없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5)  옹방강(翁方綱: 원문은 '翁力綱'으로 되어 있으나 '力'자는 '方'자의 오식임이 분명하므로 고쳤다)이라는 사람이 쓴 《양한금석기(兩漢金石紀)》에 동소지(董小池) 순(洵)의 인설(印說)을 인용하였으되,

   "관인(官印)이라는 것은 뒷 사람들이 이윤추구에만 급급하여 위조를 하는 사람이 많으니 부곡(部曲)의 장(將)과 사마(司馬) 등의 인장과 같은 것은 게다가 황동(黃銅)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서 그 글씨가 모두 큰 종과 방불해서 처음 제도를 시작할 때는 커다란 실수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차츰 진짜 인장으로 이를 비교하게 된다면 남을 속이는 일이 불가능 할 것이다." 라고 한 것만 보아도 인장위조가 원래 많은 것인데 그 진짜를 얻어오기 전에는 감별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변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색깔 있는 진흙에 찍힌 흔적을 가지고 흙속에서 오랜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새겨진 필획이(刻劃)이 더욱 옛스러움을 더한(加古) 봉니의 류에서는 인장을 새기는 것보다도 남을 속이기가 더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樂浪大尹章》은 새겨진 획이 가냘프면서 약한데 그 하나는 얕게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좀 깊게 조각하여 여러번 찍어가면서 고쳐 새긴 것이 완연하니 군현의 인장은 전부 경사(京師: 서울)에서 주조한 것이오, 군에서 스스로 새긴 것이 아닌즉 찍어보고 고쳐 새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최근에 여러 개의 모조설이 횡행하여 혹 《남감장인(邯長印)》·《조선령인(朝鮮令人)》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등의 위작품이 있음을 말한 분도 있으나 이것도 일부 학인의 충실한 고증과 검증을 통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한 것을 물리친 것이로되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진실이 일부에 있음을 믿는 것이라 전체를 통구(通究)하여 보면 몇 개를 지적함에 그칠 것이 아니다.  

 

  6)  속현의 봉니가 이같이 모여든 것은 낙랑의 군 치소이던 까닭이라고 한다면 《낙랑태수(樂浪太守)》 · 《낙랑대윤(樂浪大尹)》가 무엇 때문에 자기 군의 치소에 남겨 있는냐 하는 것은 1)항에서 언급하였거니와 낙랑의 수승(守丞)(이 '守'를 간혹 '階卑職高'의 '守'와 같은 것으로 보고자 하나, 이는 불가하니 '守'니 '行'이니 '眞'이니 '攝'이니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써 그 직위에 대하여 이로써 생기는 칭호다.  그 직위가 '守'와 '行'이 있음이 아니니 수승(守丞)은 태수(太守)의 승(丞)이요, 다른 해석을 허용치 않는다)  장사(長史)의 봉니들까지 다 갖추고 있으니 태수의 부중(府中)에서 아침 저녁으로 시중을 드는 승사(丞史)가 무엇 때문에 봉니를 더한 문서를 보낸단 말인가.  이러한 점에서 다 갖출수록 다 갖춘 것이 미덥지 못하거늘 한갓 그 문자만을 증명하려 함에 급급한 것이 너무나 데면데면하여 탐탁하지 아니한가.

 

   여기서 잠깐 설명을 드릴 부분이 있다. 승사(丞史)란 승(丞)과 사(史)인데 진 한 때 중앙과 지방관리를 보좌하는 관원이다.  한나라 때는 승상(丞相)에게는 장사(長史)가 둘이 있었고, 어사(御史)에게는 승(丞)이 둘이 있었는데 합해서 승사(丞史)라고 했다.   태수 이하의 군승(郡丞) 장사(長史) 들을 보좌하는 관원들도 늘 승사라고 하였다.

 

  7)  《樂浪大尹章》은 누가 보더라도 왕망시대의 관명이라, 한대이면 태수(太守)이지 대윤(大尹)일 리가 없지 아니한가.  그런데 왕망시대에는 낙랑이라는 군명이였었으니 《낙랑대윤(樂浪大尹》이 어찌된 명칭인가.  왕망시대는 천하의 군명을 전반적으로 고 쳐서 낭야군(琅邪郡)을 전이군(塡夷郡)이라 하고, 동해군(東海郡)을 기평군(沂平郡)이라 하고, 임회군(臨淮郡)을 준평군(準平郡)이라 하고, 예장군(豫章郡)은 구강군(九江郡)이라 하고, 영릉군(零陵郡)을 구의군(九疑郡)이라 하는 이 유례로 낙랑군은 낙선군(樂鮮郡)이라 하였음이 분명하게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되었으니

낙랑군, "무제 원봉 3년에 열었다. 왕망 때 낙선(樂鮮)이라 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했다.(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위 작하는 자가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으므로 왕망시대에도 낙랑인 줄 알고 한대(漢代)의 군 이름에다가 신대(新代)의 관명을 받혀 놓은 것이니 무엇으로 그 거짓됨을 가릴 것인가.  어떤 사람은 구차하게 끌여들여 말같지도 않은 말을 꾸미되 대윤(大尹)은 왕망의 초기에 시행된 제도요 낙선(樂鮮)은 왕망이 뒤늦게 고친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나 왕망이 처음 정권을 잡아 뭇 관청에 조칙을 내려 나라를 세우고 정치의 도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법제를 새롭게 시행하면서 장안(長安)을 상안(常安)으로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군현의 이름을 전반적으로 고칠 때 첫번째 고친 것이므로 《한서(漢書) · 왕망전(王莽傳)》에는 문율(文律: 법률)상 번만(繁蔓)한 것을 피하여 장안(長安)을 고쳐서 상안(常安)이라고 한 것만을 예시하고 그 나머지는 《지리지(地理志)》 각 군 아래에 분주(分注: 본문 밑에 두 줄로 잘게 단 주. 할주라고도 함)한 것이다.  《지리지》에 "장안(長安), 왕망 때 상안(常安)이라 하였다는 주에, 안사고(安師古)가 이르기를,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 한의 군현의 이름으로 고쳤으니 아래는 모두 이와같다"라고 한 것은 곧 일시에 전면적으로 고쳤음을 명시한 것이다.  이 이외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야말로 유물을 가짜로 말들면 갖은 잔꾀를 다 부려도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궁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 할 것이 아닌가.

 

   위에서 언급한 이유를 가지고 자세하게 연구해 보면 새기고 조작을 해서 가짜를 만들어 찍었던 것이 거의 다 의심없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하나가 모두 진품이라고 할진대 어떠한 곳에서 일부러 낙랑 부분만 수집하여 가져온 것일지니 그것과 관계됨은 실로 하나도 없고 이것과 관계됨은 거의 전체가 남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 하면 벌써 후대의 일이요, 후대에 있어서는  이같이 제 마음대로 거두어드릴 도리가 없을 것이니 이런 설상(設想: 가상)조차 마침내 부서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다른 것은 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일제와 문화재위조범들은 왕망의 신(新)나라 때  행정구역명과 관직명이 바뀐 사실조차 모르고 "낙선대윤장(樂鮮大尹章)"으로 조작해야 할 인장을 "낙랑대윤장(樂浪大尹長)"이라고 엉터리로 위조해내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전반적인 평양출토 봉니의 사료로서의 신뢰성을 의심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는 전한 · 후한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간에 왕망이 세운 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존속기간은 15년 밖에 안되지만 그 당시 한 군현의 이름을 전반적으로 바꿔 정치의 쇄신을 꾀했는데 낙랑(樂浪)을 낙선(樂鮮)이라고 하였고, 군의 태수를 대윤으로 고쳤다.  필자는 정인보 선생님의 이와 같은 귀중한 증언을 듣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로부터 들은 적이 없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4.  와당(瓦當)에 대한 언급

  (1) 와당에 대한 개념

 

 

   위 그림은 와당의 각 부위 명칭을 설명하기 위해 올린 자료이다.(《古代瓦當》에서)

   우리나라 고대 건물에서는 와당이란 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중국에서 들여온 제도이기 때문에 중국의 와당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다.

   와당은 중국 고대 건축물인 처마의 끝을 덮고 있는 기와, 속칭 간와당(簡瓦當)이라고 하는 것이다.  와당의 평면의 모습은 주로 반원형(半圓形)과 원형(圓形) 두 종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둥글 납짝한 떡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正面)과 배면(背面)이라고 하는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다.

   배면(背面)은 기와와 기와 사이을 서로 접하는 면으로서 처마 끝에 설치를 하면 서까래와 서로 가깝게 되며 당배(當背)라고 한다.  정면(正面)은 바로 외부로 노출되는 부분으로 당면(當面)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당배(當背)는 독창성이 엿보이는 흔적이 남아 일부를 제외하고는 문양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지만, 당면(當面)에는 꽃무늬나 문자로 장식한 것이 많다.  

   와당의 가장자리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다 높게 두드러진 하나의 모서리가 있는데 변륜(邊輪)이라고 한다.  일부 반원형 와당의 가장자리에는 변륜이 없는 것도 있는데 이를 연(緣)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원형 와당의 당면 가운데는 모두 동심원으로 된 불록한 선이 있는데 원내 공간을 중앙(中央)이라고 칭하고, 그 중심점을 당심(當心) 혹은 곧바로 중심이라고 해도 좋다.  당심에는 젖꼭지 모양으로 생긴 볼록한 장식이 있는데 뉴(紐)라고 한다.  변륜 가까운 곳에 동그라미처럼 볼록한 선으로 된 것은 외권(外圈)이라고 한다.  중앙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는 내구(內區)라 하고, 그 외부를 둘러 싸고 있는 부분을 외구(外區)라고 한다.  와당 가운데는 두 줄 또는 한 줄의 볼록나온 직선으로 당면을 사등분으로 나뉜 것이 있는데 그 볼록한 부분을 계(界)라고 하며, 각각 등분한 공간을 격(格)이라고 한다.  몇몇 와당에는 변륜의 안에 구간을 획분함이 없이 마음대로 문양을 새긴 것이 있어서 구체적인 정황을 보아서 융통성 있게 부르면 된다. (과부 편저, 《고대와당(古代瓦當)》, 중국서점, 1~2쪽 참조)

 

  (2) 와당의 미덥지 못한 점

   와당 가운데 《낙랑예관(樂浪禮官)》은 봉니와 비교도 안 되니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있던 한군(漢郡) 낙랑으로 말하면 예관(禮官)이라는 것이 한나라 제도가 없은즉 이것을 가지고 한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증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 이것도 위조가 의심나는 물건으로 간간히 나왔다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도 이미 논의가 있었을 뿐더러 고려초기 관제인 예관(禮官)이 그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해당한즉 이러한 와당은 한군을 흉내내어 위조해 낸 가장 무리한 것이요,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는 와당은 상기 와당과 모두 같은 토성에서 나온 물품으로 년대를 보는 데 가장 유력한 듯 싶게 생각할 수 있으나 위조한 물품이 한 곳에서 나타난즉 가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혜제(晉惠帝) 원강(元康) 개원(291년)하기 45년 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동평왕 21년, 247년 필자주) 그 이듬해에 동천이 돌아가셔(원문은 禮陟으로 되어 있음) 평양 시록(柴麓)에 장사를 지냈으니 진혜제 때 저들 군의 터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5.  봉산(鳳山)의 소위 《장무이전(張撫夷塼)》과 관련하여

   용강(龍岡: 점제현신사비를 가리킴)의 빗돌 조각과 평양토성의 봉니 · 와당이라는 것의 그 진면목은 위와 같거니와 또 어떤 사람은 봉산에서 발견되 묘전(墓塼: 묘를 축조하는 데 사용한 벽돌)에 근거해서 봉산을 대방군의 치지(治址)라고 미루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 묘의 부서진 벽돌들을 다시 읽어보면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

    《大歲口漁陽張撫夷塼》

    《九月二十八日造塼日八十石口》(이상은 옆구리에 있는 명)

    《張使君博》(上小口銘)

    《哀哉夫人奄背百姓子民愛感, 夙夜不寧永側玄宮痛割人情》(옆구리에 있는 명)

    《張使君》(상소구명)

    《天生小人供養君子千人, 造塼異葬夫母旣好且堅典口記之》(옆구리에 있는 명)

    《使君帶方太守, 張撫夷塼》(상소구명)

   여기서 말하는 장무이(張撫夷)는 공손씨(公孫氏)의 분군(分郡)인 저 대방(帶方)의 태수로 연대는 미상하나 이쪽에 포로로 잡힌 사람으로 부곡(部曲) 얼마를 데리고 봉산(鳳山) 부근에 항호(降戶: 원문은 '降湖'로 되어 있으나 '湖'는 '戶'의 오식이 분명하므로 고쳤다)의 대우를 받으면서 거주해 살았던 것이니 평양에서 출토한  《永和九年三月十日, 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라는 묘전 중 현도태수(玄菟太守)와 같은 류의 인물로서 객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쓸쓸하고 가련함이 예전 관장과 예전 백성의 신세와 똑 같을 새 유민(遺民)이 그 묘를 축조하되 모든 서러움을 붙이었던 것이다.  이 묘전대로라면 봉산(鳳山)이 대방(帶方)일진대 저 전묘를 근거로 하여 평양이 현도(玄菟)란 말인가. 평양 땅 서로 가까운 곳에서 저쪽 두 태수의 고적(古跡)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우리에게 투항하여 살 곳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면 포로로 붙잡혀 땅을 지급받았던 것이다.

   최근의 고고학의 토(土)는 읽고 이해하는 것부터가 구구하여 "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를 읽되 요동한현도태수령(遼東漢玄菟太守領)을 관명으로 보아서 동리(佟利)가 그 성명이라고 하였으니 관직의 영(領)이라는 것은 영직(領職: 본직외에 직위가 낮은 직챔을 겸직하는 것을 말한다)을 표하여야 하는 것이다.  가령 영유주목(領幽州牧)이라든지 영낙랑태수(領樂浪太守)라든지 영직(領職)이 있은 뒤에 하는 말이니 조선관제로도 영병조사(領兵曹事)라든지 영경연사(領經筵事)라든지 영(領)하는 바 없이 하나의 영(領)자만이 홀로 붙은 관명은 그야말로 금문 · 고문에 모두 없다.

   《금석색(金石索)》에 나오는 "金韓州主簿驗記官高造"라 한 거울의 명문을 상고하건대 "官高"는 만든 사람이요, 한주주부(韓州主簿)는 이를 조사 · 검증하여 기록하던 책임자이니 그 아래 주석하기를, "한주(韓州)는 원래 고려의 동산(銅山) 땅이라 금나라 천회(天會) 6년(1127년) 10월에 혼덕공(昏德公) · 중혼후(中昏侯)를 한주(韓州)로 옮겼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관고(官高)가 구리거울을 만들고 주부(主簿)가 이를 검증한 것은 상(上)께서 운사(運司)로 하여금 보좌해서(원문의 '佐式'은 '佐貳'의 오식이 분명하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대조토록 했던 바로 이와 같은 것이 바른 해석이다.  동리(佟利)가 만든 것을 요동(遼東)이 고향인 한(韓)씨 성(姓)을 가진 현도태수가 영(領)(주재)함이 저 고관(高官)의 조함을 금나라의 한주주부(韓州主簿)가 조사해서 기록함과 똑 같이 같은 예요, 가장 가까운 예로서는 봉산 묘전의 "조주부영전(趙主簿令塼)"의 영(令)이 곧 영(領)의 차자이니 영전(令塼)은 벽돌을 만드는 것을 영(領)하는 것이요, "근의불(懃意不)"의 아래 글자는 미상하나 그 뜻을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한다는 말이니 어떤 사람이 - 불(不)의 아래가 누울 와(臥)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함은 거의 대실(大失)이 없을 것이다.

   요동을 본향으로 한 한(韓)씨 성으로 이전에 현도태수를 지냈던 동리(佟利)라는 자의 제조를 영(領)한 그 벽돌과 어양(漁陽)을 본향으로 한 장(張)씨 성이요 이름을 무이(撫夷)라고 하는 죽은 요동태수(遼東太守)의 묘에 부민들이 진력해서 예전 주부의 주재로 조성한 벽돌이 실상으로 말하면 우리쪽에서 한군(漢郡)을 회수한 역사적 사실 중의 한 고사를 보충함직 하거늘 이에 반하여 한군(漢郡)에서 이 묘전을 집터로 삼아서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만들게 되니 가벼이 믿는 폐해를 어떻게 낮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잠깐 설명하고 정인보 선생의 말씀을 계속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금석색(金石索)》이란 청나라 금석학 저작으로 종합성 고기물도보(古器物圖譜)인데 상 · 하 두 책으로 되어 있다.  풍원붕(馮雲鵬) · 풍운완(馮雲鹓) 형제 2사람이 공동으로 엮었다.  서목문헌출판사에서 도광 3년 수고재(邃古齋) 판본에 근거해서 영인하였다.  이 책은 청각본은 이미 눈에 잘 띄지를 않고 현재는 자주 보이는 것은 대개 만청 혹은 민국시 석인본이 대부분이다. 《금석색》은 오늘날 금석기(金石器)를 수집 · 보존하는데 지침서가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진정하게 수집 보장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은 바로 소장품에 대해 감별을 하고, 고증을 하고,  정리를 해서,  저술을 하고 연구를 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위에서 말하는 금나라 거울의 명문에 관한 이야기는 금나라 때의 구리거울(銅鏡)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금나라는 남송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하는데다, 구리는 화폐를 주조하는 원료로 쓰이기 때문에 동경이 국경 넘어로 제조 유통하는 것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래서 구리거울의 가장 자리에는 관계기관의 검사를 거쳐서 등록을 하고, 현의 지방 공장이 거울에다 검사를 마쳤다는 문자를 새겨넣고 싸인을 해야 일정 지역내에서 판매가 가능했다.  그래서 한주(韓州)의 관원인 주부 벼슬을 가진 고씨가 검수를 하고 거기에 싸인을 한 동경의 명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나라에서 구리의 통제에 관한 규정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금사》 권48, 지(志) 제29, 식화(食貨)3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6.  평양낙랑설은 근거할 만한가

   비 · 와당 심지어 고묘의 전까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이것이 다 이만하여도 평양낙랑설의 가거여부를 명백하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봉니 · 와당에 관하여 그것을 위조해 낸 까닭을 추론하고자 한다.

   무엇이든지 거짓(僞)이면 거짓이오, 날조(造)면 날조인 것이다.  가령 어떠한 화가가 있다고 하자.  그 위조한 물품이 분명할진대 거짓으로 판단하고 말것이니 그것을 가짜로 만들어 낸 자가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이것을 만들었다는 것까지 교모하게 증명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예로부터 가짜를 물리칠 때 조작한 것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까지는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동순(董洵: 청나라 절강 산음인으로 호를 小池 또는 念笑라고 함)이 말한 바와 같이 관인을 후인이 위조한 것은 한갓 이익에 혈안이 되어 일어난 것이니 쉽게 말하면 남을 속여서 팔아먹자는 것이다.  어디 관인 뿐이겠는가.  법서(法書: 체법이 될 만한 명필의 서첩)도 그렇고 명화도 그렇고 고봉니 고와당 고기 등의 위조가 어느 무엇이 사리(射利: 수단 ·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끗을 노림)가 아니라 하겠는가.  이미 사리일진대 단순하게 헤쳐볼 여지도 없다.  그러나 평양출토의 봉니 와당은 단순한 사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니 이 몇 조각의 철요(凸凹)한 속에서도 한사군역에 관한 피차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心影)가 어른거려 마지않는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을 한 뒤로 말기까지 이르는 동안은 한도(漢都) 봉니 등을 위조해 내는 것이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오, 이 문제는 고려 일조간에 걸리어 있는 것이니 어찌해서 그러냐 하면 신라통일의 업이 전조선의 판도로 보면 축소요, 축소뿐만 아니라 조선발상의 시기(始基: 근원)와 단군왕조가 서진(西進)한 고도를 전부 포기하고 한 귀퉁이에서 일시적으로 안일을 탐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것이니 그야 그 때의 국력을 생각해서 별수 없는 노릇이라고는 할는지는 모르나 이익(李瀷) · 안정복(安鼎福)같은 선철은 이에 긴 한숨을 내쉬면서 조선의 역대로 떨치지 못한 것이 이 한 수에서 비롯했다고 애통한 사론들을 쓴 것이다.  신라의 뒤에 계속 일어난 광대의 영주인 고려태조- 일찍이 토우(土宇: 강토, 원문 '土字'의 '字'자는 '宇'자의 오식임이 분명하므로 고쳤다)가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하고 원망하여 발해를 취한 거란을 나라의 원수라 일컫고 그 사신을 물리쳤으니 은연히 고토의 완전회복(古土全收)의 큰 뜻을 기대하였다.  돌아가시면서 십조(十條)의 훈요(訓要)는 더욱이 그 깊은 마음을 보이거니와 그 뒤로 외우내환의 파도가 끝없이 이어져 내려왔으되 이 일단의 유지(遺志)는 혹은 밑으로 잠복해서 흐르거나 혹은 드러남을 달리하면서도 일관하였다. 성종 12년에 서희(徐熙)가 거란 소손녕(蕭遜寧: 원문 '蕭遡寧)의 '遡'자는 '遜'자의 오식임이 분명하므로 고쳤다)과 담판할 때 거란의 동경(東京)이 우리의 구지(舊地)라 하여 저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땅을 먹어들어갔다고 꾸짓는 말을 스스로 기가 질리게 하였다.  태조께서는 고려의 국명(國命)을 받들어 금나라 복주(復州)에 방을 내서 알리신 것을 보면 요하(遼河) 이동이 우리의 고토임을 거듭 언급하셨으니 어찌 하였든지 압록강 밖의 우리의 땅이 다른 사람의 손에 갑짜기 들어가게 됨을 한스러워 함이 여조로부터 심각하게 임금의 마음속을 번민게 하여 고려의 말년까지 관철함을 볼 것이니 이쪽이 이같으니만큼 저쪽으로서 이에 대한 이절책(泥絶策)이 또한 백방이었을 것도 없지 않았다.

   고려 예종 6년에 송나라 사람인 호종단(胡宗旦: 태조의 이름과 같다고 주석을 달았는 바, 태조 이성계의 이름이 '旦'이었음, 이를 미루어 해방이 된 뒤에도 조선의 시조의 이름까지 피휘했을 리 없으니 이글을 쓴 시기는 일제 때로 보여짐, 일제때까지도 조선의 선비들은 태조 이성계를 아태조라 하면서 깎듯이 예우하였음)를 등용하여 권지직한림(權知直翰林)이라는 벼슬을 시키었으니 호(胡)는 복건인으로 장삿배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던 자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나오는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36봉에 봉마다 비가 있었는데 호종단이란 놈이 모두 가져다가 물속에 쳐박아 버렸는데도 아직 그 대석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호종단이란 놈은 이승(李昇)의 남당(南唐)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출사하여 5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이르는 곳마다 비갈을 가져다가 혹은 거기에 써 있는 글자를 깍아내거나 혹은 깨뜨려서 물속에 쳐박아버렸으며 심지어는 종경(鐘磬)에도 이름 있는 것은 모두 다 쇠를 녹여서 막아버려 종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하여 한송정(寒松亭) · 총석정(叢石亭) · 삼일포(三一浦)에 있는 비와 경주에 있는 봉덕사종(奉德寺鐘)에도 눈에 띈다고 한 것과 《고성읍지(高城邑志)》에,

   "무선대에 예로부터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의 호종단이 그 비를 뽑아서 물속에 쳐박았다"라고 한 것을 보면 호 종단이란 놈이 남당 신속의 후예로 복건에 거주하다가 우리나라로 와서 5도로 돌아다니면서 고적의 훼멸에 몰두하였음이 분명한데 고적으로도 조선고대의 특수한 방향을 나타내는 것을 골라서 없애버린 것인즉 결코 심상한 행동이 아니며 어떠한 계획 아래서 착착 실행한 것이라 예종을 전후해서 고려 민족의 사고적 발흥이 바야흐로 약동하는 때이므로 정조(定朝)로부터 특파한 고적훼멸의 밀사가 아닌지 누가 알랴.

   고려 사람들의 정신적 우모(寓慕)를 없애려고 고적을 좇아다니면서 금석(金石)에 방자하고 악독한 종조배(宗朝輩: 중국의 역대 군주를 얏잡아 표현한 말)가 있음을 보라.  고려시대의 고토 회복에 대한 의념을 현란케 하기 위해 여기 유익한 조작이면 이를 철저히 하던 자도 있었을 것이니 양자가 소적 적극만이 다를 뿐이지 그 속은 똑같은 것이다.  대개 미천왕이 고지를 처음으로 수복하였을 때 한군의 당시 도적을 수도인 평양으로 운반해 가지고 와서 고문서의 찰독이 봉니와 아룰러 장치된 것도 있었던지라 그 뒤 상란을 여러번 지나 조적현문(鳥跡玄文)이 들불에 불타 없어지고 용도서첩이 니토에 맡겨지게 되어 과거의 유물을 물을 곳이 없더니 고려시대에 와서  

 

 

 (요 즘은 글을 쓰는 것이 어떤 원고지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자판을 두드리면서 직접 작성해야 하므로 미완성 초고를 올리는 수가 있으므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시간 나는 대로 계속 이어갈 것이다.  정인보 선생는 글을 어렵게 쓰시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해박한 지식에 저절로 머리 숙여지며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