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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신당서 흑수말갈 열전 번역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14.
연간(A.D. 742~755;신라 경덕왕1~14)에 여덟 번 와서 고래 눈알(鯨睛), 담비(貂鼠), 흰토끼가죽(白兎皮)를 바쳤다. 철리(鐵利)는 개원(開元) 연간(A.D. 713~741;신라 聖德王 12~孝成王 5)에 여섯 번 왔다. 월희는 (개원 연간에) 일곱 번 오고, 정원(貞元) 연간 (A.D. 785~804;신라 원성왕 1~애장왕 5)에 한번 왔다. 우루(虞婁)는 정관(貞觀) 연간(A.D. 672~649;고구려 營留王 10~寶藏王 8)에 두 번오고, 정원(貞元) 연간 (A.D. 785~804;신라 元聖王 1~哀莊王 5)에 한번 왔다.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복속되어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肅愼) 땅에 있는데,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후위(後魏) 때에는 물길(勿吉)로도 불리었다. 경사에서 

동북 방향으로 6천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돌궐에 닿으며, 남쪽은 고구려와, 북쪽은 실위(室韋)와 접해 있다. 수십 부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추장(酋長)들이 자치(自治)를 한다. 그 중 가장 유력한 부족은 속말부(粟末部)로서 제일 남쪽에 위치하여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백두산을 지칭함)에 이른다. 그 산은 또한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와 서로 닿는다. 속말수(粟末水)의 연안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은 태백산 서쪽에서 흘러 나와서 북으로 타루하(它漏河)로 흘러들어 간다.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돌부(汩咄部)이고, 그 다음의 것이 안거골부(安居骨部)이며, 더 동쪽은 불날부(拂涅部)이다. 안거돌부의 서북쪽에 있는 것이 흑수부이고,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이다. 부족과 부족 사이는 먼 경우는 3~4백리이고, 가까운 것은 2백리이다. 백산부는 본래 고구려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는데, 황제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그 무리들의 대부분은 당(唐)으로 들어 왔다. 골돌, 안거골 등도 모두 분산되어 점차 그 세력이 미약하여져 뒤에는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유민들은 뿔뿔이 발해로 들어갔다. 오직 흑수부만이 완강하여 땅을 16부락으로 나누고 남부와 북부로 일컬었으니, 이는 그 위치가 가장 북쪽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거세고 보병전을 잘하여, 늘 다른 부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풍속은 머리를 땋아 멧돼지의 어금니를 매달고, 꿩의 꼬리깃으로 冠을 꾸며서 다른 여러 부락과 구별을 짓는다.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우며, 수렵을 잘 한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젊은이를 존대하며 늙은 자는 천시한다. 거처하는 집이 없고 산수에 의지하여 움을 파서 그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는데, 마치 무덤과 같다. 여름에는 수초를 따라 생활하며, 겨울에만 움 안에 들어가 산다. 오줌으로 세수를 하니,이적( 夷狄) 중에서 가장 지저분하다. 죽은 자를 묻을 적에는 관곽(棺槨)이 없고, 그가 타던 말을 잡아 제사한다. 추장은 '대막불만단(大莫拂瞞瑞)'이라 하는데, 대대로 부자가 세습하여 추장이 된다. 서계(書契)가 없다. 화살은 돌촉으로 길이가 2촌이니, 이는 질이 좋지 않은 화살(고노楛砮)을 만드는 예전의 방법 일 것이다. 가축은 돼지가 많고, 소와 양은 없다. 수레와 말이 있고, 밭은 耦耕을 하며 수레는 밀고 다닌다. 조와 보리가 있다. 담비(貂鼠), 흰 토끼(白兎), 흰 매(白鷹) 등이 많이 난다. 염천(鹽泉)이 있어 기체로 증발하여 나무 끝에 소금이 엉긴다. 무덕(武德) 5년(A.D. 622; 고구려 영류왕 5)에 추장 아고랑(阿固郎)이 처음으로 唐에 왔다.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A.D. 628; 고구려 영류왕 11)에는 마침내 신하로 예속되어 항상 공물을 바쳐오므로, 그 땅을 연주(燕州)로 삼았다. 태종이 고구려를 토벌할 적에 그 북부가 반기를 듣고 고구려와 합세하였다. 고혜진(高惠眞) 등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할 적에 싸움마다 늘 말갈 병사를 앞에 내세웠다. 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고 혜진을 사로잡은 뒤, 말갈 병사 3천여 명을 모 두 묻어 죽였다. 개원(開元) 10년(A.D. 722;신라 성덕왕 21)에 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조근(朝覲)을 오니, 현종(玄宗)은 

그를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에 제수하였다. 이에 안동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흑수부(黑水府)를 두자고 청하므로, 부장으로 도독 또는 자사를 삼고, 조정에서 장사(長史)를 두어 감시와 통치케 하였다. 부도독(府都督)에게 이씨(李氏)의 성씨를 하사하고 이름은 헌성(獻誠)이라 하여, 운휘장군영흑수경략사(雲麾將軍領黑水經略使)로 삼아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시켰다. 현종의 말년까지 15번 조공을 바치었다. 대력(大曆) 연간(A.D.766~779;신라 혜공왕 2~15)에는 모두 7번, 정원(貞元) 연간 (A.D. 785~804;신라 원성왕 1~애장왕 5)에는 한 번 왔으며, 원화(元和) 연간(A.D.806~820;신라 애장왕7~헌덕왕 12)에는 두 번 내조하여 조공을 바치었다. 당초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는데, 더 북쪽으로 10日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日로 가면 굴설부(窟說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부른다. 조금 동남으로 10日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날(拂涅), 우루(虞婁), 월희(越喜), 철리(鐵利) 등의 부락이 있다. 그 땅은 남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과 동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로는 실위(室韋)에 이른다. 남북은 2천리이고, 동서는 1천리에 뻗쳐 있다. 불날(拂涅), 철리(鐵利), 우루(虞婁), 월희(越喜)는 때때로 중국과 통하였으나, 군리(郡利), 굴설(屈設), 막에개(莫曳皆)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어 경사에 조근을 온 것을 왼쪽에 덧붙여 기록해 둔다. 불날(拂涅)은 대불날(大拂涅)로도 일컬으며, 개원(開元) 연간(A.D. 713~741;신라 성덕왕 12~효성왕 5) 천보(天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