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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712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6]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허위론’ 교과서에 그대로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⑥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 6차 교육과정의 구 국사교과서의 부록, ‘역대왕조계보’.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재위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무려 400년 이상의 신라사가 부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 2018. 1. 10.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5]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 ↑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주류 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북한의 발굴 결과는.. 2018. 1. 6.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4]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④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 * 둔유 : 屯有, 동어 : 冬於, 열구 : 列口, 율구 : 栗口 » 중국 삼국시대 유주(왼쪽 점선 안)와 대방군(오른쪽 점선 안) 지도. ‘중국 역사지도집 제3집(삼국, 서진시대)’에 실린 것으로, 위나라가 평안남북도는 물론 황해도의 대방군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촉, 오와 싸우기에도 전력이 부족하던 위나라가 고구려 남부에 대방군을 운영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사군 중에는 진번·임둔군처럼 설치 25년(서기전 82) 만에 낙랑·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사학.. 2018. 1. 6.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3]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2018.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