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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712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전문 번역 【集解: 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為洌水. 疑樂浪, 朝鮮取名於此也. 索隱: 案,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집해에서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와 열수와 산수가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하여져서 열수가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낙랑이이 조선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여기에서인 것 같다. 색은에서 안을 내었는데 朝의 음은 조(潮)인데 죠[直驕反]로 발음된다고 하였고, 鮮의 음은 선(仙)이다.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汕의 음은 산(訕)이다. 朝鮮[一]王滿者, 故燕人也[二].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三]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爲其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四],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五], 聚黨千餘人, 魋..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渤海靺鞨 전문번역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족과 무리를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696)에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좌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참하고, 다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 군대를 압박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규합하여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이해고만 몸을 빼..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 발해관련 기록 발췌 번역 개원(開元) 7년(719) 3월 정유일 발해말갈군왕(渤海靺鞨郡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그 아들 (대)무예(武藝)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개원 14년(726) 12월 신축일 발해말갈(의 왕)이 그 아들 의신(義信)을 보내어 내조(來朝)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바쳤다. 개원 16년(728) 봄 1월 갑자일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개원 20년(732) 9월 을사일 발해말갈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토록 하였다. 개원 26년(738) … 이해에 발해말갈의 왕 대무예가 죽고 그 아들 (대)흠무(欽茂)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대흠무를 책봉하였다. 개원 29년(741) 가을 7.. 2009. 11. 17.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傳 전문번역 말갈(靺鞨)은 곧 숙신(肅愼)의 땅이니, 후위(後魏) 때에는 이를 물길(勿吉)이라 하였다. 경사(京師)에서 동북 방향으로 6천 여리 밖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突厥)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高句麗)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室韋)와 인접해 있다. 그 나라는 모두 수십 부나 되는데, 각각 우두머리(酋帥)가 있어 더러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더러는 돌궐의 신하로 예속되어 있다. 유 주도독(幽州都督)을 추증하고 건릉(乾陵)에 배장하였다. 그 뒤로부터 때로는 추장이 직접 오고 때로는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백산부(白山部)는 본래 고구려에 부용(附庸)되었는데,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 많은 무리들이 중국으로 들어 왔다. 골돌(汨咄), 안.. 200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