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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4

馬韓東北有百濟, 百濟東有樂浪, 百濟北有靺鞨 설에 마한은 전라도요, 백제는 경기와 충청도요, 말갈은 송화강 유역이요, 낙랑은 요하 혹은 대동강 유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마한 백제 말갈 낙랑 등의 위치 관계는 통설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1. 통설과 맞지 않는 《삼국사기》 기록 • 백제와 마한의 위치관계 마한이 전라도이고 백제가 경기도이면 백제는 마한의 북쪽이던지 서북쪽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 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온조임금이 웅천책을 세웠다. 마한임금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분명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 2013. 7. 2.
백제 초기 영토는 대릉하 부근 백제는 초기에 마한의 영토를 분양받았습니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신채호선생의 동서양자 상환의 주장에 따라 동북은 아마 서북일 것입니다. 백제는 초기에 마한 땅 서북쪽 100리의 땅에서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요서지역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를 증거할 만한 지역이 삼국사기에 보입니다. 삼국사기 온조왕조를 읽어보면 十一年, 夏四月, 使襲破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兩柵, 以塞之路.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 2012. 5. 17.
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 (1) 거란의 10만 군사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 20만 8천 3백명이 맞아 싸운 것인데 먼저 영주에 주둔하였다고 하네요.그런데 영주를 두고 번역본은 평남 안주라고 하고 있고.. 강감찬 장군이 흥화진에서 수공으로 적을 물리쳐 이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데 흥화진의 한자는 興化鎭 으로 원문에 되어 있더군요. 또 대장군 강민첨은 자주 내구산에서 적을 유인하여 패퇴시켯다고 하는데 자주 내수간을 평남 순천이라고 번역해 놓았네요. 1.영토.... 영토회복과 수호는 국민과 국군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토에 대하여 왜곡을 하여 두고 영토회복과 수호를 하라고 하면 잘못된 아비를 제 아비로 모시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왜곡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한 죄가 없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2009. 11. 26.
조선력사지도첩: 남한 역사학계는 반성해야한다. 연해주도 고구려 영토였다. 고구려 영토는 6세기 말~7세기 초 중국 흑룡강성과 내몽골자치주와 요녕성은 물론이고 연해주까지로 되어있다. 식민사학에 물들어 일본의 역사해석을 그대로 베껴쓰고 있는 게을러빠진 현재 남한의 역사학계는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BC 30세기에 건국된 전조선은 BC 15세기 후조선으로 교체되었고 이 시기에 고대국가인 부여가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북부여는 후부여라고 한 듯 하다. 전조선의 수도가 현재 북한의 평양이라고 한 것으로봐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게 깔려있으니 틀렸다. 단군조선의 수도는 현재 홍산문명지와 하가점하층문화지역으로 요하 상류와 대릉하 상류지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09.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