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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 (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6.
거란의 10만 군사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 20만 8천 3백명이 맞아 싸운 것인데 먼저 영주에 주둔하였다고 하네요.그런데 영주를 두고 번역본은 평남 안주라고 하고 있고.. 강감찬 장군이 흥화진에서 수공으로 적을 물리쳐 이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데 흥화진의 한자는 興化鎭 으로 원문에 되어 있더군요. 또 대장군 강민첨은 자주 내구산에서 적을 유인하여 패퇴시켯다고 하는데 자주 내수간을 평남 순천이라고 번역해 놓았네요.


1.영토....


영토회복과 수호는 국민과 국군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토에 대하여 왜곡을 하여 두고 영토회복과 수호를 하라고
하면 잘못된 아비를 제 아비로 모시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왜곡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한 죄가 없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최근 영토를 축소 왜곡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것을 하나 찾아냈기에
기쁜 마음으로 회원님들과 정보를 공유하려 합니다.^^
(물론 이미 다 알려진 것이기도 하지만요..^^)


2. 귀주대첩


귀주대첩은 강감찬 장군이 거란,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잠깐 보다 보니...우리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다고 배운
학교역사의 사실(史實)과 다른 사실(史實)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지나대륙도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이제 거의 상식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으므로,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한다 하여도 변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은 듭니다만..


사실(史實)과 관련하여 역사왜곡의 추론과 고려 영토에 대한 근거를
확실히 다진다면 영토회복의 정당성은 더욱 확고한 근거와 명분을
가진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귀주대첩에 관련된 것을 보면...

귀주대첩은 거란의 제 3차 침입과 관련된 것입니다.
1차침입에서는 서희가 변설로 거란으로부터 강동 6주를 얻는 전과를
올렸고..거란은 여진의 땅을 뺏어서 고려에게 주었죠..^^....
2차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공격해 왔으며...^^

제 3차는 거란의 성종이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에
소배압(蕭排押)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무려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됩니다.
침략군은 10만인데 방어군은 20만이 넘네요..

이때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고려의 인구가 도대체 얼마이기에 단시간에 20만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귀주대첩보다 100여년 뒤에 있었던 윤관장군의 여진정벌에는 승병까지 동원한 것이
17만 병력이라고 했기에 그러합니다.

또 다른 의문 하나는 연전연패하는 거란군이 어찌 서경을 거쳐 개경까지
올수 있었는가입니다..
군사도 고려군의 절반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다른 분견대를 파견할수도 없는
처지였을 것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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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몇 개의 역사 기록..


귀주대첩에 관련된 고려사절요의 내용입니다.

*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무오 9년(1018), 송 천희 2년ㆍ 거란 개태 7년
①..○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 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
거란의 10만 군사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 20만 8천 3백명이 맞아 싸운 것인데 먼저 영주에 주둔하였다고 하네요.그런데 영주를 두고 번역본은 평남 안주라고 하고 있고..
강감찬 장군이 흥화진에서 수공으로 적을 물리쳐 이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데
흥화진의 한자는 興化鎭 으로 원문에 되어 있더군요.
또 대장군 강민첨은 자주 내구산에서 적을 유인하여 패퇴시켯다고 하는데 자주 내수간을 평남 순천이라고 번역해 놓았네요.


이 부분에 요사(遼史)를 보면 자기들이 패배한 것이라서 그런지 간략하게 써 놓았더군요.
요사 본기 성종 개태 7년
*新校本遼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聖宗七/開泰七年 - 185 -
②...十二月丁酉,宋遣呂夷簡、曹璋來賀千齡節.是月,蕭排押等與高麗戰于茶、陀二河,遼軍失利,天雲、右皮室二軍沒溺者?,遙輦帳詳穩阿果達、客省使酌古、渤海詳穩高?明、天雲軍詳穩海里等皆死之
→ 개태 7년 12월 정유 송에서 사신을 보내 천령절에 하례를 하였다..이 달에 소배압 등이 다하와 타이하에서 고려와 전쟁을 벌였는데 요군이 이익을 일어 천운, 우피실 2군이 물에 빠져 ~~ 하고,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죽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열전에 보면 좀 자세하게 나와 있군요.
* 新校本遼史/列傳/卷百十五 列傳第四十五 二國外記/高麗 - 1521 -
③..開泰元年,詢遣蔡忠順來乞稱臣如舊,詔詢親朝.八月,遣田拱之奉表,稱病不能朝.詔復取六州之地.二年,耶律資忠使高麗取地,未幾還.三年,資忠復使,如前索地.五月,詔國舅詳穩蕭敵烈、東京留守耶律團石等造浮梁于鴨록江,城保、宣義、定遠等州.
===> 개태 원년, 순(고려 현종임금)이 채충순을 보내서 예전과 같이 신칭을 하는 것을 구하여 조서를 내려 순이 친조하도록 하였다. 8월, 전공지를 보내서 표를 올려 말하길 병이 있어서 친조할수 없다고 하였다. 강동 6주를 다시 취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2년, 야율자충을 고려에 보내 땅을 취하겠다고 하였는데 돌려받지 못할듯하였다. 3년, 자충을 다시 보내 전과 같이 땅을 찾았다. 5월, 국구상은 소적열과 동경유수 야율단석 등에게 조서를 내려 압록강에 뜰다리를 만들고 선의 정원 등 주의 성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④..四年,命北府宰相劉愼行爲都統,樞密使耶律世良爲副,殿前都點檢蕭虛烈爲都監.愼行설家邊上,致緩師期,追還之;以世良、虛烈總兵伐高麗.五年,世 良等與高麗戰于郭州西,破之.六年,樞密使蕭合卓爲都統,漢人行宮都部署王繼忠爲副,殿前都點檢蕭虛烈爲都監進討.蕭合卓攻興化軍不克,師還.
===> 4년 북부재상 유신행을 도통으로, 추밀사 야율세랑을 부도통으로 , 전전도검열 소허열을 도감으로 명하였다. 신행이 가를 이끌고 변상에서 원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들을 쫓아 돌아왔다.: 세랑과 허열총병이 고려를 공격하였다. 5년, 세랑 등이 고려와 곽주 서쪽에서 싸워 이겼다. 6년,추밀사 소합도를 도통으로 하고, 한인 행궁도부도 왕계충을 부도통으로 하고 전전도검열 소허영을 도감으로 하여 토벌을 추진했다. 소합도가 흥화군( 興化軍 ) 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돌렸다.


이제 거란의 3차침입을 말하고 있는 내용인 듯합니다.
⑤...七年,詔東平郡王蕭排押爲都統,蕭虛烈爲副統,東京留守耶律八哥爲都監,復伐高麗.十二月,蕭排押與戰于茶、陀二河之間,我軍不利,天雲、右皮室二軍沒溺者?,天雲軍詳穩海里、遙輦帳詳穩阿果達、客省使酌古、渤海詳穩高淸明等皆沒于陣.
→ 7년, 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으로 하고 소허열을 부통,동경유수 야율팔가를 도감으로 삼고 다시 소고려를 공격했다. 12월 소배압이 다하,타하 2하사이에서 전쟁을 하였으나 아군이 불리하여, 천운,우피실 2군이 물에 빠져 죽었고, 천운군 상은해리,요련장 상은아과달,객성사작고,발해상은 고청명 등이 진지에서 모두 죽었다.

⑥..八年,詔數排押討高麗罪,釋之.加有功將校,益封戰沒將校之妻,錄其子弟.以南皮室軍校有功,[五]賜衣物銀絹有差,出金帛賜肴里、涅哥二奚軍.八月,遣郞君曷不呂等率諸部兵,會大軍同討高麗.詢遣使來乞貢方物.九年,資忠還,以詢降表進,釋詢罪.
→ 8년, 조서를 내려 소배압이 고려와의 전쟁에서 지은 죄를 풀어 주었다. 전쟁장교의 처와 그 자제들에게 봉록을 더하여 주었다. 남피실군교에게 공이 있어서 의물은연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고, 금백을 효리와 열가 2해군에 내 주었다. 8월, 낭군 갈불여 등을 보내 제부의 병사를 이끌고 대군을 모아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순(고려 현종)이 사자를 보내 방물을 바치게 하여 줄 것을 청하여 왔다. 9년, 자충이 돌아왔는데 순이 항복의 표를 올려서 순의 죄를 풀어 주었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경신 11년(1020), 송 천희 4년ㆍ거란 개태 9년
⑦..○ 이작인(李作仁)을 거란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번국(藩國)을 일컫고 공물 바치는 것은 종전대로 할 것을 청하게 하며, 마침내 억류하였던 야율행평(耶律行平) 등을 돌려보내었다.

====>>> 이게 뭡니까?
결국은 고려가 요나라에게 항복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배운 역사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해 요의 성종임금은 연호를 바꿉니다.
태평(太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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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의문이 드는 이상한 기록


그런데 의문이 드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사 본기 성종 태평 2년에
*新校本遼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聖宗七/太平二年 - 191 -
⑧...十二月辛丑,高麗王詢薨,其子欽遣使來報,?命使冊欽?高麗國王.[二0]甲寅,宋遣劉燁、郭志言來賀千齡節.
어쟀든 고려 현종임금이 죽었다는 말이 나옵니다.그 아들 흠이 사자를 보내 알려왔다는...

그리고 요사 고려 열전에는
*新校本遼史/列傳/卷百十五 列傳第四十五 二國外記/高麗 - 1522 -
⑨..太平元年,詢薨,[六]遣使來報嗣位,?遣使冊王欽?王.九年,賜欽物.十一年,聖宗崩,遣使告哀.七月,使來慰奠

태평 원년에 고려 현종이 죽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원년과 2년의 기록으로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고려사절요입니다..

요사의 본기와 고려 열전에는 태평 2년과 태평원년에 죽었다는 현종임금이..
그 후로 10년을 더 왕위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고려의 역사 기록이 여러개가 있어서 옮겨 적다가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 것인지..
제 생각에는 여러 개의 고려역사 기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수십년에 걸쳐서 작업한 역사왜곡이 저 수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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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흥화진= 흥화군


어쨋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 관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거란의 3차 침입 시기인 10*** 요나라 개태 7년의 기록 하나를 보면요,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무오 9년(1018), 송 천희 2년ㆍ거란 개태 7년.
정월 기록중에...
⑩.."○ 흥화진( 興化鎭 )이 요즈음 병란과 흉년을 겪어 백성 중에 춥고 배고픈 사람이 많으므로 면포(綿布)와 소금ㆍ장을 주었다."

라고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④번 기록에서 거란이 흥화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이 고려의 흥화진을 공격한 것이라는 내용이
확인이 됩니다.

고려의 흥화진= 거란의 흥화군입니다.

그런데 흥화진은 거란의 1차 침입때 서희가 담판하여 얻은 강동 6주의 하나라고 하고
강동 6주는 현재의 압록강 동쪽이라고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3-3..흥화진의 위치는 대륙...


하지만 흥화진=흥화군의 위치는 현재의 압록강 동쪽이 아닙니다.

흥화진=흥화군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 동쪽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강동 6주도 귀주대첩의 역사 이야기도 모두 사실이 아니게 됩니다.

또 흥화진=흥화군은 대륙에 있다면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 만이 아닌
대륙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왜곡이 사실인 것으로 될 것이고요.^^

모두 알고 계신 그 역사왜곡 사실은 다음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