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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조선사연구초: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3.

1.    교정의 이유

조선사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하고로 중국 위진시대 사관이 지은 삼국지 동이열전 같은 것을 취하는가. 조선 고문헌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고사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에 힘입은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쓰인 조선열전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一隅를 도거(盜據)한 衛氏 일가가 漢과 대항하던 略記니 조선열전이라느니보다 도리어 중국 流賊의 침략사라 함이 가하며,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비교적 상비(詳備)하나 또한 각기 당시 중국에 관계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漢族의 外競史라 함이 가하거니와, 위진시대의 사관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단군왕검의 건국이 왕심의 위서에 보이며, 조선왕 否, 조선왕 準 등의 약사가 어환의 위략에 보이며, 고대 열국의 국경 관제 풍속 등이 진수의 삼국지에 보이어,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고사까지도 간혹 기재하였다.

이는 고구려 동천왕 때에 衛將 관구검이 환도(丸都: 고구려 서울)에 入寇하여 주워간 서적과 전설이 있어 據錄한 자가 있은 듯 하니, 당시에는 비록 국치(國恥)이나 후세의 사적 재료는 이에서 더 진귀한 것이 없을 까닭이다.

魏晉 사관의 기록 가운데서 하고로 삼국지만 취하는가. 전술한 모든 사관의 기록에 왕침의 魏書는 “往在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의 수십자가 麗僧 無亟(一然)의 삼국유사에 전하였을 뿐이며, 어환의 魏略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 註에 인용한 4, 5조가 전하였을 뿐이요, 그 양서의 전부가 다 缺亡하였으므로 하릴없이 삼국지만을 취하게 됨이며, 先儒는 매양 삼국지 동이열전을 捨하고 후한서의 것을 취하였으나, 이는 다만 후한이 삼국의 前代인 줄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 저자 진수보다 백여년 이후의 사람임을 생각지 아니함일 뿐더러, 양 동이열전을 대조하면 후한서의 것이 명백히 삼국지의 초록이건만 이를 깨닫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후한서를 사하고 삼국지를 취함이다.

하고로 이를 취하는 동시에 교정을 가하는가. 천 년 이전에는 印版이 없어 一致書籍이 모두 抄寫로 전하므로 전도(顚倒), 와오(訛誤), 탈락(脫落), 증첩(增疊)된 자구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가 모두 고증가의 손을 경한 뒤에야 可讀하게 되었는데,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피등(彼等)이 고증에 용력하지 아니하였으며, 설혹 용력할지라도 自家의 눈에 서투른 인명, 풍속, 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으니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하나요, 피등이 그 유전적 자존성으로 타국을 묘시(藐視)하여 동이라 칭한 것도 가통(可痛)하나 그러나 이는 사실에는 관계가 없거니와, 다만 고의로 무록(誣錄)한 것도 있으며, 혹 전문으로 오록(誤錄)한 것도 있어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두번째이니, 그러므로 저자의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이 있게 된 것이다.

2.    字句의 교정

이제 顚倒, 訛誤, 脫落, 增疊된 자구를 교정하리라.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1]라 하니 오환골도(烏丸骨都)는 烏骨丸都의 誤요, 오골과 환도는 다 城名이나, 오골성은 지금의 連山關 일명 鴉骨關이요, 환도성은 지금의 집안현동선령(輯安縣洞仙嶺)이니, 오골과 환도의 위치 연혁은 조선사를 읽는 자의 명지하는 바이므로 이제 번록(煩錄)하지 아니하거니와, 관구검의 환도성 침입은 본 열전에 상기한 바, 오골은 곧 관구검이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하는 경로인즉 踰烏丸骨都가 곧 踰烏骨丸都의 오임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대개 상문의 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초사자(抄寫者)가 오골의 골과 환도의 환을 바구어 오골환도라 쓴 것이다.

2)     濊傳에 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 이라 하니, 우기의 문자는 文理가 닿지 아니하므로 지나학자들까지도 이를 의심하여 모두 그 오자가 있음을 인하여 동시에 건륭의 흠정삼국지 위지 권 20 고증에는 有廉恥不請의 請을 諳의 오자라 하고 이를 下文에 屬讀하여 不諳句麗言語라 하였으나 上文에 同言語의 인민을 指함인즉 청을 암으로 개하여 不諳句麗言語라 독함이 상하의 문으를 모순케 함일 뿐더러 예는 곧 동부여의 오니 (次節의 기사교정 참조) 동부여가 구려의 언어를 몰랐다 하면 갑의 종형제 을이 갑의 언어를 모른다 함과 같으니, 흠정삼국지의 운운은 다만 억단이 될 뿐이다. 후한서 예전의 상문에 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同其人性愿慤少嗜欲不請에 거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의 請은 오자가 아니요 句가 의 오자이며 麗는 하문의 句麗의 麗로 말미암아 오증이 된자니, 이를 개정하면 有廉恥不請 言語法俗與句麗同이니 有廉恥不請 1구요 言語法俗與句麗同이 1구이다.

3)     韓傳의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니 삼한이나 부여가 각부 대신을 “크치”라 칭한 바, 크치를 음으로 써서 “遣支(견지)”, “遣智(견지)” 혹은 “近支(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大兄(대형) 혹 大等(대등)이 되고, 각 대신의 首長(수장) 총리대신을 “신크치”라 칭한바, 신크치를 음으로 써서 臣遣支(신견지), 혹 臣近智(신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太大兄(태대형), 혹 上大等(상대등)이 된다 함은 이미 졸저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우기한 臣雲遣支의 雲은 곧 하문의 臣雲新國의 雲으로 말미암아 誤證된 자니 이를 개정하면 臣智惑加優呼臣遣支라 할지니, 신크치의 약칭이 신치가 되어 당시의 습관어가 되고 신크치라 具稱함이 희소하므로 臣遣支惑略呼臣智라 쓰지 않고 도리어 臣智惑加優呼臣遣支라 씀이다.

4)     변진전의 “借邑”이니 韓傳에는 邑借란 관명이 있고 변진전에는 借邑이란 관명이 있는 바 양자 중 하나는 반드시 倒寫(도사)한 자일지니 何者(하자)가 도사인가. 頓(돈)씨의 가보에 거하면 돈씨는 을지문덕의 자손이니 을지는 관명이요 성이 아니라 하며, 일본인 白鳥庫吉은 퉁구스족의 말에 使者(사자)를 “일치”라 함에 의거하여 晉書 숙신전의 乙力支를 일치로 해석한 바, 읍차는 그 음이 일치와 비슷하니 또한 사자의 뜻이 될지며, 고구려의 관명의 鬱折(울절)도 또한 ”일치”인 듯 하니 변진전의 차읍은 곧 읍차의 倒載일 것이다.

5)     변진전의 彌烏邪馬(미오야마)니 邪 耶 牙 등 자가 모두 “라”의 음이 됨은 이미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해동역사 지리에 거하면 현금 高靈이 곧 변진의 彌摩那인즉 본전의 邪馬는 馬邪의 倒寫이다.

6)     한전의 駟盧(사로), 莫盧(막로)와 변진전의 馬延(마연)이니, 우의 삼국은 疊寫(첩사)이므로 해동역사의 刪去함이 옳은 것이다.

3.    기사의 교정

前節(전절)에 진술한 바는 본 列傳(열전)의 抄寫(초사)시대의 抄寫者(초사자)들이 誤(오)한 字句(자구)를 교정한 자이어니와, 이제 본절에는 당초 그 본문의 잘못된 기사를 교정하려 함이다.

위진 사관이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서적이 있어 참고하였다해도 기사의 違誤(위오)가 많음은 마치 원명청 사관들이 원사나 명사나 일통지 간운데서 고려의 사책이나 이조의 여지승람의 본문을 등록하자면 매양 妄改(망개)와 위증이 있는 유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略擧(략거)하건데,

1)     辰韓(진한)을 秦人(진인)의 자손이라 함이니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를 하우씨의 자손이라 하며, 한시외전에 고죽국을 湯(탕)의 封國(봉국)이라 하며, 어환의 위략에 大秦(대진)–로마인을 지나인의 자손이라 하여 彼國(피국) 사가들이 매양 그 조존의 僻見(벽견)으로 허다한 笑話(소화)를 끼쳤지만, 본 열전에도 그 謬習이 있어 辰韓(진한)의 일명은 秦韓이라 하고, 秦韓(진한)의 秦(진)에 傅會(부회)하여 辰韓(진한)은 秦人(진인)의 동주한자라 하며 이를 위증하기 위하여 辰馬 양 韓이 동일한 “羅 那 不斯” 등의 지명과 동일한 신지, 읍차 등의 관명이 있음을 불구하고 “辰韓…言語不與馬韓同”의 억단을 내리며, 모호망매(模糊茫昧)한 國爲邦,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등 난구()를 가입하여 “言語…有似秦人”의 불충분한 증거를 발표하여 조선의 족계를 亂하려 하였으며…

2)     동부여를 濊로 오인함이니, 지나인이 조선 일을 적을 때에 너무 무책임하게 적어, 공자의 춘추에 조선을 산융과 섞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진번조선의 對燕전쟁을 흉노전의 동호 산융 혹 예맥 등의 사실에 넣어 만일 관자나 위략이 아니면 그 오류를 발견할 수 없이 되었거니와, 본지에도 또한 동부여를 예로 오인한 잘못이 있다.

예맥은 곧 “려신”이니 려신을 혹 “려”의 한자로 譯하여 離枝(이지), 令支(영지), 濊(예), 穢(예), 薉(예) 등이 되며, 혹 려신을 두 자로 병역하여 女眞(여진), 野人(야인) 등이 되며, 혹 려신의 아리강으로 그를 이름하여 挹婁(읍루), 鴨盧(압로) 등이 되며, 혹 “려신”의 別部(별부) “물가”로 전체를 총칭하여 勿吉(물길), 靺鞨(말갈) 등이 된 자라 할 것이다. 歷來(역래) 학자들이 조선의 삼국 초인 중국의 漢末(한말)에 읍루란 명만 있은 줄 알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기에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라 하여 읍루를 예맥으로 仍書(잉서)하였으며 조선의 삼국 말인 중국의 당나라 초기에 靺鞨이란 명만 있는 줄 알지만 김유신전에 “唐高宗高句麗與濊貊向惡”이라 하여 말갈 예맥으로 仍稱(잉칭)하엿으니 “려신”의 명칭과 연혁이 대개 이러한 것이어늘, 본지에 읍루가 濊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立한 이외에 따로 濊傳을 立함이 하나의 誤요, 동북 양 부여 가운데에 북부여는 그저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濊로 인함이 再誤니라

그러나 읍루전에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言語不與扶餘句麗同 東夷飮食類皆用俎豆 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 라 하니 扶餘東北千餘里가 송화 흑룡연안의 려신국이 아니냐. 言語不與扶餘句麗同이 후한서 읍루전과 북사 물길전의 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한 려신족이 아니냐. 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가 조선 열국 중 가장 미개한 려신이 아니냐. 그 위치 언어 풍속의 설명이 곧 려신임이 명백하며, 濊傳에는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이라 하였으니, 남으로 진한을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언어는 당시 조선 열국이려신 부락 이외에 모두 동일한 어어이었지만, 법속이 부여 고구려 양국과 상동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이는 그 위치 언어 풍속으로 말미암아 동부여를 예로 오인함이 명백하거늘 후세 학자들이 삼국지의 誤를 발견치 못하여 조선사상 또는 동양사상 종족의 界限을 劃淸(획청)하지 못하여 허다의 분규를 釀出(양출)하였다.

(당) 賈耽(가탐)의 “新羅北 溟州古濊地前史以扶餘爲濊地者蓋誤”는 다만 북부여가 濊가 아님을 발견할 뿐이요 동부여가 濊가 아님은 依舊히 발견치 못함이다.

혹왈 “려신이 水草를 逐하여 遷徙하는 蠻族인 고로 삼국사에 羅 濟 麗 삼국의 중간에 잡거한 말갈려신도 있으며, 고려사에 두만과 압록 등지에 侵據한 女眞려신도 있었은즉, 본지의 濊도 이와 같이 일시 동부여 역내에 침입한 려신됨이 가하다”하나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主인 동부여를 立傳하지 않고 客인 濊를 입전함은 본지의 誤이다.

3)     樂浪을 뺌이니, 낙랑은 조선사상 가장 장황분요(張皇紛擾)한 대문제라, 그 詳論은 타일로 讓하거니와, 이제 약설하건대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譯이니, 漢 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낙랑을 州郡의 제일로 정하니, 그 위치가 지금 海城등지요, 최씨란 자가 대동강 연안에서 굴기하여 낙랑국이라 칭하다가 末王 崔里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 20년이요, 그 뒤에 낙랑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漢兵을 영입하여 고구려에게 반항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라. 羅 濟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구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구가 絶跡(절적)됨은 최씨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라.

한 광무 이후의 낙랑이 비록 漢에 服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의구히 조선인이 主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僑寓(교우)한 자요, 태조왕때에는 요동이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 賈耽(가탐)의 四夷述 自序에 “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함이요 동천왕 때에 至하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仍屬하였으므로 동천왕이 丸都를 관구검의 유린에 棄(기)하여 廟社와 인민을 평양에 移함이나, 요동의 낙랑은 魏에 見失하였으므로 관구검의 還軍할 際에 낙랑을 從함이요, 미천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入하였으므로 연나라 모용외가 永平部의 柳城에 낙랑을 移設함이며, 광개토왕 장수왕 이후에는 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핍을 당하다가 백제의 兵이 海를 渡하여 침거하여 위제(魏帝: 拓跋氏)가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내에 낙랑을 이설함이니, 이상은 사책에 증명된 자라.

요동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입한 자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漢族의 정복을 被한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것이어늘 삼국지가 한서 지리지의 遺規(유규)를 襲(습)하여 낙랑을 조선열전 중에 빼었으므로 그 지리의 缺憾(결감)은 고사하고 첫번째는 고구려와 낙랑의 언어 풍속 등 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두번째는 낙랑과 삼한의 언어 풍속 등 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세번째는 따라서 고구려 부여 등 북방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과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 동이열전의 비상한 결점이 되었다.

4)     拔奇(발기) 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誤하여 장자라 하며, 공손강에게 借兵한 사실에도 약간의 誤가 있으며 고구려왕을 고구려후라하며 고구려사에 보이지 아니한 고구려후의 騶(추)란 이름이 있으며 王莽(왕망)이 고구려후 騶(추)를 斬(참)하였다하며…기타 모든 착오가 있으나 이는 사학상에 그리 대문제 될 것이 아니라 贅論(췌론)하지 아니한다.

4.    결론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

역래의 조선사가들의 소위 사학은 매양 博學으로써 유일의 조건을 삼으며 그 소위 박학은 오직 서적뿐이요 그 소위 서적은 중국서적뿐이었다.

김부식은 조선 고사가 결망된 까닭에 無虎洞中의 弧狸와 같이 조선사가들의 鼻祖가 되었지만, 彼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宋人의 책부원구 일천권을 사다가 自家의 참고에 供하고는 內閣에 心臟하여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됨을 희망하였다. 彼의 악렬한 수단이 참 通惡할 만할 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푼어치가 못되는 역사다.

삼국유사 점필재집 등에 산견한 천년사상계의 지배자인 영랑, 술랑, 부례랑 등 위인을 쓰지 아니하며 文武王書, 당서, 일본서기 등에 유전한 백제 말일의 유일한 영물인 부여福信의 열전을 짓지 아니하며, 무공이 가장 많은 동성왕 시대를 微弱으로 오증하며, 奇功을 세운 양만춘을 누락하며, 족계를 談하려면 왕검시의 정통인 부여를 刪棄하며, 지리지를 기하려면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를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심히적다.

彼가 중국서적에서 얻은 박학도 너무창피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聚燕齊亡命王之都王儉”을 인용할 때에는 왕지를 하문에 붙여 “왕지도왕검”이라하여 그 귀절을 옳게 떼지 못하였으며, 宋書 고구려전의 “璉不欲使弘南來”를 移錄할 때에 璉을 왕으로 고치면서 來는 그대로 두어 장수왕이 평양에 앉지 않고 浙江에 안자 하는 말이 되었으며, 수서의 “高麗傲慢不恭帝將討之”는 “我傲慢不恭帝將討之”라 개서하여 허리부러질 我란 주인을 찾았으며, 책부원구의 “姓募名秦”을 등사하여 신라 박, 석, 김 3성 이외에 턱없는 의문의 募氏帝王을 인사하게 되고, 이밖에도 이 같은 盲人夜行의 기사가 많으니 선택없는 박학은 박학이 아닌 석택만 못하다.

최근의 구암, 순암 등 諸先儒는 탄복할 만한 精詳謹密을 가져 김씨의 착오를 발견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중국 서적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지리를 논하려면 지위가 착잡한 水經을 그대로 인용하며, 연대를 표하려면 속석(束晳: 죽서기년의 학자) 이후에 위작한 죽서기년을 그대로 尊信하고 彼 소위 經史는 字字金玉으로 보아 그 위증과 오증을 발견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저자가 시기를 얻으면 중국 서적 중 일체 조선에 관한 기록의 是非誤正을 찾아보려 하거니와, 근래 著史者들이 매양 각종의 진서 위서 訛言 정언을 모두 조선사의 재료로 삼아 洋文의 형식으로 篇 章을 갈라 신사학자의 지은 조선사를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한다.



[1] 窮追極遠踰烏丸骨都 지극히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 骨都 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