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조선사연구초: 三國史記 중 東西 兩字의 相換 考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3.

1.    東有樂浪의 시비

낙랑은 평양의 별명이요, 평양은 백제의 서북이어늘, 이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를 보면 “國家東有樂浪” 이란 1구가 있다. 그리하여 歷來 사가의 논제가 되었다. 安順菴은 “낙랑이 비록 백제의 서북이지만 낙랑국(최씨) 성시(盛時)에 강원도 반폭(半幅)이 거의 낙랑의 속지가 된 고로 백제가 강원도 부분의 낙랑을 가리켜 東有라 하였다” 하고, 정다산은 “右의 낙랑은 춘천 낙랑이요 평양 낙랑이 아니니, 대개 춘천의 土酋 최씨가 굴기(堀起)하여 낙랑국이라 칭하고 매양 신라와 백제를 침하므로 신라 백제 양국의 초엽에 보인 낙랑은 모두 춘천 낙랑이니, 춘천낙랑인 고로 東有라 하였다” 하나, 낙랑의 본부가 평양인즉, 백제인이 낙랑을 거론할 때에 본부를 사(捨)하고 그 부분인 강원도 낙랑을 말할 리가 없으므로 나는 순암 선생의 말을 좇으려 아닌한다.

춘천이 漢의 낙랑 동부가 되었단 말은 있으나 춘천을 낙랑이라 칭한 때는 없으며, 또는 삼국사기에 거하면 신라와 백제의 초년에 모두 낙랑국의 침구로 인하여 비상히 곤고하다가 고구려 대무신왕 17년에 낙랑을 멸하고 20년에 낙랑을 다시 漢에게 견탈(見奪)함으로부터 낙랑의 침구가 羅•濟 양국사에 보이지 아니하였은즉, 그 각문에 보인 낙랑들이 곧 1개의 낙랑임이 명백하여, 漢이 낙랑을 취하여 살수 이남이 한에게 속하였다 한즉 그 낙랑들이 모두 今 평양임이 명백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산 선생의 말도 좇으려 아니한다. 

그러면 東有의 兩字를 어떻게 해석하려 하는가? 次節에 이를 해설하여 한다.

2.    삼국사기에 바뀐 東西 兩字

삼국사기에 西자가 東자로 바뀐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온조왕 24년에 마한왕이 온조를 責하여 가로되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라 한 바, 백제가 마한의 서북인즉 마한의 할여한 百里地, 온조의 初據한 미추성, 위례성 등도 서북이 됨이 명백하니 “동북일백리”는 “서북일백리”로 作함이 가하며, 온조왕 37년에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空無居人.”이라 한 바, 패수는 대동강이요, 대수는 임진강이면, 한수 서북됨이 확연한즉, 한서 서북 부락이 도망하여야 浿帶之間에 據人이 없으리니, “한수동북”은 “한수서북”으로 作함이 가하며, 지리지에 “新城國之東北大鎭.”이라 한 바, 신성은 高奴子가 鮮卑를 막고 男建이 李勣을 막던 고구려의 서북 요새인 고로 신당서에도 “新城賊之西邊要鄙.”라 함이니 “동북대진”은 “서북대진”으로 작함이 가하다. 이상은 모든 東자는 西자로 작함을 인하여 나는 東有樂浪도 西有樂浪으로 작함이 가하다 한다.

3.    東西 兩字의 바뀐 원인의 가정

하고로 삼국사기 중에 西자를 東자로 바뀐 자가 이다지 많으냐. 만일 당시의 사람들이 일월의 출몰하는 동서의 방향까지 몰랐다 하면 삼국 문명이 모두 거짓말이 될 뿐이며, 혹은 당시의 초사자(抄寫者)나 후세의 인판자(印版者)가 誤함이라 하면 다른 문자는 그렇지 않은데 홀로 西자만 쫓아다니면서 東자로 誤할 리가 없으며, 또는 西자의 자형과 비슷한 兩자나 雨자나 而자나 亞자 등으로 誤寫치 않고 오직 字意의 반대되는 東자로 오사할 리도 없으며, 또는 반대되는 南자나 北자로 誤치 않고 이제 공교히 3, 4 처에나 동일한 西자로만 誤하였다 함도 不成의 설이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말에 “동방”을 “시”라 하고 “서방”을 “한”이라 하므로 삼국시대의 학자들이 한자를 취하여 이두자를 만들 때에 西자의 음 “시”를 취하여 “東”쪽을 “시(西)”로 쓰며, 그 대신에 “西”를 “東”으로 써 東西 양자가 바뀌었으며 사가가 사책을 지을 때에 그 바뀐 東西 兩字를 썼으므로 고사상에 바뀐 동서 兩字가 있음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4.    가정부터 實例

그러다가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독하니 “迦瑟羅一名河西良”이라 하였다. 가슬(迦瑟)은 “가시”요, “가시”는 포동(浦東)의 意니 고구려는 琿春 등지를 가시(迦瑟)라 하고, 신라 경덕왕 이후에는 今 강릉을 가시(迦瑟)라 한 자니, 그러면 고구려의 가시는 고구려 동북의 지명이요, 신라의 가시는 신라 동북의 지명인즉, 가시를 河東良이라 하지 않고 河西良이라 함은 東의 意를 취하지 않고 西의 意를 취함이니 이것이 이두자의 東자를 西자로 바꾸어 쓴 실례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1가정을 확증하였으며, 고구려에서 제천대회를 寒盟이라 칭한 바 한맹의 일명이 東盟이니, 寒盟은 그 음이 한몽이 될지며, 한몽은 大會의 意니, 함몽의 한을 음으로 쓰면 寒盟의 寒이 되려니와 意로 쓰면 西가 될 터인데, 이제 西盟이라 하지 않고 東明이라 함은 이두자의 西자를 東자로 바꾸어 쓴 실례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2가정을 확증하였다.

5.    兩種 史冊의 不同

그러면 고사상에 동서 양자가 모두 바뀌지 않고 바뀐 동서 양자가 있는 이외에 바뀌지 아니한 동서 양자도 있음은 하고인가(뭔소린지…)?

대개 삼국시대에 이두자로 쓴 史冊과 한자로 쓴 사책이 있었으니, 가령 백제사에 왕근왕(王斤王 – 本紀에 三斤王이라 함은 誤板) 일명을 임걸왕(壬乞王)이라 하니, 一은 한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면 他一은 이두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며, 삼국유사에 노례(弩禮; 누리 즉, 世)왕의 일명이 유례왕(儒禮王)이라 하니, 一은 한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면, 他一은 또 이두자 사책에서 전한 명니, 기타 모든 관명 지명 등의 양명있는 자는 다 양종 사책의 쓰인 명을 竝傳한 자며, 소문전(蘇文傳)에 “其父東部大人”이라 하고, 註에 “或云西部大人”이라 하였으니, 본문과 주의 인용한 자가 이같이 상반함은 양자 중의 一이 한문 사책에서 출한 동시에 他一은 이두자 사책에서 출한 것일지니, 동부 서부의 분별하지 못하게 됨이 더욱 고사상에 동서 양자 바뀐 것이 있는 실증이다.

6.    김부식의 호도(糊塗)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미 한문의 저작인즉 이두자의 쓰인 古詞나 방위 같은 것을 모두 개정치 아니함은 하고인가? 김씨는 황조맹랑(荒粗孟浪)한 사가라. 發岐와 拔奇는 1인의 名의 兩譯이어늘, 김씨가 一은 고구려사에 거하며 他一은 중국사에 거하여 쓸 쌔 誤分하여 양인을 만들었으며, 살수는 삼국시대 가장 유명한 전장이어늘 김씨는 이들 未詳地分에 넣었으며, 이밖에도 이러한 호도(糊塗) 하나 둘이 아니다. 김씨가 이두문에 무식하므로 모든 알기 쉬운 국어의 관명도 “夷言不知其意”라 自註하였으며, 게다가 이두문 배척에 결렬하여 신라시대에 끼친 시가, 삼국유사에 적힌 시가를 삼국사기에는 한 짝도 쓰지 아니하였으니, 만일 김씨가 전술한 인명, 지명, 東西 등이 이두문의 것인줄을 알았더라면 모두 배척하고 收入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어찌 개정 여부가 있으랴. 그러면 삼국사기에 바뀐 東西 등 자의 존재는 누구의 收拾이냐? 麗初의 문사, 혹 승려들이 각종의 古記를 한문으로 지을 때에 모든 이두자의 사책을 역출하는 동시에 그들 不經意하는 가운데서 우연히 유루(遺漏)하여 몇 개 바뀐 동서 양자가 남아 있음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