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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단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5세 가륵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8.

제5세 단군왕검 가륵 인제

仁帝(인제) 휘는 嘉勒(가륵)이고 元帝(원제)의 태자이다. 元年(원년)은 己亥(기해)이고 재위기간은 45년이다.
仁帝諱嘉勒元帝太子也. 元年己亥在位四十五年.

己亥(기해, BC2182) 원년. 帝(제)의 성품은 총명하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었다. 큰아들 烏斯丘(오사구)를 太子(태자)로 삼았다. 5월에 帝(제)는 三郞(삼랑)【納言博士(납언박사)이다】乙普勒(을보륵)을 불러 神王倧佺(신왕종전)의 도리에 대해서 물었다. …이하 번역 생략(환단고기 참조)…
己亥元年. 帝性聰睿仁慈有聖德. 冊長子烏斯丘爲太子. 五月帝召三郞【納言博士】乙普勒, 問神王倧佺之道. 乙普勒交拇加右手, 行三六大禮, 而進言曰.., 神者能引出萬物, 各全其性, 神之所妙, 民皆歸依也. 王者能德義理世, 各安其命, 王之所宣, 民皆承服也. 倧者國之所選也, 佺者民之所擧也, 皆七日爲回, 就三神, 執盟, 三忽爲佺, 九桓爲倧. 盖其道也欲爲父者斯父矣欲爲君者斯君矣欲爲師者斯師矣欲爲子爲臣爲徒者亦斯子斯臣斯徒矣故神巿開天之道亦以神道而求爲福於世上人間而已代天神而王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代天王而主人間去病解怨無一物害命三七計日會全人執戒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玄妙自得光明共濟是爲居發桓也施之九桓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也

庚子(경 자, BC2181) 2년. 때에 풍속은 오히려 같지 않고 사투리는 서로 각축을 벌였었다. 비록 眞書(진서)라는 상형문자가 있었으나 10집마다 많은 말들이 통하지 아니하였고 100리를 지나면 글자를 해독하기 어려웠다. 이 해 봄에 三郞(삼랑)【博士(박사)이다.】乙普勒(을보륵)에게 명하여 正音(정음) 38자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인데 그 문자는 다음과 같다.
庚子二年. 時俗尙不一, 方言相殊, 雖有象形表意之眞書, 十室之邑語多不通, 百里之國字每難解. 是年春, 命三郞乙【博士】乙普勒, 譔正音三十八字, 是爲加臨土. 其文曰..,

辛丑(신축, BC2180) 3년. 가을에 神誌(신지)【太修官(태수관)이다】 高契(고 글)에게 명하여 배달나라의 옛 이야기[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고 칭하기를 刪修加臨多(산수가림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양 사학의 원조가 되었는데 神誡(신계) 神訓(신훈) 勅語(칙어) 諭書(유서)에서부터 道德(도덕) 正治(정치) 法律(법률) 風俗(풍속) 習慣(습관) 등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그 책에 들어있다【野勃(야발)이 渤海文(발해문)으로 간행하였다.】.
辛丑三年. 秋命神誌【太修官】高契編修倍達留記, 稱曰刪修加臨多, 是爲東洋史學之元祖也. 神誡神訓勅語諭書及道德正治法律風俗習慣等皆備載此書【野勃以渤海文刊行】

癸卯(계묘, 2178) 5년. 주와 군들을 按察(안찰)하고 학문과 농업을 권장하였다.
癸卯五年. 按察州郡奬學勸農.

甲辰(갑진, BC2177) 6년. 太學(태학)에 있는 太士(태사)인 高辛(고신)【혹은 高信(고신)이라고도 한다.】가 부모의 상에는 3년 服制(복제)할 것을 청하니 帝(제)가 좋다고 하였다. 愛苗(애묘)씨가 무도하여 帝(제)가 병사를 보내 悉段(실단)에서 토벌하였다. 遼陽(료양)[1] 太守(태수) 索靖(색정)의 치적이 좋지 못하여 帝(제)가 진노하였으며 弱水(약수)【지금의 黑水(흑수)이다】로 귀양보내 종신토록 갇혀 지내게 하였으나 후에 그를 용서하여 또한 그 땅을 봉국으로 삼았으니 흉노 선우의 조상이 되었다. 이르기를 摚犁孤塗單于(당리고도단우)라 하는데 즉 하늘【摚犁(당리)】의 아들【孤塗(고도)】大皇帝(대황제)【單于(단우)】라는 뜻이다.[2]
甲辰六年. 太學太士高辛【一云高信】請行父母喪三年服制帝曰善. 愛苗氏無道, 帝遣兵討伐于悉段. 遼陽太守索靖治績不善, 帝震怒命遷流于弱水【今黑水】, 終身棘置, 後赦之仍封其地, 因居而終爲匈奴單于之祖稱曰摚犁孤塗單于卽天【摚犁】子【孤塗】大皇帝【單于】之義也.

乙巳(을사, 2176) 7년 봄…(번역생략) 【발해사에서는 “帝(제)가 聖德(성덕)과 訓意昭明(훈의소명)이 있다고 高興(고흥)이 남긴 遺史(유사)에 있다”고 하였다.】.
乙巳七年. 春, 帝下詔曰, 天下之大本在於心之中正, 而巳[3]人失中正, 則事無成就, 物失中正, 則體乃傾覆人心愈危道心愈微惟精惟一允執厥中勿失中正不失中正然後萬事可得正矣. 但, 爲父當慈, 爲子當孝, 爲君當義, 爲臣當忠, 爲夫婦當以相敬, 爲兄弟當以友愛, 爲幼小當以悌長, 爲朋友當以有信恭儉以持己博愛以接人修學練業啓發智能鑄成德器廣施公益共開世務常尊國敎是遵禮法各守其職勤勉致産國如有事㤀私奉公冒險勇進克扶國家之大業是爾朕與汝臣民皆 拳拳服膺咸有一德實踐至意庶幾一體【渤海史曰.., 帝有聖德訓意昭明▨載於高興遺史】.

丙午(병오, BC2175) 8년. 康居(강거)가 支伯特(지백특)【西藏(서장)이다】에 의지하여 반역하니, 帝(제)는 夫宇(부우)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게 하였다. 4월에 帝(제)는 太白山(태백산)에 올라 민가에서 불때서 나오는 연기가 적음을 보고 조세에 차등을 두라고 명령하였다.
丙午八年. 康居據支伯特【西藏】而叛, 帝遣宇平討平之. 四月帝登太白山, 望見民家炊煙少起, 命感租稅有差.

丁未(정미, 2174) 9년. 帝(제)는 龍岡(룡강)에 올라 민가에서 불때서 나오는 연기가 많음을 보고 이내 기뻐하고 노인들에 상을 내렸다.
丁未九年. 帝登龍岡, 望見民家炊煙多起, 帝乃欣悅賞賜耆老.

戊申(무 신, 2173) 10년. 帝(제)는 동쪽으로 巡行(순행)하여 滄海(창해)에 이르러 산과 강들을 보고 말하기를 “아름답고 기이한 산과 강들의 佳麗(가려)함이여”라고 말하고 “나는 장차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하였다. 濊(예)의 마을이 반란을 일으키자 帝(제)는 余守己(여수기)를 명하여 그 추장 素尸毛犁(소시모리)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이대부터 그 땅을 素尸毛犁(소시모리)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牛首州(우수주)【春州(춘주)】이다. 그 자손은 해상으로 달아나서 天王(천왕)이라 참칭하였다.
戊申十年. 帝東巡至于滄海, 望見山川曰.., 美㢤奇㢤山河之佳麗㢤. 朕將欲遷都于東方. 濊邑叛, 帝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 自此稱其地曰素尸毛犁, 今牛首州【春州】也. 其子孫逃于海上僭稱天王.

辛亥(신 해, BC2170) 13년. 帝(제)는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이번 봄이 바야흐로 한창이고 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았을 때 草木(초목)과 많은 생물이 모두 그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는데 나는 백성들 중에 혹 鰥寡孤獨(환과고독)들이 곤궁한 상황에 항상 존재하니 우수와 비애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근심으로부터 마음이 풀려서 환하게 웃는 날이 없으니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夏國(하국)의 민간의 풍문을 조사하여 구원할 사실이 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4] 속하기를 바라는 자가 심히 많았다.
辛亥十三年. 帝詔曰.., 今春和方畼之時, 草木群生之物皆有其自樂, 朕有百姓或鰥寡孤獨困窮之人常在憂愁悲哀之中無展眉歡笑之日可不憐㢤. 使人査實救之夏國之人聞風. 願屬者甚多.

계축(癸丑, 2168) 15년. 아우 嘉祿(가록)을 阿闍王(아도왕)으로 봉하고 국가를 주고 국가이름을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당장경(唐莊京)【白岳(백악)】에 도읍하였다. 성을 쌓고 마을을 건설하니 인민들이 많이 모였으니 1,0000호가 되었다.
癸丑十五年. 封弟嘉祿爲阿闍王, 賜國, 號曰阿斯達, 都唐莊京【白岳】, 築城, 設邑. 人民多聚成都, 作一萬戶.

甲寅(갑인, BC2167) 16년. 阿闍王(아도왕)은 韓天寬(한천관)을 太宰(태재)로 하고 吳善(오선)을 都統(도통)으로 삼았다.
甲寅十六年. 阿闍王 以韓天寬爲太宰, 吳善爲都統.

乙卯(을묘, BC2166) 17년. 阿斯達(아사달)의 遺族(유족)인 貊(맥)의 추장이 黃州(황주)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阿闍王(아도왕)이 吳善(오선)을 보내 토평하였다.
乙卯十七年. 阿斯達遺族貊酋據黃州而叛, 阿闍王遣吳善討平.

戊午(무오, BC2163) 20년. 아도왕이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戊午二十年. 阿闍王築壇祭天

辛酉(신유, BC2160) 23년. 阿闍王(아도왕)은 서쪽으로 순행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또한 永王山(영왕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五浦洞(오포동)에 비를 세웠는데 서쪽으로 순행한 事蹟(사적)을 기록하였다.
辛酉二十三年. 阿闍王西巡觀海, 仍登永王山, 祭天, 立碑于五浦洞, 記西巡事蹟.

壬戌(임술, BC2159) 24년. 모든 汗(한)들에게 정치를 살피고 인정을 베풀며 구휼을 권유하고 농상을 장려하게 하였다.
壬戌二十四年. 命諸汗, 察政, 施仁, 勸諭救恤, 奬勵農桑.

乙亥(을해, BC2146) 37년. 夏國(하국)의 主相(주상)이 畎部(견부)를 침범하여 帝(제)가 병사를 보내 저지하였다. 阿闍王(아도왕)이 입조하여 형제우애의 도리에 대하여 敍事(서사)하였다.
乙亥三十七年. 夏主相來侵畎部, 帝遣兵禦之. 阿闍王入朝叙兄弟友愛之誼.

丙子(병자, BC2145) 38년. 夏國(하국)의 주상이 風部(풍부)와 黃部(황부)를 침범하니 帝(제)가 병사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丙子三十八年. 夏主相來風部黃部, 帝遣兵禦之.

辛巳(신사, BC2140) 43년. 于部(우부)가 夏國(하국)과 서로 통하여 화합하였다.
辛巳四十三年. 于部與夏國通和.

壬午(임 오, BC2139) 44년. 때에 천하는 태평하고 백성은 안락하여 비는 순하고 오고 바람은 고르게 들었다. 하늘에서는 홍수와 가뭄의 재앙이 없었고 곡식은 풍년이 들고 과일은 잘 익어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이 없었으므로 이를 일컬어 治平時代(치평시대)라 하였다.
壬午四十四年. 時天下泰平, 百姓安樂, 雨順風調 天無水旱之灾, 穀豊, 果熟, 民無衣食之患,稱之以治平時代.

癸未(계미, BC2138) 45년. 9월에 帝(제)가 죽었다. 태자 烏斯丘(오사구)가 즉위하니 이가 光帝(광제)이다.
癸未四十五年. 九月帝崩, 太子烏斯丘立, 是爲光帝.

 

[1] 환단고기에는 列陽이라고 하였다.

[2] 약수를 黑水(흑수)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흑룡강은 아닐 것이다. 즉, 약수는 흉노의 땅에 있어야만 한다.

[3] 원문은 巳이나 문맥상 己인듯하다.

[4] 왜 이런 기록이 나왔는가?

《규원사화》가륵임금 기록

하국(夏國)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람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중략… 재위 51년 동안 위엄 있는 덕은 사방으로 퍼져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夏王失德, 其臣有簒逆者, 乃使息達率藍‧眞蕃之民, 以征之, ……在位五十一歲, 威德流被于四表, 國人咸慕其化.

《후한서 동이열전》: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태강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羿)에 의해 쫓겨났다.]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羿所逐也.]

태강은 하국의 제3대 왕으로 예에 의해 쫓겨난 그 19년은 BC2170년이며 곧 가륵 37년이며 약간의 년대 차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