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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당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17세 벌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9.

제17세 단군왕검 벌음 의제


의제의 이름은 벌음이고 익제의 태자이다. 원년은 경진년이고 재위기간은 51년이다.
毅帝諱伐音益帝太子也. 元年庚辰在位五十一年.

경진(BC1661) 원년. 큰아들 위나를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단간선(段干銑[1])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은국(殷國)의 주인 소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庚辰元年. 冊長子尉那爲太子命段干銑爲太子太傅. 殷主小甲遣使來和. 是歲定八十稅一之制.

신사(BC1660) 2년. 여름에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임금께서 심히 불쌍히 여기시어 그 백성을 창해의 물가로 옮기고 쌀과 곡식을 균등히 공급하였다.
辛巳二年. 夏洪水大漲民家多被害. 帝甚憐之移其民於滄海之濱均給米穀.

을유(BC1656) 6년. 요양성을 쌓고 무예를 가르쳤다.
乙酉六年. 築遼陽城敎以武藝.

을축(BC162) 10년. 임금께서 북쪽으로 순행하여 약수【흑룡강이다】에 이르렀다. 우속(禹粟)에게 명하여 금광을 채굴하라고 하였다.
乙丑十年. 帝北幸至弱水【黑龍江也】命禹粟採掘金鑛.

정미(BC1634) 28년. 임금께서 장백산에 오르셔서 큰 비석을 세우고 성스러운 여러 한(汗)들의 공로를 크게 새기시고 업적을 칭송하였다.
丁未二十八年. 帝登長白山立巨碑大刻列聖群汗之功稱頌業績.

무신(BC1633) 29년. 임금께서 심양태수[2] 오환(吳渙)을 불러 이르시기를 “경이 심양을 지킨 이후로 비방하는 말이 날마다 나에게 들리므로 내가 사람을 시켜 심양을 살피어본즉 밭과 들이 크게 개간되었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만족하며 소와 말들은 많이 번식하였다. 이는 곧 경이 나의 좌우신하들에게 아부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하셨다. 이에 관작을 더하여주고 상으로 말과 마차를 주었다.
戊申二十九年. 帝召瀋陽太守吳渙謂之曰.., 卿守瀋陽以來毀言日至然, 使人審察瀋陽, 則田野大闢, 人民裕足, 牛馬蕃殖. 是卿不諂於朕之左右也. 仍加官爵賜賞車馬.

임자(BC1629) 33년. 임금께서 청해태수 팽오(彭吳)을 불러 이르시기를 “경이 청해를 지킨 이후로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나에게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 청해를 살피어 본 즉 밭과 들은 황폐하고 백성들은 빈곤하며 가축들도 번성하지 아니하니 이는 경이 짐의 좌우 신하들에게 아첨하여 좋은 평판을 구한 까닭이라. 겉만 꾸미는 사람을 세상에서 모두 꺼리고 미워하는데 하물러 군을 다스리는 직무를 가진 자에게는 어떠하겠느냐? 내가 이미 경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이는 경이 하려는 마음도 없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라. 다시 청해의 태수로 복직시키니 백성을 잘 다스려 나라에 보답하라.”고 하셨다. 이내 다시 청해태수로 복귀시키셨다.
壬子三十三年. 帝召靑海太守彭吳謂之曰.., 卿守青海以來譽言日至然, 使人審視靑海則田野荒廢, 人民貧困六畜不蕃是卿諂於朕之左右而求譽也. 外餙之人世皆忌憎, 况治郡之任乎. 朕旣知卿之才能, 此不爲也非不能也. 復守靑海善治百姓以報國祚. 乃命還守本職.

계축(BC1628) 34년. 임금께서 창해태수 려인(黎仁)을 불러 이르시기를 “경이 창해를 지킨 이후로 칭찬의 말도 없고 헐뜯는 말도 없다. 또한 관원의 도리는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며 다른 관직을 갖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경이 다른 사람의) 관작과 녹봉을 훔쳐 빼앗는 것은 신하의 행실이 아니니라. 경은 이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다. 이내 다시 창해태수로 복귀시키셨다.
癸丑三十四年. 帝召滄海太守黎仁謂之曰.., 卿守滄海以來曾無譽言又無毀言. 且爲官之道在於忠君治民不思重任而竊取爵祿者非臣子之行也. 卿深思之. 乃命還守滄海

갑인(BC1627) 35년. 임금께서 국정을 돌아보시고 현명한 자를 천거하여 능히 안팎의 모든 벼슬을 하사하시었는데 감히 녹봉만 받아 먹으려는 자들이 아니었다.
甲寅三十五年. 帝明察國政, 擧賢任能內外諸司, 不敢爲尸位素餐者也.

을미(BC1622) 40년. 동생 벌심【또는 대심】을 달달(韃靼)[3]의 한(汗)으로 삼았다.
乙未四十年. 封皇弟伐心【一云代心】爲韃靼汗.

경오(BC1611) 51년. 임금께서 돌아가시니 태자 위나가 즉위하였는데 이가 곧 명제이다.
庚午五十一年. 帝崩太子尉那立是爲明帝.

 

[1] 段인지 殷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기고사에서는 은자선(殷子仙)이라고 하였다.

[2] 지금의 하간(河間). 로사(路史) 참조 할 것.

[3] 환단고기에는 남선비의 대인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