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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당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14세 아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8.

제14세 단군 아한 무제


武帝諱阿漢裕帝太子也. 元年丁亥在位五十二年.
武帝(무제)의 이름은 阿漢(아한)이고 裕帝(유제)의 태자이다. 원년은 丁亥(정해)년이고 재위기간은 52년이다.

丁亥元年. 冊長子屹達爲太子封次子屹德爲安平王. 置養賢祠奉安廣成子【紫府先生】蒲衣子小連大連.
丁亥(정해) 원년. 큰아들 屹達(흘달)을 태자로 삼고 둘째아들 屹德(흘덕)을 安平王(안평왕)으로 삼았다.[1] 養賢祠(양현사)를 두고 安廣成子(안광성자)【紫府先生(자부선생)】과 蒲衣子(포의자)와 小連(소련)과 大連(대련)을 봉안하였다.

戊子二年. 四月. 有一足獸見於松花江邊而哀叫, 帝請有爲子問曰.., 此實初見之獸也, 一足走躍悲叫何也. 有爲者對曰.., 國家將興必有祥瑞, 國家將亡必有妖孽, 盖神物現則事體動而禍福將至, 是以知爲善而亦知不善, 故發天地造化之徵兆也. 此一足獸在夏國南方陽獸, 而神明之物也. 豫知夏國之將亂避來于此而哀號者也. 非但觀此獸而知之, 察之於天道之順行而必能豫知萬世之事也. 帝曰.., 代夏國爲王者爲誰. 有爲子曰.., 臣察夏國之人材, 則夏國無其人, 但有天乙者得伊尹之賢佐, 存養德行, 名高當世, 代夏爲王, 其子孫傳至六百餘年. 帝曰.., 其次者爲誰. 有爲子曰.., 西夷有聖人出修德施恩, 民心皆歸. 有賢相良將之輔弼, 其子子孫孫繼位傳至八百餘年.
戊子(무 자) 2년. 4월에 다리가 한 개인 짐승이 송화강가에서 슬프게 부르짖는 것이 보이었다. 帝(제)가 有爲子(유위자)를 불러 묻기를 “이것은 실로 처음 보는 짐승이다.하나의 다리로 뛰고 달리는데 어찌 슬피 부르짖느냐?”고 하셨다. 有爲者(유위자)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것이 있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망하고 불길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신령한 것들이 나타나면 事와 體들이 움직여 禍(화) 와 福(복)들이 장차 이르게 되므로 아는 것이 좋은 때도 있고 아는 것이 좋지 못한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조화의 징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 발 하나 달린 짐승은 夏國(하국) 남쪽의 陽獸(양수)인데 신명스러운 물건입니다. 夏國(하국)이 장차 난리가 있음을 예지하고 이곳으로 피하여 슬피 우는 것입니다. 단지 이 짐승을 관찰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천도의 순행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능히 만세의 일을 예지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帝(제)가 “夏國(하국)의 대를 이어 누가 왕이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有爲子(유위자)가 말하기를 “제가 하국의 인재들을 살펴보니 하국은 그런 사람이 없으며 단지 天乙(천을)이라는 자가 伊尹(이윤)이라는 현명한 보좌관을 얻어 덕을 길러 행하니 이름이 당대에 높습니다. 하국의 대를 이어 왕이 된다면 그 자손들이 600여 년에 도달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帝(제)가 말하기를 “그 다음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유위자가 말하기를 “西夷(서이)에 聖人(성인)이 있어 덕을 쌓고 은혜를 베푸니 민심이 다 그에게도 돌아갑니다. 賢相良(현상량)이 도와준다면 그 자자손손 재위를 이어 800여 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帝曰..朕雲裔盛衰之期果在何時願聞其大畧. 有爲子曰..國家盛衰之運全由天定, 非人力所致. 基下善治人民, 德治萬方國之文化, 優勝於中華, 然至於周世, 禮樂法度燦然具備, 聖賢輩出, 始述經傳, 百家爭鳴, 發其意志思想, 闡明其文化, 向進風靡, 天下萬國仰慕, 爭赴學習, 是爲漢學全盛之時也. 當其時, 基下之聖子神孫或保基於北方或遷都於東方或建國於南方 有其大者地方數千里小者數百里. 後屬疎遠互相侵掠干戈日尋, 文化漸退, 不事祖國文字, 慕華思想日甚漸廣, 數千年之後, 慕華狂儒遍滿國中, 全廢我國文字, 專用漢文字, 而我國國號帝號官名地名日用事物之名繙之以漢字, 且邦人之名或與華人相同, 若以邦人錯認華人則其子孫竟致忘失其祖先者多矣. 竊思將來之事豈不寒心㢤極爲痛恨者此也. 伏願基下深思遠慮豫備後事焉. 將來國祚或分二或分四矣. 帝曰先生眞千古神人也能推知半萬年後事也.

帝(제)께서 “내 자손(雲裔[2]) 의 성쇠의 시기는 과연 어느 때인가? 그 대략을 듣기를 원한다.”라고 말하셨다. 有爲子(유위자)가 말하였다. “국가 성쇠의 운수는 전적으로 하늘이 정하는 것에서 말미암으며 사람의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하께서는 인민을 선하게 다스리시고 만방의 나라의 문화를 덕으로 다스리시니 中華(중화)보다 월등합니다. 그런데 周國(주국)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저들의) 예악과 법도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聖賢(성현)이 배출되고 經傳(경전)을 처음으로 저술하여 여러 학자들이 활발히 논쟁하니 그 사상들이 발현되어 문화가 천명되고 바람에 휩쓸리는 향진되어 천하만국이 앙모하여 다투어 배우러 올 것이니 이것이 한학전성시대입니다. 그때에 기하의 聖子神孫(성자신손)들은 혹 그 기틀을 북방에서 보전하거나 혹은 동방으로 천도하거나 혹은 남방에서 나라를 세울 것인데 큰 나라들은 수천리에 이를 것이고 작은 나라들은 수백리에 이를 것입니다. 그후 몇대가 지나면 서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창칼로 침략하여 노략질하기를 날마다 심각해질 것이며 문화가 점차로 퇴보하여 선조의 문자를 배우지 아니하고 중국을 사모하는 사상들이 날로 심각해지고 점차 광범위해지니 수천년이 지난 후에는 중국을 사모하는 미친 선비들이 나라 안에 편만하여 우리나라의 문자를 완전히 폐하고 중국문자만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가의 호칭과 임금의 호칭과 관직의 이름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물의 이름들을 한자로 번역하리니, 또한 나라사람의 이름이 혹 중국사람의 이름과 서로 같아질 것입니다. 만약 나라사람들이 중국사람들로 오인된다면 그 자손들은 마침내 그 조상들을 잊어버리는 자가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몰래 장래의 일을 생각해본다면 이 어찌 한심스럽지 않으며 통한이 극에 달하지 않겠습니까? 기하께 업드려 원하오니 먼 장래의 일을 생각하시어 훗일을 예비하시옵소서. 장래에 나라는 혹 2개로 혹은 4개로 나뉠 것입니다.”고 하였다. 帝(제)가 말하기를 “반만년 뒤의 일을 미루어 아는 것이 참으로 선생은 아주 먼 옛날의 神人(신인)이로구나.”라고 하였다.

 

八月. 帝巡國中, 至遼河之弁韓村, 立巡狩碑, 且下詔天下立石碑于國之四境. 碑面以本國文字刻歷代帝王名號. 傳之後世是爲金石之始也. 長白山興安嶺九月山馬韓村松花江邊遼河之弁韓村平壤之法首橋【朝鮮宣祖十六年癸未 碑發掘】 沿海州各有古代國文石碑文似梵文【滄海力士黎洪星過遼河題一詩曰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莓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倘非檀氏跡云云】.

8 월. 帝(제)는 나라 안을 순행하여 遼河(료하)의 弁韓村(변한촌)에 이르러 巡狩碑(순수비)를 세우고, 또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나라 땅 사방의 경계에 비석을 세우라고 하였다. 비석에는 본국의 문자로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칭을 새기었다. 후세에 전하여지니 이것이 금석의 시초가 되었다. 長白山(장백산)과 興安嶺(흥안령)과 九月山(구월산)의 馬韓村(마한촌)과 松花江(송화강) 주변과 遼河(료하)의 弁韓村(변한촌)과 平壤(평양)의 法首橋(법수교)【朝鮮(조선) 宣祖(선조) 16년 癸未(계미)년에 비석을 발굴하였다.】와 沿海州(연해주) 각지에 고대의 국문으로 되어 있는 비석이 있는데 글자는 梵文(범문)과 비슷하였다【滄海力士(창해역사) 黎洪星(여홍성)이 료하를 지나다가 시를 한 수 기록하였는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莓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倘非檀氏跡”라고 하였다】.

 

庚寅四年. 王北斗【一云北斗王祖明孫】見山川高低淸濁作地名分界.

庚寅(경인) 4년. 王北斗(왕북두)【어떤이는 왕북두가 왕조명의 손자이라고도 한다】가 산과 강의 높고 낮음과 맑고 흐림을 보고 지명을 만들고 경계를 나누었다.

 

辛卯五年. 春下詔選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而登用.

辛卯(신묘) 5년. 봄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품행이 곧고 직언하며 끝까지 간언하는 선비를 뽑아 등용토록 하였다.

 

丙申十年. 命開基波爲首相, 馬干得爲上將, 弘景爲諫官. 帝明察國政從廷議.

丙申(병신) 10년. 開基波(개기파)를 首相(수상)으로 삼고 馬干得(마간득)을 上將(상장)으로 삼고 弘景(홍경)을 諫官(간관)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帝(제)께서 명확히 국정을 살펴보고 조정에서 논의되는 사항에 따랐다.

 

丁酉十一年. 帝勵精求治日益孜孜, 罷朝問于諫官弘景.., 曰我何如主. 弘景對曰.., 基下不仁之主也. 帝曰.., 何由而知不仁. 弘景對曰.., 基下不封親弟而封其子何爲仁君乎. 帝不悅弘景趍出有爲子入見. 帝問曰.., 朕何如主. 有爲子對曰.., 仁君也. 帝曰.., 何由而知爲仁. 有爲子對曰.., 臣聞, 君仁臣直, 俄者弘景之言直, 是以知之. 帝大悅召弘景拜諫議大夫, 自是極言之士多進.

丁酉(정 유) 11년. 帝(제)께서 다스림을 정성스레 구함에 힘쓰는 것을 날마다 더하여 힘쓰고 힘쓰시니, (어느날엔가) 조회를 파하고 諫官(간관)인 弘景(홍경)에게 물으셨다. “나는 어떤 임금인가?” 호경이 대답하기를 “기하께서는 어질지 못한 임금이십니다.”라고 하였다.  帝 (제)가 말하기를 “어떤 연유로 어질지 못함을 알겠느냐?”고 하였다. 홍경이 대답하기를 “기하께서는 친형제를 봉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봉하셨으니 어찌 어진 임금이 될수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帝(제)가 기뻐하지 않으시니 홍경이 걸어 나가고 有爲子(유위자)가 들어와뵈었다. 帝(제)가 묻기를 “나는 어떤 임금인가?”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어진 임금입니다”라고 하였다. 帝(제)가 말하기를 “어떤 이유로 어진 것을 알겠느냐?” 유위자가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직언을 한다고 하였는데 잠시동안의 홍경의 직언이 이를 알게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帝(제)가 크게 기뻐하고 홍경을 부ㄹ러 諫議大夫(간의대부)를 배수하였다. 이때부터 바른말 하는 선비들이 많이 조정에 진출하였다.

 

癸卯十七年. 命按察州縣開倉賑恤.

癸卯(계묘) 17년. 주와 현을 자세히 살피도록 하여 태창을 열어 진휼하였다.

 

乙卯二十九年. 命菁莪大夫韓不倍封莫國【馬韓】, 沃沮大夫高士深封眞國【辰韓】, 貊城大夫申突盖封番國【弁韓】, 爲列汗【諸侯】, 以補莫眞番三韓之職.

乙卯(을 묘) 29년. 菁莪大夫(청아대부)인 韓不倍(한부배)를 莫國(막국)【馬韓(마한)】에 봉하고, 沃沮大夫(옥저대부)인 高士深(고사심)을 眞國(진국)【辰韓(진한)】에 봉하고, 貊城大夫(맥성대부) 申突盖(신돌개)을 番國(번국)【弁韓(변한)】에 봉하여 列汗(열한)【諸侯(제후)】가 되게하여 莫眞番의 三韓(삼한)의 직을 고치었다.

 

丙辰三十年. 命有爲子爲國太師立太學館養成賢士.

丙辰(병진) 30년. 有爲子(유위자)를 國太師(국태사)로 임명하고 太學館(태학관)을 세워서 賢士(현사)를 양성하였다.

 

戊寅五十二年. 七月帝崩. 萬民慟哭如考妣喪. 太子屹達【一云伐音達】立是爲虞帝.

戊寅(무인) 52년. 7월에 帝(제)가 죽었다. 만민이 통곡함이 자기 어머니 돌아가신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 태자 屹達(흘달)【혹은 伐音達(벌음달)】이 즉위하니 이가 虞帝(우제)이다.

 

[1] 이때들어 다시 아사달국을 세움인가?

[2] 雲孫이란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손이라는 뜻으로 8대의 자손을 지칭한다. 子, 孫, 曾孫, 玄孫, 來孫, 昆孫, 仍孫, 雲孫의 순서이다. 여기서는 雲裔라 하였으므로 그냥 자손이라고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