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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달가가 숙신을 정벌하기 이전에 숙신은 고구려 서쪽에 있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4. 4.

숙신을 읍루와 동일시하여 고구려 동북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사서를 너무 안이하게 해석한 까닭이다.
적어도 AD280년 이전에는 숙신이 고구려 서쪽에 있었다는 증거를 하나씩 들어보겠다.


1) 오른쪽 12군의 진격로에 숙신이 포함되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 ·부여·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후성(候城) ·제해(堤奚) ·답돈(踏頓) ·숙신 ·갈석 ·동이(東暆)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평양에 집결하기위하여 진격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평양의 동북쪽에 있던 숙신을 거쳤다가 다시 후퇴하여 평양에 모일리 없다.
이는 숙신이 평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는 말이다. 


2) 달가는 양맥과 숙신을 겸하여 다스렸다.

서천왕 11년(AD 280)에 숙신이 쳐들어온다. 이때 달가(達賈)가 나가서 싸워 이기고 숙신 600가구를 부여의 남쪽으로 옮겼다. 또한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양맥과 숙신을 동시에 통솔하도록 하였다.[1]

양맥은 다들 알다시피 고구려 서쪽에 있었다.
그런데 만약 숙신이 고구려 동북쪽에 있었다면 서로 정 반대편에 있던 숙신과 양맥을 달가에게 맡겨 동시에 다스리도록 할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숙신과 양맥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여러 중국사서에 숙신이 고구려 동북쪽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서천왕 11년에 숙신 600가구를 부여의 남쪽에 옮긴 이후에 이들이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부여 밖으로 더 나아간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리라. 


한편 서천왕 11년에 숙신만 침략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기록이 있다.
봉상왕 원년에 달가가 죽었는데 이때에 백성들은 "만약 달가가 아니었다면 양맥과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리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즉, 서천왕 11년에 숙신만 침략해왔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숙신과 양맥이 같이 쳐들어 온 것이며 이는 숙신이 양맥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하였었다.
그렇기에 달가가 숙신과 양맥을 동시에 통솔하는 것이 가능하였었다.


3) 위국(魏國) 장군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공적을 새긴 이유는 숙신이 중국과 접하여있기때문이다.

동천왕 20년에 관구검이 쳐들어오고 그들이 후퇴하면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들의 공적을 새기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 전쟁에서 동천왕은 옥저까지 도망가기는 했지만 전쟁의 승자는 고구려였고 패자는 위국(魏國)이었다.
따라서 숙신이 만약 고구려 동북쪽에 있었다면 그들이 패하여 돌아가는 상황이므로 적진 한복판인 고구려 땅에서 그들의 공적을 새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들이 전쟁의 공적을 숙신의 남쪽 경계에서 새길 수 있었던 이유는 숙신의 남쪽 경계는 곧 중국땅이기 때문이다. 
이는 숙신이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집안(集安)에서 발견되었다던 관구검 기공비는 고구려땅 한복판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가짜임을 알 수 있다. 


4)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서 말한 숙신의 위치

사기 사마상여열전을 보면 "오유(烏有) 선생은 말하기를……'또한 제국(齊國)의 동쪽에는 큰 바다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낭야(琅邪)가 있으며 성산(成山)에서 유람하고, 지부(之罘)에서 활을 쏘며, 발해(渤澥)에 배를 띄우고, 맹제(孟諸)에서 놀며, 곁에는 숙신(肅愼)과 이웃하였다."고 하였다.[2]
따라서 숙신은 산동반도와 발해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음을 알수있다.


5) 숙신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끼여 강국에서 조공하였었다.

상서(尙書)에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였다"고 했다.[3]
왜 숙신이 와서 축하하였을까?
이는 숙신이 동이 즉 고조선에 복속하였었는데 성왕이 동이를 공격하므로 말미암아 숙신이 동이의 다스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와서 축하하였던 것이다.
이는 숙신의 위치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있어 강국에 붙어서 양다리를 걸친 외교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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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 서천왕 11년

11년(280) 겨울 10월에 숙신이 쳐들어 와서 변경의 백성들을 살륙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나라를 잘못 이어 받아, [나의] 덕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이 멀리 떨치지 못하여, 이렇게 이웃의 적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게 하였다. 꾀많은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쳐서 깨뜨리려고 하니, 그대들은 기이한 꾀와 특이한 책략이 있어서 그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한 자를 각각 천거하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임금님의 동생 달가(達賈)는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서 대장이 될 만합니다.”고 말하였다. 왕은 이리하여 달가를 보내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기이한 꾀를 내어
엄습해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예닐곱 곳을 항복시켜 복속시켰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아울러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사기 권117 司馬相如傳.

“烏有先生曰……且齊東有巨海, 南有琅邪, 觀乎成山, 射乎之罘, 浮渤澥, 游孟諸, 邪與肅慎為鄰.”


[3]尚書注疏卷十七

成王旣伐東夷肅愼來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