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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북서(北書) 열전에서 보는 고(高)씨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4. 11.

글쓴이 심제

 

선비족의 나라 北魏 열전에서 보는 수많은 高氏 ..고구려 고씨와 그 근본이 같음을 알수있으며 魏와 고구 려의 친연관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선비족은 4~5세기간 북방민족의 전통을 버리고 중원문화를 지향하여 급속히 한족화됩니다. 南朝 晉의 영가(永嘉, 懷帝의 年號, 307~312)의 난때 北魏의 고관들이 적지않게 고구려로 피신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서에 표현된 발해라는 지명을 보니 하북천진 유역이 아닌 하간유역으로 비정됨을 추론할수 있습니다.  

高湖,字大淵,勃海蓨人也。漢太傅裒之後.
고호,발해수인이다.한나라 태전부의 후예이다.

高允,字伯恭,勃海人也。祖泰,在叔父湖《傳》。
고윤, 발해인이다.

高閭,字閻士,漁陽雍奴人。五世祖原,晉安北軍司、上谷太守、關中侯,有碑在薊中.
고려, 어양옹노인이다.오세조는 고원이다.상곡태수를 지냈고 관중후였다.그 비석이 계현에 있다.

高祐,字子集,小名次奴,勃海人也。本名禧,以與咸陽王同名,高祖賜名祐。司空允從祖弟也.
고우, 발해인이다.위 고조(6대 탁발굉)가 우란 이름을 하사했다.

高道悅,字文欣,遼東新昌人也。曾祖策,馮跋散騎常侍、新昌侯.
고도열, 요동 신창인이다.증조는 고책이다. 풍발이 각처로 움직일때 마다 항상 따랐다.

高聰,字僧智,本渤海蓨人。曾祖軌,隨慕容德徙青州,因居北海之劇縣.
고총,  발해수인이다.증조는 고궤이다.모용덕이 청주로옮길때 따라서갔다.북해의 극현에서 살았다.

高崇,字積善,渤海蓨人。四世祖撫,晉永嘉中與兄顧避難奔於高麗。父潛,顯祖初歸國,賜爵開陽男,居遼東,詔以沮渠牧犍女賜潛為妻,封武威公主。拜駙馬都尉,加寧遠將軍.
고숭,발해수인이다.진 영가때에 형 고와 고구려로 피난했다.현조초에 나라로 돌아와 개양남이란 작위를 받다.요동에 살았으며 조거목사 건의 딸로 처를 삼도록하다.무위공주에 봉했다. 부마도위,가령원장군에 배향하다.

高肇,字首文,文昭皇太后之兄也,自雲本渤海脩人,五世祖顧,晉永嘉中避亂入高麗.
고조,문소황태후의 오빠이다.고운은 발해수인이다.진나라 영가시에 고려로 피난했다.

高遵,字世禮,勃海蓨人。父濟,滄水太守。遵賤出,兄矯等常欺侮之。及父亡,不令在喪位。遵遂馳赴平城,歸從祖兄中書令允。允乃為遵父舉哀,以遵為喪主,京邑無不吊集,朝貴鹹識之。徐歸奔赴。免喪,允為營宦路,得補樂浪王侍郎,遵感成益之恩,事允如諸父.
고준,발해수인 이다.아버지 고제는 창수태수였다.준은 천한출생이었다.형 고교등이 항상 속이고 업신여겼다.아버지가 죽으매 상주지위도 허락받지못햇다.평성으로 부고를 쫒았다.돌아와 할아비인 중서령윤을 따랐으며 윤은 결국 그에게 상주의 지위를 주었다...


참고> 西晉 永嘉의 亂.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중국 왕조를 말한다. 서진(西晉:265∼316)과 동진(東晉:317∼419)으로 구분되며, 그 제실(帝室)은 사마씨(司馬氏)이다. 사마씨는 원래 하내온현(河內溫縣:河南省 溫縣)의 명족으로, 사마 의(司馬懿)가 3국의 하나인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를 비롯하여 여러 황제를 섬기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공적을 세워 권신(權臣)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사(師) 및 소(昭)도 권신으로서 세력을 확보하고 반대자를 제거해서 위나라 황실을 위압하였다. 263년 소가 집정할 때 3국의 하나인 촉한(蜀漢)을 멸망시켰고, 265년 소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武帝)은 위나라의 황제 조환(曹奐)으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명목으로 황제위를 빼앗아 제위에 오르고 뤄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아 진나라(西晉)를 세웠다. 진나라는 280년에 오(吳)나라를 평정하여 3국을 통일하고, 점전법(占田法) ·과전법(課田法) 등의 토지제도와 세법(稅法)인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하였다.

무제의 명성은 멀리 로마에까지 전해져 사절단이 그를 알현하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2대의 혜제(惠帝)는 무능하여 귀족관료는 9품관인법(九品官人法:九品中正法)에 따른 문벌주의에 안주하고 소외된 하급 사인(士人:寒門)의 일부는 제실(帝室)의 일족인 여러 왕의 심복이 되어, 290년 8왕의 난을 일으켰다. 이것은 290년 무제(武帝)가 죽고 연소한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무제의 황후 양씨(楊氏)는 선황의 유조(遺詔)라 하여 그녀의 아버지 양준(楊駿)을 재상으로 앉히고 국정을 전단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혜제의 황후 가씨(賈氏)는 여남왕(汝南王) 사마 량(司馬亮)과 초왕(楚王) 사마 위(司馬瑋)를 서울로 불러 올려서 양씨 일족을 죽이게 한 후, 구실을 만들어서 사마 양, 사마 위를 죽이고, 스스로 국정을 맡아서 가씨 일족은 지극히 융성하였다.

301년 조왕(趙王) 사마 륜(司馬倫)은 가씨 일당을 포살하고 혜제를 폐한 후 스스로 황위에 올랐으나, 제왕(齊王) 사마 경(司馬?)과 성도왕(成都王) 사마 영(司馬潁)의 공격을 받아 자살하고 혜제가 복위하였다. 이후 장사왕(長沙王) 사마 애(司馬乂), 동해왕(東海王) 사마 월(司馬越), 하간왕(河間王) 사마 옹(司馬勒)도 군사를 일으켜서 정권을 다투었으므로 국도(國都) 뤄양[洛陽]은 전란 때문에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사마 월이 영과 옹을 죽이고, 혜제가 죽자 회제(懷帝)를 즉위시켜서 정권은 월에게 돌아오고(306), 16년에 걸친 내란도 일단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반란에 종군한 흉노 등 변방의 여러 민족들도 자각하기에 이르러,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궐기하여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켰다.  

  이 영가의 난은 산시성[山西省] 일대에 이주하고 있던 흉노부족이 중심세력으로, 그 족장(族長) 유연(劉淵)은 팔왕(八王)의 난(300) 뒤의 중원(中原)이 혼란함을 틈타 독립할 결심을 굳히고 304년 국호를 한(漢:후에 趙)이라 칭하였다. 유연이 죽은 뒤 아들 유총(劉聰)은 거병하여 뤄양[洛陽]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자신들의 근거지인 평양(平陽:山西省)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서진의 군사 10여만 명도 학살함으로써 뤄양은 폐허가 되었다. 이로써 뤄양과 장안(長安:西安)은 외방 민족에게 파괴되고 311년에는 3대의 회제(懷帝)가 살해되었으며, 316년에는 4대의 민제(愍帝)도 잡혀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에 앞서 오(吳)나라의 옛 도읍지 건업(建業:南京)에 있던 서진 왕족의 사마 예(司馬睿:元帝)는 뤄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건업을 도읍으로 삼아 동진을 세웠다. 황허강[黃河] 유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왕도(王導) 등 귀족은 강남(江南)의 토착 명족(名族)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들과 화합하여 귀족제의 국가를 이루어갔다. 또한 북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따라 양쯔강[揚子江] 중 ·하류 유역의 개발이 진전되어 장원(莊園)도 형성되었다. 동진은 반란, 궁중 음모, 북조 왕조들과의 전쟁 등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동진도 서진과 마찬가지로 대지주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동진은 몇 차례에 걸친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이겨내고 347년에는 쓰촨[四川] 지방을 수복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두는 데 공이 컸던 무장 환온(桓溫)은 황제를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환온과 꼭두각시 황제는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다. 383년 동진은 페이수이[ 水] 전투에서 북부 유목민족 국가들의 공격을 물리쳤다.(두산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