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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남당유고 눌기천왕기 訥祇天王紀 번역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拾壹年火兎之年也
11년은 화토(火兎:정묘427)의 해이다.

二月福壽生寵德子久希寵德破南留軍於金官湯倍吹希事之如父福壽潛通之至是生子王聞之召寵德還
2월, 복수(福壽)가 총덕(寵德)의 아들 구희(久希)를 낳았다. 총덕은 남(南)을 깨뜨리고 금관(金官)에 군대를 머물렀는데, 탕배(湯陪)와 취희(吹希)가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복수(福壽)가 몰래 그와 잠통(潛通)하고는 이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는 총덕(寵德)을 소환하였다.  

五月召加耶博士五人入京使骨門子弟習其文字
5월, 가야(加耶)의 박사(博士) 5인을 불러 입경(入京)시키고, 골문(骨門)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그 문자(文字)를 익히게 하였다.  

聖明宮生子習棠不類於王王曰誰子也聖明不悅曰汝以我爲山凰乎王笑而不問時聖明有歌臣棠馬出入潛通故王疑之也
성명궁(聖明宮)이 아들 습당(習棠)을 낳았는데 왕(王)을 닮지 않았다. 왕이 “누구의 아들인가?”하고 묻자 성명(聖明)이 좋아하지 않으며 “네가 나를 산황(山凰)으로 삼는가?”라고 하였다. 왕은 웃으며 (더이상) 묻지 않았다. 당시 성명은 가신(歌臣) 당마(棠馬)가 있어 출입하며 몰래 잠통(潛通)하였던 까닭에 왕이 그를 의심한 것이다.  

※‘生子(아들을 낳았다)’라고만 기록한 것은 王子(왕의 아들)가 아님을 의미한다. 아기 이름 역시 그 가신 ‘당마(棠馬)’의 ‘棠’자를 따고 있다.

角干奈己卒基臨王子也好神仙有大德王惜之
각간(角干) 나기(奈己)이 졸(卒)했다. 기림왕(基臨王)의 아들이었다. 신선(神仙)을 좋아하고 큰 덕(大德)을 지녔었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七月紫我生王女宋兒
7월, 자아(紫我)가 왕의 딸 송아(宋兒)를 낳았다.  

河期爲伊湌賜安康川地
하기(河期)를 이찬으로 삼고 안강천(安康川)의 땅(地)을 하사했다. (하기(河期)를 이찬으로 삼고 안강(安康)의 천지(川地)를 하사했다.)??  

阿老上宮生王子好生
아로상궁(阿老上宮)이 왕자 호생(好生)을 낳았다.

一善女毛禮作窟於家中畜怪于家毛禮初爲巫州吏妾之州干見而奪之毛禮不悅州干乃與吏逃居山中能有口辯惑衆命有司捕毛禮及怪
일선(一善)의 여자 모례(毛禮)가 집안에 토굴(窟)을 만들고 집에 괴인(怪)을 길렀다. 모례(毛禮)는 처음에 무당(巫)이 되어서 주의 관리(州吏)가 그를 첩으로 삼았는데 주칸(州干)이 보고는 그를 빼앗았다. 모례(毛禮)가 주칸(州干)을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관리와 더불어 산속으로 도망쳐 살았다. 구변(口辯)을 가져서 능히 대중(衆)을 미혹(惑)할 수 있었으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례(毛禮) 및 괴인(怪)을 체포하도록 했다.  

※모례(毛禮) : ‘모록(毛綠)’으로도 적는다. <삼국유사>  

九月宝美生美海公女厚梁
9월, 보미(宝美)가 미해공(美海公)의 딸 후량(厚梁)을 낳았다.  

穀大登南郊民獻七莖禾宴群臣于南桃
곡식이 대풍이었다. 남교(南郊)의 백성이 일곱 줄기의 벼(七莖禾)를 바치자, 남도(南桃)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十月大索毛禮及其徒
10월, 모례(毛禮)와 그 무리(徒)들을 크게 수색하였다.  

紅我生美海女策兒
홍아(紅我)가 미해(美海)의 딸 책아(策兒)를 낳았다.  

雪雨三日慮囚問過
눈비(雪雨)가 삼일 동안 내리자 (원옥이 없는지) 죄수를 심리하고 (왕이) 과오를 물었다.  

以庶子山近爲聖母神士
서자 산근(山近)을 성모신사(聖母神士)로 삼았다.


  


十二年黃龍之年也
12년은 황룡(黃龍:무진428)의 해이다.  

正月烏士只生子烏含
정월, 오사지(烏士只)가 아들 오함(烏含)을 낳았다.  

仁德生銍知
인덕(仁德)이 질지(銍知)를 낳았다.

二月一善逃女毛禮及怪人墨胡爲捺已民所獲至京
2월, 일선(一善)의 도망녀 모례(毛禮) 및 괴인(怪人) 묵호(墨胡)가 날이(捺已)의 백성에게 잡힌바 되어 경도(京)에 이르렀다.  

三月扶余毗有迎野王女韋二娘至月奈
3월, 부여(扶余)의 비유(毗有)가 야왕(野王)의 딸 위이랑(韋二娘)을 마중하기 (위해) 월나(月奈)에 이르렀다.  

古自以南子秋爲婿引好樹之餘衆欲伐金官王命實相伐古自大破之乃立發車爲其君年才十四
고자(古自)가 남(南)의 아들 추(秋)를 사위로 삼고 호수(好樹)의 잔당(餘衆)을 끌어들여 금관(金官)을 치려고 하였다. 왕이 실상(實相)에게 명하여 고자(古自)를 쳐서 그를 대파하고, 마침내 발차(發車)를 그 임금(君)으로 세웠는데, 나이 14세였다.  

四月幽墨胡毛禮于城西有司欲殺之上宮曰虎村尙不可伐何不容一墨胡乎乃命幽之
4월, 묵호(墨胡)와 모례(毛禮)를 성서(城西)에 가둬두게(幽)하였다. 유사(有司)가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아로)상궁(上宮)이 말하기를 “호촌(虎村)도 오히려 토벌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 어찌 일개 검은 오랑캐(墨胡)는 용납하지 못하는가?”하였다. 이에 그를 유폐(幽)하도록 명했다.  

九月加耶舍訶病沒長女蟾神立以其從兄三光爲夫
9월, 가야(加耶)의 사가(舍訶)가 병몰(病沒)하자 장녀 섬신(蟾神)이 즉위하여 그 종형 삼광(三光)을 남편으로 삼았다.  

十月實相等大破野人于四勿秋等奔野國
10월, 실상(實相)등이 사물(四勿)에서 야인(野人)을 크게 쳐부수자 추(秋)등이 야국(野國)으로 달아났다.  

太太保反崩春秋六十九
태태궁(太太) 보반(保反)이 붕(崩)하였다. 춘추 69세였다.

  

  

十三年土蛇之年也
13년은 토사(土蛇:기사429)의 해이다.  

二月築矢堤岸長二千百七十步
2월, 시제(矢堤)를 쌓았는데 둑의 길이(岸長)가 2,170보였다.  

靑我生美海公女通里
청아(靑我)가 미해공(美海公)의 딸 통리(通里)를 낳았다.  

以王女通只妻河期子方奴
왕녀(王女) 통지(通只)를 하기(河期)의 아들 방노(方奴)의 처로 삼았다.  

三月以內留爲太太
3월, 내류(內留)를 태태궁(太太)으로 삼았다.  

塞凰生王女芊凰
새황(塞凰)이 왕녀 천황(芊凰)을 낳았다.  

以遠明爲宮人
원명(遠明)을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四月山凰生好淵女畏凰或作實相女
4월, 산황(山凰)이 호연(好淵)의 딸 외황(畏凰)을 낳았다.  

以卜好爲舒弗邯美海爲兵官伊湌命執國政
복호(卜好)를 서불감(舒弗邯)으로 삼고, 미해(美海)를 병관이찬(兵官伊湌)으로 삼아서, 국정(國政)을 잡도록 명했다.  

七月福壽生湯倍子倍希
7월, 복수(福壽)가 탕배(湯陪)의 아들 배희(倍希)를 낳았다.  

紫我生美海子金海
자아(紫我)가 미해(美海)의 아들 금해(金海)를 낳았다.  

九月宝美生王女宝梁皃似美海王曰可以爲美海女也宝美曰偶然相似何怒之爲王曰非怒也興之也
9월, 보미(宝美)가 왕녀(王女) 보량(宝梁)을 낳았는데 모습이 미해(美海)와 흡사했다. 왕이 말하기를 “가히 미해(美海)의 딸로 삼아야겠다.”하니 보미가 “우연히 서로 닮은 것인데 노하면 어쩝니까?”하자 왕이 말하기를 “노한 것이 아니다. 흥겨운 것이다.”라고 했다.  

※‘生王女’라는 표현이 이미 왕의 딸임을 밝히고 있다.

十月行大祭于始祖廟
10월, 시조묘(始祖廟)에서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上紫金天衣于太太
태태궁(太太)에게 자금천의(紫金天衣)를 진상하였다.



  

十四年金馬之年也
14년은 금마(金馬:庚午430)의 해이다.  

正月龍明生山近子春山
정월에 용명(龍明)이 산근(山近)의 아들 춘산(春山)을 낳았다.  

紅我生美海子大古兒
홍아(紅我)가 미해(美海)의 아들 대고아(大古兒)를 낳았다.  

鳥生公主有疾毛禮請禱召墨胡入宮禱之有效乃命放歸一善毛禮生子皆肖墨胡而自言非相交而神相接也
조생공주(鳥生公主)가 병질이 있었다. 모례(毛禮)가 기도(禱)하기를 청하매 묵호(墨胡)를 불러 입궁시키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는데 효험이 있었다. 이에 석방을 명하여 일선(一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모례(毛禮)가 자식을 낳았는데 모두 묵호(墨胡)와 닮았으나 스스로 말하기를 서로 상교(相交)한 것이 아니라 신(神)이 접(接)한 것이라 했다.  

三月湯倍奔阿羅湯倍驕傲自以爲位在吹希之上强通于仁德有娠福壽怒欲治之乃與其徒出奔
3월, 탕배(湯陪)가 아라(阿羅)로 달아났다. 탕배가 교오(驕傲)하게 스스로 취희(吹希)보다 지위가 높다하며, 강제로 인덕(仁德)을 사통하여 임신을 하자 복수(福壽)가 노하여 그를 치죄하려하였다. 이에 그 도당과 함께 도망쳐 나간 것이다.  

五月始置海宮先是神泉湧于海濱仙巫以爲道場成邑至是營宮以爲遊宅
5월, 처음으로 해궁(海宮)을 두었다. 이에 앞서 바닷가에서 신천(神泉)이 솟구쳤는데 선무(仙巫)들이 도장(道場)으로 삼음으로써 읍락(邑)을 이루었다. 이에 이르러 궁실을 조영함으로써 유택(遊宅)을 삼았다.  

以丁期子丁都爲殿門頭上
정기(丁期)의 아들 정도(丁都)를 전문두상(殿門頭上)으로 삼았다.  

七月命好淵與山兒等伐阿羅湯倍又奔月奈
7월, 호연(好淵)에게 명하여 산아(山兒)등과 함께 아라(阿羅)를 토벌하게 했다. 탕배(湯陪)는 다시 월나(月奈)로 달아났다.  

以長子慈悲爲太子
장자 자비(慈悲)로 태자를 삼았다.  

十月修倉廩
10월, 창름(倉廩)을 수리하였다.  

眞經堂火
진경당(眞經堂)에 불이 났다.  

角干房期薨子房人大阿湌房發阿湌
각간(角干) 방기(房期)가 훙(薨)하였다. 아들 방인(房人)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고, 방발(房發)은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大雪三日日仙塞金上化以順實爲日仙行明于月宅
큰 눈이 사흘 동안 내렸다. 일선(日仙) 새금(塞金)이 상화(上化)하자, 순실(順實)을 일선(日仙)으로 삼고 월택(月宅)에서 행명(行明)하였다.(월택(月宅)에서 밝음(明)을 행(行)하였다.)??  

※행명(行明) : 선도(仙道)와 관련된 용어로 보이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十五年白羊之年也
15년은 백양(白羊:辛未431)의 해이다.  

月奈阿羅野人等伐古自以湯倍爲發車夫
월나(月奈) 아라(阿羅) 야인(野人)등이 고자(古自)를 침벌함으로써, 탕배(湯陪)를 발차(發車)의 남편으로 삼게 했다.  

命實相代好淵守金官
실상(實相)에게 명을 내려 호연(好淵)을 대신하여 금관(金官)을 지키게 했다.  

三月毗有伐月奈取其西南地爲郡
3월, 비유(毗有)가 월나(月奈)를 쳐서 그 서남부(西南)의 땅을 취(取)하여 군(郡)을 삼았다.  

月奈移都猿邑遣其弟吳人請和
월나(月奈)가 도성을 원읍(猿邑)으로 옮기고, 그 아우 오인(吳人)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였다.  

四月野人引兵三千襲東邊寵德兵敗入圍明活城掠我婦女孝直引悉直軍斷其後好淵多甘引南路軍與京都軍合擊之斬其酋晩頭良不次等降者千有人退遁者皆溺于海
4월, 야인(野人)이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 변경(東邊)을 습격하여, 총덕(寵德)의 병력을 격파하고, 들어와 명활성(明活城)을 포위하고 우리의 부녀자를 약탈하였다. 효직(孝直)이 실직(悉直)의 군사를 인솔하여 그 배후를 끊고, 호연(好淵)과 다감(多甘)이 남로군(南路軍)을 이끌고서 경도군(京都軍)과 합세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그 추장(酋) 만두량(晩頭良)과 불차(不次)등을 베어 죽이니, 항복한 자가 천여 명이었으며, 도망쳐 숨은 자들은 모두 바다에 빠졌다.  

塞凰生實相子塞文
새황(塞凰)이 실상(實相)의 아들 새문(塞文)을 낳았다.  

五月王幸晩頭良妻比斯只于宮比斯只有絶色多甘獻之王欲爲宮人群臣爭之不聽命許軍士得野女者爲妾晩頭良等爲其王所憎以伐我名之而欲來留故多引婦而來其軍士掠我女而亂之多娠者
5월, 왕이 궁(宮)에서 만두량(晩頭良)의 처(妻) 비사지(比斯只)에게 행차(幸)하였다. 비사지(比斯只)는 절색(絶色)을 지녀 다감(多甘)이 그를 헌상하였다. 왕이 궁인(宮人)으로 삼으려 하자 군신(群臣)들이 쟁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명을 내려 군사들의 야녀(野女)를 얻은 자는 첩(妾)으로 삼도록 허락했다. 만두량(晩頭良)등은 그 왕(王)의 미움을 사게 된 바로써 우리를 정벌한다고 일컫고는 와서 체류하려한 까닭에 부녀(婦)를 이끌고 온 것이다. 그 군사들이 우리 여자들을 약취하여 난행하였기에 임신한 자가 많았다.  

六月移野人降者西路分築各城
6월, 투항한 야인(野人)들을 서로(西路)로 옮겨 각기 나누어 성(城)을 쌓도록 했다.  

七月霜雹殺穀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王幸湯明公主賜第蘿井湯明乃聖明女也
왕이 탕명공주(湯明公主)에게 행차(幸)하고 나정(蘿井)에 저택을 하사했다. 탕명(湯明)은 곧 성명(聖明)의 딸이었다.  

蟾神生三光女阿利
섬신(蟾神)이 삼광(三光)의 딸 아리(阿利)를 낳았다.  

九月王欲伐南海中野人以年荒止之
9월, 왕이 남해(南海) 안(中)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이 해의 (농작이) 흉년이므로 그를 중지하였다.  

十月月奈獻美女及白牛
10월, 월나(月奈)가 미녀(美女)와 흰소(白牛)를 헌상하였다.  

王親祠聖母山以山花爲祠主因宇花病也
왕이 친히 성모산(聖母山)에 제사하였다. 산화(山花)를 사주(祠主)로 삼았는데 우화(宇花)가 병(病)에 걸림으로 인해서였다.  

賑京都飢民
경도(京都)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伊湌河期卒年五十七以其子足期爲級湌
이찬 하기(河期)가 졸(卒)하니 나이 57세였다. 그 아들 족기(足期)를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十六年水猿之年也
16년은 수원(水猿:壬申432)의 해이다.  

二月山凰生王女寵凰賜米
2월, 산황(山凰)이 왕녀 총황(寵凰)을 낳자 쌀을 하사했다.  

京外民多食松樹皮王亦進松食而自責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허다히 소나무 껍질을 먹자 왕 역시 소나무 음식(松食)을 들며 자책하였다.  

四月發車生湯倍子發登
4월, 발차(發車)가 탕배(湯陪)의 아들 발등(發登)을 낳았다.  

內留太太崩壽七十一分骨于奈勿實聖之兩陵以鳥生草生爲兩陵祭主
내류태태궁(內留太太)이 붕(崩)하였다. 수(壽)가 71세였다. 나물(奈勿)과 실성(實聖)의 두 릉(兩陵)에 뼈를 나누고, 조생(鳥生)과 초생(草生)을 두 릉(兩陵)의 제주(祭主)로 삼았다.  

宇花卒雲花公主女也善祭事神事王惜之
우화(宇花)가 졸(卒)하였다. 운화공주(雲花公主)의 딸이었는데, 제사(祭事)와 신사(神事)를 잘하였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六月宝美生美海公女沙梁
6월, 보미(宝美)가 미해공(美海公)의 딸 사량(沙粱)을 낳았다.  

八月穀大登中外洽然
8월, 곡식이 대풍이 들자 중외(中外)가 매우 흡족(洽然)해 하였다.  

紫我生五樹翌日紅我生首里皆美海公女也産巫以爲不吉請棄其一美海公曰老者尙生何棄小兒乎命笞産巫紫我諫之使巫逃之
자아(紫我)가 오수(五樹)를 낳고 다음날 홍아(紅我)가 수리(首里)를 낳았는데, 모두 미해공(美海公)의 딸이었다. 산무(産巫)가 불길하다하며 그 하나를 버릴 것을 청하자 미해공이 말하기를 “늙은 것도 오히려 사는데 어찌 얼라(小兒)를 버리는가?”하고 산무(産巫)의 볼기를 치도록 명하자 자아(紫我)가 간언하여 (말리며) 산무로 하여금 도망치게 하였다.  

※‘얼라(小兒)’는 ‘알라’로도 적을 수 있는데 후자가 좀 더 고형인 것으로 추측된다. 경상도 사투리는 고대 이두해석에 있어 종종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위화진경>에서 '君子惟爾交豈爲色乎' 의 ‘色’을 ‘씹’로 해석한 것 또한 어떤 선정성이나 즉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대어에서 ‘색(色)’의 독음이 ‘씹/싶’이라는 추론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실제로 '君子惟爾交豈爲色乎' 나 상기 치술신모 기사에 보이는 ‘閏凰時爲靈廟淨主不可通色’의 ‘色’은 정확히 ‘sex'로 번역되는 것인데 이 ‘sex'에 해당하는 우리말 고대어는 ’씹/싶’외에는 없다. 유교적 엄숙주의와 고유어를 멸시하는 어문사대주의 풍조하에서 ‘씹’이 비속어로 전락하고 그 의미영역 또한 축소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十月寵德伐南海野人不克命好原代之
10월, 총덕(寵德)이 남해(南海)의 야인(野人)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호원(好原)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福壽生子畏先是吹希烝福壽逐湯倍至是生子以爲神助行大祭于綾峴福壽又命仁德通吹希弟乭希吹希不敢妬曰一根同枝水自上下金官人歌之曰綾峴之柳何以裊裊水自上下不得不然
복수(福壽)가 아들 외(畏)를 낳았다. 이에 앞서 취희(吹希)는 복수를 증(烝)하고 탕배(湯陪)를 쫓아냈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신(神)의 도움이라하며 능현(綾峴)에 대제(大祭)를 지냈다. 복수(福壽)가 다시 인덕(仁德)에게 명하여 취희(吹希)의 아우인 돌희(乭希)와 통하게 하니 취희는 감히 질투하지 못하고 “한 뿌리의 한 가지이니 물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른)다.”라고 하였다. 금관(金官)사람들이 그를 노래하여 “능현(綾峴)의 버드나무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물이 위로부터 아래로, 어쩔 수 없이 그렇다네.”라고 하였다.  

方石自麗還以麗女獻之
방석(方石)이 고구려(麗)로부터 돌아왔는데 고구려 여자를 (데려옴)으로써 그를 바쳤다.  

十二月好原大破野人于買珍島
12월, 호원(好原)이 매진도(買珍島)에서 야인(野人)을 크게 쳐부수었다.  

湯倍遣西巨知等來朝獻方物
탕배(湯陪)가 서거지(西巨知)등을 보내어 내조(來朝)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靑淵使古自
청연(靑淵)이 고자(古自)에 사신으로 갔다.

  

  

十七年水鷄之年也
17년은 수계(水鷄:癸酉433)의 해이다.  

二月蟾神爾光爲繼夫乃其庶弟也道光之母首老者王之庶妹也內留太太之生也蟾神之父舍訶娶之生道光至三光病沒故繼之
2월,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을 계부(繼夫)로 삼으니 곧 그 서제(庶弟)였다. 도광(道光)의 어머니인 수로(首老)란 자는 (눌기)왕의 서매(庶妹)였으니 내류태태궁(內留太太)의 소생이다. 섬신(蟾神)의 아버지 사가(舍訶)가 그를 아내로 맞아 도광(道光)을 낳았는데 삼광(三光)이 병몰(病沒)함에 이른 까닭에 그가 뒤를 이은 것이다.  

以王女黔牛妻翊宗 祠主茜宗
왕녀 검우(黔牛)를 익종(翊宗)의 처로 삼았다. 천종(茜宗)을 사주(祠主)로 삼았다.  

三月蜃樓生王子末厚
3월, 신루(蜃樓)가 왕자 말후(末厚)를 낳았다.  

四月美海公卒年四十一公典雅淸秀愛人下士嘗以實聖之命使于野人十數年而始還其王女宝美慕公生女羅海而逃歸以爲堤上公養女使屬枕宮公不敢自居獻于王及卜好而 凡有喜憂同之公深知野人舟楫之利命繕我艦以敵之野人多歸降皆屬公臣以爲用多有功績至是病劇王執手下淚問其欲爲公曰臣弟死爲國靈以保海上兄王勿悲王乃以舒弗 邯贈之葬以太公禮中外莫不哀惜
4월, 미해공(美海公)이 졸(卒)하니 나이 41세였다. 공(公)은 전아(典雅)하고 청수(淸秀)하였으며 사람들을 아끼고 선비(士)에게 몸을 굽힐 줄 알았다. 일찍이 실성(實聖)의 명으로 야인(野人)에게 사절로 가서는 십수년이 지나 비로소 돌아왔다. 그 왕녀 보미(宝美)가 공(公)을 사모하여 딸 나해(羅海)를 낳고서 도망쳐오자, 제상공(堤上公)의 양녀로 삼아 침궁(枕宮)에 속하게 했는데, 공(公)은 감히 스스로 차지하지 않고 왕(王) 및 복호(卜好)에게 바쳤으니, 무릇 기쁨과 걱정이 있으면 그를 함께 하였다. 공(公)은 야인(野人)들의 배와 노(舟楫)의 이로움을 깊이 알아서 우리 함선(艦)을 보수함으로써 그를 대적케 하였다. 야인(野人)들이 허다히 투항해 왔는데 모두 공(公)의 신하에 소속시켜 쓸모 있게 함으로써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니 왕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 하고 싶은 바를 묻자 공(公)이 가로되 “신제(臣弟)는 죽어서 나라를 위하는 영령(爲國靈)으로 해상(海上)을 보호하리니 형왕(兄王)은 슬퍼하지 마소서.”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를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하고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하니 중외(中外)가 모두 애석(哀惜)해 마지않았다.  

七月毗有遣其弟好嘉夫獻美女七人曰小侄新立無以奉上國謹以妹獻以備九宮則幸甚願解宿感而互相持護以禦北虜如何王欲伐野人故許其和
7월, 비유(毗有)가 그 아우 호가부(好嘉夫)를 보내어 미녀 7인을 바치고 말하기를 “어린 조카(小侄)가 새로 서서 상국(上國)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삼가 누이를 바침으로써 구궁(九宮)을 채울 수 있다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원컨대 묵은 감정을 풀고 서로가 돕고 보호하여 북쪽 오랑캐(北虜)를 막음이 어떠하신지요?”하였다. 왕은 야인(野人)을 정벌하고자 한 까닭에 그 화친을 허락하였다.  

八月以宮人仙明妻孔嘉夫乃實聖女也
8월, 궁인(宮人) 선명(仙明)을 공가부(孔嘉夫)의 처로 삼으니, 곧 실성(實聖)의 딸이었다.  

九月穀大登
9월, 곡식이 대풍이었다.  

命扶余醫眞兒敎王子宝信
부여(扶余)의 의사(醫) 진아(眞兒)에게 명하여 왕자 보신(宝臣)을 가르치도록 했다.  

祭天地四岳
천지(天地)와 사악(四岳)에 제사를 지냈다.  

以巴胡爲太子妃行吉鮑祠
파호(巴胡)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아 포(석)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十月孔嘉夫與仙明歸
10월, 공가부(孔嘉夫)가 선명(仙明과 더불어 (부여로) 돌아갔다.  

妊欣爲內宮舍人
등흔(登欣)을 내궁사인(內宮舍人)으로 삼았다.  

命大造舟艦
전함(舟艦)을 대거 제조하도록 명하였다.  

以靑我妻山近王行吉鮑祠盖從靑我求也
청아(靑我)를 산근(山近)의 처로 삼아 포(석)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대개 청아(靑我)의 요구(求)를 따른 것이다.  

  



十八年木狗之年也
18년은 목구(木狗:갑술434)의 해이다.  

二月毗有又遣其叔伊辛來獻雪花馬二匹請娶王女爲正妃王以王女色不美憂之少女周氏年十三而色美願自往王大喜盛飾以送之
2월, 비유(毗有)가 다시 그 숙부 이신(伊辛)을 보내어 설화마(雪花馬) 2마리를 바치고, 왕녀(王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정비(正妃)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딸들의 안색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그를 근심하였는데, 어린 딸(少女) 주씨(周氏)가 나이 13살이고 안색이 아름다우매 스스로 가기를 원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성대하게 장식하여 그를 보내었다.  

紅我生王子馬宿王親視洗兒
홍아(紅我)가 왕자 마숙(馬宿)을 낳자 왕이 친히 (와서) 보고 아기를 씻겼다.  

以羅海妻堤上公寵孫登欣行吉于豆乙宮登欣者靑我之子也其父曰順實郞乃許婁葛文王之後裔其先從征召文爲其州干世娶召文宗女妻之遂失骨品順實郞慨然入京初爲雲 花公主家奴與塞金布兒爲友時稱三傑雲花善歌敎順實以秘旨故骨女多就順實學歌得通靑我生登欣鵄述酷愛之請爲寵孫王許之宝美亦愛登欣出入同車乃以其女妻之
나해(羅海)를 제상공(堤上公)의 총손(寵孫)인 등흔(登欣)의 처로 삼아 두을궁(豆乙宮)에서 길례를 올렸다. 등흔(登欣)이란 자는 청아(靑我)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는 순실랑(順實郞)이라고 하는데 곧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후예였다. 그 선조는 소문(召文)에 출정해서 그 주칸(州干)이 되어 대대로 소문(召文)의 종녀(宗女)를 취하여 처(妻)로 삼았는데 마침내는 골품(骨品)을 잃게 되었다. 순실랑(順實郞)이 개연히 경도에 들어와 처음에 운화공주(雲花公主)의 가노(家奴)가 되어 새금(塞金) 포아(布兒)와 더불어 벗(友)이 되니 당시에 삼걸(三傑)이라 칭해졌다. 운화공주는 노래를 잘하였는데 신묘한 맛(秘旨)으로 순실(順實)을 가르친 까닭에 골녀(骨女)들이 많이 순실(順實)에게 나아와 노래를 배웠다. 청아(靑我)와 통할 수 있게 되어 등흔(登欣)을 낳았는데, 치술(鵄述)이 그를 몹시도 아껴 총손(寵孫)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왕이 그를 허락하였다. 보미(宝美) 또한 등흔(登欣)을 아껴서 한 수레를 타고 출입하였는데 마침내 그 딸로써 그의 처를 삼았다.  

三月實相等進攻野人于西海大破之
3월, 실상(實相)등이 서해(西海)에서 야인(野人)들에게 나아가 공격(進攻)하여 그를 대파(大破)하였다.  

以毗有妹蘇時昧爲宮人賜骨品以其受幸而娠故也
비유(毗有)의 누이(妹) 소시매(蘇時昧)를 궁인(宮人)으로 삼고 골품(骨品)을 하사했다. 그 행(幸)을 받고서 임신한 까닭이었다.  

五月月奈君石風浮海遇風而漂不知去處實相請立吳人爲其君許之先是吳人母吳女立國於西海石人征服之以爲妻生吳人未幾石人之長子石風奪吳女而逐石人于扶余吳女又生石風子禹風至是其臣方方通吳女而欲立禹風吳女欲立吳人實相以吳人有功于我立之
5월, 월나군(月奈君) 석풍(石風)이 바다에서 배를 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간곳을 몰랐다. 실상(實相)이 오인(吳人)을 그 임금(君)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그를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오인(吳人)의 어머니 오녀(吳女)는 서해(西海)에서 입국(立國)하였는데, 석인(石人)이 그를 정복하고 처(妻)로 삼음으로써 오인(吳人)을 낳았다. 얼마 안 되어 장자 석풍(石風)이 오녀(吳女)를 빼앗고는 석인(石人)을 부여(扶余)로 내쫓았으며, 오녀는 다시 석풍의 아들 우풍(禹風)을 낳았다. 이에 이르러 그 신하 방방(方方)이 오녀(吳女)와 상통하고는 우풍(禹風)을 세우고자 했는데, 오녀(吳女)는 오인(吳人)을 세우려고 하였다. 실상(實相)은 오인(吳人)이 우리에게 공(功)이 있음으로 해서 그를 세웠다.  

九月孔嘉夫與仙明來朝獻白鷹二頭蘇時昧女生故也
9월, 공가부(孔嘉夫)가 선명(仙明)과 더불어 내조(來朝)하여 흰매(白鷹) 두 마리를 바쳤다. 소시매(蘇時昧)의 딸이 태어난 까닭이었다.  

兄山人多入虎村州干請伐之不許
형산(兄山)사람들이 많이 호촌(虎村)으로 들어가자 주칸(州干)이 그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十月孔嘉夫仙明歸扶余賜良金明珠以褒毗有
10월, 공가부(孔嘉夫)와 선명(仙明)이 부여(扶余)로 돌아갔다. 양금(良金)과 명주(明珠)로써 비유(毗有)를 포상(襃)하였다.  

十一月宝美生王女牟梁
11월, 보미(宝美)가 왕녀(王女) 모량(牟粱)을 낳았다.  

命立眞兒堂以備藥石
진아당(眞兒堂)을 세우도록 명함으로써 약석(藥石)을 구비하도록 하였다.  

塞凰生太子子世德
새황(塞凰)이 태자의 아들 세덕(世德)을 낳았다.  

以王子山同爲靑骨阿湌
왕자(王子) 산동(山同)을 청골아찬(靑骨阿湌)으로 삼았다.  

冬暖如春
겨울에 따듯하기가 봄과 같았다.  

仁德生乭希子突知
인덕(仁德)이 돌희(乭希)의 아들 돌지(突知)를 낳았다.  





十九年木豕之年也
19년은 목시(木豕:을해435)의 해이다.  

正月大風拔木
정월에 대풍(大風)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以骨女妻眞兒
골녀(骨女)를 진아(眞兒)의 처(妻)로 삼았다.  

王與諸姬遊海宮
왕이 여러 희첩(姬)들과 더불어 해궁(海宮)에서 노닐었다.  

靑我生山近女山艾
청아(靑我)가 산근(山近)의 딸 산애(山艾)를 낳았다.  

比斯只生王女天生
비사지(比斯只)가 왕녀(王女) 천생(天生)을 낳았다.  

二月修祖宗陵門
2월, (역대) 조종(祖宗)들의 능문(陵門)을 수리하였다.  

妊欣爲級湌
등흔(登欣)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湯倍以發登爲嗣時發車生女唐氏故也
탕배(湯陪)가 발등(發登)을 후사(嗣)로 삼았다. 당시 발차(發車)가 딸 당씨(唐氏)를 낳은 까닭이다.  

四月祀始祖廟
4월,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蟾神生道光子孝國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의 아들 효국(孝國)을 낳았다.  

巴胡與太子入海宮
파호(巴胡)가 태자와 더불어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山凰生女燕凰
산황(山凰)이 딸 연황(燕凰)을 낳았다.  

後宮杜氏難産而薨帝惜之厚葬之
후궁(後宮) 두씨(杜氏)가 난산(難産)으로 훙(薨)하였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겨 후하게 장사지냈다.  

福壽請以吹希爲繼夫時福壽又生吹希女彘姬色尙壯餘故吹希愛之如妻故也
복수(福壽)가 취희(吹希)를 계부(繼夫)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때에 복수는 다시 취희의 딸 체희(彘姬)를 낳았는데 색(色)이 오히려 왕성하고 남으므로 취희가 그를 처(妻)처럼 사랑한 까닭이었다.  

七月末曷請婚以采女送之
7월, 말갈(末曷)이 혼인을 청하자 채녀(采女)로써 그를 보냈다.  

九月吹希以福壽爲正妻行吉于綾峴大宴群臣
9월, 취희(吹希)가 복수(福壽)로 정처(正妻)를 삼아 능현(綾峴)에서 길례를 행하고, 군신(群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十月王親祭穀神
10월, 왕(王)이 친히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以王子僧爲城官阿湌
왕자 승(僧)을 성관아찬(城官阿湌)으로 삼았다.  

末曷獻弓手及大弓
말갈(末曷)이 궁수(弓手)와 대궁(大弓)을 바쳤다.
  


  

二十年火鼠之年也
20년은 화서(火鼠;병자436)의 해이다.  

正月骨女覃氏生眞兒子通兒
정월, 골녀(骨女) 담씨(覃氏)가 진아(眞兒)의 아들 통아(通兒)를 낳았다.  

二月發車遣古厚等獻吳國宝貨
2월, 발차(發車)가 고후(古厚)등을 보내어 오국(吳國)의 보화(宝貨)를 바쳤다.  

三月紅我生宝宝兒子乃宿時宝宝兒學歌于紅我至夜深不歸仍與之通而生
3월, 홍아(紅我)가 보보아(宝宝兒)의 아들 내숙(乃宿)을 낳았다. 당시 보보아는 홍아에게 노래를 배우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져도 돌아가지 않자 그대로 그와 더불어 통하고서 낳은 것이다.  

遣方石于扶余救藥毗有以女妻之
방석(方石)을 부여(扶余)에 보내어 약(藥)을 구하자 비유(毗有)가 딸을 그의 처(妻)로 삼았다.  

四月雹命放寃囚禁骨人仙徒奪民愛妻許民相好者合
4월에 우박이 내리자 억울한 죄수들을 (찾아내) 석방토록 명했다. 골인(骨人)과 선도(仙徒)들이 백성의 애처(愛妻)를 뺏는 것을 금하고, 백성이 서로 좋아하는 자와 합(合)하는 것을 허락했다.  

五日巴胡生太孫毗處賜米視兒
5월, 파호(巴胡)가 태손(太孫) 비처(毗處)를 낳자 쌀을 하사하고 아기를 보았다.  

蜃樓生王女蜃海
신루(蜃樓)가 왕녀 신해(蜃海)를 낳았다.  

五月王勸稼南郊
5월, 왕이 남교(南郊)에서 농사를 권장하였다.  

毗有妻周氏私通其臣事覺而歸
비유(毗有)의 처(妻) 주씨(周氏)가 그 신하와 사통(私通)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돌아왔다.  

以鳥生妻宝宝兒行吉鮑祠
조생(鳥生)을 보보아(宝宝兒)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六月好原破野人鎭島虜其骨女獻之王大喜乃以皇我妻之行吉于鮑祠是日分賜野女于諸將爲妾
6월, 호원(好原)이 진도(鎭島)에서 야인(野人)을 쳐부수고 그 골녀(骨女)들을 사로잡아 헌상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이에 황아(皇我)를 그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날 야녀(野女)들을 제장(諸將)들에게 나눠주어 첩(妾)으로 삼게 했다.  

山同紅骨大沛靑骨
산동(山同)을 홍골아찬(紅骨)으로 삼고, 대패(大沛)를 청골아찬(靑骨)으로 삼았다.  

十月宝美生女美梁乃登欣女也宝美初以貞守欲拒上供美海公怒乃上供于王及卜好公而生子不復自貞密引登欣通于帷車中王亦知之不禁至是遂生女
10월, 보미(宝美)가 딸 미량(美粱)을 낳으니 곧 등흔(登欣)의 딸이었다. 보미는 애초에 정절을 지킴으로써 (색공을) 상납(上供)하기를 거부했었다. 미해공(美海公)이 노하자 마침내 왕(王)및 복호공(卜好公)에게 상공(上供)하여 자식을 낳고는, 다시는 스스로 정절을 (지키지) 않았으니, 몰래 등흔(登欣)을 이끌어 유거(帷車)안에서 밀통하였다. 왕 또한 그것을 알았으나 금(禁)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마침내 딸을 낳은 것이다.  

以宝宝兒爲級湌賜名習宝
보보아(宝宝兒)를 급찬(級湌)으로 삼고 이름을 내려 습보(習宝)라 했다.  

王入海宮
왕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以王子富理爲神官阿湌
왕자 부리(富理)를 신관아찬(神官阿湌)으로 삼았다.


두메 (2009-03-26 06:55:06)  
16년 8월조 각주에 인용된 '君子惟爾交豈爲色乎'는 원래 '君 子 惟 以 道 交 豈 爲 色 乎'의 오류입니다.
아무리 수정을 해서 입력해도 게시판이 제멋대로 글자를 바꿔버리는군요.
정성일 (2009-03-27 15:43:11)  
님때문에 신라사초를 해석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군요.
요즈음은 도무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어 해석을 등한시 하였습니다.
해석도 문제이지만 계보도라던가, 삼국사기 기록과의 비교도 함께 해야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를 도울 수 있는데 아직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으리라 봅니다.
이를테면 보해공의 탈출시의 기사가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비교해 보면, 삼국사기는 보해가 아닌 실성이사금의 탈출기사를 바꾸어 적고 있습니다.
두메 (2009-03-27 19:53:32)  
님 때문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니고, 남당 문건이 공개된 이래 간간히 개인적으로 해오던 작업을 공유하는 것 뿐입니다.
잘못된 번역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여러 역본이 나옴으로써 보다 완전한 자료의 공유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밍한 사료비판은 그 다음 문제겠죠.
자신의 영역을 빼앗긴 듯한 기분인 모양이신데, 댓글을 통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일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문의 오역과 오식에 대한 지적이라면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
각주는 역자의 사견이므로 무시하시면 됩니다.
정성일 (2009-03-27 21:21:28)  
두메님은 반대로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한문 판독을 하며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저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일반 독자를 이해를 돕기 위해 과거의 진실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여 돈을 내고 구입한 독자들이 돈을 낸 것이 아깝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다듬고 있을 뿐입니다.

두메님 덕분에 홀가분하다는 것은 그 동안에 무거웠던 짐을 덜어 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해석하다 보면 독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님의 글을 보며 처음 나타났으나 내공은 저보다 높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나의 영역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저는 처음에 국사편찬위원회에 해석본을 넘기겠다고 글을 올린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 왈 "책을 한번 내어보시죠"라는 답변이었습니다.
지금 두메님에게 요구정도는 책을 낼때는 제 이름 석자정도는 넣어주시면 어떨까요? 라는 정도
(이것도 받아 주지 않으면 솔직히 배신감 느낍니다)
물론 저도 두메님의 이름 석자를 넣을 것입니다.
공저할 생각도 있지만 이건 자신만의 개성이 있어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다면 어쩔 수 없이 감사인사만 전할 수 밖에 없지만...
혹시 두메님과 김영채님이 동일한 분은 아니시겠죠.
문장을 다듬느라, 솔직히 창피하여 글을 보내지 못햇습니다.

그리고 남당의 책이란 서로 비교해 가면서 비판을 가하고 교필을 해 갈때 비로서 빛이 나는 것입니다.
두메님이 젊으시다면 한 20년 후쯤이면 교수님 하실지 모르지만, 나이가 많으시다면 별볼일 없고 인생만 태우다 가는 것이죠.
저의 나이도 이제40이 다 되어 갑니다.
저는 어차피 후세를 위해 내 몸을 태우고 가는 것입니다
두메 (2009-03-28 00:34:39)  
정성일님.
답변이 늦었군요.
앞서 밝혔듯 제가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순수하게 제 개인적 호기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애초에 책을 낸다는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이미 파일이 공유된 마당에 누가 그 책을 산다는 것인지?)

‘님 때문에’라는 말에 불쾌했는데 이렇게 거창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님의 취지와 열정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좀 산만한 환경이라 경황이 없고, 또 답변할 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댓글로 나눌만한 이야기도 아닌 듯하니,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차후 천천히 메일을 교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선민 (2009-04-03 09:41:23)  
크크큭..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간쯤에 모례와 묵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은 아들이 묵호자인듯 합니다..
아도와 동일인물이라 하는데.. 묵호자(묵호의 아들)란 뜻이므로 아도가 본래의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미추왕기와 내물왕기에 혼재되어 있는데 신라사초의 기간으로 따지면 미추왕과 중복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성일 (2009-04-07 13:35:33)  
선민님//
님께서도 남당 유고를 연구하고 있을 터이니, 가장 헷갈리고 어려운 부분이 사람의 이름과 문장으로 해석하여야 할 곳을 아는 일입니다.
묵호자의 '자'부분은 접미사인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위화는 위화(랑)으로, 연오는 연오(랑), 대서는 대서(공), 가야여주 미리는 미리(신)...
묵호와 모례사이에 물론 아들이 있긴 합니다.
묵호는 묵호자가 맞고, 묵호의 아들이 아도인지는 확인이 불가한 사항입니다.
솟대 (2009-06-27 13:10:34)  
두메 선생님 다음전개가 궁금합니다.
아직 이어지는 부분은 번역이 안되셨는지요. 너무 오래 중단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