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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남당유고 금천대제법흥진왕기 金天大帝法興眞王紀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영제천후가 꿈에 큰 백마를 보고서 낳았다. 임금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관대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았고 천문,지리,음양오행,진서,원경,활쏘기,말타기와 같은 여러 기술이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나라를 경영하는데 큰 법도가 있었으니 어진이를 임명하고 재주있는자를 선발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중흥시키고 대업을 이루는 위엄에 이르렀다.
임금은 신장이 칠척이고 훌륭하고 준수한 얼굴에 신룡(신령한 용(제왕)의 형상)이 있어 소명천후가 지극히 그를 사랑하여 말하기를 내 아우는 마땅히 우리나라를 일으킬 것이다. 분종태자에게 명하여 함께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고 지증왕에 이르러 분종에게 선위를 받았으며 임금에게서 (왕의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사양하였다. 4년 겨울 나라를 다스림에 이종이 뛰어나서 으뜸으로 천거하여 군사의 일을 맡겼고 아진종에게 정사를 물으니 나라사람들이 성군으로 평가하지 않음이 없었다. 9년 여름 태자를 불러 오로지 대정(大政)을 명령하였으나 거듭 임금의 부름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년 3월 구요궁에서 선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를 높이어 태상노제지증대왕이라 하였다. 선도(신하)들이 이에 팔백전 위에서 임금을 부르기를 금천대제법흥진왕이라 하였다. 영제천후에게서 나라의 옥새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산호(山呼:만세를 이름) 만세를 외쳤으며 임금의 나이 삼십사세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神統)이며, 나의 신국은 석가세존의 신성한 나라이다. 지금 내 어머니와  뛰어난 천성을 지니신 성상(聖上)께서는 나라를 키우시고 절(山)을 창건하셨으며 짐의 몸을 보육해주셨다.  옛날에도 수렴정치가 있었으니 짐이 대권을 잡음에 이르러 우선 어머님과 황제폐하를  받들 것이니  너희 군신들은 마땅히 짐의 효성을 본받아 나의 성스러운 두 분을 섬겨야 할 것이다. 이에 옥좌에서 천후를 받들고 신천대제법흥묘왕의 호칭을 올렸으며 임금에게서 나라의 장보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또한 만세를 외쳤고 대서랑 호지 아찬에게 명하여 두 성스러운 분의 나라를 다스리는 절목들을 모아서 그것을 받들었다. 다음해 7월 늙으신 임금이 붕어하시니 영제천후가 양궁에서 의식을 행하고 진궁에서 즉위하였다.

원년 7월 임금이 조서에서 말하기를 분종전군은 크나큰 인이 있어 짐에게 나라를 사양하였다. 이에 마땅히 정사를 돌봄에 마음대로 명할 수 있는 임무를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분종으로써 품주를 삼고 보인으로써 조주를 삼고 철부로써 성을 보호하는 장군으로 삼고 아시를 금하신으로 삼았다.

8월 벽화로써 좌황후를 삼고 보도로써 우황후를 삼았으며 삼부전군으로써 태자를 삼았으며 위화랑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9월 분종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자질이 허세를 부리고 난잡하여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며 신의 아내가 또한 임신 중이라 공무를 행할 수 없으니 원컨대 중요한 직책에서 풀어 주십시오.’ 라 하니 이에 철부준치로써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10월 여러 신하들이 철부가 병권을 관장하여 중요한 정치를 마음대로 함은 잘못된 것이다.하여 옛법을 들어 그것을 논의하자 철부가 이에 (임금의 임명을)면해줄 것을 청하여 수지,보현으로써 그를 대신하였다.

11월 묘왕과 위화가 해궁에 들어갔다.

12월 임금이 두왕후와 함께 해궁에 들어갔다.

상선(가장 뛰어난 신하)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따뜻한 가죽옷과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하사하였다.

2년 청양 정월에 임금이 해궁으로부터 진궁에 돌아와 조회를 받고 바로 그날 해궁으로 돌아갔다.

물력묘홍이 품조주가 되었다.

각간 하대가 죽자 그 아내 보패에게 해마다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거듭 진궁을 고쳐지었다.

보도왕후가 구요궁에서 지소공주를 낳았다.

수지에게 명하여 고사를 모아서 널리 새로운 제도에 대해 논의하였다.

묘원 원화

5월 선원에서 령을 내려 식신에게 아찬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그의 아들 벽신을 태자사인으로 삼았다.

7월 평입궁에서 큰제사를 지내고 보현이 그것을 주재하였다.

위화옥란이 품조주가 되었다
10월 평입궁 수왕전이 완공되자 임금과 묘왕이 노제(老帝)의 복을 3일간 빌었다.

12월 각간 비지가 죽었으니 (그의) 나이 일흔넷 이었다. 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훈공(훌륭한 공)을 안타까워하며 사당을 세우고 그를 제사지냈다.

수지, 보현이 품조주가 되었다.

3년 화원 정월 임금이 묘왕과 더불어 남조에서 조회를 받았다.
임금이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불을 들자 어떤 황룡이 일정(우물)에서 보였다. 태사설덕이 상서로운 길조라 여기고 (나라)안팎의 선무(도인,무당)들에게 명하여 복을 빌게 하였다.
개명,백진이 품조주가 되었는데 보현이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납수의 딸 계화로써 공주를 삼고 옷을 하사하였다. 당시에 계화가 감지의 총애를 얻어 (공주의)벼슬을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16일 묘왕이 별동선원에서 연회를 열었다.

4월 병부령을 설치하여 철부,패연이 (병부령이) 되었다.

5월 묘왕이 선원에 들어가자 화랑이 적토에서 제사를 지냈다.

6월 각간 지세로가 죽었으니 나이가 육십오세였으며 태공의 예로써 그를 장사지냈다. 공은 선제의 친형제로써 오래도록 병마를 관장하였고 관대하고 후덕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무예에 뛰어난 선비이다. 위로 고비(考妃)와 같은 이들은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비에게 명하여 보수궁과 해량궁 함씨궁을 하사하고 아울러 해마다 곡식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7월 이찬 실죽오로서 각간을 삼았고 군정을 맡겼고 아시오도로 품조주를 삼았다.

8월 별동에서 크게 가배를 행하였다.

진환이 아들 융공을 낳았으니 혹자는 위화의 아들이라 하고 혹자는 임금의 아들이라 하였다.

상선인 외산에게 명하여 나라 안을 순시하게 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묻게 하였다.

9월 개명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이 잘 다스려지는지의 여부를 살피게 하며 백성들에게 농사를 열심히 지을 것을 권장하며 기술이 있는자들 중에 郡主(군주)나 村主(촌주)가 백성들의 여식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것을 금지 하였다.

염화가 비령의 아들인 비해를 낳아서 쌀을 하사하였다.

묘왕이 위화와 더불어 별동에서 월가를 불렀다.

10월 선등에게 명하여 남교에서 대상을 행하였고 임금과 묘왕이 그를 총애하였다.

11월 부여가 조공을 바치며 아뢰기를 고구려가 양(梁)을 통하여 남쪽으로 내려 오려한다. 하여 임금이 북로와 남로에 명하여 수륙으로 방어를 갖추게 하였으며 정포를 하사하였다.

가야공주 홍뇌로써 권처로 삼았다.
12월 묘왕과 위화가 해궁에 들어가 진경대회를 열어서 주군(州郡)에서 선약대서에 정통한자 삼십육인을 뽑아서 신하로 삼았다.

임금이 두 왕후와 더불어 평립궁에 행차하시어 누이동생 진환으로써 궁감독관으로 삼았으며 염란으로서 법관으로 삼고 화전을 하사하였으며 옹구신은 내마에 벼슬을 주었다.

포장의 처 섬경이 죽자 지세로의 처인 함씨로써 섬경의 사부인 양수에게 처를 삼게 하였다.

4년 화계 정월 임금이 두왕후와 더불어 진궁에서 조회를 받았으며 늙은 상선에게 술을 하사였다. 이에 선도산에서 백계제를 지냈다.

준실이 입종의 처가 되어서  신궁에서 예식을 행하고 노비와 집을 하사하였고 진만이 삼산의 처가 되어서 이동궁에서 예식을 행하니 임금과 벽화왕후가 그것을 주관하였다.

수지,보현이 품조주가 되었다.

2월 임금이 벽화와 영실과 더불어 행궁에 행차하여 묘왕을 알현하였다. 영실은 수지의 아들인데 얼굴이 곱고 부드럽고 온후하여 임금이 그를 총애하여 옥새를 관장하는 신하로 삼았으며 일어설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그를 배개를 삼았으니 마치 부부와 같았다.
임금이 매번 벽화궁주와 더불어 즐거움을 합할 때 영실을 오라하여 함께 잠자리를 하였다.
벽화궁주는 임금이 후회할까 두려워 그 동생인 설화로써 영실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임금이 영실과 설화가 사귀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설화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고 벽화궁주를 멀리하였다. 벽화궁주가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영실을 유혹하여 서로 좋아하게 만드니 임금이 다시 궁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궁주가 이에 영실을 차지하고 설화에게 는 그 남편인 내거에게 돌아가라 명하였다. 설화는 당시에 이미 영실의 자식을 임신 중이었으나 스스로 임금의 아들이라 하며 궁을 나가려하지 않았고 왕후의 무정함을 원망하였으나 왕후는 끝내 다시 설화를 불러들이지 않았고 홀로 임신하였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배를 만지며 영실의 아이인가? 짐작하고 있었는가? 하고 물었다. 왕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영실이 비록 힘을 빌려줬다 할지라도 어찌 당신에 미치겠습니까? 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영실이 곧 짐이니라. 네가 임신함은 영실의 자식이니라.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영실의 자식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보현을 불러서 왕후를 씻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다시 태후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자 하여 해궁에 들어갔으며 보현이 그를 따랐고 해궁에 몇 일 머물면서 임금은 묘왕과 더불어 운제산에 행차하였다. 벽후와 보현은 모두 위화와 더불어 사통하였다.

3월 준실 원화

보혜궁주가 죽었다. 이찬 선견의 처라. 아버지는 습보갈문왕 이고 어머니는 오수궁주이다.
성품이 음란함을 좋아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임금이 모진궁에 있을 당시 보혜를 맞이하여 그를 예뻐하였으며 그여인을 (궁으로)들였다. 또한 스스로 임금의 총애를 얻었다. 임금이 즉위하여 권처(권세있는 아내)가 되게 명하니 지위가 이품에 이르렀고 궁궐의 노비를 하사하였다. 보혜는 미색이 쇠퇴하면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항상 적당한 약을 복용하고 화장을 하여 마치 젊고 아름다운이 같이 하였다. 항상 미소년을 데리고 끼고 누워서 거울로 서로 비춰보며 말하기를 ‘누가 더 예쁘냐?’라고 하면 소년은 ‘궁주께서는 신과 비교하면 아이처럼 매우 예쁘십니다.’하였다. 이에 보혜는 기뻐하며 얼굴이 아직 늙어가지 않다고 여겼으며 그 아들 아시에게 ‘임금께서는 나를 잊지 않으셨겠지?’ 하고 물으니 아시가 웃으며 말하길 젊을 때 총애는 숲과 같아서 오히려 총애를 다 받지 못하거늘 당신(어머니)과 같은 늙은 몸을 어찌 총애 하겠습니까? 하니 보혜가 이에 슬피 울었고 병을 얻었다. 선모가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인간이 살아감에 즐거움이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물건을 보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둘째가 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것 세 번째가 부귀로 즐거움을 행하는 것이라 하였거늘 따라서 얼굴색이라는 것은 말단중의 말단이오 내 부인이 어찌 그 말단을 취하여 스스로를 상심한단 말인가? 보혜는 듣지 않고 끝내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선모가 껴안고 보혜에게 노래를 불러주니 ‘우차린혜여(아~~)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우차빈호아(아~ 여인이여)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임금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보혜는 짐의 총애하는 첩이라’ 왕후의 예로써 그를 장사지내주었으며 사당을 세워 보혜라 하였다.

4월 병부의 제도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철부로써 령을 삼았고 동성으로 랑을 삼았다.

묘왕이 벽화와 더불어 주군 선원을 순수(순시하고 사냥함)하였다.

5월 홍뇌궁이 새로 완공되어 여러신하들과 궁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홍뇌와 영실에게 춤을 대결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벽화후는 임신한지 만삭이었다. 때문에 임금은 영실과 항상 함께 홍뇌궁에서 잠을 잤으며 벽화후가 그것을 투기하여 영실을 불러다가 춤을 추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홍뇌를 안고 그와 춤을 추었다. 벽후가 화를 내며 임금과 홍뇌를 (손으로)치고 울었다. 임금이 벽후의 태동을 두려워하여 벽후를 껴안고 휘장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위로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미치도록 술에 취해 있었고 휘장 바깥에서 노래를 부르니 밤이 새도록 연회가 거두어지지 않았다.

6월 천홍이 임금의 아들천경을 낳았다.

7월 위화와 오도가 품조주가 됨. 오도는 옥진을 낳았고 아시의 처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오도는 옥진으로써 위화의 딸로 삼기를 원했다. 임금이 오도가 위화에게 다시 가고자 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벽화가 딸 삼릉을 낳았고 임금이 영실에게 명하여 그를 씻게 하였다.

임금과 묘왕이 해궁에 들어가지 영실이 묘왕과 사통하였다.

8월 사룡으로써 남조주로 삼았다.

임금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와 보도의 궁으로 들어갔다. 보도가 영실을 받아드리지 않고서 이르자 임금이 노여워하였다. 이때 이르러 묘왕이 힘써 권하여 두명의 후(后)를 고루 총애하였다. 임금이 이에 먼저 영실로 하여금 조서를 받들어 그곳에 들어가게 하였고 보도도 능히 그칠 수 없었다.(부득이 따라 들어갔다.) 이에 영실과 더불어 신지(神池)에서 목욕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후회하여 벌을 줄까 두려워서 이다. 영실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폐하에게 사랑받기를 바라겠습니까? 오직 임금께서 그와 강제로 (명하시니) 어찌하겠습니까? 보도가 말하기를 나와 너는 좋아하는 것이지 사통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를 안아줄만하고 신전에 들어가 즐거움을 행하고 천지신명께 고할 것이며 궁중에 있는 상하의 신하들로 하여금 공을 보게 할 것이다. 영실이 이에 후를 안고 신전에 들어가 그것을 고하고 운우의 정(부부의 관계)을 행하였고 임금이 그것을 들었다. 이에 돌아와 후를 옛날과 같이 총애하였다.

남조에서 크게 가배를 행하였다.
9월 순지로써 천주사주로 삼았고 비원으로써 법사를 삼았다.

벽화후는 삼릉이 백일이 됨으로써 술자리를 마련하여 임금과 영실과 위화와 오도를 맞이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였다. 오도가 말하기를 내 딸 상진의 첫 생일이니 임금과 후께서는 또한 저에게 음식을 내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그것을 허락하여 말하기를 (산해)진미를 베풀만 하다 하였다. 오도가 말하기를 비록 진미가 없다할지라도 오직 그런데로 괜찮은 품질의 매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약속하여 만남에 이르렀는데 눈이 한길이나 깊어져서 임금은 마침내 오도의 궁에서 묵으면서 그 딸인 옥진을 사랑하였고 이로부터 옥진의 총애가 높아졌다.

11월 백련이 위화의 딸인 백화를 낳았다.

12월 임금과 묘왕이 오도의 궁에서 묵었고 위화에게 해찬의 벼슬을 더해주고 크게 별동에서 진경회를 열어주니 진골 남녀가 모두 그곳에 나왔다.

오년 황구 정월 임금이 묘왕과 두왕후와 더불어 진궁에서 조회를 받았다.

2월 백종에게 명하여 주산성을 쌓게 하였다.

3월 옥진으로써 영실에 아내로 삼게 하였고 제와 벽후가 포사에서 예식을 하게하였다..
4월 청진이 마대의 딸인 황진을 낳았다.
5월 보도후가 딸인 설소를 낳았다.
아혜궁주가 죽자 인양묘에 장사지냈다.

산종, 묘원이 품조주가 되었고 위화가 병부령이 되었다.

8월 남조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앙인이 선제인 율진으로써 진면궁에서 화랑을 삼았다.

9월 임금이 옥진과 더불어 승광선원에서 월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