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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나물대성신제기(奈勿大聖神帝紀) 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남당유고,남당박창화

월내신경(月嬭神經)에서 말한다.

『 황계(黃鷄:기유349/289?) 4월, 태제(太弟) 말구각간(末仇角干)이 화림(花林)에서 깊이 잠이 들었는데(盡寢) 꿈에 황룡(黃龍)이 승천하며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침을 보고 크게 놀라 일어났다. 그 때에 휴례공주(休禮公主) 또한 화림묘주(花林廟主)로서 신기둥(神楹)에 기댄 채 혼미(昏迷)한 상태였는데, 홀연 백화(百花)가 흐드러지게 피고 오색빛깔의 봉황(鳳)이 꽃 가운데로부터 나와 품속으로 날아들므로 얼싸안고 그를 보니 곧 말구각간이었다.
그 꿈을 기이하게 여기고 몰래 걸어 나와 말구각간의 재방(齋房)을 엿보니 각간이 뛰쳐나와 (공주를) 안으며 말했다.
“내가 좋은 꿈을 꾸었으니 바라건대 공주가 이루어주시오.”
공주가 말했다.
“첩 또한 꿈을 꾸어 신의 뇌사(神賚)가 없는가 했습니다.”
이에 서로 부여안고 신지(神池)에 목욕하고는 묘신(廟神)에게 기도를 올리고 마침내 원앙의 아름다움을 맺으니 과연 태기가 있었다.
미추선제(味鄒仙帝)가 이를 듣고 도산(桃山)에서 길례를 올려 부부가 될 것을 명하였다.
각간은 그 때 이미 쉰셋의 춘추였고 공주는 열아홉 살의 춘추였으나 구름은 짙고 비는 진하여, 정(情)이 마치 아교와 옻칠 같았으니 대개 하늘이 정한 배필이었다.
선제(仙帝)는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우리 아우의 복(福)이 짐보다 백배 낫다.”라 하며 상을 내림이 심히 많았다.
月嬭神經曰黃鷄四月太弟末仇角干晝寢于花林夢見黃龍昇天雷電風雨大驚而起時休禮公主亦以花林廟主依神楹而昏迷忽見百花爛開有五色彩鳳自花中出飛入懷中抱而 見之乃末仇角干也奇其夢而潛步出伺末仇角干之齋房角干走出抱之曰吾有好夢願主成之公主曰妾亦有夢無乃神賚也乃相抱浴于神池而禱于廟神遂結鴛鴦之好果有娠味 鄒仙帝聞之命吉于桃山爲夫婦角干時已五十三春秋公主才十有九春秋而雲濃雨厚情若膠漆盖天定配匹也仙帝大喜曰吾弟之福勝于朕百倍賞賜甚重

애초에 달례태후(達禮太后)가 꿈에 금색공작(金色孔雀)을 보고서 (미추)선제(仙帝)의 딸 곧 휴례공주(休禮公主)를 낳았다. 술례태후(述禮太后)는 꿈에 금색대조(金色大鳥)를 보고 미추선제(味鄒仙帝)를 낳았으니 곧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아들이다. 5년 뒤에 다시 또 하얀 큰말(白大馬)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구도왕(仇道王)에게 고하였는데 왕은 마침 병질이 있어 그 좋음(好)을 이룰 수 없자 말흔각간(末昕角干)에게 명하여 이루게 하고 말구각간(末仇角干)을 낳았다. 그런고로 선제(仙帝)는 심중에 대통(大統)이 돌아갈 연고인 바를 안 것이다.
공주가 이미 잉태를 하자 각간은 아침마다 그를 안고 씻기는데 흰 수염(白鬚)은 새하얗게 밝고(皓明) 옥체는 풍만하고 반지르르하니 달례태후(達禮太后)가 희롱하여 말했다.
“네 남편이 흰 수염을 네 배에 드리우고 너를 안으니 네가 흰 수염을 위해서 네 남편을 아끼느냐?”
공주가 말했다.
“남편은 곧 부제(父帝)의 포제(胞弟)이고 나라의 큰 기둥입니다. 비록 흰 수염이 아니라도 어찌 아끼지 않겠습니까?”
공주가 이에 비단주머니로 그 수염을 담아 넣고 말했다.
“모후(母后)가 나를 놀리니 모후로 하여금 나를 안는 것을 못 보게 하겠습니다.”
각간이 말했다.
“부모의 사랑이다. 가까이하여 보게 할 것이지 어찌 피해야 하는가?”
선제(仙帝)가 이를 듣고 “옳다.”하며 이에 도산(桃山)으로 들어와 제(帝)의 곁에 거처할 것을 명하고 제(帝)와 달후(達后)가 아침 저녁으로 방문해서 그를 애무(愛撫)하였다.

이듬해 금구(金狗:경술350/290?) 3월일에 이르러 (배가) 더욱 불어나자 제(帝)와 달후(達后)가 그를 위하여 친히 성모(聖母)에게 기도하고 각간 일양(日陽)에게 명하여 화림세신(花林世神)에게 참배하도록 하였다. 보름 뒤 초저녁에 이르러서 뇌우(雷雨)가 홀연히 일어나고 태기가 동해서 산실로 들어가니 달후(達后)가 친히 신화(神火)를 받들고 그를 어루만졌다. 공주가 마침내 각간의 무릎을 안고서 분만하니 서기(瑞氣)가 영롱하고 천향(天香)이 실내에 가득찼다. 성자(聖子)가 고고히 태어나니 준일(俊逸)하고 영매(英邁)하였으며 보통아이와는 크게 달랐다. 선제(仙帝) 또한 이르렀는데 각간에게 명하여 아기를 씻게 하고 친히 자의(紫衣)를 내리며 말했다.  
“오늘 비로소 용손(龍孫)을 얻으니 짐은 기쁨을 이길 수 없다.”
이에 나물(奈勿)이라 이름하고 노비(奴婢)를 더하고 신미(神米)를 하사하니 공주와 각간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어수(魚水)와 비익(比翼)의 정(情)은 갈수록 더해지고 점점 굳어졌으며 성자(聖子)를 국양(鞠養)하는 즐거움은 하루 하루 날로 깊어갔다.
初達禮太后夢見金色孔雀而生仙帝女乃休禮公主也述禮太后夢見金色大鳥而生味鄒仙帝乃仇道葛文王子也後五年又夢白大馬入懷告于仇道王王適有疾不能成其好命末 昕角干成之生末仇角干故仙帝心知大統所歸故也主旣娠角干朝朝抱而洗之白鬚皓明玉體豊膩達禮太后戱之曰汝夫以白鬚垂汝腹而抱汝汝爲白鬚而愛汝夫乎主曰夫乃父 帝之胞弟而國之大柱也雖非白鬚豈不愛乎主乃以錦囊盛其鬚曰母后戱我無使母后見抱我也角干曰父母之慈也可近而視之何爲避乎仙帝聞之曰是也乃命入桃山居帝之側 帝與達后朝暮至而愛撫之至翌年金狗三月日益漲帝與達后爲之親禱于聖母命角干曰謁花林世神至望後初昏雷雨忽作胎動而入産達后親奉神火而撫之主乃抱角干之膝而 娩分瑞氣玲瓏天香滿室聖子呱呱而誕俊逸英邁大異凡兒仙帝亦至命角干洗之而親賜紫衣曰今日始得龍孫朕不勝喜乃名奈勿加奴婢給神米公主角干之喜無以形也魚水比 翼之情愈往愈固聖子鞠養之樂日甚一日』

※월내신경(月嬭神經)은 달례태후(達禮太后)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月嬭와 達禮는 우리말의 ‘달래’에 해당하는 이름을 동음이사(同音異寫)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따라서 월내신경(月嬭神經)은 달례태후(達禮太后) 생전의 저작으로 추정되지만 본문 인용의 단락을 결정짓기가 매우 애매합니다. 편의상 여기서 인용을 끊기는 했지만 이하의 기록 역시 公主 또는 聖子를 (보이지 않는) 주어로 하는 특정 시점의 기사가 계속 되므로 어디까지가 월내신경(月嬭神經)의 인용이고 출전인지 정확한 구분이 어렵습니다. 참작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6월, 공주와 각간은 성자(聖子)를 안고 구도세신(仇道世神)의 묘(廟)에 참배(謁)하고 비로소 골문(骨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六月主與角干抱聖子謁仇道世神廟始宴骨門

9월, 구도(狗徒)가 (성자를) 받들어 주군(君)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그를 허락하였다. 九月狗徒請奉爲君許之

각간(角干)이 친히 문천(蚊川)에 제사지냈다. 角干親祀蚊川

이 해에 대풍(大豊)이 들었는데 각간의 농장(角干庄)에 가화(嘉禾)와 서수(瑞穗)가 있자 전민(田民)들이 칭하(稱賀)하여 이르기를 “성자곡(聖子穀)”이라 했다. 각간이 이에 선제(仙帝)께 받들어 올리자 선제(仙帝)가 말했다.
“세신(世神)께 제사 지내고 그를 분배해야 할 것이다.”
이에 달후(達后)에게 명하여 공주와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화림(花林)에 천신(薦)토록 하였다.
是歲大豊角干庄有嘉禾瑞穗田民稱賀曰聖子穀也角干乃奉于仙帝帝曰可祀世神而分之乃命達后與公主齋沐而薦于花林

12월, 말흔각간(末昕角干)이 훙(薨)하였다.十二月末昕角干薨

백시(白豕:신해) 2월, 공주가 성자(聖子)와 함께 술례태후(述禮太后)의 능(陵)과 소비왕(所非王)의 능(陵), 월백(月白)의 능(陵), 자봉태후(紫鳳太后)의 능(陵), 말흔각간(末昕角干)의 능(陵)을 참배(謁)하였다. 白豕二月主與聖子謁述禮太后陵所非王陵月白陵紫鳳太后陵末昕角干陵

수우(水牛:계축) 2월, 공주가 매군(妹君:여동생) 야물(冶勿)을 낳았다. 水午二月公主生妹君冶勿

목호(木虎:갑인) 정월, 각간(角干)은 육군두상(六軍頭上)이므로 공주 또한 융복(戎服)을 갖춰 입고서 말을 타고 장사(將士)들의 조례(朝禮)를 받았다. 성자(聖子) 역시 말에 타고자하므로 공주가 이에 품에 안고서 말에 올랐는데 비록 내달려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주가 검극(釰戟)의 장사(將士)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무섭지 않느냐?”하자 성자가 말했다.
“모두 내 신하입니다. 무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광명후(光明后)가 듣고는 그 말을 장하게 여겨 말했다.
“내 딸 도류(道留)로 가히 처(妻)를 삼을 수 있겠다.”  
木虎正月角干六軍頭上公主亦具戎服騎馬受將士朝禮聖子亦欲騎馬公主乃抱而上馬雖馳而無懼色公主指釰戟將士曰彼不懼乎聖子皆吾臣也何懼之有光明后聞之壯其言曰吾女道留可以妻之

3월, 처음으로 시조묘(祖廟)에 참배하고 (유례) 닛금(尼今)을 배알하였다. 광명후(光明后)가 이에 도류공주(道留公主)의 궁(宮)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차리고 성자(聖子)에게 녹색인끈(綠綬)과 비색(붉은색)의복(緋衣)을 하사했다.
三月始謁朝廟及尼今光明后乃召于道留公主宮置宴賜聖子綠綬緋衣

청토(靑兎:을묘) 3월, (유례) 닛금(尼今)이 (성자에게) 골품(骨品)과 작위(爵位)를 내리고 호림(好臨) 아찬(阿湌)에게 도(道)를 닦을 것을 명하자 성자(聖子)가 말했다.
“원컨대 선제(仙帝)의 도(道)를 배우고 싶습니다.”
靑兎三月尼今賜骨品爵位命修道于好臨阿湌聖子曰願學仙帝道

6월, 각간과 공주는 성자(聖子)와 야물(冶勿)을 데리고 소문(召文)에 들어갔다. 六月角干公主與聖子冶勿入召文

화룡(火龍:병진) 7월, 공주가 제군(弟君) 소물(小勿)을 낳았다.火龍七月公主生弟君小勿

적사(赤蛇:정사) 3월, 선제(仙帝)가 성자에게 띠(帶)와 칼(刀)을 하사했다. 赤蛇三月仙帝賜聖子帶及刀

5월, 광명후(光明后)가 도류공주(道留公主)와 더불어 (공주의) 저택(宅)에 행차하였다. 성자(聖子)가 그 먹을 것을 도류(道留)에게 양보하며 “내 처에게 주겠다.”라고 하니 후(后)는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것을 함께 먹도록 명했다.
五月光明后與道留來幸于宅聖子以其食讓于道留曰可與吾妻后奇其言命共食之

8월, 공주가 도류공주(道留公主)에게 비단옷(錦衣)을 바치자 광명후(光明后) 역시 성자(聖子)에게 목마(木馬)를 보내서 한가위(嘉俳)에 적승(赤繩)을 행하였다.
八月公主以錦衣獻道留公主光明后亦以木馬贈聖子行赤繩于嘉俳  
※적승(赤繩) :부부의 인연을 맺는 일

황마(黃馬:무오) 2월, (성자가) 선제(仙帝)를 모시고 화림(花林)에서 제사를 받드니 선제(仙帝)가 그를 크게 칭찬하여 말했다.
“진퇴(進退)는 그 절도(節)를 얻었고 전천(奠薦)은 그 법도(儀)에 부합하니 짐은 손자(孫)를 가졌노라.”
이에 부공(父公) 말구각간(末仇角干)에게 검(釰)을 배우도록 명하니 성자(聖子)가 말했다.
“원컨대 활인검(活人釰)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공(父公)이 말했다.
“성인(聖人)은 광명(光)을 쓰며, 양장(良將)은 위엄(威)을 쓰며, 범부(常夫)는 칼날(刃)을 쓴다. 우리 아이가 광명(光)을 쓴다면 가히 상제(上帝)를 제사하여서 만민(萬民)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黃馬二月陪仙帝奉祀花林仙帝大贊之曰進退得其節奠薦合其儀朕有孫也乃命學釰于父公末仇角干聖子曰願學活人釰父公曰聖人用光良將用威常夫用刃吾兒用光則可以祀上帝而理萬民

말구각간(末仇角干)이 병질 때문에 집안(家)을 대서지공(大西知公)에게 맡겼다. 성자(聖子)는 모주(母主)와 함께 영묘(靈廟)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도 없이 (말구각간이) 훙(薨)하였다. 성자는 목놓아 울며 지극히 슬퍼하였다. 이에 앞서 호림공(好臨公)은 말구각간(末仇角干)의 병관(兵官)으로써 공주와 더불어 사사로이 좋아(悅)했는데 이에 이르러 공주가 호림공(好臨公)을 계부(繼夫)로 삼고 싶어 하자 선제(仙帝)가 그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올리니 대서지공(大西知公)이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했다.
“형수(嫂)는 마땅히 내 처가 되어야하나 젊고 잘생긴 것(小艾)을 좋아하여 의(義)와 신(信)을 등졌다.”  
성자가 이에 (공주에게) 간하여 말했다.
“숙부라면 내가 아버지로 삼을 수 있지만 병관이라면 안됩니다.”
공주가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미의 남편인 바가 곧 네 아버지이다. 어찌 병관(兵官)이라 말하느냐? 아버지로 불러야 할 것이다.”
末仇角干以疾委家于大西公聖子與母主禱于靈廟不效而薨聖子號泣盡痛先是好臨公以末仇角干兵官與公主私悅至是公主欲以好臨公爲繼夫仙帝許之乃吉于鮑祠大西公不悅曰嫂當爲吾妻而好少艾負義信也聖子乃諫曰叔父則吾可以爲父兵官則不可公主撫之曰母之所夫卽汝父也
何言兵官可呼以父也

[말구공(末仇公)의 장자 동구(冬九)와 성구(城九)등이 거짓으로 유명(遺命)이라 칭하며 공주를 처로 삼고자 했으나 공주가 듣지 않자 동구(冬九)등이 강제로 음행을 하였다. 공주가 울며 ■■에게 호소하니 선제(仙帝)가 이에 동구(冬九)를 유배시키고 호림(好臨)에게 시집가도록 명했다. 末仇公長子冬九城九等假稱遺命欲妻公主公主不聽冬九等强陰之公主泣訴于■■仙帝乃流冬九而命歸好臨也]   []안은 원문의 세주(細註). <아달라기>에 의하면 판독이 안되는 글자 ■■은 호림(好臨)으로 확인됨.

5월, 광명후(光明后)가 성자를 도류궁(道留宮)으로 불러 마제(馬祭)를 행하고 그대로 궁중(宮中)에 머물도록 명했다. 당시 휴례공주(休禮公主)가 새 남편 호림공(好臨公)과 정분이 좋으므로 성자(聖子)의 간하는 말을 꺼리어 후(后)에게 청탁한 것이다. 성자(聖子)는 9세이고 도류(道留)는 7세였는데 서로 정의(情意)가 들어맞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광명후가 그를 사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어린 봉황(鳳凰)들이 심히 사랑스럽도다!”
옹판(雍判)이 태어나기에 이르자 성자(聖子) 또한 후(后)의 젖(乳)을 마셨다.
五月光明后召聖子于道留宮行馬祭仍命留于宮中時休禮公主與新夫好臨公情好忌聖子諫言而請於后也聖子九歲而道留七歲情意相得不欲相離光明后愛之曰雛鳳凰甚可愛及雍判生聖子亦飮后乳

토양(土羊:기미) 5월, 휴례공주(休禮公主)가 호림공(好臨公)의 아들 호물(好勿)을 낳았다. 성자(聖子)에게 보일 생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맞아오게 하니 (광명)후(后)는 도류(道留)와 함께 가서 뵙도록 명하였다. 공주가 마침내 성자를 안고서 울음을 터뜨리자 성자가 말했다.
“내가 호물(好勿)을 사랑하니 다시는 병관을 시샘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머무르겠습니다.”
공주는 기뻐하며 “에미가 병관을 아끼는 것은 네가 도류공주(道留主)를 아낌과 같은 것이다.”하니 성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로부터 자주 (궁을) 나가 어머니를 뵈었다.
土羊五月休禮公主生好臨公子好勿思見聖子使人迎之后命與道留覲之公主乃抱聖子而泣聖子曰吾愛好勿不復妬兵官與母宿也公主喜曰母愛兵官如汝愛道留主也聖子頷之自是累出覲母

6월, 예생궁(禮生宮)이 대서공(大西公)의 아들 마아(馬兒:실성)를 낳았다. 六月禮生宮生大西公子馬兒

백원(白猿:경신) 3월, 선제(仙帝)가 성자(聖子)에게 보라색 허리띠(紫帶)와 홍문신의(紅紋神衣)를 하사하고, 도류(道留)에게는 푸른색 허리띠(碧帶)와 청령신의(蜻蛉神衣)를 내리고 시조묘(祖廟)와 닛금(尼今)을 배알하도록 명했다. (유례) 닛금(尼今)께서는 이에 작록을 더하고 새로 도류궁(道留宮)을 세우도록 하여 광명후(光明后)에게 예속해 두고 아직은 어리므로 신궁(新宮)을 허용하지 말도록 했다.
당시 대서공(大西公)은 이벌찬(伊伐湌)이었다.
白猿三月仙帝賜紫帶紅紋神衣于聖子碧帶蜻蛉神衣于道留命謁祖廟及尼今尼今乃加爵祿新建道留宮置其隸屬光明后以其尙幼勿許新宮時大西公伊伐湌

8월, 광명후(光明后)가 보반공주(保反公主)를 낳았다. 八月光明后生保反公主

대서공(大西公)의 비(妃)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총애를 얻어 입궁하자 휴례공주(休禮公主)는 그 홀로 기거함을 딱하게 여기고 대서공댁(大西公宅)에 가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호림공(好臨公)이 이를 알고 화를 내자 대서공(大西公)이 말했다.
“형수(嫂)가 아우의 처가 되는데 누가 감히 말하는가?”
닛금(尼今)이 이를 듣고 “대서(大西)가 옳다”하였다.
대서공(大西公)이 이에 길례를 치르려하자 휴례(休禮)는 차마 호림(好臨)을 버리지 못하고 격일(間日)로 양쪽에 몸을 두었다.
때에 성자(聖子)는 도류(道留)와 더불어 닛금(尼今)에게 노래를 배웠는데 닛금(尼今)이 그를 위하여 노래하였다.
“거북이가 바다에 머무르나 그 굴은 산에 있노라(有龜住海其穴在山)”
성자(聖子)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생(禮生)이 웃으며 말했다.
“등에 삼신산(三神山)을 지고 발로 팔해(八海)를 차는 까닭이다.”
닛금(尼今)이 말하기를 “또 다른 뜻이 있다.”하니 예생(禮生)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휴례(休禮)가 나 때문에 양쪽으로 어려운데 너(汝)가 어찌 그를 조롱하는가?”
성자(聖子)가 마침내 이해하고 어머니를 대서지(大西知)에게 가도록 청하였다.
大西公妃禮生宮得尼今寵入宮休禮公主憐其獨居詣大西公宅私通好臨公知之怒大西公曰嫂爲弟妻誰敢言乎尼今聞之曰大西是也大西公乃欲行吉而休禮不忍棄好臨間日 而兩處時聖子與道留學歌于尼今尼今爲之歌曰有龜住海其穴在山聖子不解其意禮生笑曰背三神山而足蹴八海故也尼今曰又有別意禮生止之曰休禮以我之故兩難汝何嘲 之聖子乃解請以母歸大西知

금계(金鷄:신유) 정월, 휴례공주(休禮公主)가 성자(聖子)를 좇아서 대서공(大西公)에게 개가할 것을 청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니 닛금(尼今)이 예생(禮生)과 함께 그를 주재하였다.
대서공(大西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이 되었다.
金鷄正月休禮公主從聖子請改嫁大西公行吉鮑祠尼今與禮生主之大西公六軍頭上

3월, 닛금(尼今)이 대서택(大西宅)에 행차하여 연회하고 마셨다. 휴례공주가 노래를 받들어 올리고 총행(幸)을 받았다. 닛금(尼今)이 이로부터 자주 행차(幸)하니 휴례(休禮)를 봉하여 궁주(宮主)로 삼고 용택(用宅)과 노비(奴婢)를 더하였다.
三月尼今幸大西宅宴飮休禮公主奉歌受幸尼今自是累幸封休禮爲宮主加田宅奴婢

7월, 접황궁(蝶凰宮)이 부군(副君)의 딸 윤황(潤凰)을 낳으니 성자(聖子)가 노래를 바쳐올렸다. 七月蝶凰宮生副君女潤凰聖子奉歌

10월, 백해궁(白海宮)이 닛금(尼今)의 아들 도령(道寧)을 낳으니 휴례궁(休禮宮)이 들어가 닛금(尼今)에게 하례했다. 十月白海宮生尼今子道寧休禮宮入賀尼今

수구(水狗:임술) 4월, 도류궁(道留宮)이 낙성되자 그리 옮겨서 거처하였다. 水狗四月道留宮成移居之

5월, (성자가) 도류궁(道留宮)과 더불어 도산(桃山)에서 길례(吉)를 치렀다. 五月與道留宮行吉桃山

6월, 광명후(光明后)와 더불어 신림(新林)의 신지(神池)에서 목욕하니 후(后)가 말했다.
“네 나이 열셋으로 능히 짐의 몸을 씻으니 오래지않아 가히 행상수조(行祥受祚)할 것이다. 코가 우뚝(隆準)하고 봉황의 모습(鳳皃)이면서 제(帝)가 아니었던 자는 아직 없었노라.”
六月與光明后浴于新林神池后曰汝年十三能洗朕躬不久可以行祥受祚隆準鳳皃而不帝者未有

9월, 광명후(光明后)가 내류공주(內留公主)를 낳았다. 九月光明后生內留公主

10월, 선제(仙帝)가 붕(崩)했다. 十月仙帝崩

11월, 광명후(光明后)가 닛금(尼今)과 더불어 상례(祥)를 행하였다. 十一月光明后與尼今行祥
※행상(行祥) : 대상(大祥) 소상(小祥)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함인 듯.

흑시(黑豕:계해) 정월, 달례태후(達禮太后)를 도산주(桃山主)로 삼았다. 黑豕正月達禮太后爲桃山主

2월, 닛금(尼今)이 광명후(光明后)와 더불어 시조묘(祖廟)에 제사하였다. 휴례궁주(休禮宮主)가 대서공(大西公)의 아들 대물(大勿)을 낳았다. 二月尼今與光明后祀祖廟休禮宮主生大西公子大勿

3월, 비로소 궁술과 기마를 배웠다.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딸 길막(吉莫)을 낳았다. 三月始學弓馬禮生宮生尼今女吉莫

4월, 군신(群臣)들이 광명후(光明后)를 존숭하여 신후(神后)로 삼았다. 四月群神尊光明后爲神后

달준(達準)이 호림(好臨)의 아들 서금(西今)을 낳았다. 達準生好臨子西今

청서(靑鼠:갑자) 3월, 모궁(母宮)과 더불어 성모(聖母)를 참배하고 부공(父公)의 복을 빌었다. 靑鼠三月與母宮謁聖母福父公

4월, 막희(莫姬)가 부군(副君)의 아들 나기(奈己)를 낳았다. 四月莫姬生副君子奈己

10월, 신후(神后)가 닛금(尼今)의 딸 기탄(其炭)을 낳았다. 十月神后生尼今女其炭

12월, 부군(副君) 기림(基臨)이 선양을 받았다. 十二月副君基臨受禪

대서공(大西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을 장흔공(長昕公)에게 양보해 넘기며 말했다.
“병권은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나 그대는 가히 할 수 있다.”
장흔공(長昕公)이 말했다.
“대임(大任)은 선양으로 해결(禪解)해서는 안됩니다.”
大西公以六軍頭上讓于長昕公曰兵權不可與人汝可爲之長昕公曰大任不可以禪解不受

※<아달라기>에는 위의 기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흔(長昕)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삼았다. 대서지공이 장차 사임하고자한 까닭에 장흔에게 양보하여 말하기를 “병권은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나 너는 가히 할 수 있다.”하니 장흔이 말하기를 “대임은 선양으로 해결(禪解)해선 안됩니다.”하고 받지 않았다. 후(后)가 그를 듣고 장흔(長昕)의 공변(公)됨을 알고 그대로 그에게 제수했다. 의복과 주식을 장흔의 어머니 유모궁주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숙모는 두 아들을 가져 고굉(股肱)이 된 고로 그를 경하(壽)함입니다.”하였다.以長昕爲六軍頭上 大西知將欲致仕 故讓于長昕 曰 “兵權不可與人 汝可爲之” 長昕曰 “大任不可 禪解” 而不受 后問之 知長昕之公 仍受之 賜衣酒于長昕母乳帽宮主 曰 “叔母有二子爲股肱” 故壽之』


청우(靑牛:을축) 정월, 장흔공(長昕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이 되었다. 닛금(尼今)이 유모궁주(乳帽宮主)를 축수하였는데 때에 나이 89세였으나 오히려 강녕(康寧)하였다.
靑牛正月長盺公六軍頭上尼今壽乳帽宮主時年八十九而尙康寧

3월, 도류공주(道留公主)가 두을궁(豆乙宮)에서 강복(絳服?)하였다. 三月道留公主絳服于豆乙宮  
※강복(絳服) : 진홍색 복장을 입다?

매군(妹君) 초물(初勿)이 태어났다.妹君初勿生

5월, 비(妃) 도류(道留)와 더불어 문천택(蚊川宅)에 들어갔다. 五月與妃道留入蚊川宅

화호(火虎:병인) 5월, 다시 문천택(蚊川宅)에 들어가 구도(狗徒)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火虎五月復入蚊川宅宴狗徒

10월, 신후(神后)가 딸 동탄(東炭)을 낳았다. 달준(達準)이 호림(好臨)의 딸 서림(西林)을 낳았다. 十月神后生女束炭達隼生好臨女西林

적토(赤兎:정묘) 정월, 성자(聖子)는 꿈에 붉은토끼(赤兎)와 흰토끼(白兎)가 합쳐져 하나의 큰 백양(一大白羊)이 되는 것을 보고 모궁(母宮)에게 물으니 모궁(母宮)이 말했다.
“흰토끼(白兎)는 나다. 조짐이 나에게 있으니 마땅히 백양(白羊)의 해(年)에 발흥하리라.”
이에 토제(兎祭)를 지냈다.
다시 달례태후(達禮太后)에게 묻자 후(后)가 말했다.
“조짐이 백년의 뒤(百年之后)에 있다”
赤兎正月聖子夢見赤白兎合爲一大白羊問于母宮母宮曰白兎我也兆在我當發於白羊之年乃行兎祭又問於達禮太后后曰兆在百年之后

2월, 선대 닛금(先今) 유례(儒禮)가 붕하였다. 二月先今儒禮崩

3월, 작위가 아찬(阿湌)으로 진급되었다. 三月進爵阿久

4월, 호림공(好臨公)이 졸(卒)하였다. 모궁(母宮)이 슬피 울며 말했다.
“좋은 남편이 나를 생각하고 나를 보고 싶어도 와서 볼 수 없었으니 내가 그 죄로다.”  
이에 공(公)의 조각상(象)에 제사하니 닛금(尼今)이 그를 위로하였다. 호림공(公)은 닛금(尼今)의 포제(胞弟)로서 나이 35세였다.
四月好臨公卒母宮悲泣曰好夫思我而欲見我不能往見吾其罪乃祭公象尼今慰之公尼今之胞弟年才三十五

9월,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부여태자(夫余太子) 길수(吉須)의 처(妻)로 하였다. 九月以康世女千康妻夫余太子吉須

황룡(黃龍:무진) 2월, 부여(夫余)가 말을 바쳤다. 黃龍二月夫余獻馬

7월, 제군(弟君) 용물(龍勿)이 태어났다. 七月弟君龍勿生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아들 방기(房期)를 낳았다. 禮生宮生尼今子房期

9월, 유모궁주(乳帽宮主)가 훙(薨)하였으니 나해제(奈解帝)의 딸이었다. 모궁(母宮)이 말했다.
“옥모태후(玉帽太后)이다. 계도(鷄徒)의 주(主)가 되어 무릇 30년이니 대서공(大西公)의 어머니이다.”
九月乳帽宮主薨奈解帝女也母宮曰玉帽太后也爲鷄徒主凡三十年大西公之母也

※나해기(奈解紀)에 의하면 유모(乳帽)는 옥모(玉帽)의 딸로 확인이 됩니다. 따라서 원문의 ‘玉帽太后也(옥모태후다)’라는 문구는 ‘玉帽太后女也(옥모태후의 딸이다)’라고 해야 문맥이 통합니다. 아마도 남당선생이 전사하던 도중에 실수로 ‘玉帽太后女也’의 ‘女’자 하나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토사(土蛇:기사) 2월, 신후(神后)가 닛금(尼今)의 딸 근단(斤丹)을 낳았다. 土蛇二月神后生尼今女斤丹

7월, 성자(聖子)가 신후(神后)를 받들어 문천(蚊川)에서 목욕하였다. 달준(達隼)이 한문(旱門)의 아들 준문(隼門)을 낳았다. 七月聖子奉神后欲于蚊川 達隼生旱門子隼門

금마(金馬:경오) 2월, 도류(道留)가 딸 혜리(惠利)를 낳았다. 金馬二月道留生女惠利

5월, 부군(副君) 흘해(訖解)가 선양을 받았다. 五月副君訖解受禪
모궁(母宮)과 더불어 문천(蚊川)에서 노닐었다. 與母宮遊蚊川

백양(白羊:신미) 2월, 모궁(母宮)이 아들 원물(元勿)을 낳았다. 白羊二月母宮生子元勿
신후(神后)가 딸 석단(昔丹)을 낳았다. 神后生女昔丹

8월, 달례태후(達禮太后)가 도산(桃山)에서 붕(崩)하니 백해공주(白海公主)가 그를 대신하였다. 달례후(達禮后)는 무도(巫禱)와 예지(預知)와 음양(陰陽)과 오운(五運)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神)으로 여겨 말하기를 “월내(月嬭)는 신경(神經)을 가졌다”라고 하였다. 춘추 69세였다.
八月達禮太后崩于桃山白海公主代之達禮后善於巫禱預知陰陽五運時人神之曰月嬭有神經春秋六十九

10월, 고구려(麗)의 사유(斯由)가 부여(夫余)와 더불어 싸우다 죽으니 아들 구부(丘夫)가 즉위했다. 十月麗斯由與夫余戰死子丘夫立

수원(水猿:임신) 6월, 기림제(基臨帝)가 붕(崩)하니 춘추가 43세였다. 제(帝)는 (광명)신후(神后)의 포제(胞弟)이고 아버지는 걸숙각간(乞淑角干)이었다. 인자(仁慈)하고 사물을 아꼈으며(愛物) 가사(歌詞)를 잘 하였다. 포제(胞弟)인 호림공(好臨公)이 졸(卒)하자 그를 슬퍼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며 노래를 지어서 그를 애도하였다. 신후(神后)가 그를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마침내 선양하고 자성(性)을 기르다가 우화(羽化)하였다.
水袁六月基臨帝崩春秋四十三帝神后胞弟也父曰乞淑角干仁慈愛物善歌詞胞弟好臨公卒哀之不食肉作歌而悼之神后止之而不聽遂禪而養性羽化

도류(道留)가 아들 곽이(霍伊)를 낳았다. 道留生子霍伊

11월, 예생궁(禮生宮)이 성자(聖子)의 딸 상기(桑期)를 낳았다. 十一月禮生宮生聖子女桑期

흑계(黑鷄:계유) 5월, 보반공주(保反公主)가 강복(絳服)하고 불을 잡았다(執火). 이날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도로위에서 비늘이 펄떡거리니 아동들이 다투어 취해서 먹었는데 큰 것은 한 자 정도 되었다.
黑鷄五月保反公主絳服執火是日京都雨魚道路躍鱗兒童爭取而食大者盈尺

목구(木狗:갑술) 수월(首月:정월?), 도류(道留)가 아들 장외(長畏)를 낳았다. 신후(神后)가 제(帝)의 딸 방단(方丹)을 낳았다. 木狗首月道留生子長畏神后生帝女方丹

7월, 모궁(母宮)이 딸 계물(癸勿)을 낳았다.七月母宮生女癸勿

목시(木豕:을해) 2월, 신후(神后)가 성자(聖子)로 부군(副君)을 삼았다. 木豕二月神后以聖子爲副君

옹판(雍判)이 닛금(尼今)의 아들 옹기(雍己)를 낳았다. 雍判生尼今子雍己

3월, 내류공주(內留公主)가 강복(絳服)하고 불을 잡았다(執火). 三月內留公主絳服執火

4월. 예생궁(禮生宮)이 제(帝)의 아들 하기(河期)를 낳았다. 四月禮生宮生帝子河期

11월, 근초고(近肖古)가 죽(殂)고 근수(謹須)가 섰다. 발해(發亥)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十一月近肖古殂謹須立遣發亥吊之
※근수(謹須) : 앞서 적토 9월조에 나온 부여태자(夫余太子) 길수(吉須)와 동일인인 듯. 〈삼국사기〉에는 근구수(近仇首) 또는 수(須).〈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근귀수(近貴首).〈속일본기 續日本紀〉에는 구소(久素). 귀류(貴流←貴梳?) 등으로 표기됨.

화서(火鼠:병자376/316) 정월, 닛금(尼今)이 질환이 있어 (광명)후(后)가 부군(副君)과 함께 조례를 받았다. 火鼠正月尼今有疾后與副君受朝

5월 도류비(道留妃)가 산고로 인하여 훙(薨)하였다. 후(后)는 보반궁(保反宮)을 계비(繼妃)로 삼도록 명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올렸다. 도류궁(道留宮)을 혜리택(惠利宅)으로 삼고 새로 보반궁(保反宮)을 세웠다.
五月道留妃固産而薨后命保反宮爲繼妃行吉鮑祠道留宮爲惠利宅新建保反宮

9월, 신후(神后)가 부군(副君)과 더불어 남교(南郊)에서 농작을 품평하고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돌아왔다. 때에 후(后)는 이미 부군(副君)의 아이(子)를 임신하고 있어서 부군을 아낌이 배로 깊었다. 유차(帷車:휘장을 친 수레)에서 노래하여 이르되 “하늘은 나이를 가지고 나는 아이를 가지네!”라고 하였다.
九月神后與副君品稼南郊宴父老而還時后已娠副君子愛副君倍甚歌于帷車曰天有年兮吾有子

11월, 신후(神后)가 부군(副君)의 아들 호동(好童)을 낳으니 부군(副君)이 그를 씻겼다. 十一月神后生副君子好童副君洗之

적우(赤牛:정축) 정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조례를 받았다. 赤牛正月神后副君受朝

4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비로 막혀 도산(桃山)에 체류했는데 집서(執書) 화종(華宗)등이 힘주어 말하였다,
“재이(災異)가 거듭해서 일어나니 선정(善政)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닛금(尼今)이 이에 뜻을 결정하고 선양을 거행하였다.
四月神后與副君滯于於桃山執書華宗等力言災異重出不可無善政尼今乃決意行禪

예생(禮生)이 대서지(大西知)의 딸 당기(唐期)를 낳았다. 禮生生大西知女唐期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行大場

3년[기묘] 정월, 황토제(黃兎祭)를 행하였다. 三年正月行黃兎祭

패골(貝骨)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광현(光玄)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광현(光玄)은 흘해(訖解)의 딸이며 어머니는 광원(光元)이다. 선궁(仙宮)을 위로하고자 해서 그를 점지한 것이다. 貝骨伊伐湌光玄稟主玄訖解女也母光元也欲爲仙宮而点之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초리(初利)를 낳았다. 保反生帝女初利

공태(公兌)와 홀명(忽明)을 부여(夫余)에 사신으로 보냈다. 公兌忽明使夫余

4월, 왜병(倭兵)이 크게 밀어닥치자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허수아비(草偶) 수천개를 만들어 세우고 용사(勇士) 1천명을 부현(斧峴) 동원(東原)에 매복시켰다. 왜병이 과연 계략에 걸려들어 크게 패퇴하자 추격하여 그를 남김없이 사로잡았다.
四月倭兵大至造草偶數千于吐含山下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倭果中計大敗追擊盡獲之

5월, 북천(北川)에서 궁마(弓馬)를 크게 사열하였다. 五月大閱弓馬于北川

기탄(其炭)을 포제(胞弟) 호물(好勿)의 처로 하였다. 以其炭妻胞弟好勿

미사품(未斯品)을 행군두상(行軍頭上)으로 삼고, 삼생(三生)을 호군두상(護軍頭上)으로, 마아(馬兒)를 행군주부(行軍主簿)로 삼았다. 未斯品行軍頭上三生護軍頭上馬兒行軍主簿

7월, 유두(乳斗)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취선(翠宣)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乳斗伊伐湌翠宣稟主

진(秦)사람 부량(符良)등 7인이 표류하여 도착했다. 秦人符良等七人漂至

8월, 가배(嘉俳:한가위)를 행하였다. 八月行嘉俳

4년[경진] 정월, 백룡제(白龍祭)를 행하였다. 四年正月行白龍祭

벽불(碧彿)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촌씨(村氏)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碧狒伊伐湌村氏稟主

3월, 부여(夫余)가 입공(入貢)하였다. 三月夫余入貢

등보(登保) 각간(角干)이 졸(卒)하였다. 登保角干卒

4월, 큰 물이 나서 산이 무너진 것이 13곳이었다. 四月大水山崩十三所

말구각간(末仇角干)을 추존하여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삼고 말흔각간(末昕角干)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화림(花林)및 월내(月嬭)의 여러 묘(廟)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尊末仇角干爲世神葛文王末昕角干亦如之親祀花林及月嬭諸廟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딸 사류(舍留)를 낳았다. 內留生馬兒女舍留

태성(太聖)이 해궁(海宮)에서 딸 준물(俊勿)을 낳았다. 太聖生女俊勿于海宮

백성중에 무예가 특출하고 협력(脅力)이 남보다 뛰어나며 특이한 기술을 가진 자와 숙련된 기술자(異技熟工)들을 선발하여 병관(兵官)에 소속시켰다. 천거하여 끌어내거나(薦引) 발고(發告)하여 알리는 자에게도 역시 상을 내렸다.
選民武藝特出脅力過人異技熟工者屬于兵官薦引發告者亦有賞賜

가야(加耶)의 모가(慕訶)가 그 서매(庶妹) 사씨(思氏)를 바쳤다. 加耶慕訶獻其庶妹思氏

6월, 토무(土武)를 설치해서 부곡(部曲)과 주군(州郡)의 무사(武士)들을 관장하게 했다. 六月置土武典部曲州郡武士

7월, 보리가 풍작이어서 3년치의 곡식(三年穀)을 얻으매 백성들이 그를 많이 내버리자 관름(官廩)에 거둬들이도록 명했다. 七月豊麥得三年穀民多棄之命收官廩

보색(寶色)을 이벌찬(伊伐湌)으로 물인(勿仁)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宝色伊伐湌勿仁稟主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九月行大場

10월, 고구려 사신 방부류(方夫流)가 왔는데 심히 무례하였다. 삼생(三生)이 그를 죽이고자 했으나 제(帝)가 그를 만류하고 후하게 대우해서 보냈다. 부류(夫流)가 돌아가서 계림(鷄林)에 임금(君)이 있음을 고하였다.
十月麗使方夫流至甚無禮三生欲殺之帝止之厚遇而送之夫流歸告鷄林有君

5년[신사] 정월, 금사제(金蛇祭)를 행하였다. 五年正月行金蛇祭

연해(連解)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운해(雲海)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連解伊伐湌雲海稟主

3월 부여(夫余)가 양마(良馬) 한쌍을 바쳤다. 三月夫余獻良馬一雙

봄,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春夏旱

7월, 등억(登檍)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선운(仙雲)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登檍伊伐湌仙雲稟主

옹판(雍判)이 딸 융기(融己)를 낳았다. 雍判生女融己

11월, 신후(神后)가 제(帝)의 딸 성단(成丹)을 낳았다. 十一月神后生帝女成丹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므로 사자를 파견해서 창름(倉廩)을 열고 그를 구휼하였다. 年荒民飢流亡發使開倉廩賑之

6년[임오382/322] 정월, 현마제(玄馬祭)를 행하였다. 六年正月行玄馬祭

지공(芝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두화(兜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芝公伊伐湌兜花稟主

태공(太公) 대서지(大西知)가 훙하니 나이 68세였다. 말흔왕(末昕王)의 서자(庶子)이고 어머니는 유모궁주(乳帽宮主)라 한다. 말구공(末仇公)이 그를 포제(胞弟)처럼 아껴서 가보(家寶)를 위임했는데 공(公)은 스스로 취하지 않고 모두 간수했다가 제(帝)에게 돌려주었다. 태성(太聖)을 마치 임금처럼 섬겨서 사사로운 행차(私幸)가 많아도 일찌기 질투한 일이 없었다. 태성(太聖)이 슬피 울며 “세상에 어찌 우리 남편 같은 자가 있겠는가? 원컨대 따라죽어서 그 마음에 보답하리라.”하니 제(帝)가 그를 만류하고 왕례(王禮)로써 장사지냈다.
太公大西知薨年六十八末昕王之庶子也母曰乳帽宮主末仇公愛之如胞弟委以家宝公不自取皆守而歸于帝事太聖如君多私幸而未嘗妬太聖悲泣曰世豈有如我夫者乎願殉而報心帝止之葬以王禮

장흔(長昕)을 태공(太公)으로 하였다. 長昕太公

지공(芝公)이 병으로 사임하니 한문(旱門)으로 그를 대신하였다. 芝公病免旱門代之

달준(達準)을 품주(稟主)로 하고 화종(華宗)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達隼稟主華宗六軍頭上

설화(雪花)가 삼생(三生)의 아들 사람(沙覽)을 낳았다. 雲花生三生子沙覽

2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도리(都利)를 낳았다. 二月保反生帝女都利

왜(倭)와 화친하여 호시(互市)를 열고 교혼(交婚)하였는데 그 나라를 야(野)라고 칭했다. 與倭和親互市交婚稱其國曰野

5월 마아(馬兒)를 위두(衛頭)로 삼았다. 五月以馬兒爲衛頭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京都雨魚

부여(夫余)의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이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자 육부(六部)에 거주하도록 명했다. 부여(夫余)가 그를 송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七月夫余禿山城主布隆率三百人來降命居六部夫余請還之不許

홀명(忽明)을 이벌찬(伊伐湌)으로 하고 유운(乳雲)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忽明伊伐湌乳雲稟主

8월, 제(帝)가 신후(神后)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해궁(海宮)에서 가배(嘉俳)를 행했다.
八月帝與神后入海宮行嘉俳于海宮

10월,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아들 가류(可留)를 낳았다. 十月內留生馬兒子可留



정성일 (2009-02-23 10:25:21)  
유모(乳帽)와 옥모(玉帽)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두분은 모녀관계로, 유모(乳帽)는 옥모(玉帽)와 내해의 딸입니다.
두메 (2009-02-23 18:10:40)  
정성일님/
지적 감사합니다.
乳帽 玉帽로 게시판을 검색해보니 나해기(奈解紀)에 "玉帽生帝女乳帽(옥모가 제의 딸 유모를 낳았다)" 라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덕분에 쉽게 찾았습니다.
아마도 위 해당기사 원문의 ‘母宮曰玉帽太后也’는 원래 ‘母宮曰玉帽太后女也’였는데 남당선생이 전사 도중에 실수로 ‘女’ 한 글자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각주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두메 (2009-02-23 21:54:53)  
이선민님/
근구수왕이 둘째아들이라는 것 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이선민님 고견을 읽고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하며 찾아보았는데 해당사항의 확실한 전고가 좀처럼 보이질 않네요.
삼국사기 어느 부분인지 귀띔해주시면 확인해서 참고토록 하겠습니다.
이선민 (2009-02-24 15:24:50)  
두메님/
문제가 될 것 같아 지웠다가 다시금 http://www.samkookji.com/bbs/view.php?id=gunyoung&no=3121 이곳을 찾아 확인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서 나중에 찾아서 올려드리겠습니다.
정성일 (2009-02-25 18:26:15)  
두메님이 저와 같은 공부를 시작하신 듯 하여 반갑습니다.
꼭 제가 맞는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저의 견해를 말하고자 합니다.
일단 한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大西公以六軍頭上讓 于長昕公 曰 "兵權不可與人 汝可爲之" 長昕公曰 :大任不可 以禪解" 不受
대서공(大西公, 대서지)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을 장흔공(長昕公)에게 양위하며 말하기를 “병권은 타인에게 줄 수 없는 것이나 너라면 가히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장흔공(長昕公)이 말하기를 “대임(大任, 여기서는 軍權)은 불가하니 선위(禪位)함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하며 (선위를) 받지 않았다.
《견해》 대서공(大西公, 대서지)과 장흔공(長昕公)은 사사로이 같은 어머니의 형제입니다. 장흔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대서공의 아버지가 말흔(末昕)인데, 장흔공과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친형제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장흔이 병권을 받았는지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3권 아달라기 부분에 자세한 부분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以長昕爲六軍頭上 大西知將欲致仕 故讓于長昕 曰 “兵權不可與人 汝可爲之” 長昕曰 “大任不可 禪解” 而不受 后問之 知長昕之公 仍受之 賜衣酒于長昕母乳帽宮主 曰 “叔母有二子爲股肱” 故壽之
장흔(長昕)을 6군두상으로 삼았다. 대서지(大西知)가 나이가 많아 장차 그만두기를 원하여 장흔에게 넘겨주려하였기 때문이다. 대서지가 말하기를 “병권은 다른 사람에게는 줄 수 없으므로 너에게 내려줌이 옳다”라고 하였다. 장흔이 말하기를 “중대한 임무는 불가하므로, 양위하는 것을 그만 두십시오”라고 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광명후가 그 소식을 듣고 장흔의 공평무사함을 알기 때문에 그대로 받도록 하였다. 광명후가 장흔의 어머니 유모(乳帽)궁주에게 옷과 술을 내리며 말하기를 “숙모는 두 아들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중신)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그런 연유로 장수함을 축하하였다.
정성일 (2009-02-25 18:30:30)  
위의 문장과 아래문장을 비교하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분명 위의 문장에는 잘못된 사실이 없으나, 뒷의 문장을 누락시킴으로 인하여 엉뚱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두메 (2009-02-26 17:08:31)  
정성일님/
새로운 정보와 의견 감사드립니다.
아달라기는 처음 열어봤는데 설마 똑같은 제목의 <나물대성신제기>까지 말미에 붙어있을 정도의 거편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번역의 선후가 뒤바뀌었다는 느낌입니다.
위의 <나물대성신제기>중에 판독이 안되어 ■■ 처리한 세주 부분도 유례니금기에 정확히 好臨이라 나오고 또 훨씬 디테일하게 설명되어 있더군요.
두 기록을 취합하면 좀 더 정확한 번역이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정성일님이 제시한 해석은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大任不可以禪解不受"는 아달라기의 기사를 통해 不受 앞의 끊어 읽기가 확인되므로 大任不可以禪解 부분만 재해석하면 "대임은 선해(禪解)해서는 안됩니다."로 읽히고 좀 더 부연하면 "대임은 선양으로 해결해선 안됩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선양이 가능한데 병권은 선양이 불가한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병권은 신하의 임무이기에 가치관의 적용도 다르다고 봅니다.
병권을 임의로 남에게 넘기는 것이야말로 신하로서 왕권을 무시하고 신민에게 공정을 결하는 행위이기에 장흔은 그것을 지적하여 받지 않은 것이고, 그러한 장흔을 광명후는 위공무사한 인물이라 평가하여 육군두상을 제수한 것이겠죠.
나머지 해석은 추후 본문의 수정과 각주로 대신하겠습니다.
두메 (2009-02-26 17:09:18)  
이선민님/
혹 삼국사기가 아니라 남당문서 내에서 보신 내용은 아닐런지요?
중요한 사항이 아니므로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각주에 근수(謹須)= 길수(吉須)? 라고 한 것은 이두에 대한 제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것뿐입니다. 이두는 ‘或云’ ‘一云’ ‘亦云’등으로 표현되는 이표기의 수집이 관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동명이기나 동음이사로 추정되는 이름을 발견하면 흥분하게 되지요.
앞서 玉帽=乳帽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로 玉帽=乳帽가 맞다면 玉의 고대 신라음(향음)은 ‘乳(nu)'로 해독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개인적 지레짐작이었던 것이죠.
원래 끈기 있고 꾸준한 성격이 못돼서 언제까지 이 작업이 계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후로도 많은 관심과 지도편달 바랍니다.
정성일 (2009-02-26 19:06:48)  
두메님이 해석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점은, 나라의 병권(또는 군권)을 개인끼리 주고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남당유고를 이제 해석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여 끊어읽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권이 구도공이 잡은 이후로 아들 말흔공에게, 다시 말구공에게, 다시 대서지에게, 다시 장흔공에게 이어집니다.
구도와 말흔은 부자사이, 말흔과 말구는 부자사이, 말구공과 대서공은 동부형제, 대서공과 장흔공은 동모형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권력이 군권으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지금 저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 말은 먼저 영화를 본 자가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이어서, 영화를 이제 보려는 분의 흥미를 빼앗는 짓이기에 여기서 그만 두렵니다.
서로간에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해 갔으면 합니다.
정성일 (2009-02-26 19:17:33)  
대서지공과 장흔공의 관계는 동모형제입니다.
대서지와 장흔공은 남이 아닙니다.
어떻게 형제가 남이 아니냐고요.
대서지공은 병권만 물려준 것이 아니라 마누라도 넘겨줍니다.
대서지공의 부인은 내물이사금의 어머니인 휴례부인입니다.
물론 대서지에게 휴례부인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적처의 개념이 있습니다.
내물이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내물의 아버지인 말구공의 재산을 잘 관리하여 다시 내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대서지는 그 공으로 아들 실성이 내물의 다음왕이 된 것으로 보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성이 배반하여 내물의 아들들을 죽이려 하자, 눌지가 군사를 일으켜 실성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신라 역사상 최초로 무력으로 선왕을 쫓아낸 기록입니다.
말구가 죽으면서 대서지공에게 내물의 어머니 휴례부인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나이가 되자 다시 동생인 장흔공에게 물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