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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위화진경(魏華眞經) 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남당유고,남당박창화

금화선자(金華䙴子) 박달옥야(朴達玉耶) 정수개사(淨修開祀)

※금화선자(金華䙴子)의 '䙴'자는 웹상에서 지원이 안되는 글자인데 遷에서 책받침변 辶을 제거한 형태입니다. 遷의 고자(古字)로서 <계림유사>에 보면 “仙人曰遷(선인을 遷이라 한다)”는 구절이 있지요.



풍운(風雲)은 구천(九天)을 나는 수레요, 일월(日月)은 만고(萬古)의 긴 등불이라. 사람과 더불어 함께 호흡하니 풍월(風月)은 운일(雲日)을 뒤쫓아 마중(馳騁)하노라. 옛날 밝고 광대하던 시절에 백마(白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성인(聖人)께서 나라를 세우셨도다. 천신(天神)과 지선(地仙)이 잇달아 일어나 위로는 덕(德)이 흡족(洽)하고 아래로는 낙(樂)이 풍성(腴)하였다. 시절은 화창하고 해마다 풍년이며,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춤추는 옷소매가 산에 가득하고, 기리는 노랫소리가 하늘에 잇닿았다. 다만 박(朴) 석(昔) 김(金)이 한 몸(一體)이 되는 마음 바람(心風)을 전하니 이것이 곧 강(康) 연(燕) 위(魏) 삼대(三代)의 요목(目)이라. 해탈상화(解脫上化)의 묘리(妙)와 둔갑개산(遁甲開山)의 오의(奧)가 여기에 빠짐없이 담겨있어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추니 가히 인내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큰 인연(彝緣)의 보배요 큰 깨달음(大覺)의 보물이니 무릇 우리 낭도(郎徒)들은 마음속에 채워 담아 갖고 놀 것이로다.
風雲九天飛車 日月萬古長燈 與人之道呼吸 風月馳聘雲日 在昔熙昊之世 白馬天降 聖人造邦 天神地仙 相繼而起 德洽于上 樂腴於下 歲和年豊 國泰民安 舞袖遍山 頌歌連天 傳維朴昔金 一體之心 風是康燕魏三代之目 解脫上化之妙 遁甲開山之奧 盡在于此 天秘地藏 可以忍之實 彛緣之寶 大覺之珍 凡我郞徒潛心玩栽

※"康燕魏三代之目"이란 구절은 신라의 '삼대목'과 관련된 언급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드는데...참 난해하고 기이하네요. '康 '자는 자형이 흐릿하여 '唐'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봤는데, 어느쪽으로 판독하던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燕은 다른 자료에서도 심상치않은 문맥으로 간간히 등장합니다만 康과 魏는 무엇이고 과연 신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건지..?


전(傳)에 말한다.
달문대모(達門大母)가 허루(許婁) 갈문왕(葛文)의 아들 허을(許乙)을 낳으니 이가 을공(乙公)이다.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득도하고 굴공(屈公), 길공(吉公)과 더불어 당세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굴공(屈公)은 호랑이를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호도(虎徒)라 했으며 봉황대모(鳳凰大母)를 받들었다.
길공(吉公)은 소를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우도(牛徒)라 했으며 흘고대모(紇古大母)를 받들었다.
을공(乙公)은 백양을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양도(羊徒)라 했으며 금강대모(金剛大母)를 받들었다.
이를 고삼도(古三徒)라 한다.
흑치(黑齒)의 낭도(徒)는 도생대모(道生大母)를 받들어 계도(鷄徒)가 되고, 목아(木我)의 낭도(徒)는 아세대모(阿世大母)를 받들어 구도(狗徒)가 되고, 돌산(突山)의 낭도(徒)는 옥모성모(玉帽聖母)를 받들어 마도(馬徒)가 되니 이를 후삼도後三徒)라 한다.
양도(羊徒)는 또 아혜성모(阿惠聖母)를 받든 적이 있어서 후삼도와 더불어 네벗(四友)이 되었다.
금강(金剛)의 낭도(徒)는 다소 부진하여 오직 성동(城東)과 소문(召文)만을 차지했다.
을공(乙公)의 아들을 산을(山乙)이라하니 이가 산공(山公)이다. 소문(召文)에 나가 지키며 세세로 목단(牧丹)의 딸을 취해서 아들을 낳아 칸(干)을 전했다. 산을의 아들은 우을(牛乙)이고, 우을의 아들은 연을(燕乙)이라하고, 연을의 아들은 윤을(允乙)이라하며, 윤을의 아들은 수을(水乙)이라하고, 수을의 아들은 용을(用乙)이라하니 모두 조상의 풍도를 가져서 능히 옛 도(道)를 전하였다.
때에 아황대모(阿凰大母)가 을공(乙公)을 존봉(尊奉)하였다.
용을(用乙)이 매번 입조할 때마다 아황을 배알하니 (아황은) 자택에 무대(場)를 베풀어 대접하는 빈례가 매우 융숭했다. 택비(宅婢) 분아(粉兒)가 꿈에 백마(白馬)를 보고는 용공을 모셔서 아들을 낳았는데 장대하고 괴걸하였으므로 아황이 그를 장대랑(長大郞)이라 이름하였다. 장성해서는 위문(衛門)에 속했는데 골품이 미천하여 떨치지 못하자 스스로 양도(羊徒)에 투신하여 궁마(弓馬)에 능하고 담력이 있음으로써 무리들에게 추대된바 되었다.
때에 조정은 서북면을 근심하여 용공으로써 장재(將材)를 대신하려 했다. (용공이) 이를 근심하여 마침내 아황을 알현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세록(世祿)이 신(臣)에게서 끊어짐입니다.”
아황이 그를 딱하게 여기고 이에 그 딸 접황(蝶凰)을 불러서 그를 위해 계책을 내게 했다. 접황은 제(帝)에게 총애가 있어 방사(房事)를 오로지 하였으므로 마침내 침석(寢席)하는 기회에 제(帝)에게 고하여 말했다.
“용을(用乙)은 세습의 신하이니 실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들 장대랑은 장재를 갖고 있으니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帝)는 그를 허락하였다.
양도(羊徒)가 이에 소문(召文)을 배필로 함으로써 위엄을 장식하려하자 (소문의) 골노(骨老)들은 장대랑의 골품이 미천함으로 해서 세주(世主)의 배필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주(世主)가 말했다.
“마땅히 이 위급한 시기에는 현인(賢人)이 가장 존귀하니 어찌 골품의 낮음을 묻겠는가? 전 칸(前干)의 아들이요 천제(天帝)의 명령인데 감히 받들지 않을 것인가?”
상로(上老)등이 말했다.
“신(臣)등은 늙었으니 또한 죽어야 합니다. 다만 세주께 보답하기를 원할 따름이오니 만약 세주께서 새 사람이 좋으시다면 감히 딴 말이 있겠습니까?”
이에 10촉(燭)을 밝혀 봉산(逢山)에서 맞이하고 수왕(樹王) 아래서 혼인(婚)하였다. 이 밤에 상서로운 빛이 침상(床)을 감돌았으며 하늘의 음악이 허공을 타고 내려왔다.
혼신(婚臣)이 아뢰기를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하였다.
세주(世主)가 과연 꿈을 꾸었는데 푸른소(靑牛)가 수왕(樹王)의 큰 열매를 입으로 따서 주므로 입으로 받아 삼켰더니 기이한 향내가 뱃속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깨어나서 합환을 치르고 아들을 낳게 되자 배실랑(裵實郞)이라 이름하였다.
(배실랑은) 성품이 호탕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능히 자신을 굽혀서 아랫사람(下士)을 대할 수 있었다.
경화(京華)에 노닐면서 영웅(英雄)과 교제코자 했는데 당시 양도(羊徒)는 저군(猪君)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었다. 저군(猪君)은 분아(粉兒)의 후남편의 소생이다.
장공(長公)이 서울에 있었을 때 딸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양아(羊兒)라 하며 저군(猪君)의 처가 되었고, 둘째는 적아(翟兒)라 하며 세기공(世己公)을 모셨고, 막내는 해아(亥兒)라 하며 홀명공(忽明公)을 모셨다. 분아(粉兒)는 오히려 별 탈 없이 무양(無恙)하였다.
장공(長公)이 이에 활과 말을 주어서 배실랑을 보내고 저군(猪君)의 집에 묵게 했다.
저군은 협의(俠義)를 좋아하고 무리들을 잘 이끌었는데 양아(羊兒) 역시 능히 낭도(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며 또한 현달의 행실(達行)이 있어서 무리들이 저낭(姐娘)이라 칭했다.
성동(城東)의 무품녀(無品女)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으나 홀로 한 선자(奾子)만이 따르지 않고 스스로 백양신(白羊神)이라 칭하며 양아(羊兒)를 황양선(黃羊奾)이라 불렀다. 저군(猪君)이 노하여 욕보이려하자 양아(羊兒)가 말했다.
“내가 듣건대 성인(聖人)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덕(祥德)을 갖는다고 한다. 백양(白羊)의 해에 명활산(明活山)의 검못(神池)이 다시 솟아올랐는데 저이가 바로 그 상서로움을 가졌다. 비록 궁핍(窮)하나 무리에게 재물을 모으지 않으며 이르기를 “에이듯 참을 수 없이 가난해도 스스로 영화롭게 여기는 자는 어질(仁)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시집가기를 권하며 “그대(君)의 아름다움으로 높은 가문에서 섬기면 부귀가 선 채로 오리라.”하니 선자가 말하기를 “도를 생각하되 부귀하게 살 수 있으나 음란할 수 없는 것이 지(智)요, 노소(老小) 미추(美醜)로써 간택하지 않고 그를 즐겁게 함을 허용하는 것이 용(勇)이다”라고 하였다. 인(仁) 지(智)와 또한 용(勇) 덕(德)을 저는 가지고 있으나 나는 못 가졌노라! 그대는 내 남편이 되어서 도(道)로써 나를 가르치지 못하고 도리어 성인(聖人)을 욕하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저군(猪君)이 이에 사과하고 배실랑(裵實郞)으로 하여금 가서 그를 뵙게 하였다.
그 집 문전에 이르자 보리가 어지럽게 쌓여있고 당(堂)에 들어서자 깨진 박(瓢)이 나뒹굴어 난잡하였는데 선자(奾子)는 허리에 짧은 치마를 걸치고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랑(郞)이 절하며 말했다.
“선자(奾子)의 높은 풍도를 듣고서 왔으니 바라건대 덕음(德音)을 베푸소서.”
선자는 미소를 짓고 다리를 들어 (랑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내가 월사(月事)가 있으니 랑(郞)은 기저귀를 갈 것이다.”
랑(郞)은 그 비린내와 더러움을 꺼려하지 않고 그것을 갈아주었다.
선자가 말했다.
“낭군(郞君)이 멀리서 와서 나를 아끼는데 밥이 없을 수 없으니 또한 나와 더불어 보리를 찧겠는가?”
랑(郞)이 응낙하고 뜰로 내려가서 절구를 대하고 평탈(平脫)하였으나 보리가 (채)벗겨지지 않았는데 선자가 짚단 위에 쓰러져 누우며 말했다.
“나는 좋은 남편이 없어서 늘 굶주려 절구질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가 능히 나에게 한 근의 고기를 베풀겠는가?”
랑(郎)이 문을 나와서 푸줏간(肉舖)을 발견하고는 (고기)값을 묻자 모두가 백금(百金) 가격이었으므로 이에 차고 있던 보도(寶刀)를 풀어줌으로써 고기와 바꾸었다. 돌아와 보니 선자가 추하게 생긴 장부(醜丈夫)와 더불어 짚단 위에서 합환하는데 차마 못 볼 광경이었으나 랑(郞)은 예사롭고 심상하게 부엌에 들어가 (고기를) 삶아서 내어갔다. 선자가 추장부와 더불어 고기를 남김없이 먹고는 배가 부르자 똥물(矢水)을 싸서 옷에 뿌리니 냄새(臭氣)도 맡기 어려웠으나 랑(郎)은 태연히 선자를 부축하며 간호했다. 마침내 그 먹은 것을 토하니 타니단수(唾泥胆水)가 완연히 고름즙(膿汁)과도 같았다. 랑(郎)에게 그것을 먹도록 명하자 랑(郎)은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그것을 핥아먹었다. 추장부가 노하여 랑(郎)에게 말하기를
“네가 필시 내 아내와 통정했기에 그 토한 것을 달게 먹는 것이다."
하고는 그를 거꾸로 매달고(倒懸) 힐문하려하자 랑(郎)이 정색하며 말했다.
“군자는 오직 도(道)로써 사귈 뿐이니 어찌 씹(色)을 하리오?”
추장부가 거짓이라 하며 장차 그의 포(脯)를 뜨려고 시퍼런 칼날이 배를 지나갔으나 (낭은)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자(奾子)가 앙천대소하고 추장부는 바람을 따라 쓰러지는데 보니 그것은 곧 한줄기의 수수깡이었다. 랑(郎)이 바야흐로 그 신통함(神)을 알고 제자가 될 것을 청하자 선자가 말하였다.
“신선(神仙)의 도는 오직 양진(養眞)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낭군을 보니 이미 진기(眞氣)가 이루어져 첩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첩이 낭군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이 밤이 마땅하리다.”
마침내 그 진미(珍味)를 차려내어 대접하니 이는 인간 세상에 없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 교칠(膠漆)의 정을 나누고 새벽에 이르러서 깨어보니 선자는 이미 간데없고 다만 빈 베개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따름이었다.
랑(郎)이 황홀하여 망연자실(恍惚自失)하고 있는데 문득 벽을 보니 시(詩) 한 수를 제하여 가로되
風吹天上雨 바람 불어 하늘위의 비를 뿌리니
更作人間雲 다시 인간세상에 구름이 일어나네
散合本無常 모이고 흩어짐이 본래 무상하거니
何時再見君 어느 때나 그대를 다시 보려나.
랑(郎)이 창연(愴然)한 마음으로 돌아가며 어제의 푸줏간(肉鋪)을 보니 곧 하나의 오이시렁(瓜架)이었다. 보도(寶刀)는 오히려 시렁위에 있었고, 똥물을 흩뿌렸던 곳은 모두 자금화(紫金花)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양아(羊兒)가 랑(郞)에게 일러 말했다.
“선자가 너와 얼우(婚)고 떠난 것은 네가 학문에 힘쓰도록 함이다. 경도 안(京中)에 상선(上仙)들이 많으니 너는 가히 취학(就學)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에 세기공(世己公)에게 나아가 수업(受業)하였다.
세기공(公)은 이방(理方)으로써 랑(郞)을 사지(舍知)로 삼았는데 선정(善政)이 있자 차례를 뛰어넘어 대사(大舍)를 제수하고 힘써 형정(刑政)을 보살피게 하였다. 超授大舍務省形政
※6월, 현운(玄雲)에게 명하여 명활산(明活山)에서 백양제(白羊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때에 성동(城東)의 세민(細民:비천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허다히 백양신(白羊神)을 받들었는데 의(義)를 숭상하여 무리(徒)를 지으매 그 수가 심히 많았다. 저군(猪君)을 우두머리로 삼아 성대하게 말(盛言)하기를 “백양신이 강림하여 나라를 지킨다.”하고 다시 “제(帝)는 소이고 후(后)는 양이다(帝牛而后羊?)”하며 집집마다 후(后)의 상(象)을 받들어 조석으로 그를 경배하였다. 후(后)가 (소문을) 듣고 그를 기이하게 여겨 세기(世己)에게 말하였다. “성동(城東)의 양도(羊徒)는 대다수가 곧 빈민(細民)들인데 의(義)로써 서로 격려하여 각기 그 업(業)에 안주하며 짐의 몸(朕躬)에 충성하여 조석으로 상(象)에 절을 하니 비록 여느 선문(仙門)이라 해도 이 무리(輩)에는 미치지 못한다. 너 또한 양도(羊徒)인데 어찌 이 무리(衆)를 돌보아 돕지 않는가?” 세기(世己)가 말했다. “신(臣) 또한 그 (소문)을 듣고 그 우두머리 저군(猪君)이란 자를 불러 의의(義)를 물었는데 자못 선도(仙道)를 알았습니다. 그 어미 분아(粉兒)란 자는 마로(馬◯)의 서자 마아(馬兒)의 딸입니다. 그 골품이 비록 미미하나 이처럼 되어 오게한 사람이니 포상이 없을 수 없으나 신(臣)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까닭에 감히 아직 (못하였습니다.)” 후(后)가 말했다. “이 무리(徒)는 가히 병관(兵官)에 속하게 함으로써 군려(軍旅)에 기용함이 가하리라.” 세기(世己)가 말하기를 “신(臣)의 뜻은 저군(猪君)을 신하로 삼아 관리(官吏)에 소속시키고 이방(理方)에 들이어 먼저 민속(民俗)을 바로잡도록 하고자 합니다.”하니 후(后)가 그를 허가하였다. 이에 저군(猪君)을 이방(理方) 사지(舍知)로 삼고 그대로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六月命玄雲行白羊祭于明活山時城東細民多奉白羊神尙義作徒其數甚衆以猪君爲頭盛言白羊神降臨護國又言帝牛而后羊家家奉后象朝夕拜之后聞而奇之謂世己曰城東 羊徒多是細民以義相勵各安其業忠于朕躬朝夕拜象雖他仙門不及是輩汝亦羊徒何不眷爰此衆乎世己曰臣亦聞之召其頭猪君者 問義頗知仙道其母粉兒者馬(辶+老)蘖子馬兒之女其骨雖微而有來如此之人不無褒賞而臣不得專故未敢也后曰此徒可屬兵官以用於軍旅可也世己曰臣意欲以猪君爲 臣屬吏使入理方先正民俗后可之乃以猪君爲理方舍知仍行大祭. <흘해니금기>2년 백양(311/371) 6월조 기사.



황우(黃牛:기축)의 봄. 경도(京都)에 크게 역병이 돌아 죽는 자가 꼬리를 물었는데 한 걸인여자(乞女)가 있어 부적(符)을 베풀면 병이 나았다. 도읍 안(都中)의 사녀(士女)들이 앞 다퉈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를 위해 당(堂)을 짓고 받들어 모셨다.
여러 무당(諸巫)들이 그를 질투하여 강제로 걸녀(乞女)를 끌고가 명활지(明活池)에 이르자 물에 들어가도록 핍박하며 말했다.
“옛날에 금강대모(金剛大母)가 한겨울로써 목욕하던 연못이다. 네가 만약 금강신(金剛之神)이라면 속히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날은 큰 눈이 이불(席)을 깔듯 내리고 물은 차갑기가 얼음장 같았다.
신자(信子) 3인이 울면서 따라와 자신들이 대신 빠질 것을 원하자 무당들은 그들을 모두 물에 던져 넣고는 죽이고자 했다. 걸녀(乞女)가 이에 눈 위에서 옷을 벗고 몸을 번드쳐 물로 들어가니 물이 홀연 끓어오르며 금빛장액(金醬)으로 변하고 신자(信子) 3인이 모두 금색동자(金色童子)가 되었다.
커다란 무지개 사다리가 나타나 하늘로부터 땅으로 광명이 쏘아져 내리고 백양(白羊)이 붉은 입술에 비취색 옷을 너울너울 흩날리며 내려오니 걸녀(乞女)가 세 동자를 안고서 백양(白羊) 위에 올라탔다.
모든 무당들이 크게 절복하고는 앞 다퉈 물속으로 뛰어들어 양(羊)의 정강이를 끌어안고 우러러 절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옷을 벗은 곳에는 이미 한 쌍의 단향목(栴)이 있었고 붉은 토끼(赤免)가 솟구쳐 나오더니 은도(銀刀)로 눈을 헤치고 풀을 불어 젖히자 하나의 커다란 금빛 버섯(金箘)이 드러났다.
걸녀(乞女)가 마침내 단향목 아래 금버섯의 위에 앉아서 오른쪽엔 양(羊), 왼쪽엔 토끼(免)를 거느리고 모든 무당들에게 계(戒)를 주니 금빛이 영롱하고 향기가 천하로 퍼져나갔다.

때에 나밀성제(那密聖帝)는 전각위에 있었는데 향기를 맡고서 멀리 기운을 바라보고는 시신(侍臣) 서금(西今)을 불러 가서 살펴보고 오도록 시켰다.
서금(西今)이 (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그를 범(犯)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돌아와 아뢰기를 “요망한 무당(妖巫)이니 베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사건을 이방(理方)에 내리자 사지(舍知)들은 서금(西今)을 두려워하여 그릇된 명령을 좇았다.
걸녀(乞女)가 장차 형장(刑場)에 이르려는데 대사(大舍) 배실랑(裵實郞)이 밖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는 걸음을 배가하여 당도했다. 포박을 풀고 그를 조사해보니 바로 백양선자(白羊奾子)였다.
기쁨과 슬픔(喜悲)이 번갈아 밀려오고 마침내 서금(西今)의 무고(誣)를 탄핵하였다.
제(帝)가 이에 배실랑(裵實郞)에게 상을 내려 나마(奈麻)의 작위를 더하고, 선자(奾子)에게는 자의숭품(紫衣崇品)을 하사하여 모든 무당(諸巫)들을 감독하도록 명하니 이는 모두 세기공(世己公)의 힘(力)이었다.
세기공(世己公)이 이에 선자(奾子)와 배실랑(裵實郞)을 장식하여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하고 부부(夫婦)가 됨으로써 양도(羊徒)를 주관토록 명하였다.

백토(白菟:신묘)의 겨울에 세기공(世己公)이 훙(薨)하였다.
선자(奾子)가 말하기를 “내년에는 필시 신후(神后)가 붕(崩)할 것이니 무당들을 독려하여 기도해도 효험이 없으리라. 서금(西今)은 마땅히 우리를 참소하여 주살할 것이니 일찍이 피하느니만 못하다.”하였다.  
선자(奾子)가 이에 복어(河豚)를 잘못 먹고서 죽은 것으로 위장하니 랑(郞)이 세 신자(信子)와 함께 거짓으로 그를 장사지냈다. 랑(郞) 또한 슬픔에 상심하여 미친 척하며 관직을 버리고는 돌이켜 국경부근(境上)에서 선자(奾子)와 만났다.    
선자(奾子)가 말하기를 “나는 장차 무당 행세를 하며 천천히 소문(召文)으로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먼저 들어가 세주(世主)를 뵈옵고 병(發)을 발하면 가히 내가 들어가 치료할 수 있으리라.”하였다.      
랑(郞)이 허락하고 그 말대로 하였다.
세주(世主)가 장공(長公)에게 이르기를 “우리 부부에게는 이 아들이 있을 뿐인데 병질이 이와 같으니 신무(神巫)가 아니면 치유할 수 없으리라. 무거운 상금(重賞)을 내걸어 그를 찾아야 할 것이오.”하였다.
이에 방(榜)을 내걸어 선자(奾子)를 얻었는데 선자(奾子)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말하였다.
“태자(太子)의 병(病)은 짝(偶)을 잃음에서 온 것이니 만약 저를 처(妻)로 삼으면 나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세주(世主)가 말하기를 “치유되면 처(妻)로 삼으리라.”하였다.
이에 하룻밤을 동침하고서 문득 나으니 세주(世主)는 그를 처(妻)로 삼고자했으나 골의(骨議)를 어렵게 여겼다.
선자(奾子)가 말했다.
“첩이 비록 천인(賤人)이나 일찍이 남에게 몸을 허락한바 없으며 지금 태자를 위해 천침(薦枕)한 것은 부부(夫婦)가 되기 위함이니 이제 골의(骨議)에서 불허하면 첩은 죽고 태자 또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문을 닫고 음식을 끊으니 랑(郞)의 병(病)도 재발하였다.
세주(世主)가 그를 근심하자 상로(上老)가 아뢰었다.
“신(臣)이 듣건대 난옥태후(暖玉太后)가 동남으로 오시매 모란꽃(牧丹花)위에 다시 꽃이 피었다하니 이는 거의 선자(奾子)를 일컬음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종묘사직이 장차 끊어지려하여 그 운명이 선자(奾子)에게 달렸거늘 어찌 구문(舊文)에 얽매여 사직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선자(奾子)를 신(臣)의 딸로 삼아 태자에게 시집보내소서.”
장공(長公)이 “옳다.”하였다.
이에 선자(奾子)를 상로(上老)의 딸로 삼고 성(姓)을 내려 난(暖)씨라 하였다.
10촉(燭)을 밝혀 그를 맞이하였으니 금슬과 우애가 다만 비익조(比翼)와 연리지(連理)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세주(世主)는 크게 기뻐하며 상로(上老)에게 무겁게 상(賞)을 내리고, 명을 내려 강상(江上)에 태자당(太子堂)을 조영(營)함으로써 산수(山水)를 즐기도록 하였다.
랑(郞)은 난씨(暖氏)와 더불어 산에서는 약초를 캐고 물에서는 고기를 낚으니 야옹(野翁) 초수(樵叟)들이 모두 그를 벗 삼을 수 있었다.  
난씨(暖氏)가 경도(京)에서부터 자식을 기원한 것이 근 천일(千日)에 가까워지려 하였다. 이에 랑(郞)에게 말하였다.
“부도(婦道)는 좋은 자식을 낳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오늘밤 서로 얼우면 귀한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 돌아올 수 있게 멀리가지 마십시오.”
랑(郞)은 그를 응낙하였다.
(랑은 강에) 배를 띄워서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는 다른 어부의 물고기를 남김없이 사들여서 그를 놓아 주었다.
홀연 큰 자라(大黿) 한마리가 어자(漁子)에게 쫒긴바 되어서 배안(舟腹)으로 들어왔는데 랑(郞)은 자라를 보호하며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난씨가 그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달빛을 따라 강으로 내려갔는데 물 가운데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랑(郞)이 자라(黿)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를 위하다 늦었소.”
난씨(暖氏)가 말했다.
 “길상(吉祥)입니다. 우리 남편이 아니면 누가 이처럼 할 수 있으리오.”
이에 부부가 배안에서 합환하니 오색구름이 허공을 감싸고 선악(仙樂)소리가 강에 가득했다. 난씨(暖氏)가 말했다.
 “이는 천자(天子)의 기운입니다. 우리 자식이 반드시 귀한 손주를 낳아 천궁(天宮)에 들어가게 되고 마땅히 성제(聖帝)가 탄생할 것입니다. 조짐이 80년 밖에 있으니 우리 자손이 천하에 두루 퍼져 가득하고 삼한(三韓)을 통합할 것입니다. 우리 부처(夫妻)는 길이 호국세신(護國世神)이 되어 존엄이 제후(帝后)의 위에 있게 되리니 또한 즐겁지 않습니까?”
랑(郞)이 말했다.
 “우리 처(妻)의 덕(德)을 갚을 길이 없소.”
난씨(暖氏)가 말했다.
 “모두가 낭군(郎君)의 복입니다. 첩이 무슨 힘이 되리오. 하늘이 반드시 낭군의 자겸지덕(自謙之德)에 보응한 것이로다.”
큰 자라가 그 말을 듣더니 입에 불구슬(火珠)을 물고 나아와 머리를 수그리고는 떠나갔다.    
랑(郞)이 탄복하여 “우리 처(妻)는 진실로 성인(聖人)이다.”하며 어루만지고 아끼었다.
10달 만에 옥(玉)같은 남아가 태어났는데 자태가 절묘하였다. 이에 이름을 순실랑(順實郞)이라하였다.
장공(長公)은 세주(世主)와 더불어 골문(骨門)에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경덕릉(景德陵)의 옥죽(玉竹)이 다시 살아나자 모두들 적선(笛仙)이 다시 태어남이라 하였다. 커감에 따라 피리(笛)를 부는 것이 능숙하여 가무(歌舞)의 진수(眞)를 얻으니 하늘이 이룸이었다.
4살때 세주(世主)가 졸(卒)하였다. 랑(郞)이 피리를 불자 닷새를 부활하였는데 말하기를 “나는 선문(仙門)에 의탁(託)해서 태어나 마땅히 네 처(妻)가 되리라.”하였으니 이가 바로 청아(靑我)의 전탁(前託)이다.
세주(世主)가 졸(卒)하자 장대공(長大公)은 배공(裵公) 부처(夫妻)에게 보위(位)를 전하고 오직 랑(郞)을 기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열 살에 장공(長公)이 졸(卒)하였다. 랑(郞)이 피리를 불자 닷새를 부활하였는데 말하기를 “천문(天門)에 태어나 가히 너를 지키리라.”하였으니 이가 바로 산근공(山近公)의 전탁(前託)이다.
15세에 개연(慨然)히 경도(京)에 들어가 홀명공댁(忽明公宅)에 머물렀다.
당시 홀명공(忽明公)은 나이 70세로 흰 수염이 눈(雪)과 같았는데 오히려 기력(氣力)이 있어 아침마다 해아(亥兒)와 더불어 백마(白馬)를 타고 도산(桃山)을 참배하고 돌아오곤 했다. 혹은 랑(郞)과 더불어 동행했는데 피리를 불게 하며 운화공주댁(雲花公主宅)을 지나가니, 공주(公主)가 그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인간(人間)의 피리가 아니다.”라 하며 그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랑(郞)이 이에 해아(亥兒)와 더불어 공주(公主)를 알현하자 공주(公主)가 해아(亥兒)에게 말했다.
 “동해(東海)에 상고(上古)때에 음양죽(陰陽竹)이 있었는데 낮에는 나뉘고 밤에는 합쳐지니 곧 자룡(雌龍)의 정(精)이었다. 상세(上世)에 능히 이 피리를 불수 있었던 자는 만공(萬公)과 길공(吉公)뿐이고, 소문국(召文)에 옥상인(玉上人)이 있어 능히 이 피리를 불었는데 이제 (그가) 다시금 환생했노라.”
공주(公主)가 그를 위해 북(鼓)과 거문고(琴)를 연주하며 그의 (피리와) 화음하니 기이한 새(禽)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
랑(郞)이 마침내 공주(公主)의 저택(宅)에 머물렀다.
당시 공주(公主)는 나이가 50을 넘었으나 마치 젊은 소부(少婦)처럼 랑(郞)을 섬기고 침식(寢食)은 반드시 손수 점검하고서 진공하였다.  
이에 앞서 공주는 아끼는 폐노(嬖奴)가 세 명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 총애를 얻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랑(郞)을 죽이고자 사람을 시켜 문밖에서 기다리게 했다가 관헌(吏)에게 발각되어 이방(理方)에 넘겨졌다. 당시 골녀(骨女)들은 사분(私奔:사통)을 좋아하여 모두가 폐노(嬖奴) 네다섯 명, 혹은 예닐곱 명씩을 두고 있었다.
백시(白豕:신해)의 설날 아침(元朝)에 큰 눈이 내렸는데 폐노(嬖奴)들이 술에 취해서 서로 난투를 벌여 눈 속에 피가 흥건하였다.
제(帝)가 그 소문을 듣고 골녀(骨女)의 사분(私奔)을 금하며 모든 폐노(嬖奴)들을 이방(理方)에 넘기도록 명했다.
랑(郞)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공주(公主)가 랑(郞)의 애를 뱄다하여 그를 넘기고자 했으나 제(帝)가 홀명공(忽明公)을 위해 특사하고 난황궁(暖凰宮)에게 노래(歌)를 배우도록 명했다.
난황궁(宮) 또한 랑(郞)을 사랑하여 포아(布兒)와 형제(兄弟)가 될 것을 명하였다. 난황(暖凰)의 딸 음황(陰凰) 역시 폐노(嬖奴)가 있어 이름을 새금(塞金)이라 했는데 모두 미천(微)한 신분으로써 등룡(登龍)한 까닭에 당시 3걸(三傑)이라 칭해졌다. 서로 다 같이 벗이 되었는데 랑(郞)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매양 청풍명월(淸風明月)의 밤이면 피리를 불며 성밖 교외를 지나가는데 (피리)소리가 구소(九霄)의 하늘을 꿰뚫으니 성안(城中)의 사녀(士女)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담장을 이뤄 마지않았다.
제상공(堤上公)의 장녀인 청아낭주(靑我娘主)가 (그를) 사모해서 찾아와 키비(箕帚)를 받들 것을 청(請)한지가 한 해 남짓 이었으나 가까워질 수 없었다.
청아(靑我)가 말하였다.
 “첩이 그대를 사모하여 보러오느라 부모님과도 소원해졌는데 그대는 밤낮(晝夜)으로 소좌(塑坐)한 채 첩을 다시는 사랑할 뜻이 없으니 어찌 박정함이 그리 큽니까?”  
랑(郞)이 웃으며 말했다.
 “소좌(塑坐)는 유위(有爲)하니 시험 삼아 내 호흡중의 물건(物)을 보라.”
청아(靑我)가 마음을 정갈히 하고 나아가 그것을 보매 만 팔천억 신장(神將)들이 출입하는 것이 마치 벌집(蜂房)의 벌(蜂)과도 같았으니 앉아서 천하(天下)를 다스림이었다.
이 밤에 큰 별이 가옥에 떨어지자 랑(郞)이 말하였다.
 “천선(天仙)이 네 배를 빌려 태어나고자 한다.”
청아(靑我)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목욕하고 천침(薦枕)해서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바로 등흔공(登欣公)이다. 비할데 없는 영웅(英雄)이었으니 치술신모(鵄述神母)가 그를 사랑하여 몽손(冡孫)으로 삼았다.  
때에 실성제(實聖帝)는 음황(陰凰)을 총애하여 3걸(三傑)을 불러 보고는 각자 작위를 내리고 원하는 바를 허여토록 명하였다. 양도(羊徒)는 기뻐 용약(踊躍)하며 모두가 청운(靑雲)을 얻으리라 하고 벼슬(仕)을 구하는 자가 문전을 메우니 랑(郞)이 웃으며 무리들에게 말했다.
 “밭을 갈아 서민(庶民)을 먹이는 직책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성동(城東)의 수백 목(頃)밭을 얻었으니 힘껏 수확해야 할 것이다.”
당시 포아(布兒)와 새금(塞金)의 낭도(徒)는 모두 청운(靑雲)에 들어서 랑(郞)의 무능을 비웃으니 양도(羊徒)들이 불평이 많아져 혹은 마도(馬徒)로 투신하여 들어갔다. 우진(牛眞)이 이를 근심하자 랑(郞)이 말했다.
 “오미(午未)의 운수(數)는 영고(榮枯)의 순서(序)가 있으니 2년은 출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