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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거란고전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25.

契丹古傳

祖光 濱名寬祐가 지은 契丹古傳(거란고전)의 주석서인 契丹古傳詳解 중에서 원문만 뽑아 해석한 것이다. 본인은 契丹古傳(거란고전)의 영인본 직접 본적은 없으므로 濱名寬祐이 판독한 한자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 그리고 띄어쓰기와 쉼표와 마침표 등은 본인이 임의로 찍은 것이다. 장(章)은 契丹古傳詳解을 지은자가 붙인 것이나 이에 따른다.

 

제1장.             (경)의 본래의 뜻

曰若稽 諸傳 有之曰.., 神者 耀體 無以能名焉. 維鑑能象, 故稱鑑曰日神體, 讀如 戞珂旻.

曰若稽(왈약계)의 여러 傳(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神(신)이라는 것은 빛나는 물체이고 능히 이름할 것이 없다. 다만 비춤「鑑」으로 형상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그 비춤을 日神體(일신체)라고 하며 戞珂旻(알가민)[1]과 비슷하게 읽는다.”

 

제2장.             日祖東大海に禊して日孫を生む

恭惟日祖名, 阿乃沄翅報, 云 戞靈明澡乎, 辰云 珥素佐煩奈, 淸悠氣所凝, 日孫內生.

日祖(일조) 이름을 삼가 생각하여보니 阿乃沄翅報(아내운시보)인데 戞(알)의 靈(령)이 밝고 맑음을 일컫는 것이다. 별「辰」의 이름을 珥素佐煩奈(이소좌번내)이라고들 한다. 아주 많은 맑은 기운이 엉기어 日孫(일손)이 안에서 태어났다.

 

제3장.             日孫の天降

日孫名 阿珉美辰沄繾翅報順瑳檀彌固, 日祖乳之, 命高天使鷄載而降臻. 是爲神祖, 蓋日孫 讀如 戞勃, 高天使鷄 讀如 胡馬可兮. 辰沄繾翅報 其義 猶言 東大國皇也.

日孫(일손) 이름은 阿珉美 辰沄繾翅報順瑳檀彌固(아민미 신운견시보 순차단미고)인데 日祖(일조)가 그에게 젖을 주었다. 高天使鷄(고천사계)에게 (해의 자손을) 싣고 강림하여 이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神祖(신조)이다. 대개 日孫(일손)은 戞勃(알발)과 비슷하게 읽고 高天使鷄(고천사계)는 胡馬可兮(호마가혜)와 비슷하게 읽는 것이다. 辰沄繾翅報(신운견시보)라는 것의 뜻은 오히려 東大國皇(동대국황)을 말함이다.

 

제4장.             東大神族

族延萬方. 廟曰弗菟毘, 廷曰蓋瑪耶, 國曰辰沄繾. 稱族竝爲辰沄固朗, 稱民爲韃珂洛, 尊皇亦謂辰沄繾翅報. 神子神孫國于四方者, 初咸因之.

민족「族」들이 만방으로 퍼져나갔다. 사당「廟」을 弗菟毘(불도비)이라고 하고, 중앙정부「廷」를 蓋瑪耶(개마야)라고 하며, 나라「國」를 辰沄繾(신운견)이라고 하였다. 민족「族」을 다른 말로 辰沄固朗(신운고랑)이라고 칭하였고, 백성「民」을 韃珂洛(달가락)이라고 칭하였으며, 임금「皇」을 또한 높여 辰沄繾翅報(신운견시보)라고 하였다. 神(신)의 아들과 자손의 나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니 모두다 이것을 처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제5장.             辰沄氏の起源

或云, 神祖名 圖己曳乃訶斗, 號 辰沄須瑳珂. 初降於父之陰, 聿肇有辰沄氏,居於鞅綏之陽, 載還有辰沄氏, 是爲二宗. 別嗣神統 顯于東冥者, 爲 阿辰沄須氏. 其後 寧羲氏著名, 五原諸族之間.

혹자는 神祖(신조)의 이름이 圖己曳乃訶斗(도기예내가두)이고 호칭이 辰沄須瑳珂(신운수차가)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의부)의 북쪽「陰」에 내려왔다. 聿肇(율조) 辰沄氏(신운씨)[2]는 鞅綏(앙수)의 남쪽「陽」에 살았으며 載還(재환) 辰沄氏(신운씨)가 있는데 이들이 으뜸이 되는 둘이다. 별도로 神祖(신조)의 계통을 이어 東冥(동명)에 나타난 자들은 阿辰沄須氏(아신운수씨)가 되었다. 그 후에 寧羲氏(녕희씨)가 이름을 드러냈는데 五原(오원)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있다.

 

제6장.             東大神族の傳統稱呼

因亦念之, 雖世降族斁, 猶可繹綿緖, 而格其原壤, 例如. 瑪玕 靺鞨 渤海 同聲相承, 珠申 肅愼 朱眞 同音相襲, 傳統自明也矣. 乃爰討探舊史, 作次第如左.

또한 유래를 생각하여보면, 비록 세상에 내려온 민족들이 계통이 끊기었을지라도, 번성한 자손들은 실타래 풀듯이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니 그 기원이 된 토지를 탐구하여보면 그 예가 다음과 같다. 瑪玕(마간)과 靺鞨(말갈)과 渤海(발해)는 같은 발성이 서로 이어온 것이요, 珠申(주신)과 肅愼(숙신)과 朱眞(주진)은 같은 발음이 서로 이어온 것이니, 전하여진 계통은 자명한 것이다. 이에 옛 역사를 탐구하여 차례대로 다음과 같이 글을 짓는다.

 

제7장.             東族振興の四大要道

塢須弗 耶摩駘記 曰, 其國所以未嘗隤頹者, 職由 潭探上古, 明覯先代, 審設神理, 善繩風猷. 一曰, 秋洲 讀做 阿其氏末, 蓋亦因于阿其比也.

塢須弗(오수불)이 지은 耶摩駘記(야마태기)에서 “그 나라가 일찍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오직 상고의 것을 깊이 찾고 선대의 것을 확실하게 갖추고 神(신)의 도리를 살피어 베풀며 좋은 풍속과 좋은 도리를 잘 이어나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秋洲(추주)가 阿其氏末(아기씨말)를 지어 읽었는데 아마도 阿其比(아기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고 말하였다.

 

제8장.             七聯族の名稱原義

氏質都札曰.., 阿藝也 央委也 陽委也 潢弭也 伯弭也 潘耶也 淮委也, 列名聯族尋其所由, 皆因於秦率旦阿祺毗矣.

氏質都札(씨질도찰)은 “ 阿藝(아예)와 央委(앙위)와 陽委(양위)와 潢弭(황미)와 伯弭(백미)와 潘耶(반야)와 淮委(회위) 등의 열거한 이름들은 서로 관련된 민족이며 그들은 모두 秦率旦(진솔단) 阿祺毗(아기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제9장.             日孫浥婁族を降す

止浥婁異種, 原稱羊鄂羅墜, 本浥且之地也. 神祖伐懲元兇, 化育久之.

오직 浥婁(읍루)만이 다른 종류로서 그들의 원래 호칭은 羊鄂羅墜(양악라추)이었고 그들의 땅은 본디 浥且(읍차)의 땅이었다. 神祖(신조)가 元兇(원흉)을 쳐서 혼내주고 그들을 교화하고 교육한지 오래되었다.[3]

 

제10장.         鴨綠江の古今

命令作澡. 然後 容爲河洛, 賜名閼覆祿卽浥婁也. 或曰, 閼覆祿 禊誓之謂也. 故至今爲成者指其不渝於閼覆祿大水焉.

씻어 맑게 하도록 명령하였다.[4] 그러한 뒤에야 (그들을) 받아들여 백성「河洛」[5]이 되게 하여 閼覆祿(알복록)이란 이름을 주었으니 곧 浥婁(읍루)이다. 혹은 閼覆祿(알복록)이란 (읍루의 이름이 아니라) 禊誓(계서)를 일컫는 것이라고도 하였다.[6] 그래서 지금까지 (맹세를) 한 자들은 그 맹세한 것이 달라지지 않는 다는 취지를 閼覆祿(알복록) 大水(대수)에서 나타낸다.

 

제11장.         八千國主及び平壤

汗美須 曰 神祖都于鞅綏韃, 曰 畢識耶神京也. 敎漾緻遣翅雲兢阿解治焉.

汗美須(한미수질)에서는 “神祖(신조)는 鞅綏韃(앙수달)[7]에 도읍하였다.”고 하였고 “畢識耶(필식야)는 신령스런 도읍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漾緻遣翅雲兢阿解(양치견시운긍아해)를 교화하여 다스렸다.

 

제12장.         神子シラヒキ別と新羅

, 敎 耑礫濆兮阿解, 居戞牟駕, 曰高虛耶, 是爲仲京.

또한 耑礫濆兮阿解(단력분혜아해)를 교화하여 戞牟駕(알모가)[8]에 거하도록 하였는데 高虛耶(고허야)[9]라고 하였으니 이곳이 仲京(중경)이다.

 

제13장.         神女アタカシ媛と薩摩

敎曷旦鸛濟扈枚, 居覺穀啄剌, 曰節覇耶, 是爲海京.

曷旦鸛濟扈枚(갈단관제호매)를 교화하여 覺穀啄剌(각곡탁랄)[10]에 거하게 하였는데 (이곳을) 節覇耶(절패야)라고 하였으니 이곳이 海京(해경)이 된다..

 

제14장.         神女ウサハミ媛と撫期範紀

敎尉颯潑美扈枚, 居撫期範紀, 曰濆洌耶齊京也.

尉颯潑美扈枚(위삽발미호매)를 교화시켜 撫期範紀(무기범기)에 거하게 하였는데 이곳을 濆洌耶(분렬야)라고 하였으며 齊京(제경)이다.

 

제15장.         神子キリコヱ阿解と長白山

敎耆麟馭叡阿解, 治巫軻牟, 曰芝辣漫耶. 神祖初降于此, 故稱曰 秦率母理之京. 阿解又宮於然矩丹而居, 圖耶, 是爲離京. 阿解生而異相頭 有角 好捉鬼(鬼居)[11]. , 頒蘇, 命 遮厲 立桿 禁呪 二十四船之法, 于今有驗也

耆麟馭叡阿解(기린어예아해)를 교화시켜 巫軻牟(무가모)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곳을) 芝辣漫耶(지랄만야)라고 한다. 神祖(신조)에 처음에 이곳에 내려왔으므로 秦率母理(진솔모리)의 도읍(京)이라고 불렀다. 또한 阿解(아해)는 然矩丹(연구단)에서 궁실을 짓고 살았는데 (이곳을) 圖耶(서도야)라고 하며 離京(리경)이 된다. 阿解(아해)는 태어나면서부터 형태가 다른 머리를 하고 있었고 날카로운 뿔을 가지고 있고 귀신과 그들이 사는 곳을 잡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에 (소)를 반포하여 악행「厲」을 막고 솟대「桿」를 세우고 미신「呪」을 금지하는 등 24가지「般」의 법을 반포하였는데 지금까지 증거가 있다.

 

제16장.         東大神族の西征

西征頒疏曰, 神祖將征于西, 乃敎云辰阿餼 城于介盟奈敦, 敎察賀阿餼 城于晏泗奈敦, 敎悠麒阿餼 城于葛齊汭沫. 於是, 濟怒洌央太至于斐伊岣倭之岡而都焉. 怒洌央太 西海之名也. 斐伊岣倭 西陸塞日之處也.

西征頒疏(서정반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神祖(신조)가 장차 서쪽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므로 云辰阿餼(운진아희)를 교화시켜 介盟奈敦(개맹내돈)에 성을 쌓게 하였고, 察賀阿餼(찰하아희)를 교화시켜 晏泗奈敦(안사내돈)에 성을 쌓게 하였으며, 悠麒阿餼(유기아희)를 교화시켜 葛齊汭沫(갈제예말)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怒水(노수) 洌水(렬수) 央水(앙수) 太水(태수)를 를 건너 斐伊岣(비이구)에 있는 倭岡(왜강)에 도읍하였다.” 怒洌央太(노렬앙태)는 서쪽 海(해)의 이름이고 斐伊岣倭(비이구왜)는 서쪽 육지의 塞(새)에서 해가 뜨는 곳이 보이는 장소이다.[12]

 

제17장.         日孫の支那古五原開拓

秘府錄曰, 神祖拓地于幹[13]浸遏, 區爲五原. 伯屹紳濃和氣治於馬姑岣焉, 是爲西原也. 泱太辰戞和氣治於羊姑岣焉, 是爲東原也. 納兢禺俊戶治於尹樂淇焉, 是爲中原也. 湮噉太墜和氣治於柵房熹焉, 是爲北原也. 沄冉瀰墜和氣治於柟崤藐焉, 是爲南原也. 于是, 御旦安閔調波那阿沄 敎矩乃古諸勿有畿覲怙曾矣.

秘府錄(비부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神祖(신조)는 땅을 幹浸遏(간침알)까지 개척하여 5개의 原(원)으로 구획하였다. 伯屹紳濃(백흘신농) 和氣(화기)는 馬姑岣(마고구)를 다스렸는데 이곳이 西原(서원)이다. 泱太辰戞(앙태진알) 和氣(화기)는 羊姑岣(양고구)를 다스렸는데 이곳이 東原(동원)이다. 納兢禺俊(납긍옹준) 戶(호모)[14]는 尹樂淇(윤락기)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中原(중원)이다. 湮噉太墜(인담태추) 和氣(화기)는 柵房熹(책방희)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北原(북원)이다. 沄冉瀰墜(운염미추) 和氣(화기)는 柟崤藐(남효묘)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南原(남원)이다. 이때에 御旦安閔調波那阿沄敎矩乃古諸勿有畿覲怙曾矣(번역불가).

 

제18장.         五原以前の支那原住種族

, 五原有先住之種. 沒皮龍革牧於北原, 魚目姑腹穴於西原, 熊耳黃眉棲於中原, 苗羅孟馮田於南原, 菟首狼裾舟於海原. , 善服順, 但 南原 箔籍 兇不格. 神祖伐放之海. 疏曰, 籍三邦之名, 鳥人盟舒之族也. , 歷海 踏灘波, 據蔚都, 猾巨鍾, 遂入辰藩者其遺.

처음에 五原(오원)에는 먼저 살던 종족들이 있었다. 沒皮(몰피)와 龍革(룡혁)은 北原(북원)에서 목축을 하였고, 魚目(어목)과 姑腹(고복)은 西原(서원)에서 굴속생활을 하였고, 熊耳(웅이)와 黃眉(황미)는 中原(중원)에서 편히 살았으며, 苗羅(묘라)와 孟馮(맹풍)은 南原(남원)에서 밭을 갈며 살았는데, 菟首(도수)와 狼裾(랑거)는 海原(해원)에서 배를 타고 살았다. 모두 복종을 잘하고 순했는데 단지 南原(남원)은 箔(박)과 (균)과 籍(적)이 흉하고 사나워서 격식이 없었다. 神祖(신조)는 정벌하여 海(해)로 추방하였다. 疏(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箔(박)과 (균)과 籍(적)은 세 나라의 이름인데 鳥人(조인) 盟舒(고맹서)의 종족이다. 후에 바다를 지나 물결과 여울을 밟고서 蔚都(울도)에 의지하여 교활하고 거친 짓을 자주하였다. 마침내 辰(진)과 藩(번)[15]으로 들어간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남은 庶子(서자)라고 말하여진다.”

 

제19장.         日孫高天原に歸る

神祖親臨八百八十載. 登珍芳漾匾墜球淄蓋之峰, 祝曰, 辰沄龢提秩宸檀珂枳膠牟頡岬袁高密德溶晏髭戞賁莎戞. 終詣日祖之處, 永止非文紀旦墜阿旻潑例矣. 後經十有六連, 有璫兢尼赫琿, 承嗣大統 祖風重興 河洛復盛焉. 疏曰, 宸檀珂枳猶言稻華神洲也, 戞日也, 餘義今不可攷.

神祖(신조)는 친히 880년간 다스렸다. 珍芳漾匾墜球淄蓋(진방양편추구치개모)의 봉우리에 올라 축원하여 말하였다. “辰沄龢提秩宸檀珂枳膠牟頡岬袁高密德溶晏髭戞賁莎戞(번역불가).” 마치고 日祖(일조)가 사는 곳으로 나아가 非文紀旦墜阿旻潑例(비문기단해추아민발례)에서 영원히 살았다. 후에 16 連(련)이 경과하여 璫兢尼赫琿(당긍니혁혼)이 있었는데 대통을 이어 神祖(신조)의 풍습을 중흥시켰고 神祖의 백성「河洛」들이 다시 번성하였다. 疏(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宸檀珂枳(신단가지)라는 것은 稻華神洲(도화신주)를 높이어 일컫는 말이다. 戞(알)이란 하늘의 해를 일컫는 말이다. 나머지 뜻은 지금 상고할 수 없다.”

 

제20장.         夷の族稱及び由來

神統志曰, 神統逖, 諸莫不恢處, 取義乎, 阿祺毗以爲族稱者, 曰阿靳, 曰泱委, 曰淮委, 曰潢耳, 曰潘耶也. 取諸暘靈, 毗者, 姚也 陶也 句黎也. 陶有 陶 唐三 皐洛. 黎有八養洛矣. 取諸寧 祺毗者, 和義也 姒嬀也 猶鬼也. 取諸太祺毗者嶽也 則號五族渾瀰爲句婁. 初有四嶽後爲九伯, 蓋其音相同也. 姜濮高畎諸委屬焉. 以上通稱諸夷因神之伊尼[16]. 爲汶率.

神統志(신통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神統(신통)은 高遠(고원)하여 모두 광범위하게 처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나니 이 뜻을 취하면 阿(아)의 祺毗(기비)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하여 종족의 명칭을 삼은 것은 阿靳(아근)과 泱委(앙위)와 淮委(회위)와 潢耳(황이)와 潘耶(반야)이다. 神(신)의 밝고「暘」 영묘함「靈」의 毗(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姚(요)와 陶(도)와 句黎(구려)이다. 陶(도)에는 (호도)[17]와 唐三(당삼)과 皐洛(고락)[18]이 있다. 句黎(구려)에는 8의 養洛(양락)이 있다. 神(신)의 편안함「寧」의 祺毗(기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에는 和義(화의)와 姒嬀(사규)와 猶鬼(유귀)가 있다. 神(신)의 끝없음「太」의 祺毗(기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에는 嶽(악)이 있다. 곧 五族(오족)의 渾瀰(혼미)함을 일컬어 句婁(구루)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四嶽(사악)이라고 하였다가 뒤에는 九伯(구백)이 되었는데, 대개 그 음이 서로 같다. 姜(강)과 濮(복)과 高(고)와 畎(견)등의 여러 委(위)들이 속하였다. 이상에서 통칭하는 모든 夷(이)들은 神(신)의 伊尼(이니)[19]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廟(묘)의 깃발「」를 汶率(문솔)이라고 한다.

 

제21장.         東西兩種の雜擾

費彌國氏洲鑑, 海漠象變, 而地縮于西, 乃后稜爲海, 而天遠於東矣. 又經火災, 西族漸入. 神牛首者 鬼蛇身者 詐 吾神子號, 造 犧農黃昊陶虞, 濫命蕃祀, 自謂予聖寧識. 堯與舜者東族翅報也. 渾族有君肇自夏禹雖然禹沄也夏繾也.

費彌國(비미국)의 氏洲鑑(씨주감)에서 찬성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바다와 사막의 형상이 변하고 땅은 서쪽으로 오그라들었으며 뒤쪽 모서리는 바다가 되었고 하늘은 동쪽으로 멀어졌다. 또한 홍수와 화제를 경험한 뒤에는 서쪽의 족속들이 점차로 들어왔다. 소의 머리를 神(신)으로 삼는 자들과 뱀의 몸을 神(신)으로 삼는 자들이 우리의 神子(신자)에 대한 호칭을 속여 伏羲(복희)와 神農(신농)과 黃帝(황제)와 少昊(소호)와 陶唐(도당)과 虞舜(우순)을 지어냈다. 문란하게 蕃祀(번사)를 명하였고 스스로 ‘나는 거룩하고 안녕하며 박식하다’고 말하였다. 堯(요)와 舜(순)은 東族(동족)의 翅報(시보)이다. 混血族(혼혈족)에는 夏國(하국)의 禹(우)로부터 시작된 군장이 있다. 비록 그러하다 할지라도 禹(우)는 沄(운)에 지나지 않고 夏國(하국)은 繾(견)에 지나지 않는다.

 

제22장.         東西兩族の爭鬪ここに開かる

及皐發, 帥羗蠻而出, 以賂猾夏, 戈以繼之. 遂致以臣弑君, 且施以咋人之刑.

(고)과 發(발)[20]에 이르러서 羗(강)족과 蠻(만)족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뇌물로 인하여 夏國(하국)이 교활하여졌으므로 전쟁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데까지 도달하였으니 또한 얼마 안되어 사람을 작두질하는 형벌까지 시행되었다.

 

제23장.         東族盡く頹ろ

伯 唱而不成, 和 征而不克. 陽 勇于津防, 而 易 賣節畔之. 周師次牧焉, 淮徐方力于郊戰, 而姜從內火之, 商祀終亡矣. 潢浮海, 潘北退, 宛南辟. , 朱申之宗 毒賄倒兵, 東委盡頹.

(백)은 앞서서 이끌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和(화)는 정벌하러 나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陽(양)은 津(진)과 防(방)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易(역)이 부절「節」을 팔아 배반하였다. 周國(주국)의 우두머리「師」가 牧野(목야)에 병영을 쳤다. 이에 淮(회)와 徐(서)의 나라들은 牧野(목야)에서의 싸움에 힘을 다했지만 姜(강)이 불을 나아가 받아들였으므로 商(상)의 제사는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潢(황)은 바다에 배를 띄웠고 潘(반)은 북쪽으로 불러갔으며 宛(완)은 남쪽으로 피하였다. 아, 朱申(주신)의 宗(종)들이 뇌물에 약해졌고 병사들을 쓰러뜨렸으므로 東委(동위)는 모두 무너졌다.

 

제24장.         辰沄殷國の肇造及び遷都

, 武伯與智淮殿而止, 焉 欲力保 晋氳之原, 智淮奪子叔釐於虜, 城于葛零基以舍焉 國號辰沄殷. 時人又稱智淮氏燕, 以別邵燕. 姬發降志, 賂以箕封, 殷叔. 韓燕來攻, 乃徙翳父婁都焉. 傳云, 翳父婁者 奚契旦爰 麻岣秘 處也, 又云, 奚契旦爰 神子 耆麟馭叡 別號也.

생각해보면 武伯(무백)과 智淮(지회)는 황제「殿」의 자리에 올랐지만 멸망하였다. 이에 晋氳(진온)의 근원을 보전하려고 힘쓰고자 하였다. 智淮(지회)는 子叔釐(자숙리사)의 제위를 찬탈하고 포로로 삼았고 葛零基(갈령기)에 성을 쌓고 관청으로 하여 국호를 辰沄殷(신운은)이라고 하였다. 때에 사람들은 智淮氏(지회씨)의 燕(연)이라고도 하였고 邵燕(소연)과는 별도이다. 姬發(희발)은 뜻을 굽혀 뇌물을 주어 箕(기)를 봉하여 殷叔(은숙)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韓(한)과 燕(연)이 침공하여 오자 翳父婁(예부루)로 옮겨 도읍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翳父婁(예부루)라는 것은 奚契旦爰(해계단원)의 麻岣(마구)의 숨겨진 장소라고 하며, 또한 奚契旦爰(해계단원)라는 것은 神子(신자)의 耆麟馭叡(기린어예)를 달리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25장.         天孫遠征して同族を救援す

, 武伯山軍糾合于冀, 跳破於南. , 寧羲騅以其舟師及弩旅會于渝濱. 高令擧國前走歌, 曰 鄲納番達謨孟珂讚唫隕孟伊朔率秦牟黔突壓娜喃旺鳴孟.

마땅하게도 武伯(무백)은 山軍(산군)을 冀(기)에서 규합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파괴하였고, 짝을 맞추어 寧羲騅(녕희추)는 舟師(주사)와 弩旅(노려)를 渝濱(투빈)에 모이게 하였다. 高令(고령)은 거국적으로 앞으로 나가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鄲納番達謨孟珂讚唫隕孟伊朔率秦牟黔突壓娜喃旺鳴孟(번역불가).

 

제26장.         天孫肅愼氏を斬つて以て徇ふ

武伯 追獲 夏莫且. 寧羲騅斬之以徇. 諸族喜躍響應. 傳謂, 兪于入之誅.

武伯(무백)은 夏莫且(하막차)를 쫓아가 잡았으며 寧羲騅(녕희추)는 그를 목베어 죽일 것을 주장하였고 諸族(제족)들은 喜躍(희약)하고 響應(향응)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兪于入(유우입)이 하막차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제27장.         東族の戰圖

於是, 降燕, 滅韓, 薄齊破周.

이때에 燕(연)의 항복을 받았고, 韓(한)을 멸망시켰으며, 薄(박)과 齊(제)가 周(주)를 격파하였다.

 

제28장.         天孫の皇子立つて辰沄殷の祀を繼ぐ

辰殷大記曰.., 殷叔老, 無子. , 尉越之將旋于東, 養密矩, 爲嗣. 尋殂, 壽八十九. 督坑賁國密矩立. 時尹兮步乙酉秋七月也.

辰殷大記(진은대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殷叔(은숙)이 늙었어도 아들이 없었다. 때마침 尉越(위월)의 장군은 동쪽으로 돌아가서 密矩(밀구)를 키워 후임자로 세웠다. 얼마 있다가 은숙이 죽으니 나이가 89살이었다. 督坑賁國(독갱분국)은 密矩(밀구)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尹兮步(윤혜보) 乙酉(을유)년 가을 7월이었다.

 

제29장.         辰沄殷再度東遷

繼前言曰.., 爾來跳嘯三百餘載時, 運漸不利. 伯分爲二, 一連於弁, 一入于秦.秦自是益豪, 燕亦加彊. 殷遂以孛勃大水爲界. 讓曼灌幹之壤, 而東.

費彌國(비미국)의 氏洲鑑(씨주감)의 (찬)이 이전에 말한 것에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다.[21] “跳嘯(도소) 이래로 300여 년이 지났을 때에 운수는 점차 불리해져갔다. 伯(백)들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하나는 弁(변)에 연합시키고 또다른 하나는 秦(진)으로 편입시켰다. 秦(진)은 이때부터 더욱 굳세어졌고 燕(연) 역시도 강성함을 더하였다. 殷(은)은 드디어 孛(패사발) 大水(대수)[22]를 경계로 하고 曼灌幹(만관간)[23]의 영토를 사양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제30장.         辰沄殷復大に振ふ

於是, 殷大築 味諏君德. 前 孛斐禮水 險, 背 介盟敦 海岱, 右 踰 薛葛柵 于 撻牟母, 而爲固. 托脇於大辰之親, 而爲依. 以孛勃爲外塹, 內新興神廟, 祭察賀亶唫, 號爲和餼城. 鞅委王贈以劍副之. 東表崛靈載龍所胎之物云. , 配祠 宇越勢旻訶, 通 宇越米旻訶, 通 于占單密之山. 國復振焉

이때에 殷(은)은 味諏君德(미추군덕)[24]을 크게 쌓았다. 孛斐禮水(패비례수)의 험한 것을 앞에다 두고, 介盟敦(개맹돈)의 海岱(해대)를 뒤로 하며, 右踰 薛葛柵(설갈책)을 너머 撻牟母(달모모)까지 견고하게 하였는데, 옆으로는 大辰國(대진국)과 친함에 의탁하였다. 孛(패사발) 대수를 바깥 참호로 사용하였고 안으로는 神廟(신묘)를 새롭게 흥하게 하여 察賀亶唫(찰하단금)에 제사를 지냈는데 和餼城(화희성)이라고 호칭한다. 鞅委王(앙위왕)에게 (빈검)을 주고 보좌하게 하였다. 東表崛靈載龍(동표굴령염재룡염)이 잉태한 物(물)이라 하였다. 또한 宇越米旻訶(우월미민가)와 于占單密山(우점울단밀산)을 통하여 宇越勢旻訶(우월세민가)에게 配祠(배사)하였다. 나라가 다시 크게 떨치었다.

 

제31장.         南方の徐族來つて滿洲に建國す

先是, 宛之徐, 濟海舶臻, 倚殷居於宛灘闢地數百千里, 築弦牟達, 稱昆莫城, 國號徐訶殷.

이보다 먼저 宛(완)의 徐(서), 즉 다시 말해서 바다를 건넌 舶臻(박진)들은 殷(은)에 의지하여 宛灘闢地(완탄벽지) 수백천리에 살았는데, 弦牟達(현모달)을 쌓고 昆莫城(곤막성)이라 칭하였으며 국호를 徐訶殷(서가은)이라고 하였다.

 

제32장.         二殷兵を連ねて燕を破り秦と國疆を訂約す

至是, 燕築塞, 繞曼灌幹, 城曰襄平. 將又越孛, 强行阻斷, 二國伐燕, 克之. 踰渝, 及孤竹, 盡復殷故地. 及秦滅燕乃與之, 約卻地千里以孛水爲界如故.

이때에 이르러 燕國(연국)은 塞(새)를 쌓았는데 曼灌幹(만관간)을 둘렀으며 성의 이름은 襄平(양평)이라고 하였다. 또한 장차 孛(패사발)을 넘어 강행하여 험한 것을 끊으려고 하였을 때에 두 나라가 燕國(연국)을 정벌하였지만 이겨내었다. 渝水(투수)를 넘어 孤竹(고죽)에 이르러 殷(은)의 옛 땅을 모두 회복하였다. 秦國(진국)이 燕國(연국)을 멸하자 그 땅을 주었는데 물리친 땅이 1000리였다. 孛水(패수)로 경계를 삼으니 옛날과 같았다.

 

제33장.         秦の遺孤來つて辰沄殷に依る

秦忽諸不祀, 夫胥子有秩率其衆, 來歸. 殷舍之白提奚, 爲都岐越.

秦國(진국)은 급작스럽게 망해버려 제사도 받지 못하였는데, 夫胥(부서)의 아들 有秩(유질)[25]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귀복하였다. 은(殷)은 그들에게 백제해(白提奚)를 하사하였는데 이곳이 도기월(都岐越)이 되었다.

 

제34장.         辰沄殷亡びて朝鮮の稱起る

燕瞞說殷曰, 請背水而國以禦漢寇. 殷納封之姑. 瞞又說漢曰, 胡藏秦華胄, 請滅之爲郡,以絶後患. 漢喜給之兵仗. 瞞襲取殷, 漢進郡阻徐珂殷. 王奔辰, 秦氏隨徙. 殷亡, 瞞乃案智淮氏燕故事, 以之紀國, 曰朝鮮, 始達周武之志也.

연국(燕)의 위만(瞞)은 은국(殷)에게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물을 뒤에 등지고 나라를 건국할 것은 청합니다.” 그러자 은국(殷)은 받아들여 그를 고주우(姑)에 봉하였다. 또한 위만(瞞)은 한국(漢)에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호인(胡人)들은 진국(秦)의 귀족 자손들을 매장하여버리니 그들을 멸망시켜 군(郡)으로 삼고 이후에 일어날 근심을 끊어버리기를 청합니다.” 한국(漢)은 기뻐하여 그에게 병장기를 주었다. 위만(瞞)은 은국(殷國)을 습격하여 빼앗자 한국(漢)은 군(郡)으로 나아가 서가은(徐珂殷)의 기운을 꺾으니 서가은의 왕은 신국(辰)으로 달아나버렸다. 진씨(秦氏)도 따라서 옮겨가니 은국(殷)은 망하였다. 이내 위만(瞞)은 지회씨(智淮氏)의 연국(燕)의 옛 일들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바탕으로 나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부르기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처음으로 주국(周國) 무왕(武王)의 뜻과 통하게 된 것이다.

 

제35장.         古朝鮮の滅亡び及濊君の自刎

於是, 瞞要漢反, 故漢去但巫, 志心甚啣之. 徐珂王 淮骨令南閭峙 欲爲殷報讐, 謀之於漢. 漢誓不郡, 許以王印爲證, 及洛兎出, 南閭峙憤恚自刎. 子淮骨令蔚祥峙襲破遼東, 斬其守彭吾, 率國合于潘耶. 潘耶乃大焉.

이때에 위만(瞞)은 한국(漢)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므로 한국(漢)은 但巫(단무)로 갔지만 그것을 마음속 깊이 담고 있었다. 徐珂(서가은)의 임금(王)인 淮骨令(회골령) 南閭峙(남려치)는 은국(殷)의 원수를 갚고자 한국(漢)과 계책을 짜고 있었다. 한국(漢)은 (위만의 땅을 빼앗으면 그 땅을 漢의) 군현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王印(왕인)으로 증거를 삼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이내 (漢들은) 洛兎(락토)로 출격하였다.[26] 南閭峙(남려치)는 분하고 성이나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아들 淮骨令(회골령) 蔚祥峙(울상치)는 遼東(료동)을 습격하여 파하였고 그 곳의 守(군수) 彭吾(팽오)를 참수하였으며 나라를 거느려 潘耶(반야)와 합하니 潘耶(반야)가 이내 강성해졌다.

 

제36장.         辰馬韓漢を拒いて置郡志の碎を破す

於是, , 以蓋馬大山爲固, 以奄淥大水爲城, 拒漢, 碎破其眞敦之志.

이때에 진(辰)나라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험고(險固)로 삼고 엄록대수(奄淥大水)를 성(城)으로 삼아 한국(漢)과 겨루어 진번(眞)과 임둔(敦)을 설치하려는 것을 부수고 깨뜨렸다.

 

제37장.         古韓の王統日韓の一域を證す

, 辰者 古國上代悠遠也. 傳曰, 神祖之後 有辰沄謨率氏, 本與東表阿斯牟須氏爲一. 辰沄謨率氏有子, 伯之裔爲日馬辰沄氏, 叔之裔爲干靈辰沄氏. 干靈岐爲干來, 二干隔海而望, 干來又分爲高令云然. 有今不可得攷焉. 其最顯者爲安冕辰沄氏, 本出東表牟須氏, 與殷爲姻, 讓國於賁彌辰沄氏. 賁彌氏立未日, 漢寇方薄, 其先入朔巫達, 擊退之. 淮委氏沃委氏竝列藩嶺東爲辰守郭, 潘耶又觀兵亞府閭, .

대개 辰(신나라)은 옛날에 있던 나라로 아주 오래되었다. 전하기를 “神祖(신조)의 후예인 辰沄謨率氏(신운모솔씨)가 있었는데 본래 東表阿斯牟須氏(동표아사모수씨)와 일가이다. 辰沄謨率氏(신운모솔씨)에게 아들이 있었으며, 아들 伯(백)의 후손은 日馬辰沄氏(일마신운씨)가 되었고 아들 叔(숙)의 후손은 干靈辰沄氏(간령신운씨)가 되었다. 干靈(간령신운씨)는 나뉘어 干來(간래)씨가 되었다. 두 간씨(干, 즉 간령신운씨와 간래씨를 말한다)는 바다로 막히고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었으므로[27] 干來(간래)씨는 또한 나뉘어 高令(고령)[28]씨가 되었다”라고 말하여진다. 그러한 것이 있어서 지금 상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자는 安冕辰沄氏(안면신운씨)로서 본래 東表牟須氏(동표모수씨)에서 나왔으며 殷(은국)과 혼인을 하여 나라를 賁彌辰沄氏(분미신운씨)에게 양보하니, 賁彌氏(분미신운씨)는 未日(미일국)을 세웠다.[29] 漢(한국)의 도적들이 바야흐로 침범하려고 하자 그들의 선조들은 朔巫達(삭무달)로 들어가서 도적들을 격퇴시켰다. 淮委(회위)씨와 沃委(옥위)씨들은[30] 나란히 령(嶺, 단단대령?)의 동쪽의 울타리가 되어 辰(신나라)를 지키는 성곽의 역할을 하였으며 潘耶(반야)는 또한 亞府閭(아부려)에서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여 漢(한의 도적)을 억눌렀다.

 

제38장.         辰遠く貊を招く

先是, 弁那有二汗落, 曰縉耘伊逗氏, 曰縉耘刀漫氏. 伊逗氏者殷密矩王孫, 所入而繼淮伯諸族, 合于弁者, 具瞻爲宗中. 微兒孫, 或爲刀漫氏所鞠育, 繆突幼有異相, 刀漫忌憚之質於鞅氏, 而急襲. 繆突亡奔迂而依殷. 殷善外計, 伯陰內應. 繆突入爲沄翅報, 圍漢, 幾獲, 轉掃弁殷之間. 殷乃爲康及繆突死於賂伯復坎軻久濳漠邊. 至是辰招以率發符婁之谿臼斯旦烏厭旦之壤高令乃臻

이보다 앞서 弁那(변나)[31]에는 2명의 汗落(한락)이 있었는데 하나는 縉耘伊逗氏(신운이두씨)이고 하나는 縉耘刀漫氏(신운도만씨)이다. 伊逗氏(신운이두씨)라는 사람은 殷(은나라) 密矩王(밀구왕)의 자손으로서 淮伯(회백)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여러 족속들을 계승하여 弁那(변나)와 합하여졌는데 모두의 칭송을 받아 宗中(종중)을 이루었다. 宗中(종중)을 이루지 못한 미약한 자손, 다시말하면 刀漫氏(도만씨)[32]가 양육한 자 중에 繆突(무돌)[33]이라는 자가 있어 어려서부터 매우 특이하였다. 刀漫(도만)은 鞅氏(앙씨)[34]에게 그를 인질로 주는 것을 꺼렸으므로 (앙씨를) 急襲(급습)하였다. 繆突(무돌)은 멀리 도망하여 殷(은)에 의지하였다. 殷(은)은 밖으로의 계책을 잘 세운 것이지만 伯(백, 즉 淮伯)은 안에서의 화답함을 잘 하지 못한 것이다[殷善外計伯陰內應]. 繆突(무돌)은 들어와서 沄翅報(운시보)가 되어 漢(한)을 포위하고 거의 다 포로로 잡았으며 (이 기세를) 옮겨 弁那(변나)와 殷(은) 사이를 모두 쓸어버렸으니[35] 殷(은)은 이내 편안해졌다. 繆突(무돌)이 賂(뇌)에서 죽을 때까지 伯(백)은 여러 번 坎軻(감가)[36]하였다. 오래지나고 나서야 漠(막)[37]의 변두리가 잠잠해졌다. 이때에 辰(신나라)는 率發(솔발)[38]을 符婁(부루)[39]의 계곡에 부르고 臼斯旦(구사단)을 烏厭旦(오염단)[40]의 땅에 불렀으며 高令(고령)은 곧 이르렀다.

 

제39장.         日韓古代の高遠なる親善

, 遣使伊河畔, 載龍酬以遠河 及頌卑離. 乃亦 令勃婁達修杜都那, 置納祗米, 行高密帥, 志禳寇云. 鑑罄乎此矣.

또한 사신 伊河畔(이쇄하반)을 보내니 載龍(재룡염)[41]은 먼 곳으로부터 이쇄하반()에게 대답하며 卑離(비리)[42]를 칭송하였다. 이내 또한 勃婁達(발루달)에게 杜都那(두도나)를 정비하도록 명령하였고 納祗米(납지미)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쇄하반을 임명하여) 高密帥(고밀수)의 직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도둑(즉 漢을 말한다)들의 재앙을 막기 위한 제사를 지낼 뜻을 가졌었다고 전하여진다. 鑑罄乎此矣(번역불가).

 

제40장.         逸豫乙女その民を率ひ靺鞨となる

洲鮮記曰, 乃云, 訪于辰之墟, 娜彼逸豫, 臺米與民, 率爲末合, 空山鵑叫, 風江星冷, 駕言覽乎, 其東藩封. 焉彼丘, 不知是誰, 行無弔人. 秦城寂存, 嘻辰沄氏殷, 今將安在, 茫茫萬古, 訶綫之感, 有坐俟眞人之興而己矣.

洲鮮記(주선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이내 말하기를 “辰(신나라)의 땅을 찾아 뵈었더니, 아름다운 저 안락[逸豫[43]]함이여! 돈대의 쌀은 백성들과 비교하여[率[44]] 末合(말합)[45]이 되었도다. 空山(공산)에선 소쩍새 울어대고, 바람 이는 강물에 별은 맑은데, 수레에 말을 채워 그 동쪽의 藩(번국)과 封(봉국)을 바라보도다. 저기 저 언덕은 누구의 것이지 알지 못하며,[46] 길가엔 弔祭(조제)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秦(진)의 장성에는 고요함이 있으니, 아! 辰沄氏(진운씨)의 殷(은)이여, 지금 바라건데 편안함이 아득하고 萬古(만고)하여라. 꾸짖는 세심함의 마음이[訶綫之感] 앉아서 기다리는 참된 사람의 흥함에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제41장.         丹鷄の祥に因り契丹古頌を得

天顯元年元朔, 太祖天皇王拜日乎東閣. 丹鷄從日邊降, 翔旋閣上. 勅使旁求其所止末得. 會同元年六月乙酉, 丹鷄復現, 因得奎瓏石于醫巫閭山, 紅紫綫細自然成文卽古頌也

天顯(천현, 926) 원년 정월 초하루[元朔]에 太祖天皇王(태조천황왕)은 東閣(동각)에서 해에게 절하였는데, 붉은 닭이 해의 가장자리로부터 내려와 閣(동각)의 위를 빙빙 돌아 날아다녔다. 조서를 내려 붉은 닭이 내려앉은 곳을 두루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會同(회동, 938~947) 원년 6월 을유일에 붉은 닭이 다시 나타났고 그래서 奎瓏石(규롱석)을 醫巫閭山(의무려산)에서 얻었다. 붉은 자줏빛의 가는 실이 저절로 문자를 이루었는데 즉 古頌(고송)이다.

 

제42장.         契丹の太宗古頌を神廟に進む

皇上喜然曰朕之先者出自神子奇契丹燕矣所謂炎帝者是也五原於今不克復之何以能見哉朕當善也於是新興神廟于明殿之領親齋進頌.

皇上(황상)이 기뻐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조는 하느님의 아들인 奇契丹燕(기설단연)[47]에서 나왔는데 이른바 炎帝(염제)라고 하는 사람이다. 五原(오원)은 지금 克復(극복)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능히 볼 수 있겠는가? 내가 당연히 항상 잘해야만 하는구나.” 이때에 神廟(신묘)를 明殿(명전)의 언덕[領]에 새롭게 일으켰다. 친히 재계하고 나아가 頌讀(송독)하시었다.

 

제43장.         古頌之一

頌云:

辰沄繾翅報斡南易羅祺駿蔘冉謨律辨扈陪蘊杜乍喃吟綿杜乍喃蜜伊寧枚薰汶枚氣冉滿婆載娜摩矩泥克羊袁暘弭沚緬

제44장.         古頌之二

辰沄繾翅報斡南遏浪祺億扈瑪尹冉濟紆凱湄烏架樂遊麗奄例斡浸播圭婁可洛資麗絆例耶那奈資婁可洛固牟畢滿呂魏克遏浪謨納岐緬

제45장.         古頌之三

辰沄繾翅報案斜岐賁申釐倪厲珂洛秦弁支廉勃剌差笏那蒙緬

제46장.         契丹の應天太后神頌を琴曲に上す

應天太后 徵 諸學士, .., 太祖有言我, 先世 葛禹圖可汗 冒稱乎神賚之甲可汗, 其義猶言日神之體也. 誰能究源流辨宗支者. 因問頌義, 學士恐惶對, .., 隔世旣杳, 語音亦革. 雖旁求匪懈, 古義未可遽攷也. 太后曰.., 韻心所通, 神必能格輒攬, 而上諸琴. 命樂人作譜, 渺森嚴, 眞是神韻也. 臣羽之謹錄. 傳云會同五年六月日.

應天太后(응천태후)가 모든 학자와 선비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太祖(태조)께서 나에게 ‘선조 중에 葛禹圖可汗(갈우도가한)은 하느님이 내린 첫째되는 可汗(가한)이라고 칭하기를 무릅쓰셨었는데 그 뜻은 日神體(일신체)를 일컫는 말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었다. 누가 능히 원류를 연구하여 종손과 방계를 분별하겠는가?” 그래서 古頌(고송)의 뜻을 물으니 학자와 선비들이 두려워 대답하기를 “세대가 떨어진지 이미 오래이므로 언어의 발음이 역시 바뀌어졌습니다. 게을리하지 않고 두루 그 뜻을 구하였으나 옛날의 뜻은 신속히 상고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太后(태후)가 말하기를 “음운과 마음은 서로 소통하며, 하느님은 문득 이해가 되도록 능히 그리고 반드시 하시니 이에 가야금이 가장 낫다.”고 하였다. 음악인들에게 명하여 악보를 지으라 하시니 渺森嚴(류묘삼엄) 진실로 이는 하느님이 내린 음운이다. 신하 羽之(우지)가 삼가 기록한다. 아울러 이것은 會同(회동, 938~947) 5년 6월 어느 날이라고 말하여진다.

 



[1] 본인이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하늘은 丸(환)이다. 삼국유사 桓因(환인)과 桓(환웅)은 丸仁(환인)과 丸雄(환웅)이고 壇君王儉(단군왕검)은 댕군옹검 즉 동근옹검으로서 桓儉(환검)이 아니라 丸儉(환검)이다. 戞珂旻(알가민)의 “戞(알)”은 즉 “丸(환)”이요 “珂旻(가민)”은 “감”을 음차한 것으로 검(儉)과 같다. 즉, 日(일) 혹은 天(천)은 고대어로 “알” 혹은 “동글”이요 神(신)은 “(옹)검”이다.

[2] 辰沄氏(신운씨)는 누구인가? 辰沄은 “슌”으로 읽어야 하는데, 삼국유사의 虎(호)이며 환단고기의 須臾(수유)이며 삼국사기의 濊(회)이다. “ㅎ”은 구개음화되면 “ㅅ”이 된다. 규원사화에서는 이들의 단군이 처음 도읍한 곳을 牛首(우수)라 하였는데 牛는 뜻으로 읽고 首는 음으로 읽어 “수”이다.

[3] 규원사화의 기록과 이 기록을 비교하여보면 아주 흥미롭다.

《규원사화》부루옹검 條

신축년은 부루옹검의 원년이다. …중략… 수년이 지난 후에 盎肅(앙숙)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仙羅(선라)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僂侲(루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여기에 나오는 盎肅(앙숙)이 바로 羊鄂羅墜(양악라추)이며 挹婁(읍루)의 조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浥且(읍차)와 沃沮(옥저)와의 관계이다. 계속 규원사화를 보자.

《규원사화》부루옹검 條

仙羅(선라)를 盎肅(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道羅(도라)와 東武(동무)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沃沮)비류(沸流)졸본(卒本) 등의 뭇 나라들이다.

선라를 앙숙의 땅에 봉하였는데 그 나라이름이 곳 沃沮(옥저)라고 하였다. 땅을 점유한 선후 관계가 뒤바뀌었지만 거란고전의 본문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浥且(읍차)는 곧 沃沮(옥저)임을 알 수 있다.

[4] 대중 목욕탕은 오늘날처럼 그저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씻어 내리는 성스러운 곳이었던 것 같다.

《단서대강》

庚寅二十九年. 命置嫩江浴, 敎習漁獵.

庚寅(경인, BC2371) 29년. 嫩江(눈강)에 浴(욕장)을 설치하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거란고전에서 作澡라고 하였으니 분명 단서대강에 기록된 것과 같이 나라에서 설치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浴(욕장)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5] 앞서 稱民爲韃珂洛(백성을 일컬어 달가락韃珂洛라고 하였다)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河洛은 분명 民을 칭하였던 珂洛을 말한 것이리라.

[6] 앞서 蓋日孫讀如戞勃(대개 일손日孫은 알발戞勃과 비슷하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즉, 日孫(일손)의 정통은 “알발”이고, 정벌하여 교화된 후에 禊誓(계서)하여 日孫(일손)에 속하게 된 자들을 “알복록”이라고 하였다는 말이다.

[7] 분명 阿斯達(아사달)의 轉音(전음)이다. 阿斯達과 鞅綏韃은 모두 “앗 달”로 읽는 글자로서 요즘말로는 “아우 땅「弟地」”이며 이는 扶蘇樑(부소량)의 아우땅「弟地」라는 말이다. 扶蘇樑이란 “부르돋아 솟은 대들보가 되는 땅”이라는 말로서 거란고전에서는 畢識耶(필식야)라고 하였다. 주로 扶蘇樑은 거룩한 땅으로 출입을 금하며 藏塘京(장당경)이 위치해 있으며 扶蘇樑의 기운을 받은 아우땅「弟地」에 阿斯達을 두는 것이다. 藏塘京의 藏은 뜻으로 읽어 “감추었다”는 말이고 塘은 음으로 “땅”이며 京은 뜻으로 “도읍”이다. 즉, 藏塘京은 감추인 땅의 도읍이라는 말이다.

[8] 이곳이 곧 삼국사기의 閼川(알천)이다. 戞(알)은 閼(알)과 발음이 같고 牟(모)는 물「水」의 옛말일 것이며 駕(가)는 곧 가「邊」이므로 戞牟駕(알모가)는 “알물가”라는 말이다.

[9] 우리는 대개 辰韓(진한)이 檀君朝鮮(단군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옮겨간 유민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 耑礫濆兮阿解(단력분혜아해)를 교화시켜 그들이 거하던 땅을 高虛耶(고허야)라고 하였으니 이곳은 분명 삼국사기에 나오는 高墟村(고허촌)이다. 즉, 고허촌 지방은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의 유민이 살던 곳이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에 교화된 민족이 살던 곳으로 이들 역시 또 다른 閼覆祿(알복록)이다.

규원사화에 기록된 弁(변)과 辰(진)의 원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규원사화》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임금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夷人)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 진인(辰人)은 홍수가 다스려진 후에 청구국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와 살던 사람들이고 변인(弁人)은 남쪽의 이인(夷人) 가운데에 단군옹검(壇君王儉)에 교화된 자들이다.

[10] 梁書(양서) 신라전에 “其邑在曰啄評在外曰邑勒(그 마을이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한다)”고 하였다. 啄評(탁평)은 啄坪(탁평)으로 써야하는데 지나인들이 같은 음의 글자로 바꾸어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즉, 啄坪의 첫글자 啄은 음으로 읽고 坪은 뜻으로 읽어야 하는데, 대개 坪은 우리말의 “들” 혹은 “드르”이며 啄은 “드르”의 초성을 음차한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 거란고전에 啄剌(탁랄)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드르”를 음차한 것이다.

[11] 원문에는 鬼居로 되어 있으나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

[12] 怒洌央太를 각각 4개의 물길로 보았고 斐伊岣倭之岡을 斐伊岣(비이구)에 있는 倭岡(왜강)으로 해석하였다.

[13] 濱名寬祐는 契丹古傳詳解에서 幹(간)은 斡(알)의 오자라고 하였지만 그대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곳이 韓(한)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韓(한)은 한반도에 국한된 고대국가가 아니라 원래 지나족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

《詩經集》 卷七

溥彼韓城, 燕師所完, 以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널따란 저 韓(한)의 성은 燕(연)의 師(사)가 완성한 것이다. 선조의 명을 받아 지금 百蠻(백만)들이 따른다. 왕은 韓(한)의 侯(후)에게 그 追(추, 곧 濊를 말한다)와 그 貊(맥)을 주었고 북쪽 나라를 받아 어루만지었으니 그들의 우두머리「伯」가 되었다.

시경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인데 내용은 ‘燕國(연국)이 쌓아놓았던 큰 성을 韓(한)이 빼앗고 濊(예)와 貊(맥)을 다스려 북쪽은 모든 蠻夷(만이)들을 다스렸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韓(한)은 어디에 위치하였는가?

《潛夫論》卷九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其後韓西亦姓韓衛滿所伐遷居海

옛날에 周國(주국) 宣王(선왕)때에 또한 韓侯(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이다. 燕國(연국)과 가까웠으므로 시경에 ‘普彼韓城燕師所完’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또한 韓(한)의 서쪽에도 성이 한씨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海(해)로 옮겨가 살았다.

여기서는 其國也는 姬(희)씨를 말하고 있지만 틀린 것이다. 자세한 것은 라동현 선생이 지은 ‘중국북방 이족과 조선상고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水經注》卷十二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世謂之寒號城

王肅(왕숙)은 “지금의 涿郡(탁군) 方城縣(방성현)에 韓侯城(한후성)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寒號城(한호성)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 韓(한)은 탁군 방성현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대개 지금의 중국 북경 남쪽 固安(고안) 근방이다.

《欽定日下舊聞考》卷一百二十四

韓在燕北貊韓之北國韓歸于燕韓從而東徙漢初謂之三韓(燕史)

(한)은 燕(연)의 북쪽에 있고 貊(맥)은 韓(한)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韓(한)이 이미 燕(연)에게 귀속되었으므로 韓(한)의 무리(從를 徒로 번역하였다)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漢(한)의 초기에는 이들을 三韓(삼한)이라 하였다. 燕史(연사)에서 인용하였다.

,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三韓(삼한)이 있기 전에 이미 燕國(연국)의 북쪽 즉 탁군 방성현에 韓(한)이 있었다. 이들은 貊(맥)과 濊(예)와 蠻夷(만이)등을 다스렸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幹(간)은 斡(알)이 아니라 韓(한)의 전음이며 尙書(상서)에서는 (간)이라고도 하였다.

[14] 즉 앞서 나온 扈枚(호매)와 같은 것이다.

[15] 즉, 마한의 속국이었던 辰韓(진한)과 弁辰(변진)을 말한다. 그렇다면 箔(박)과 (균)과 籍(적)은 각각 朴(박)씨와 金(김)씨와 昔(석)씨를 말하는가?

[16](尸+二)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한다. (尸+二)는 夷의 옛글자이다.

[17] 보통 (고도)로 쓴다.

[18] 皐洛(고락)은 赤狄(적적)에 속한다.

《春秋左傳注疏》卷十

晉侯使大子申生伐東山落氏注赤狄種也落其氏族

晉侯(진후)가 아들 申生(신생)을 시켜 東山(동산) (고락)씨를 정벌케 하였다. 주석: 赤狄(적적)의 별종이다. (고락)은 赤狄(적적)의 氏族(씨족)이다

[19](尸+二)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한다. (尸+二)는 夷의 옛글자이다. 그러나 伊尼가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다.

[20] 契丹古傳詳解에는 昌(창)과 發(발)로 되어 있으나 필자가 皐(고)와 發(발)로 고쳤다. 夏國(하국)의 15대와 16대 왕이 각각 皐(BC 1758 ~ BC 1747)와 發(BC 1747 ~ BC 1728)이다. 한편, 周國(주국) 초대왕인 武王(무왕)의 이름이 發(BC 1046 ~ BC 1043)인데 그의 아버지인 文王(문왕)의 이름이 昌(창)이다.

본문에서 夏國이 거론되는 것으로 봐서 周國의 昌과 發로 보는 것보다는 夏國의 皐와 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21] 즉, 제21장과 이어진다는 말이다.

[22] 浿水(패수)를 말함인가?

[23] 滿番汗(만번한)인가?

[24] 彌鄒忽(미추홀)에 쌓은 柵(책) 혹은 長城(장성)일 것이다. 味諏(미추)는 彌鄒(미추)발음이 똑같다. 君德(군덕)은 “언덕”을 표기한 것이다. “언덕”이란 방죽을 뜻하던 중세국어 “언”과 시렁을 뜻하던 중세국어 “덕”으로 구성된 합성어이다(국립국어연구원의 21세기세종계획 홈페이지의 한민족언어정보검색 참조).

방죽은 중세국어에서 “언”이라 하였다(堤 언 뎨 堰 언 언, 훈몽자회). 君의 발음은 “군”인데 아마도 고대에는 “”이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은 “ㄱ→ㆁ→ㅇ”의 변화를 거쳐 고대국어 방죽을 뜻하던 “”이 중세국어에서 “언”이 된 것이다.

시렁은 중세국어에서 “덕”이라 하였다(棚 더기라, 금강경언해). 시렁을 뜻하는 “덕”을 德(덕)으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君德(군덕)은 곧 오늘날 말의 “언덕”이며 이를 인공적으로 쌓은 것은 곧 柵(책)을 말한다.

[25] 秦國(진국)은 郡(군)으로 縣(현)을 관할하여, 군현 양급의 지방 정권을 설치하고, 현 이하에 향(鄕)을 두어 향이 리(里), 십(什), 오(伍)를 관할하는 기층의 행정 관리 단위로 하였다. 군의 최고 행정 장관은 군수(郡守)이며 현의 행정 장관은 현령(縣令)으이고  현령 아래에는 현승(縣丞)을 두어 현령을 보조한다. 현위는 병사를 관리했으며, 감찰은 어사가 행한다. 기층 기구로는 향과 리가 있다. 향의 주관 관원은 유질(有秩)이라 하는데 그 아래에 향로(鄕老)는 봉건 교화를, 색부(嗇夫)는 사법과 세수를, 그리고 유격(游激)은 도적을 잡는 일을 맡고, 사회의 치안을 유지한다. 향 아래의 리 오에는 이정(里政) 등이 생산과 수공업 등의 사무를 담당한다. 여기 夫胥는 夫蘇(부소)로서 진시황의 아들이다. 시황제가 전국 순행 도중 병에 걸려 유서를 내렸을 때, 당시 황태자인 부소에게 황위를 이으라 적혀 있었으나, 시황제가 붕어하고 승상 이사(李斯)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趙高)는 이를 영호해와 함께 조작하였고, 시황제의 운구가 수도 함양(咸陽)으로 돌아간 후에 조작한 유서를 증거삼아 영호해가 제위에 올랐다. 황태자였던 부소는 조작된 시황제의 유언을 보고 겁에 질려 자결하였다. 영호해는 제위에 오른 후, 부소를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자신은 이사와 조고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고 사치에 빠져 있었다. 본문의 유질이 직책인지 부소의 아들 이름인지는 알 수가 없다.

[26] BC108년에 위만의 낙랑조선을 멸망시키고 1년 뒤인 BC107년에 현토군을 만들었는데, 락토란 곧 현토를 말함이다. 여기서 볼 때 낙랑조선은 현토군을 차지하지 않고 있었으며 漢이 낙랑조선을 멸망시키고 서가은(徐珂殷)이 진(辰)으로부터 할해받은 영역이었던 현토군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27]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바라다보이는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의미할 것이다.

[28] “가야”는 또한 加羅(가라)로도 쓴다. 干來(간래)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高令(고령)씨는 古寧伽倻(고령가야)를 말하는가?

[29] 契丹古傳詳解의 저자는 이 구절을 곡해하여

[30] 淮委(회위)는 濊(회)이고 沃委(옥위)는 沃沮(옥저)를 말한다.

[31] 단군조선 시절에 가장 서쪽에 있던 나라로서 규원사화에서는 藍國(람국)이라 하였고 환단고기에서는 番韓(번한)이라고 하였다. 藍國(람국)은 지나인들이 흔히 藍夷(람이)라고 표현하였는데, 해동역사에서는 藍夷(람이)는 곧 風夷(풍이)라 하였다. 어째서 藍夷(람이)와 風夷(풍이)가 같을 수 있는가? 風이란 곧 “바람”이니 여기서 “람”을 따서 藍으로 적은 것이다. 또한 管子(관자)에서는 藍國(람국)을 發朝鮮(발조선)이라고 하였으니 “바람”의 “발”을 따서 發朝鮮(발조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거란고전에서는 “발”을 弁(변)으로 음차하여 弁那(변나라)라고 적었다. 즉, 흉노는 옛 藍國(람국)의 일족이었다가 신운도만씨의 시대부터 갈라져 나간 것이다.

[32]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頭曼(두만)이라고 하였다.

[33]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冒頓(모돈)이라고 하였다.

[34]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月氏(월씨)라고 하였다.

[35] 사기 흉노열전에 冒頓는 東胡王을 죽였다고 하였으니 이를 말한 것이다.

[36] 때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서 괴로움이 큼.

[37] 고비사막으로 瀚海(한해)라고도 한다.

[38] 卒本(졸본)을 말함인가?

[39] 夫餘(부여)를 말함이다.부여와 읍루를 다 같이 부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40] 우리역사상 나라이름과 땅이름에 “단”이라는 접미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으로 잘못 알려진 나라의 올바른 이름은 震檀(센단)인데 곧 白國(백국)이라는 말인데 白岳(백악)에 도읍하였기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발해라고 잘못 알려진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의 이름도 震檀(센단)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震旦(센단)이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도 白國(백국)이라는 말이다. 강단사학에서 삼국유사의 震旦을 震國의 오기라고 하지만 어찌 國을 旦으로 잘못 적을 수가 있겠는가? 지나인의 사서만 탐독하는 자들이 우리역사의 말과 글을 몰라서 섣불리 판단한 것이다. “거란”이라고 읽는 契丹(계단)도 “셜단”으로 읽어야 하는데 이 역시 白國(백국)이라는 말이다. 강희자전에 보면 契는 발음이 셜(私列切)이라고 하였다. 고대어에서 白은 곧 “세다”이며 관형형은 “센”이 된다. 오늘날에도 흰머리를 “센머리”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고대어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를 보면 지명어에 이와 같은 증거를 볼 수가 있다.

우선 (탄)으로 음차한 지명을 보면 首乙呑(수을탄, 경곡이라고도 함), 於支呑(어지탄, 익곡翼谷이라고도 함), 習比呑(습비탄, 습비곡習比谷이라고도 함) 등이 있고, 旦(단)으로 음차한 지명으로는 乙阿旦(을아단), 買旦忽(매단홀, 수곡성水谷城이라고도 함), 阿旦城(아단성) 등이 있으며, 頓(돈)으로 음차한 지명으로는 德頓忽(덕돈홀, 십곡현十谷縣이라고도 함)이 있다. 丹(단)으로 음차한 지명은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皆丹(개단)과 林丹(림단) 등이 있다. 지나인들은 우리나라의 영토를 빼앗고 “단”이 사용된 지명을 바꾸어 屯(둔)을 사용하였는데 臨屯(임둔)이 그 하나의 예이다.

[41] 앞서 東表崛靈載龍(동표굴령염재룡염)이라고 하였다.

[42] 군장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며 貝勒(패륵)이라고 하였다.

《欽定滿洲源流考》卷八

封域至所屬諸國 多繫以卑離二字, 貝勒之轉音. 而以三汗統諸貝勒於體制亦適相符合. 晉書又載有裨離國, 在肅西北, 陴與卑音相近耳. 遼史有陴離郡, 今撫順城.

역시 봉국과 소속된 여러 나라에 卑離(비리)라는 두 글자가 연계되는데, 이것은 당연히 貝勒(패륵)의 전음이다. 그리고 三汗(삼한, 즉 삼한三韓을 말한다)이 여러 貝勒(패륵)을 통치하였다는 것은 제도와 예법에 역시 부합한다. 晉書(진서)에서 또한 裨離國(비리국)에 대한 기록이 있어 숙신의 서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陴(비)와 卑(비)는 음이 서로 가깝다. 遼史(료사)에는 陴離郡(비리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撫順城(무순성)이 된다.

《欽定金史語解》卷六

安班貝勒. 安班大臣也. 貝勒管理衆人之稱. 卷二作諳班勃極烈.

안반패륵. 安班(안반)은 大臣(대신)이라는 말이고 貝勒(패륵)은 여러 사람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금사 권2에서는 諳班(암반) 勃極烈(발극렬)로 썼다.

, 여기서 卑離(비리)란 辰(신나라)의 제왕인 “大貝勒(대패륵)”을 의미하는 것이다. 辰은 곧 震이며 이 뒤에 영토를 뜻하는 접미사 “단”을 檀으로 음차하여 첨가하면 震檀이다. 震檀이란 흔히들 말하는 단군조선이며, 卑離로 기록된 大貝勒은 壇君王儉이다.

[43] 逸豫는 태연하여 안락(安樂)하다는 뜻이다. 

[44] 여기서 率은 거느린다는 말이 아니라 “비율” 혹은 “견주어 비교함”이라는 뜻이다. 즉, 臺米與民率란 “돈대의 쌀을 백성의 수와 견주어 비교하여보니”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45] 末合이란 “곡식의 양을 섬이나 가마의 단위로 셀 때 이에 차지 못하고 남는 양”을 말한다. 즉, 臺米與民率爲末合는 “돈대의 쌀과 백성의 인구수와 비교하여 보니 쌀이 남아 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즉, 쌀이 풍족하여 살기 좋다는 말이며 앞선 逸豫의 뜻과 상통한다. 契丹古傳詳解 저자는 逸豫臺米를 비미호(卑彌乎)의 종녀(宗女)인 일여(壹與)라고 풀이하고 있고 末合을 말갈(靺鞨, 혹은 靺)로 해석하고 있으나 틀렸다. 거란고전 위서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를 근거로 ‘거란고전은 일본의 기마민족 도래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거란고전의 원문을 제대로 읽어본 자라면 이런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46] 丘는 무덤의 봉분을 말하는데, 주인이 없어 성묘하러 오는 자들이 없다는 말이다.

[47] 강희자전에 契의 발음은 私列切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契丹을 “설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인데, 이는 단군조선으로 알려진 센단「辰檀(신단)」과 발해라고 잘 알려진 센단「震旦(진단)」의 轉音(전음)이다. 이 세 나라는 글자를 서로 다르게 썼지만 모두 白國(백국)의 의미를 갖는다. 白의 훈독은 “센”인데 각각 辰과 震과 契로 음차했으며 國의 훈독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단”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각각 檀과 旦과 丹으로 음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