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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12

이상한 백제의 영토: 백제 서남쪽 마한이고 동쪽은 낙랑이고, 북쪽은 말갈이다 대개 마한은 전라도요, 백제는 경기와 충청도요, 말갈은 송화강 유역이요, 낙랑은 요하 혹은 대동강 유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마한 백제 말갈 낙랑 등의 위치 관계는 통설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1. 통설과 맞지 않는 《삼국사기》 기록백제와 마한의 위치관계마한이 전라도이고 백제가 경기도이면 백제는 마한의 북쪽이던지 서북쪽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온조임금이 웅천책을 세웠다. 마한임금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분명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경기도.. 2009. 12. 15.
사성과 숭산으로 바라본 백제의 위치 백제의 역사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개로왕은 AD475년에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까지 둑을 쌓았다고 말하고 있다.[1] 그러나 어느누구도 이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위치에서는 이 사성과 숭산을 찾을 수 없기때문이다. 백제는 생각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도무지 이해못하는 기록이 있는데 낙랑과 말갈과 백제의 위치관계이다. 김부식은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있고 낙랑이 백제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2] 말갈은 우리가 보통 여진족이라고 하는 종족이고 낙랑은 낙랑군이던 낙랑국이던 평안도와 요녕성을 벗어날수가 없다. 그러나 강단사학에서는 백제가 지금의 서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치관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다. .. 2009. 11. 29.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한 이유 지나사서를 보면 아주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155],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화하·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예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2009. 11. 20.
백제 땅 최북단 大豆山城은 압록강 이북 백제는 통설에 북쪽 경계가 浿河까지라 하고 浿河를 대동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한산주를 빼앗기기 전까지 압록강 이북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의심해하기로는 마한 멸망 후 대두산성을 쌓았으므로 대두산성 근처에 마한의 본거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하지만 의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두산성은 이외에도 마한의 잔여세력들이 반기를 들때 다시 등장합니다. 34 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 2009.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