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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펌: 이대진]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27.
같은 제목의 (2)번 글에서 귀주대첩의 중요 지명인 고려의 흥화진(興化鎭)은 요나라의
북안주(北安州) 흥화군(興化軍)
이고 이러한 사실이 금사 지리지 북경로 흥주에서 확인한 것을
말하였읍니다.

이번 회에서는 거란의 1차 침입에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얻은 강동
6주 중 한 지역인 흥화진의 진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와 관련된 지역이 명기
된 요사 지리지의 중경도, 금사 지리지의 북경로를 살펴 보겠읍니다.


1. 금나라 북경 대정부 = 요나라 중경 대정부

우리가 알고자 하는 요나라 흥화군=고려의 흥화진이 나와 있는 금사 지리지
북경로에 나오는데, 금나라 북경로 북경 대정부 = 요나라 중경 대정부입니다.

*新校本金史/志/卷二十四 志第五/地理上/北京路 - 557 -
  ①大定府,中, 北京留守司.遼中京.統和二十五年建為中京,國初因稱之.海陵貞元元年更為北京,置留守司、都轉運司、警巡院.產鼠、螺盃、茱萸梳、玳瑁鞍、酥乳餅、五味子.戶六萬四千四十七.縣十一、鎮二:

  大定倚,遼縣舊名.有土河、七金山、陰涼河.鎮一恩化.
  長興 有塗河.
  富庶 有心河.鎮一文安.- 558 -

松山 遼松山州勝安軍松山縣,開泰中置,舊置刺史.太祖天輔七年置觀察使.
皇統三年廢州來屬.承安三年隸高州,泰和四年復.有陰涼河、落馬河.


神山 遼澤州神山縣,遼太祖俘蔚州之民置.[一六]章宗承安二年嘗置惠州,陞孩兒館為灤陽縣,
以隸之.泰和四年罷州及灤陽縣.

惠和 皇統三年以遼惠州惠和縣置.
金源 唐青山縣,遼開泰二年置,以地有金甸為名.有駱駝山.
和 遼榆州和縣,皇統三年罷州來屬.


武平 遼築城杏堝,初名新州,統和間更為武安州.皇統三年降為武安縣來屬,大定七年更名.
承安三年隸高州,泰和四年復來屬.

靜封 承安二年以胡設務置,隸全州,三年隸高州,泰和四年來屬.


②..三韓 遼伐高麗,遷馬韓、辰韓、弁韓三國民為縣,置高州 .太祖天輔七年以高州置節度使,
皇統三年廢為縣,承安三年復陞為高州,置刺史,為全州支郡,分武平、松山、靜封三縣隸焉.泰和四年廢. 有落馬河、塗河.


→ ①번 파란 글씨로 되어 있는 것은 금나라 북경로 북경 대정부가 요나라 중경인데
그 요나라 중경을 통화 25년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네요.

통화 연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요나라 성종 임금 치세의 연호인데 서기 983년에서 1011년까지 사용한 것이며, 통화 25년은 서기 1007년이고, 고려왕조는 현종 임금 이전 임금인 목종 임금 10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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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25년, 서기 1007년에 만들어진 요나라 중경을 알아봅니다.

요사 지리지 중경도
*新校本遼史/志/卷三十九 志第九 地理志三/中京道/中京大定府 - 481 -
    中京道

③..中京大定府,虞為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秦郡天下,是為遼西.漢為新安平縣.
............(중략).......

聖宗嘗過七金山土河之濱,南望雲氣,有郛郭樓闕之狀,因議建都.擇良工於燕、薊,董役二歲郛郭、宮掖、樓閣、府庫、市肆、廊廡,擬神都之制.統和二十四年,五帳院進故奚王牙帳地.[二]二十五年,城之,實以漢- 482 -戶,號曰中京,府曰大定.

→ 중경대정부는 우때는(이른바 순임금시대) 영주(營州) 였고, 하나라 때는 기주(冀州)였고, 주 나라때는 유주(幽州)의 일부였으며, 진나라 천하일때는 이것이 요서(遼西)가 되었다.
한나라 때는 신안평(新安平)현이었다.
....(중략)...
성종이 일찌기 칠금산과 토하의 빈을 지나가 남쪽의 운기를 바라보니 부곽누궐의 형상이
있었다..이로 인하여 논의하여 도읍을 세웠다. 연(燕)과 계(薊)에서 좋은 장인들을 모아서 2년동안
일하여 부곽, 궁액, 누각,부고, 시율,낭무를 만들었는데 신도의 제도를 본 딴 것이다.
통화 24년 오장원에 진출했는데 옛 해왕 아장땅이었다.
25년에 성을 쌓고 한호를 채워 중경이라고 부르고, 부는 대정이라 하였다.

==> 우순 영주= 하나라 기주 = 주나라 유주= 진나라 요서 = 한나라 신안평
입니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九 志第九 地理志三/中京道/中京大定府 - 482 -
④皇城中有祖廟,景宗、承天皇后御容殿.城池湫濕,多鑿井泄之,人以為便.大同驛以待宋使,朝天館待新羅使, 來賓館待夏使.有七金山、馬盂山、雙山、松山、土河.
-> 황성가운데 조묘가 있는데 경종, 승천황후어용전이다.성의 연못을 추습하고 우물을 많이 파서 물을 흘려 보내 백성들이 편하게 했다. 대동역에서는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조천관에서는 신라 사신을 맞이하며, 내빈관에서는 하(서하)의 사신를 맞이하였다.
칠금산, 마우산, 쌍산, 송산, 토하가 있다.

===>
여기 재미있는 것은 조천관에서 신라사신을 맞이한다는 말입니다.
통화 25년이면 1007년이고 그때는 신라는 망하고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던 시절인데
신라사신을 맞는다는 말이 있다니...어딘가..???^^
고려가 써야 하는데 신라로 쓴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신라 사신이 진짜로 온 것인지...

어쨋든 요나라 중경 대정부 지역에는 칠금산. 마우산, 쌍산. 송산. 토하 등이 있군요.


다음은 요나라 중경 대정부에 있는 주현 중에 고려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만
뽑았읍니다.
한문을 모르지만 고려라는 글자는 아니....^^


*新校本遼史/志/卷三十九 志第九 地理志三/中京道/中京大定府 - 482 -

.........(전략)...........

⑤.高州,觀察.唐信州之地.萬歲通天元年,以契丹室活部置.開泰中,聖宗伐高麗,以俘戶置高州.有平頂山、灤河.[四]屬中京.統縣一:

三韓縣 ,三韓縣.辰韓為扶餘,弁韓為新羅,馬韓為高麗.開泰中,聖宗伐高麗,俘三國之遺人置縣.戶五千.
......(후략).................

위에 개태(開泰) 중에 성종임금이 고려를 공격했다는데 개태는 앞에 말한 통화 연호
후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012년 이후에 쓰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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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③ 번의
우순 영주= 하나라 기주 = 주나라 유주= 진나라 요서 = 한나라 신안평을 확인하기 위해

한서지리지에 관련된 것을 찾아 봅니다.

*新校本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 1625 -
⑥..遼西郡,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屬幽州(유주).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有高廟.莽曰鉏慮.[一]海陽,龍鮮水東入封大水.封大水﹑綏虛水皆南入海.有鹽官.新安平(신안평),夷水東入塞外.柳城,馬首山在西南.參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
-> 요서군 진나라때 설치했다.....유주에 속한다........신안평.
영지, 고죽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서 역시 유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고죽성이 있다는 것도 알수
있죠.

그런데 고대 지명이나 지금 지명이나 모두 바꿔치기가 성행을 해서 한 시대에도
몇번씩 바뀌어서 잘 알 수 없게 만들어 두었지만, 우리는 익숙해 지면 조금씩 조금씩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역사전공하신 분들을 쉽게 아시겠지만요..^^


2. 유주(幽州)의 위치는..?

지명을 너무 바꿔치기해서 잘 알 수 없는 관계로 우리는 우리의 추리 능력에 많은 의존
을 하게도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추리가 모두 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진실에는 가깝게
다가 갑니다..,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바꿔치기는 처음부터 속임수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추리력만이 그 속임수에 당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도 하기 때문입니다.


유주가 어디인가를 보면 이것도 나오기는 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요..

요사 지리지 서언에 조금 실마리가 보입니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七 志第七 地理志一/序言 - 437 -
⑦..帝堯畫天下為九州.舜以冀、青地大,分幽、并、營,
為州十有二.幽州在渤、碣之間,并州北有代、朔,營州東暨遼海.其地負山帶海
,其民執干戈,奮武,風氣剛勁,自古為用武之地.太祖以迭剌部之代遙輦氏,起臨潢,建皇都;東併渤海,得城邑之居百有三.太宗立晉,有幽、涿、檀、薊、順、營、平、蔚、朔、雲、應、新、媯、儒、武、寰十六州,[一]於是割古幽、并、營之境而跨有之.東朝高麗,西臣夏國,南子石晉而兄弟趙宋,吳越、南唐航海輸貢.嘻,其盛矣!
-> 한문을 모르니 대략 번역하면..^^
제요(이른바 요임금)가 천하를 9주로 나누었는데 순(이른바 순인금)이 기주와 청주의 땅이
커서 유주,병주,영주로 나눠어 12주가 되었다.
유주는 발과 갈의 사이에 있으며, 병주의 북쪽에는 대,삭이 있고, 영주는 동쪽으로 요해에
다다른다. 그땅은 산을 업고 바다로 띠를 두루고 있으며. 그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열심히
싸운다.풍기는 강경하며, 자고로 용무의 땅이다.
태조(요태조)가...임황에서 일어나 황도를 세우고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고 성읍 103개를
얻어 살았다. 태종이 진(5대 시대의 후진)을 세워 주면서 ....16주(이른바 연운 16주)를
얻었다.
이에 옛날 유,병,영주를 넘어 차지하였다. 동쪽으로는 고려에 조공을 받으며 서쪽으로는
하국(서하)을 신하로 삼고, 남쪽으로는.....송나라를 형제로 하고....,,등등...

==> 여기 자신들이 대단한 것처럼 써 놓은 것에서
유주에 대한 의문은 발과 갈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은 알았는데 또 막히는 것이
유주가 있다는 발과 갈이 뭐냐는 것입니다.^^

“幽州在渤、碣之間”
그 밑으로 병주와 영주의 이야기가 나와서 병주는 북쪽에 대와 삭이 있다니까..
현재의 섬서성 중부나 언저리 쯤 될 것으로 보이고요.
영주는 동쪽으로 요해에 다다른다 하였는데 여기서 요해란 지금의 발해만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영주는 동쪽으로 발해를 끼고 있는 것이고 남쪽으로 발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의 발해를 동쪽으로 연접한 어디쯤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뒤에서 지도를 보면 위치에 대해서 조금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유주는 저 발과 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죠..
발(渤)을 그 아래에 요태조가 동쪽으로 병합했다는 발해(渤海)국을 말하는
것이라고 우기면 교과서 역사에는 유주는 만주지역으로 변하고 마는데..
위에서 요나라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하였다는 것을 보면 발해의 어느 지명을
줄여서 붙였거나, 혹은 발이라는 특정 지명인 듯도 합니다만...
교과서 역사가 모르는 발해인 듯도 하고요..

이 문제는 뒤에서 위 ③번 글의 연(燕)과 계(薊)
찾아 보는 중에 알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금 복잡하지요?^^^

그런데 찾는 저는 어떻겠읍니까? 머리가 빠개질 듯합니다.^^
역사도 전공하지 않은 것이 진실을 한번 찾아보겠다고 이리 궁상이니...^^


어쨋든 진실을 향한 인간의 의지는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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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주를 알기 위해 요사지리지를 알아 보는 순서는..?

그런데 요사지리지 서언을 또 보면...요나라의 5경이 만들어 지는 순서가
대략 나와 있읍니다.

요사지리지 서언..
*新校本遼史/志/卷三十七 志第七 地理志一/序言 - 438 -
⑧..迨于五代,闢地東西三千里.遙輦氏更八部曰旦利皆部、乙室活部、實活部、納尾部、頻沒部、內會雞部、集解部、奚嗢部,屬縣四十有一.每部設刺史,縣 置令.太宗以皇都為上京,升幽州為南京,改南京為東京,聖宗城中京,興宗升雲州為西京,於是五京備焉.又以征伐俘戶建州襟要之地,多因舊居名之;加以私奴 置投下州.總京五,府六,州、軍、城百五十有六,縣二百有九,部族五十有二,屬國六十.東至于海,西至金山,暨于流沙,北至臚朐河,南至白溝,幅員萬里.
-> 또 대략 보면...
5대시대에 이르러 (요나라 영토가) 벽지 동서 3천리의 땅이 되었다.........속현은 41개였다.
태종이 황도를 상경으로 하고, 유주를 남경으로 하고, 남경을 동경으로 고치고, 성종이 중경
에 성을 만들고, 흥종이 운주를 서경으로 하여 이에 5경이 갖추어 졌다.

그러니까 요나라를 대략 3천리의 벽지 땅을 가지고 현의 수가 41개 정도 였다가.
태종이 유주를 남경으로 삼으면서, 남하를 하고 거기서 또 진출하여 성종때 중경까지
점령을 하고 흥종때는 서경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죠..
위 ⑦번 기록에 요나라 태종이 연운 16주를 얻는 내용이 있지요?

순서가 이렇읍니다.

그러니까 남경을 보고 나서 중경을 보고 서경을 보면 요나라가 확장되는 것과
함께 유주도 알게 되고 중경도 알게 되고 나아가 금나라 흥주. 요나라 흥화군,
고려 흥화진의 위치를 알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강강찬 장군의 귀주대첩의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게 되고요.

계속 어디인지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제 능력이 부족하여 단박에 알려 드리지 못함이 부끄럽읍니다..^^
하지만 역사 왜곡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노력을 더 좋은 일에 쓸 수도 있었을
것이고 회원님들도 이런 졸렬한 글을 보지 않으실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다음 회에 또 이어지겠읍니다.
다음 회에서는 요사 지리지의 남경부터 대략 보면서 유주의 위치를 가늠해 보도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