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펌:이대진]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 (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27.
(3)회 말미에서 요사 지리지에서 인용한 ⑦번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요나라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태종이 5대의 후진을 세워
주면서 연운 16주를 얻었으며, 이 즈음에 영토가 크게 늘어났으며, ⑧번 기록에서
태종이 황도를 상경으로 하고 유주를 남경으로 하였으며, 남경을 또 동경으로
하고, 성종이 중경을 설치한 이야기에 따라 거란, 요나라의 영토확장 시기대로
살펴보면 유주의 위치를 확인할수 있을 것이라 하였읍니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고려의 흥화진은 요나라의 북안주 흥화군이며 금나라의
흥주인 바, 금나라 흥주는 금사 지리지 북경로에 속하고 있으며, 금나라
북경로는 요나라의 중경도입니다.

이번회 부터는 요태조의 영토확장을 살피겠읍니다.


1.요나라 태조 시기의 위치는...?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재위 기간이 서기 916년에서 926년이라고 합니다.

관련 내용을 다 알아볼수는 없으므로 요나라 남경과 관련하여 몇개의 사실만을
예로 들겠읍니다.


그리고 사서의 기록은 다 신뢰할수 없으므로 필요한 부분에 필요 내용만으로
추론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요사,금사,송사는 원나라 시기에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이후 명나라에 영락대전을 만들면서 사서까지 정리를 하였는데 명나라 당시
지배세력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모두 바꾸거나 하였고 과거의 판본마져
부수어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또 이것을 청나라에 와서 사고전서를 만들면서 또 바꾸었으니...

거의 믿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우리가 진실된 역사를 아는 것은 유추를 통해서
진실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태조는 영토를 넓혀 나가는데 주변에 당항,실위,오환,그리고 제만(諸蠻)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또 후진(後晋)을 세워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요사 본기 태조 기록 몇개만 봅니다.

길게 보지 말고 짭은 것만 추립니다..길게 쓰면 한문 모르는데 짜증만 납니다.^^^


요사 본기 태조 서언
*新校本遼史/本紀/卷一 本紀第一 太祖上/序言 - 1 -
①..太祖大聖大明神烈天皇帝,姓耶律氏,諱億,字阿保機,小字啜里只,契丹迭剌部霞瀨益石烈鄉耶律彌里人.
->태조 대성대명신열천황제의 성은 야률씨고,휘는 억이며, 자는 아보기다. 어렸을때 자는
철리지 였었다. 거란의 질랄부 하뢰익석렬향야율미리 사람이다.

어쨋든 야율아보기가 거란 사람이라는 것은 확인이 됩니다.^^


2. 그럼 거란의 위치는?

신당서 거란 열전..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九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契丹 - 6167 -
②契丹,本東胡種,其先為匈奴所破,保鮮卑山.魏青龍中,部酋比能稍桀驁,為幽州刺史王雄所殺,遂微,逃潢水之南,黃龍之北.至元魏,自號曰契丹.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東距高麗,西奚,南營州,北靺鞨、室韋,阻冷陘山以自固


 ->거란은 본래 동호의 일종이다. 그 선조가 횽노에게 패하여 선비산으로 도망갔다.
위나라(조조가 세운 위나라) 청룡 년간에,부추 비능이 영웅의 기질을 보여 유주자사 왕웅이 죽이자 세력이 약해져,황수의 남쪽,황룡의 북쪽으로 도망갔다.
원위(선비족이 세운 위나라)시대에 이르러,스스로 거란이라고 불렀다.
땅은 경사(당나라 서울 장안성)로 부터 동북쪽으로 5천리가 넘는다 하는데 동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서쪽으로는 해에 이르고,남쪽으로는 영주에 이르며,북쪽으로는 말갈과 실위에 이른다. 냉경산의 저로 자고하였다.

===>
여기서 거란의 위치가 대략적으로 나오는데 일단 당나라 서울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5천리
라고 나오니 쉽게 알수 있네요..


신당서 고구려 열전에 보면 유사한 내용이 나와서 거란의 위치는 더욱 알기
쉬워 집니다.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 6185 -
③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④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為塹.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海)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海)를 넘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임금은 평양성에 사는데,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낙랑군이었다.
거리는 경사(당나라 장안성)로 부터 5천리가 넘느다. 산을 따라 굽고 둘러서 외성이 되고, 남쪽끝은 패수가 있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을 쌓았다. 또 국내성, 한성이 있는 별도라고
불렀다.

물은 대요수, 소요수가 있다. 대요수 : 말갈 서남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수 :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있으니 변방의 밖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가서 합해진다. 마자수가 있어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니, 물색이 오리 머리와 같아서, 압록수라고 불리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염난수와 합해지고, 또 서남쪽으로 흘서서 안시성에 이르러 해에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어, 거대한 배로 사람을 건너니, 그것으로 인하여 해자가 되었다.

===>신당서 고구려 열전에서도 알수 있는 것들이 만이 있는데요.
거란과 고구려의 위치가 당나라 경사로 부터 거의 유사한 거리에 있다는 것이죠.
거란과 고구려는 북쪽에 똑같이 말갈이 있고요.

아래 그림판 그림보세요..대충 그린 것입니다만 정확한 것입니다.^^






이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지요?
모두 다른 지역..
대륙입니다.


거란은 지금의 산서성, 고구려는 하북.백제는 하남성,신라는 산동성..
이렇게 대충 알 수 있게 됩니다.



3. 영주의 위치...

앞에서 말한 위치가 거짓말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록이 저런데 어떻게 하겠읍니까?^^

그런데 다른 지역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영주를 확인하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겠읍니다.
왜냐하면 영주는 당나라의 지명이기 때문이지요..^^

당나라 지명의 위치를 확인하면 확실해 지는 것이죠?
아니라고 우기면 나... 화낼 꺼예요...^^


구당서 지리 하북도 영주상 도독부..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九 志第十九/地理二/河北道/營州上都督府 - 1520 -
⑤營州上都督府 隋柳城郡.武德元年,改為營州總管府,領遼、燕二州,領柳城一縣.七年,改為都督府,管營、遼二州.貞觀二年,又督昌州.三年,又督師、 崇二州.六年,又督順州.十年,又督慎州.今督七州.萬歲通天二年,為契丹李萬榮所陷.神龍元年,移府於幽州界置,仍領漁陽、玉田二縣.開元四年,復移還 柳城.八年,又往就漁陽.十一年,又還柳城舊治.天寶元年,改為柳城郡.乾元元年,復為營州.舊領縣一,戶一千三十一,口四千七百三十二.天寶,戶九百九 十七,口三千七百八十九.在京師東北三千五百八十九里,至東都二千九百一十里.
  柳城(유성) 漢縣,屬遼西郡.室韋、靺鞨諸部,並在東北.遠者六千里,近者二千里.西北與奚接界,北與契丹接界.

->대략 해석을 하면요..
영주 상도독부는 수나라 유성군이다.무덕 원년에,영주총관부라고 고쳐 불렀다,
요와 연 2주를 영하고,유성현 1현을 영했다.칠년,도독부라 고쳐 부르고,영과 요 2주를 관했다.정관 2년에,또 창주를 독했다.3년에 ,또 사와 숭 2주를 독하였고 .6년에 또 순주를 독했다.10년에 ,또 신주를 독하여.지금은 7주를 독하게 되었다.만세통천 2년에
거란 이만영이 함락하여.신룡 원년,부를 유주의 경계로 옮겨 설치했다,거듭하여 어양、옥전 2현을 영하였다.개원 사년,(부를) 다시 유성현으로 옮겼다 ........
천보 원년,다시 유성군으로 하고 .건원 원년에 다시 영주로 불렀다.

유성 한나라 현으로 요서군에 속한다..실위,말갈 제부족이 나란히 동북쪽에 있다.,
먼것은 6천리, 가까운 것은 2천리다.
서북쪽은 해(奚)의 경계와 접하고 북쪽은 거란의 경계와 접한다.

===>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 얼추 맞지요? 아니 확실한 것입니다.

영주에 대해서는 요사 지리지 남경에도 나옵니다.
거란이..요나라 태종때 남경을 두게 되니 말입니다.

新校本遼史/志/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南京道/平州 - 500 -
⑥..營州(영주),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秦屬遼西郡.漢為昌黎郡.前燕慕容皝徙都于此.元魏立營州,領昌黎、建德、遼東、樂浪、冀陽、[一 九]營丘六郡.後周為高寶寧所據.隋開皇置州,大業改遼西郡.唐武德元年改營州,萬歲通天元年始入契丹.聖曆二年僑治漁陽.開元五年還治柳城.天寶元年改 曰柳城郡.後唐復為營州.太祖以居定州俘戶.統縣一:
- 502 -
    廣寧縣.漢柳城縣,[二0]屬遼西郡.東北與奚、契丹接境.萬歲通天元年,入契丹李萬榮.[二一]神龍元年移幽州界.開元四年復舊地.遼改今名.戶三千.

-> 또 대략보면...
영주...한 진나라 요서군에 속하고 한나라때는 창려군이 되었다
원위(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때 영주를 두고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6군을 영하였고 후주(5대 시기)때 고보령이 거하였다. 수나라 개황때 주를 두었으며, 대업 연간에
요서군을 두었다. 당나라 두먹 원년에 영주라 고치고 만세통천 원년에 거란이 침입하기
시작했으며, 성력 2년에 어양을 교치하고, 개원 5년 유성군으로 환치하였다.
천보 원년에 유성군으로 하고, 후당때 영주로 복원하였다.
태조가 정주부호를 살게 했다..1개의 현을 통한다.

광녕현은 한나라 유성현이며,요서군에 속한다.동북쪽으로 해.,거란과 접경한다.
만세통천 원년,거란 이만영이 입하였다.신룡원년 유주의 경계로 옮겼다.개원4년 다시 옛땅을 복구하였다. 요나라 지금 으로 고쳤다. 호는 3천이다.

====>
대충 보니 위에 그린 그림과 확실하게 맞으면서 거란이 섬서성과 산서성 북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지요.

그 거란의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하였다면...발해의 위치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
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라 판단이 되고요..
그 발해의 남쪽에 위치한 고려 역시 한반도지역만이 아닌 대륙의 산서성 동쪽지역과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란의 태종이 유주를 남경으로 하고 그 남경에 영주가 있으며, 그 영주는
요서군이라는 말은 요서군 서쪽 땅, 산서성 중부,동쪽 지역과 하북성 지역 등지는 고려땅이거나
발해땅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란의 3차침입 지역인 흥화진은 산서성이나 하북성지역 일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차없이 드네요..^^


*
대략만 보아도 학교에서 가르쳐준 역사와는 너무 차이가 나네요..
그러니 역사 전공하신 분들은 아마 그 사실들을 모두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이번회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다른 증거들도 많이 있는데 재미없는 글이 길어지면 더욱 짜증이 나실테니요.^^

다음회는 요태조가 공격한 지역을 조금 살핍니다.
거란은 산서성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 그 동쪽과 동남쪽,산서성 동쪽과 하북성,하남성,산동성은 무주공산?^^
발해와 고려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