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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통지에서 말하는 동옥저는 고구려 서쪽, 마한은 대방의 동쪽, 예는 고구려 북쪽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
중국 역사책에는 그 후반부에 항상 동이전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조선, 옥저, 예맥, 마한 등의 위치가 대략적으로나마 실려있죠. 그러나 이상한 것은 하나 같이 그 위치에 대한 설명이 하나같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책이 독립적인 연구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적었다면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기록하기를...
* 마한은 낙랑 혹은 대방의 남쪽이다.
* 예(濊)는 진한의 북쪽이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이다.

이 것을 읽고나면 마한은 한반도요, 예는 진한의 북쪽인 강원도 쯤이요, 동옥저는 개마고원 동쪽인 함경도쯤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의심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고 명확하게 설명한 기록이 없기에 헷갈리기 그지 없습니다.

그 러나 통지(通志) 권 41 도읍략(都邑略)을 읽어보면 위 기록과는 매우 다른, 민족사학계에서 평소에 주장하던 기록과 매우 비슷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통지 권41은 지나의 주변민족을 다룬 열전이 아니라 그들의 도읍을 기록한 것인데 그 곳에 우리 고대 국가의 기록에 대해서 약간 설명해 놓았습니다.

通志卷四十一, 都邑略第一
四夷都
1) 朝鮮都王險(漢樂浪郡)
2) 濊都濊在髙句麗之北(漢滄海郡)
3)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北與樂浪方可四千里有三種曰馬韓辰韓弁韓復有一種曰弁辰其後馬韓悉王三韓之地都目支國百濟都居㧞城亦曰固麻城(晉時據遼東晉平二郡在桞城北平之間)
4) 新羅都新羅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髙句麗東南兼有漢時樂浪郡之地
5) 倭初都帶方東南大海中後都邪馬臺邪馬臺去遼東二千里在百濟新羅東南
6) 夫餘都夫餘城在元莵北千里南與髙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
7) 髙句麗初都紇升骨城後世遷於丸都山下自東晉以後移都於平壤城又有别都曰國内城曰漢城號為三京(平壤即漢樂浪郡王險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随山屈曲南臨浿水在遼東南千餘里城内惟積倉儲器械賊至方入固守王别宅於其側)
8) 東沃沮都髙句麗西北在盖馬大山之東(盖馬縣名屬玄莵郡)濵大海北與挹婁扶餘南與濊貊接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亦與挹婁接
9) 挹婁即古肅慎國都不咸山在夫餘東北千餘里東濵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10) 勿吉(亦曰靺鞨)亦古肅慎氏國其都在髙句麗之北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洛瓌水水廣里餘又北行十五里至大兵魯水又東北行十八日至其都

하나씩 살펴보면

1. 조선
이것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 혹은 위만조선입니다. 지나의 사서에서 대부분 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키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1)의 문장을 해석하면
  朝鮮都王險(漢樂浪郡) 위만조선은 왕험에 도읍했다. 이곳은 한나라 낙랑군이다.
여기까지는 뭐 별다를게 없습니다.

2. 예
예는 대부분 동예라고 설명하여 강원도라고 보고 있죠.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예는 강원도로 이주하기 전에 난하 동부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래 기록은 매우 다릅니다.
  濊都濊在髙句麗之北(漢滄海郡) 예는 예에 도읍했는데 고구려의 북쪽이다(한나라 창려군이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예가 고구려 북쪽에 도읍을 했다고 하죠. 식민사학의 설명대로 예가 강원도라고 하면 고구려는 강원도 남쪽 경상북도이어야 하고, 윤내현 교수의 설명대로 난하동부라고 하면 고구려는 바다에 있어야 합니다.

저 기록의 고구려가 현도군 고구려현이라고 생각하면 그런데로 설명은 됩니다. 그러나 예의 도읍이 한나라 창해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해군은 천진 남쪽 부근입니다. 그러면 현도군은 산동반도이어야 하는데...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추측해본다면....
고 부여, 즉 고조선시대 부여는 지금의 북경지역이고, 그 부근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예의 임금 남려가 고구려 북쪽의 땅에 고조선시대 봉국으로 있었는데 한나라에 투항하자 창려군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해모수는 그곳을 격파하여 나라를 건국하니 이것이 바로 북부여이다. 그래서 지나 사서에 부여의 옥쇄에 예의 임금이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또한 국명을 북부여라고 한 이유는 고부여, 즉 고조선시대 봉국인 부여의 북쪽이므로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리고 북부여 남쪽 현도군 지역에 고주몽이 현도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이러면 대충 설명이 됩니다. 예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예는 매우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한(韓)
한 (韓)의 위치도 매우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낙랑의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여 이 낙랑을 낙랑국으로 해석하여 보통 황해 경기 충청 전라라고 이해하고 있으나, 통지에서는 대방의 동쪽이라고 합니다. 대방은 원래 낙랑군의 현이었는데 그 곳은 (AD200년 경인가요?) 대방군으로 승격됩니다. 아래 기록을 보면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北與樂浪方可四千里有三種曰馬韓辰韓弁韓復有一種曰弁辰其後馬韓悉王三韓之地都目支國 삼한은 모두 대방군의 동쪽 대해(大海) 가운데 도읍하였고 동서는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남쪽은 왜와 접하고 북쪽은 낙랑과 접한다. 거의 4천리다. 3가지가 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또는 변진이라고도 한다. 그 후 마한의 모든 왕은 목지국에 도읍하였다.

대 방군의 동쪽 대해 가운데가 어딜까요? 대방군을 평양으로 본다면 위 기록은 말도 안됩니다. 대해는 보통 바다를 말하는데 바다가운데에 도읍할 수가 없죠. 신채호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는 대해를 지나의 국경 밖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다면 지나 국경 근처일 수 밖에 없고 이 곳은 대략 북경 근처가 됩니다. 즉, 마한은 북경근처까지 영토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난 것은 띄어읽기를 달리하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三韓皆都帶方郡之東,  大海中東西以海為限 삼한은 대방군의 동쪽에 도읍했다. 대해를 가운데에 두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었다.

이 렇게 해석한다면 마한은 지금의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영토를 가졌다는 말이됩니다. 즉 산동 하북 요녕 평안 황해 경기 충정 전라 등의 모든 땅이 마한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방군은 이 땅의 서쪽에 있고 낙랑군은 이땅의 북쪽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무엇이 맞는 번역인지는 아직까지 판단을 못 내리겠으나 우리가 알던 동이전 기록과는 매우 다른 기록임에는 분명하고 역사해석도 매우 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마한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 알 수 있죠. 한반도 3천리인데 마한이 4천리라고 하였으니 분명 북한남한 합친 땅덩어리보다 큰 나라임에는 분명합니다.

4. 신라
신라도 약간 다른 면이 있습니다.
  新羅都新羅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髙句麗東南兼有漢時樂浪郡之地 신라는 신라에 도읍했고 백제의 동남 500여리에 있고 또한 고구려 동남에 있다. 그런데...한나라때에는 낙랑군의 땅을 겸하여 가지고 있었다
고 대사산책님의 저서에 신라는 북경근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통지의 기록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동남쪽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한나라때에 낙랑군 지역도 겸하여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신라의 도읍이 초기에는 낙랑군 변경에 있다가 백제와 고구려 동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 왜
왜가 과연 일본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倭初都帶方東南大海中後都邪馬臺邪馬臺去遼東二千里在百濟新羅東南 왜는 처음에 대방의 동남쪽 대해의 가운데 도읍하였다. 후에 도읍을 사마대(邪馬臺)로 옮겼는데 이곳은 요동에서 2천리 떨어진 곳에 백제와 신라 동남에 있다.

왜가 대방의 동남에 있었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누구의 주장대로 일본인들이 처음에는 경상남도 지역에 살고 있었던 종족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6. 부여
부여는 기록이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夫 餘都夫餘城在元莵北千里南與髙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 부여는 부여에 도읍했는데 현도군 북쪽 천여리에 있고 남쪽으로 고구려와접하고 동쪽으로 읍루와 접하고 서쪽으로선비와 접하며 북쪽으로 약수와 접하였는데 부여는 2천리땅이다.

여기서보면 마한이 부여보다 2배나 큰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7. 고구려
고구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髙 句麗初都紇升骨城後世遷於丸都山下自東晉以後移都於平壤城又有别都曰國内城曰漢城號為三京(平壤即漢樂浪郡王險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随山屈曲南臨浿水在遼 東南千餘里城内惟積倉儲器械賊至方入固守王别宅於其側) 고구려는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가 환도산 아래로 옮겼다. 동진 이후로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별도로 국내성과 한성을 두어 이를 3경이라 했다. 평양은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었고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로 6리다... 이하 해석이 어렵네요.

8. 동옥저
매우 다른것은 동옥저 기록입니다. 동옥저는 절대로 함경도에 올 수가 없습니다.
  東沃沮都髙句麗西北在盖馬大山之東(盖馬縣名屬玄莵郡)濵大海北與挹婁扶餘南與濊貊接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亦與挹婁接 동옥저는 고구려 서북에 있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도읍했다. 개마는 현 이름인데 현도군에 속했다. 대해(大海)에 의지해서 살며 북쪽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과 접하며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이다.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8백리를 가는데 역시 또한 읍루와 접했다.

이 동옥저가 과연 어딜까요? 고구려 서북쪽에 있는 개마현의 큰 산 동쪽이라고 합니다. 함경도지역은 절대로 고구려 서북이 될수가 없죠. 이 기록은 제가 예전에 쓴 글인 동옥저는 서옥저이다라는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동옥저라는 말은 동쪽의 옥저라는 말이 아니라 현도군 개마현에 있는 대산의 동쪽에 있기에 동옥저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 기록은 고구려가 멸한 동옥저 부근의 살수는 더이상 청천강이 될 수 없으며 고구려 서쪽에 위치한 강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 리고 또한 이상한 기록은 동옥저북쪽에 읍루가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의 통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면 동옥저 위쪽은 고구려가 있어야지 절대로 읍루가 올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왜 통지에서는 동옥저 위쪽으로 읍루가 있다고 하였을까요? 이는 아마도 저자가 동옥저를 남옥저나 북옥저와 헷갈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아래 읍루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9. 읍루
  挹婁即古肅慎國都不咸山在夫餘東北千餘里東濵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읍루는 옛 숙신국인데 불함산 도읍했는데 이곳은 부여에서 동북으로 1000리정도이다. 동쪽으로 대해와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접했다.

이곳에서는 읍루의 남쪽에 접한 옥저는 분명히 북옥저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동옥저는 읍루와 접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서북 북부여 남쪽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의 기록으로 중국사책 동이전과는 전혀 다른 여러 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뭐가 맞는지 몰라 결론을 내릴 수가 없으나 강단에서 주장하는 동옥저는 함경도, 동예는 강원도, 살수는 청천강, 마한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신라는 경상도 등의 주장이 통지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