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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壬儉의 음은 "징검"이며 "맑검" 혹은 "바탕검"으로 훈독해야 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
임검(壬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러가지 대안들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강단의 “임검(壬儉)은 왕험(王險)이다”라는 해석 비판

이 러한 해석은 우리역사를 지나인들이 기록하면서 임(壬)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들만의 방식대로 임(壬) 자를 왕(王) 자로 바꾸어 임검을 왕이라는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검(儉)에 대한 의미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체 도읍은 주로 외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험한 곳에 위치하므로 검(儉) 자를 또한 그들만의 방식대로 바꾸어 험(險, 험하다) 자로 바꾼 것입니다.

왕험(王險)에 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사기(史記)입니다.

《사기(史記)》권 115 조선렬전(朝鮮列傳)
滿……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위만(衛滿)은 점차 진번조선(眞番朝鮮)과 만이(蠻夷)들을 복속시켜 부려먹었다. 그리고 나서 옛 연(燕) 나라 제(齊) 나라 망명인들의 왕이 되었고,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위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의 식민사학을 갖는 자들은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王險城)이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고 주장하며 임검성(壬儉城)과 왕험성(王險城)을 같은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어찌 발음과 뜻이 비슷도 아니한 임(壬)자가 왕(王)자가 되며 검(儉)자가 험(險)자가 되겠습니까? 사대모화사상의 극치죠. 이를 두고 또한 사대모화사상의 핵심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동천왕 21년조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동천왕 21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의 난을 겪어 다시 도읍을 삼을 수 없어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를 옮겼다. 평양이란 본디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인데 혹 말하기를 왕이 도읍한 곳을 왕험(王險)이라 한다고 하였다.

평 양성을 왕검이 도읍한 곳이라고 하였죠. 그래놓고선 사기 조선렬전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여 이상하게 구절만 따와서 “王之都王險(왕이 도읍한 곳은 왕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기 조선렬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옛 연과 제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었다. 왕험에 도읍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김부식은 위만이 옛 단군이 도읍한 곳에 도읍하였다고 가정하였기에 위와 같이 이상하게 뒷부분만 끊어 가지고 온 것이죠. 이러한 것은 삼국유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만이 빼앗은 나라는 기자조선이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변방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기 조선렬전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기(史記)》권 115 조선렬전(朝鮮列傳)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연나라 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였고 위만도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동으로 달아나 성 외곽의 새(障塞)을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옛 진(秦) 나라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위 만이 처음 살던 곳이 진(秦)나라 때의 공터라고 하였습니다. 주로 고진공지(故秦空地)라고 불리는 곳이죠. 이곳은 공지(空地) 즉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도읍일수는 없습니다. 즉, 위만은 단군조선 서쪽 변방 공터에 살다가 단군조선 제후국인 진번조선(眞番朝鮮)을 복속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고진공지(故秦空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왕(燕王) 희(喜)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옮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故秦空地)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신채호 선생께서 어떤 사료를 근거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대략은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진공지란 단군조선과 진(秦) 사이에 있었던 군사분계선의 DMZ 같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나자 그곳을 잘 간수하지 못하였으므로 위만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죠. 따라서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王險城)은 고진공지(故秦空地)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이 있었던 곳보다 더 서쪽이 되는 것입니다.

임검(壬儉)이 왕험(王險)이라는 것은 위만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지나 사료에만 매달리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임검(壬儉)은 오늘날의 임금이다.

우 리는 최고통치자를 일컬어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임금”이라고 하지 원래는 “님금”이죠. 이의 어원을 해석하기를, 우리말 존칭인 “님”과 고마(熊, 固麻)의 전음(轉音)인 “금”이 합쳐져서 “님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壬儉이라는 글자는 “님금”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壬儉(임검)이라고 썼으므로 壬儉은 “님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임검(壬儉)은 큰고마(大熊, 大固麻)이다.

대 략을 말하면 壬은 주로 ‘아홉째 천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儉은 고대 우리말 고마(熊, 固麻)의 전음(轉音)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마”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에 “개마”로 변형되어 높은 지대를 나타내거나, “가마”로 변형되어 머리의 가장 윗부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본어에서는 かみ(가미)라고 하여 하느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임검(壬儉)이란 “높은 자 중에 최고 높은 자”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사족을 붙이면, 대웅전이 大雄殿이 아니라 임검전(大熊殿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4. 임검(壬儉)의 壬은 壬자가 아니고 “맑검” 혹은 “바탕검”라고 해석된다.

설 문해자를 보면 壬자와 비슷한 글자가 있습니다. 위에는 人자이고 그 아래가 土 혹은 士자인 글자입니다. 人이 土나 士 윗부분 정 중앙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人자의 오른쪽 파임이 土나 士의 세로획과 연결된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壬자 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글자는 呈, 廷, 望과 같은 글자인데 이 세 글자에서 壬처럼 보이는 부분은 원래 임(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글자에 대해서 설문해자의 기록을 보면…

《說文解字》卷八上
(人上土下), 善也. 从人士, 士 事也. 一曰, 象 物出地挺生也. 凡(壬, 丿上土下)之屬皆从(壬, 丿上土下). 臣鉉等曰, 人在土上(壬, 丿上土下)然而立也. 他鼎切

(가上나下)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의 글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인데 “가”가 위에 있고 “나”가 아래 있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해석하면

(人 上土下)이란 글자는 선하다는 것인데 人과 士를 따른다. 士란 일이나 혹은 섬기는 것을 말한다. 또 말하기를 만물이 땅에서 나와 솟아오르듯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무릇 (壬, 丿上土下)에 속하는 글자는 (壬, 丿上土下)을 따른다. 신현 등이 말하기를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것을 표현하므로 (壬, 丿上土下)란 서있는 것을 말한다. 발음은 텅(他鼎切)이다.

강희자전을 보면

《어정강희자전(御定康熙字典)》卷五
(丿 上土下)唐韻他鼎切集韻丑郢切竝音逞説文善也从人士士事也一曰象物出地挺生徐鉉曰人在土上(人上土下)然而立也凡聽廷望之類皆从此又類篇展禮切音徵澄也又 集韻唐丁切音廷莖也一曰屋梁又集韻徵古作(丿上下士)註詳彳部十二畫正譌(人上土下)然出也从人(人上土下)然立土上㑹意○按説文别立壬部字彚正字通从其 後説象物出地挺生及徐氏與六書正譌俱收入土部因之
(丿上土下)이란 글자는 당운(唐韻)에서 텅(他鼎切)으로 발음하라고 하였다. 집운(集韻)에서는 쳥(丑郢切) 혹은 령(逞)으로 발음하라고 하였다. 설문해자에서는 선하다는 뜻이고 人과 士사를 따르는데 士는 일이나 혹은 섬기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만물이 땅에서 나와 솟아 태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서현(徐鉉)은 말하기를 사람이 땅 위에 있으므로 (人上土下)라는 글자는 서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무른 聽, 廷, 望 등의 글자는 다 여기에 속한다. 또한 류편(類篇)에서는 展禮切로 발음하고 음은 징(徵)인데 맑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또한 집운(集韻)에서 말하기를 唐丁切로 발음하는데 음은 정(廷)이고 버팀기둥을 말한다. 혹은 말하기를 집의 대들보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집운(集韻)에서는 말하기를 징(徵)의 옛 글자는 (丿上下士)라는 글자인데 주석에서 彳 부수에 12획이라 하였다. 정와(正譌)에서는 (人上土下)라는 글자는 따라서 태어나거나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人을 따른다. (人上土下)은 따라서 땅위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회의자이다. ○按, 설문해자에서는 별도로 (人上土下)을 부수자로 두었고, 자휘(字彚)와 정자통(正字通)에서는 그 설을 따랐다. 그리고 서씨(徐氏)와 륙서(六書)에서는 정와(正譌)에서 土자를 부수로 하는 것을 따로 두었다.

정리하여보면
(人上土下)의 글자는 혹 (丿上土下)로도 쓰입니다. (丿上土下) 글자가 壬과 혼동되이 쓰이다가 없어진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聽, 廷, 望 등의 글자에 壬자 처럼 보이는 글자는 원래 (人上土下)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壬儉의 壬도 원래는 (人上土下)이었는데 (丿上土下)이었다가 후대에 壬으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人上土下)의 발음은 텅, 쳥, 령, 징, 정 등으로 매우 다양합니다.

(人上土下)의 뜻은 태어나다, 나오다, 서있다, 맑다, 선하다, 버팀기둥, 대들보 등 다양합니다.

이제 壬儉의 뜻을 해석하여 보면
“맑 다”라는 뜻을 취하여 壬儉은 “맑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대들보”와 “버팀기둥”의 뜻을 취하여 “바탕 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훈사(訓寫)하여 읽어보면 壬은 徵의 옛 글자라고 하였습니다. 徵은 "부르다"의 뜻이므로 壬儉이란 "불검" 혹은 "밝검"도 될 수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