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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진개(秦開) 침략이 BC221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동사강목을 잘못 베낀 것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17.
진개(秦開)라는 인물은 연국(燕國) 소왕(昭王)때 사람이다.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던 연대는 BC311 - BC279이다.
즉, 진개(秦開)가 쳐들어 왔던 사건은 이때에 일어났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이상한 구절이 있다.
진개의 침략이 북부여(北夫余) 제1대 임금인 해모수(解慕漱) 19년, 즉 BC221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맞는 것일까?
일부 국수주의 재야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BC221년에 진개가 쳐들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국(燕國)은 BC222에 진국(秦國)에 의하여 망하여 속국이 되는데, 망한 나라의 장수가 쳐들어 왔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왜 환단고기에서는 진개(秦開)가 해모수 19년에 쳐들어 왔다고 하였을까?
기록을 보면 해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 편
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경 진 19년(B.C.221),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국(燕國)에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국(燕國)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위 환단고기와 거의 같은 구절이 동사강목에 존재한다.

《동사강목 제1 상》 경진년 조선기녕미상 진시황 26년
王否服屬子秦, 尋薨, 子準立
初朝鮮稱王, 其後子孫稍驕虐. 燕将秦開嘗質於東胡, 胡甚信之. 歸以襲破東胡, 攻朝鮮西方取地一千餘里至滿潘汗為界. 朝鮮始弱. 及秦并天下, 王否畏秦, 遂服屬於秦, 不肯朝㑹. 否箕子四十世孫也. 尋薨子準立(文獻通考魏略補)
왕(王) 비(否)가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조 선이 왕을 칭하자, 그 뒤로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여졌다.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전에 동호(東湖)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동호가 그를 매우 믿었는데, 돌아가서는 동호를 엄습하여 격파하고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서 만번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어서는 비가 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는 기자의 40세손인데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문헌통고》와 《위략》에서 보충

판본에 따라 尋薨가 없는 경우도 있다.
동사강목과 환단고기를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동 사강목에서는 BC221년 즉 진시황 26년에 비(否)가 죽고 준(準)이 왕이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문헌통고와 위략에서 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BC221년 기사를 설명하면서 그 이전에 있었던 진개가 침입하였던 기록을 문헌통고와 위략에서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 저자는 이를 혼동하였다. 동사강목에 BC221년에 있는 王否服屬子秦, 尋薨, 子準立라는 기록을 베껴쓰면서 그 바로 밑에 있는 그 이전에 있었던 일까지 그냥 베꼈던 것이다. 그래서 진개라는 장수가 BC221년에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 웃지못할 기록을 남기고 만 것이다.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보충한 기사는 주석에 해당되므로 보통 작은 글씨로 써야하지만 안정복은 어찌된 것인지 한줄 내려쓰기만 하였다.

환단고기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기록은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기록으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위 진개 침략기사는 분명 북부여기 저자가 쓴 것이 아니라 계연수나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각색하면서 실수하여 첨가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이렇게 실수가 존재하는 환단고기를 성경이나 되는냥 믿어버리면 안된다.